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유사

박사x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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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은 자신이 종종 모래속에 파묻혀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수많은 작품속에 언급되어지는 사막은 커녕 팬텀은 실재로 존재하는 지명인 사르곤에도 방문한적은 없었으나 종종 자신의 몸 위로 모래의 사륵거리는 소리들이 내려앉는 소름끼치는 감각을 좀저럼 지우지 못했다. 피부 위, 머리카락 위, 때로는 얼굴과 검은 옷가지 사이로 흩어내리는 모래들. 무엇보다도 목을 까끌거리게 만들고 이따금 구역질이 나오게 하는 이 매마른 모래의 향은 팬텀은 다양한 방법으로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팬텀은 모래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래가 자신에게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 만큼은 아주 잘 알았다.

“메우웅.”

미스 크리스틴이 다가와 발 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모래를 톡톡 두드린다. 일반적인 사람이 본다면 고양이의 개인적인 취미나 혹은 사생활에 가까운 일에 대해서 떠올리겠지만 미스 크리스틴은 이 모래와 영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모래를 싫어하면 싫어한다고 할까. 미스 크리스틴은 아주 능숙하게 모래를 피해 팬텀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비교적 묻지 않은 왼팔을 타고 오르더니 냉큼 어깨에 자리잡았다. 그 사이에 팬텀의 머리카락에 묻은 모래를 두 꼬리로 쳐낸 것은 덤이다. 소르륵 쏟아지는 모래. 그 양은 많지 않다. 하지만 팬텀은 이 기이한 현상(사실 팬텀은 모래가 자신에 몸에서 흘러내린다는 것에 대해 이상하다는 자각이 없었다. 이런 일을 겪는 건 자신 뿐이라는 걸 로도스에 오고 나서야 알았으니까.)에 대해 좀처럼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미스 크리스틴의 심기를 지속적으로 거스른다면 언젠가는 처리를 할 수 있으면 좋으리라. 다만 지금은 방도를 알 수 없을 분이다.

“미스 크리스틴.”

검은 고양이의 그녀는 팬텀의 부름에 귀를 까닥일 뿐 큰 반응 없이 하품만을 뱉는다. 심기가 불편하고 모래가 짜증난다는 나름의 표현이다. 팬텀은 그런 그녀를 보고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구석에 놓인 빗자루를 들고 천천히 바닥을 쓸면서 이 모래가 어디에서 오고 또 어디로 사라지는지 작게 추측을 해보았다. 옷에서 생성이 되는걸까? 아니면 자신은 피부의 각질이나 머리카락이 모래로 자라는 건가? 나는 모래로 만들어진 인간인가? 사르곤의 어디 구석에 있을 법한 전설이다. 극작가나 극단장은 이런 소재를 흥미롭게 여기진 않을까? 생각의 끝이 결국 자신의 근원인 극단에 와닿자 팬텀은 서둘러 빗자루를 털어 청소를 끝마치곤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실 이 모래는 암살자에게도 좋은 현상은 아니다. 모래는 흔적을 남기기 쉬우니까.

팬텀은 따스하고 보드란, 모래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미스 크리스틴을 끌어안고 길고 긴 고민 끝에 그나마 자신에게 친숙한 곳, 종종 그림자를 끌며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팬텀?”

아무런 소리 없이 도달하며 미스 크리스틴을 바닥에 내려놓았을 뿐인데 박사는 유별날 정도로 팬텀을 빠르게 발견한다. 미스 크리스틴은 서둘러 박사의 책상 위로 올라 발을 털었다. 소리없는 발걸음 뒤에 남아있는 건 역시나 약간의 모래다. 머슥하게 소매의 묻은 모래를 털어내던 팬텀은 허리를 펴고 자신의 몸가짐이 보이지 않도록 망토의 그림자로 몸을 숨긴다.

“무슨일이야?”

박사는 아무렇지 않게 미스 크리스틴을 잡고 쓰다듬으며 팬텀을 바라본다. 팬텀은 손바닥에 있는 까슬한 모래의 감촉을 느낀다. 한참을 생각하고 연습했던 대사. 이 모래가 무엇인지 박사는 알고 있는지, 너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지… 수많은 문자와 단어의 나열들이 팬텀의 목구멍을 뚫고 혀 위까지 올랐으나 팬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손끝과 손바닥을 문질렀다. 사락사락 들리지 않는 소리가 감촉으로 피부안으로 스며든다. 팬텀은 언제나처럼 침묵했다.

박사는 그런 팬텀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붙이지 않았다. 침묵의 곡조에 또다른 침묵을 덮을 뿐, 간간히 미스 크리스틴을 쓰다듬는 동작과 종이가 넘기는 행동만이 방에 소음을 울릴 뿐이다. 팬텀은 그 침묵 안에서 아주 느리게 긴장을 풀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박사는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팬텀을 기다려준다. 언제나처럼.

“박사.”

“응.”

뜸 한번 들이지 않고 오는 대답에 팬텀은 겨우겨우 목구멍을 짜내 단어를 뱉었다.

“모래..”

“모래?”

“모래가 자꾸 떨어진다.”

팬텀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얼굴을 붉히고 당황했다. 다른 문장을 끌어오고 또 낱말을 덧붙여서 상황을 설명해야 했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박사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었다. 팬텀은 다급히 쏟아진 말을 붙잡으려 했으나 형태가 없는 말소리는 그대로 공중에서 흩어져버린다. 팬텀은 입을 달싹이다가 혀 끝에서 느껴지는 모래의 맛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냈다. 모래는 팬텀의 목구멍과 혀 그리고 입안을 매마르게 한다.

“…”

아까와 달리 다소 어긋난 침묵 아래에서 박사는 천천히 팬텀을 훝어보고 미스 크리스틴의 털을 문지른다. 그리고 손바닥을 내민다. 그녀의 털 사이에 파고든 모래다. 황금빛도 아니며, 고운 돌 부스러기라고도 부를 수 없는 거칠고 단단한 검붉은 빛의 가루다. 팬텀은 모래가 자신의 손바닥으로 파고드는 듯한 감각을 받는다. 손바닥과 혀가 따가웠다.

“일반적인 모래는 아닌데.”

박사는 그 모래를 들고 천천히 살펴본다. 팬텀은 이 답답한 모래의 맛이 점차점차 식도와 기도를 타고 배 안으로 내려가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숨이 막힌다. 모래가 몸 안의 내장에 하나하나 들러붙어서 장기의 기능을 모두 빼앗아 가는 것만 같다. 혹시 이건 오리지늄이 아닐까? 박사에게 이 부정한 것을 옮기는게 아닐까. 팬텀은 아주 천천히 남은 숨을 들이키면서 박사가 미스 크리스틴의 몸에 붙은 자신의 모래를 관찰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모래는 다르게 생긴건가. 팬텀은 제대로된 자연의 모래를 본 적이 드물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붙어있는 모래는, 검붉고 거칠고 따가우며 생명을 긁는 것들 뿐이었는데.

“팬텀.”

박사가 부른다. 팬텀은 느릿하게 반응했다.

“팬텀!!”

종이를 내던지고 박사가 일어난다. 팬텀은 다급해 보이는 박사를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팬텀 호흡해!!”

호흡?

“입벌려!! 당장!!!”

박사가 팬텀의 멱살을 잡고 아래로 끌어내린다. 팬텀은 박사가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 하지 못했다. 산소가 부족해 둔탁해진 뇌를 가지고 그저 인형처럼 타인의 행동에 이끌려 간다. 그리고 팬텀은 까끌한 모래의 맛 사이에서 부드러운 온기를 느꼈다. 입안을 매우는 모래보다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폭신한 감촉. 팬텀은 조금만 더 이 상태로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에 말라 들러붙었던 폐가 천천히 부푼다. 그제서야 팬텀은 몸속을 들쑤시던 모래의 거친 맛이 잦아드는걸 알아차렸다. 팬텀은 그대로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시선을 마주하고 바짝 얼굴을 붙이던 박사도 주저앉는다. 팬텀은 박사가 지금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머리속에는 모래와 텁텁한 돌가루에 대한 생각 뿐이다. 박사의 얼굴이 천천히 멀어진다. 그리고 박사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걸 팬텀은 그제야 인지했다.

“착하지? 응?”

무엇이 착하고 무엇을 어르는 걸까? 팬텀은 삐걱거리는 머리속을 굴리면서 박사가 손짓하는 그대로 바닥에 입안에 가득 찬 천천히 모래를 내뱉었다. 까끌거리며 바닥으로 쏟아지는 모래. 차오르던 숨이 가라앉고 나서야 팬텀은 박사가 처음 요구하는 대로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팬텀이 입술에 남아있는 온기를 의식할 사이도 없이 박사는 바닥에 있는 모래를 아주 천천히 손 끝으로 집고 문지른다. 파스스 더 고운 입자로 갈린 검붉은 가루는 공기중에서 아주 천천히 흩어졌다.

“…”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지만 아까처럼 다급하거나 쫓기는 곡조는 아니었다. 팬텀은 길게 숨을 내뱉으면서 남아있던 모래를 손바닥에 천천히 내보냈다. 완전히 흑색에 가까워 빛이라고는 모조리 흡수하는 듯한 모래. 아 이번 발작은 이렇게 끝났군. 팬텀은 아무렇지 않게 손에 있는 모래를 가볍게 털어내고 느리게 숨을 들이켰다. 당분간 혀 위에서 모래의 맛이 나는 일은 없을게 분명했다.

“언제부터야?”

“…모른다.”

팬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 모래는 자신이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언제나 언제나 같이 있었으니까. 자신의 기억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또 어디가 왜곡되어있는지 모르는 그 찰나에 이 검붉은 모래는 팬텀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자신과 같이 극단에 있었던 예술의 아이들은 다 이런 모래를 지니고 있었을까?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팬텀은 그 망령들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이 모래는 극단과 관련이 있고 그 중에서도 극단장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뿐이다.

“언제나… 언제나 있었으니까.”

박사는 아직도 팬텀의 몸에 붙어있는 모래를 세심하게 털어내더니 천천히 가루를 모아 비닐팩에 넣고는 밀봉했다.

“언제나 이렇게 많았어? 숨을 못 쉴 만큼?”

“숨을 못쉴 정도가 되는 건 드물었다.”

“…”

“어느정도 지나면 회복되었으니까.”

박사가 대놓고 과장하여 속상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연극과 비슷한 가면이지만 저 감정이 온전한 진심이라는 것을 팬텀은 알 수 있었다. 어째서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는 타박과 더불어 팬텀이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때 마다 박사가 대신 아파하곤 했으니까. 팬텀은 서둘러 무너진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자신은 그의 그림자이며 암살자다 이렇게 나약한 모습으로는 그가 지시하는 곡조에 맞춰서움직일 수 없다. 팬텀은 땅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따.

“아니야. 더 앉아있어.”

하지만 가벼운 박사의 손이 어깨를 짓누르고 팬텀을 바닥에 고정한다. 박사는 자신의 손에 담긴 모래를 내려다 본다. 팬텀이 토하고 박사가 받은 이 가루는 조심스럽게 다룬 손길이 부질없게도 아주 느리게 흩어지며 흔적조차 없었다는 듯이 사라지고 있다. 팬텀은 모래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았다. 팬텀에게 쏟아지는 모래는 언제나 팬텀을 떠나면 손쉽게 사라지고 또 흩어진다. 흔적도 없이. 마치 극단장의 손길처럼.

“…”

박사는 그 모래가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가만히 비닐팩을 들고 응시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모래. 팬텀이 다른 이들에게 이런 현상을 들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고 로도스가 팬텀의 이상을 손쉽게 찾아내지 못한 이유기도 하다. 검붉은 가루가 온전히 사라지고 존재했다는 부피감 마저 남기지 못하고 깨끗하게 빈 비닐팩이 되었을 때, 그제야 박사는 팬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심각하네.”

팬텀은 박사의 편가에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으나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전 까지 엄청나게 새어나오던 모래는 이제 찾아보려고 해도 가루는 커녕 먼지 한 톨 조차 찾을 수 없다. 팬텀이 발작할 때 마다 제때 숨기만 했다면 아마도 영원히 로도스는 이 이상현상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할게 뻔했다. 박사는 입을 다물고 어떻게 해야 팬텀이 이 현상을 제때 자신에게 밝히고 매번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팬텀은 치료에 소극적이고 잘 숨으니까. 미스 크리스틴의 도움? 지금까지 이 상황에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와서 그녀가 이 일을 도와야 할 일이라고 인지를 할까?

“음…”

박사는 일부러 침묵을 깨트리고 혀를 굴렸다. 그리고 혀 끝에서 느껴지는 작은 요철을 맛본다. 까슬하고 매마르고 빳빳한… 거친 맛. 비어버린 비닐팩을 때놓고 엄지로 혀끝을 문지르자 아주 작게 남아있던 검붉은 모래가 손끝에 보인다. 박사는 아주 짧게 엄지를 한 번 보더니, 팬텀을 다시 한 번 보고, 서둘러 그 수상한 모래를 한 알 삼켰다.

“…박사?”

목 안을 완전히 조이는 듯한 따가움. 그리고 그런 고통을 째는 듯한 팬텀의 의아한 목소리. 박사는 간신히 목울대를 움직여 모래를 삼키고는 작게 헛구역질 했다. 한 알로 이렇게 거북한데 한 움큼을 뱉어낸 팬텀은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쿨럭”

결국 기침으로 이어진 박사의 모습에 팬텀이 다급하게 다가온다. 다시금 가까워지는 얼굴. 입술이 또 닿기전에 박사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팬텀의 뺨을 밀어냈다.

“흐읍… 하. 아니 그. 인공호흡할 정도는 아니야. 아니야.”

일부러 두 번 아니라고 강조한다. 얼굴 앞에서 멈추고 가만히 있는 팬텀을 보고 박사는 다시금 겨우 숨을 골랐다.

“네 모래 내가 삼켰으니까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모르겠네.”

“…!!”

“그러니 제때 와서 치료 하도록 해. 모래도 오리지늄도.”

아무것도 없다는 듯 낼름 혀를 내미는 모습을 보고 팬텀이 다소 허망하다는 내색을 보인다. 박사는 그런 모습을 보고 웃었다. 팬텀은 자신의 몸에 큰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역시, 타인의 몸을 가지고 얽매면 된다. 그러면 팬텀은 군말하지 않고 순순히 치료와 상담을 받을 것이다.

“알겠지?”

여전한 침묵이었으나 박사는 팬텀이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을 알았다. 어째서 다 사라진 모래가 박사의 입 안에서만 남아있었는지, 팬텀에게 해가 되진 않을지, 이 모래 한 알이 얼마나 큰 부작용을 가지고 올지. 이에 대해서는 박사 스스로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박사는 다소 태평하게 켈시를 떠올렸다. 눈 앞의 남자와 같은 스라소니의 귀를 가진 여성을. 그리고 자신의 몸이 위험해 진다면 그녀가 어떻게 해서라도 이 모래의 정체를 밝히고 팬텀의 이상현상까지 같이 해결 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욕이야 좀 듣겠지만 뭐 어떤가. 이 모래 또한 이 테라의 비밀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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