짧은 소설

죄악

박사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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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정과 생각은 중요한게 아니니까. 주변에 요구에 수용하고 움직인다.

자아를 유지해라는 켈시의 말을 속으로 비웃는다. 그래 너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없을거야. 왜냐면 너에게 뭘 도와달라고 해야하는지 나조차도 모르니까.

나는 석관에서 태어났어.

축복도 박수도 따스한 엄마의 품 같은 것도 없지.

나의 부모라면 분명 기억을 잃기 전의 존재일 거라고. 나는 그와 자신의 존재에 선을 그었다.

자신은 씨앗이다. 수국은 토양에 따라서 꽃의 색이 바뀐다. 자신도 그렇다. 주변은 자신을 어떤 색으로 피워낼지 고민하며 여러가지 조취를 취한다. 과거의 자신은 어떤 일을 했을까 어떤 열매를 맺었을까. 어떤 씨를 만들었길래 자신이 태어났나. 그의 지식과 그의 신체 그의 인간관계를 받아 나는 그가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죄와 의무까지 물려받았다. 자신은 과거의 박사라는 토양에 심어진 씨앗이다.

그를 부정하면 나는 완전한 타인이 된다.

그를 받아들이면 나는 과거의 망령이 된다.

자신은 과거의 미래 사이의 금을 밟고 서있다. 미래를 선택할 수도 과거를 선택할 수도 없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역할을 수행할 능력과 지식이 있어 이를 행할 뿐이다. 나는 누구지. 나는 뭘까. 나는 누가 되어야하지. 나는 무엇이 되어야하나.

"박사."

멀겋게 뜬 눈을 바라보는 존재가 있다.

과거의 자신을 모르는 사람. 미래의 자신을 알아야 하는 사람. 너는 나를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른다. 너도 그렇다. 너는 너를 모른다. 나도 너를 모른다.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공유한다. 너는 종종 나에게서 과거의 그를 본다. 나는 너를 통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너는 내가 뭔지 모르지. 너는 내가 뭘 해야하는지 모르지. 너는 나의 동포가. 너는 나란 존재에… 무지하지. 나처럼. 그리고 나도 매한가지다. 나도 너를 모르고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극단원이 아니고 나는 너라는 존재에 무지하다.

우리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건 그저 서로의 위치와 입장 뿐이다. 서로의 살가죽 안에 무엇이 들었든 무엇을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무지라는 바탕 안에서 서로의 일면만을 바라보니까.

“무슨 일이지?”

“아무일도.”

아무일도 없어. 여전히 나는 내가 몰라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그런가.”

너는 나의 과거와 관련되지 않은 완전한 타인이다. 너는 너 자신의 과거, 너 자신의 자아, 너 자신의 존재에 매몰되어 타인을 바라볼 수 없는 사람이니까. 너는 내가 처음 만난… 나 만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한 타인이다. 자기 자신이 버거워 몸부림치고 어쩔 줄 모르는 타인이다. 네 머리속은 노래로 꽉 차서 타인이 들어가지 못해.

“우리가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너무 가까운 거리는 자기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자기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거울과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일부분을 보는 수밖에 없으니까.

“서로 모르고 있었으면 또 어땠을까?”

벌여진 거리를 좁히고 그의 차고 있는 모니터링 제어구를 쥔다. 마치 목을 옥죄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힘으로 망가트릴 수 없다. 당연히 목을 조를 수도 없다. 너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을 것을 나는 안다. 너의 목소리에 너는 죄책감을 가지니까. 너의 목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것이 죄악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조차도 그렇게 된다. 너는 침묵에 익사하고 있다, 내가 목을 조르지 않아도.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질문조차 되지 못하는 말이 쏟아진다. 손에 힘을 주지만 단단한 제어구는 여전히 둔탁한 검은 빛을 내면서 아무련 변화 없이 그대로다. 네가 로도스에서 들은 나의 평가가, 혹은 나는 모르는 과거의 평가가 너의 시야를 가릴까? 너의 생각을 가둘까? 내가 아닌 내 주변의 정보로 나를 판단할까? 온전한 내가 아닌 영원히 바뀔 수 없는 과거의 정보에 나를 재단할까.

너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다.

과거의 일에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망령처럼 들러붙는 과거는 나의 그림자에 가깝다. 그림자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야. 빛에 따라 형태와 모습을 바꿔. 하지만 신체에서 때어놓을 수 없는… 그런 거잖아.

너는 이 말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지?

힘주는 것을 포기하고 손톱으로 내리 긁어대자 제어구의 이음세 부분이 헐거워진다. 아. 그 틈을 노리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네가 제어구를 붙잡고 숨을 헐떡인다. 너에겐 이 장치가 필요하다. 가면과 마찬가지로 너의 죄를 덮어 가리니까.

“괜찮아. 네가 네 목소리를 덮어줄게.”

잠시간의 응시 끝에 너의 숨이 잦아들고 천천히 손에 힘을 푼다. 나는 그 사이로 조금씩 조금씩 파고들어 장치를 치운다. 하얗게 드러난 너의 목 중심에는 검은 광석이 튀어나와 있다. 손끝에 닿은 돌에 감촉에는 너의 체온이 묻어있다. 예쁘다. 네가 입을 벌린다. 하지만 문장을 만들지 못하고 다시금 입을 다문다. 나는 천천히 목을 죄는 장치를 벗겨내리고 너와 얼굴을 마주한다. 네가 뱉어야 하는 죄악의 입구를 막고 천천히 들이마신다.

너는 두려움에 떨다가도 안심하고 입을 오물거린다.

아… 너와의 첫 키스를 죄악이라고 불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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