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방주

율법에 이름을 붙이는 법

이그제큐터 단편

첫 명일방주 글입니다.

공상의 정원 이후 시점. 이격 이그제큐터 모듈 스토리 등 이것저것 포함.

박사가 캐릭터로서 등장합니다. 딱히 가내 박사 설정을 반영하지는 않았습니다.

커플링 없음. 29000자.


1

“실례합니다. 이 드론의 점검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몇몇 엔지니어들과 의논을 하는 중이던 메이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그 등쌀에 휘말려 작전 중 적에게서 노획한 작은 기계가 하늘로 솟았다. 뛰어오른 미보가 기계를 자성이 있는 파츠로 부착해 낚아채려 했지만 그 외장은 애석하게도 자석에 붙지 않는 알루미늄이었다. 깡 소리를 내며 미보의 코에 부딪혀 다시 튀어오른 장치를 날렵하게 뻗어온 손이 잡아챘다.

날아가는 총알이라도 잡을 수 있을 듯한 민첩한 손놀림이었다 ─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로도스에 전설처럼 떠돌곤 한다.

총을 쥐기 편한 반장갑을 낀 손. 시선이 팔을 타고 올라가면 어깨를 두른 두터운 붉은색 영대와 흰 케이프, 맨 위에는 백발로 희미한 명암이 든 무덤덤한 얼굴이 있다.

이그제큐터는 잠깐 기계를 손안에서 굴려 살핀 뒤 뚜벅뚜벅 다가와 메이어에게 내밀었다.

“외장에 손상은 없어 보이지만 내부 구조가 충격을 받았을 수는 있겠습니다.”

메이어는 허둥거리며 받아들었다. 조금만 더 신이 났다면 정신이 팔려 그것을 아예 입에 넣을 뻔했다.

“아, 고마워 이그제큐터. 이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원래 고장나 있었으니까 괜찮아. 고맙다는 건 그러니까, 잡아 준 거랑 점검 얘기 둘 다야!”

“부탁을 하는데 감사를 듣다니 이상하군요. 받아 주신다는 의사로 이해해도 될까요?”

“물론이지! 도리어 우리 쪽에서 제발 부탁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로!”

이그제큐터의 한쪽 옆구리에는, 최근 로도스에서 엔지니어링에 몸담은 거의 모든 이들을 잠 못 이루게 한 검은 육면체 모양 드론이 얌전히 끼워져 있었다.

그는 검은 광륜이 달린 드론을 작업대 한켠의 빈 자리에 내려놓았다. 굴러다니는 납땜 인두와 자투리 기판과 허물처럼 벗겨놓은 전선 피복들 바로 옆이었다. 새카만 드론의 흠집 하나 없는 만듦새와 그 시시콜콜한 소품들의 부조화는 보는 사람들에게 신성모독적인 조바심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엔지니어들은 잠시 주춤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으나, 최근 라테라노에서 교황만큼 명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이그제큐터에 대한 서먹함은 곧 공학도의 솟아오르는 호기심에 패배했다. 고글로 얼굴을 다 덮다시피한 카우투스 오퍼레이터 하나가 용감한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용기는 딱 4초 갔다. 그는 아름다운 형태에 손대는 일조차 황송스러운지 드론 주위의 허공을 더듬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점검이라면 어, 어느 정도까지요?”

물론 이그제큐터는 패닉과 희열이 반씩 섞인 듯한 그들의 반응에 구애되지 않았다.

“이 드론을 지급받은 이래 정비를 한 적이 따로 없어서, 혹 필요한 상황에 작동이 멈출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합니다. 분해해서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분해? 진짜 그래도 돼?”

아직껏 뒤편에 거진 숨어 있던 자라크 오퍼레이터가 참지 못하고 목을 뺐다. 이그제큐터는 고개에 음성 인식 기능이 달린 듯이 그쪽으로 대답했다.

“저도 업무에 필요한 수준의 공학적 지식은 있지만 이것을 분해할 방법을 따로 확인할 수 없어서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정비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두 말하기 없, 아니, 뭔가 문제 있으면 꼭 두 말 해 주세요. 막상 손대려니 좀 긴장이 돼서…….”

“…….” 관용어구의 변주를 해석하는 짧은 침묵. “알겠습니다. 이삼 일 정도 본함에 머물 전망이니 그 동안 작업을 마치기 어려우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메이어가 탄식했다. “아, 난 내일부터 나가 봐야 되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오늘 클로저랑 회의는 취소하고 내일 출발 시간까지 집중해야…….”

“……급한 작업은 아니니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말 문제가 생긴다면 라테라노로 복귀하면 되니까요. 일단 작업하실 동안 저는 다른 업무를 정리하고 있겠습니다. 서류 절차가 필요하다면 내선으로 보내 주십시오.”

이그제큐터가 정중히 묵례하고 물러나려 하자, 탁자 위에 놓인 드론은 기계 팔로 탁자를 살짝 딛고 본체의 방향을 비틀어 이그제큐터가 있는 문간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엔지니어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혼비백산한 오퍼레이터가 드론을 더듬더듬 삿대질했다.

“전, 원 끄신 거 아니었어요?”

이그제큐터는 잠시 멈칫했다가 답했다. “사실 전원을 끄는 기능이 있는지도 알 수 없어서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문제는 없을 겁니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보조 무기는 제가 따로 보관하고 있기도 하고요.”

엔지니어 하나가 멍청하게 끄덕였다. “아. 네.”

“그럼 연락 주십시오.”

그 넋놓은 대답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로 들었는지, 희고 붉은 실루엣이 등을 돌리고 문 너머로 사라졌다. 자동문이 소리를 뚝 잘라낸 마냥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극도의 흥분과 긴장, 미량의 공포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공백 끝에 메이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무기가 있다면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는 이야기?”

“……그런 의미 같죠?”

“혹시 모르니 부속지 부분을 결박해 놓고 시작할까……?”

“케이블타이면 될까요?” “되겠냐? 저번 작전 기록 보니까 철근을 그냥 받아내던데?” “저 부피에 뭘 넣었길래 그만한 반발력이 나와?! 나도 그 기록 볼래! 언제 거야?” “잠깐만,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알아. 네, 실례합니다 스노우상트 씨. 본함에 계시죠? 일단 제2엔지니어링실로 와주세요! 지금 당장!” “메커니스트는 지금 왜 외근 중이어서!”

물론 작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암시 따위는 공학도들의 영혼을 막을 수 없었다. 이그제큐터는 엔지니어링부의 오퍼레이터들이 전문성을 발휘해 그런 사소한 난관쯤은 간단히 해결하리라고 믿어 주었으니까. 그 무덤덤하고 예의바른 ‘부탁’을 어마어마한 자존심의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이그제큐터 본인이 알고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2

이틀 뒤, 이그제큐터가 연락을 받고 엔지니어링부 휴게실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처참히 녹아내린 자존심의 웅덩이에 반쯤 잠겨 퀭한 클로저가 앉아 있었다. 품에는 여전히 흠집 하나 없는 검은 드론을 안고. 이그제큐터는 짤막하게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작업이 용이하지 않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언제나와 다를 바 없이 사실을 말했으나 클로저는 으윽, 정신적 확인사살을 당한 얼굴이 되었다. 탄식하며 손을 놓자 클로저의 품에서 유연하게 떠오른 드론이 이그제큐터의 어깨너머쯤 허공에 자연스레 자리잡았다. 프로펠러도, 반중력 발생 장치 특유의 희미한 귀울음 같은 구동음조차 없다. 클로저는 그 우아함에 새삼 절레절레했다.

“미안. 외근 나가는 메이어한테 바톤터치 받고 나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갖은 분석 방법을 써 보는 차에 켈시가 끼어들어서는……아, 거기 앉아. 얘기가 좀 길어.”

이그제큐터는 희미하게 눈썹을 좁혀 의아한 기색을 띄우며 클로저가 가리킨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특별히 주섬거린 것 같지 않은데도 예스러운 겹겹 망토가 단정히 정리되는 모습이 숫제 마법 같았다. 혹은 이그제큐터스럽다는 표현도 어울릴 것이다.

“닥터 켈시가? 로도스의 내규와 관련해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습니까? 정비 요청서라면 제출했습니다만.”

클로저는 다 들으라는 듯이 투덜투덜 푸념을 늘어놓았다. “왜, 저번에 네 그 새옷으로 저항성 테스트 해 보고 그랬었잖아? 그때 폭발 저항이 진짜 예술의 경지였는데…… 아니 이 얘기는 나중에. 어쨌든, 켈시가 어떻게 알았는지 조금 전에 작업실로 쳐들어와선, 자꾸 그렇게 교황청 물건으로 간을 보면 라테라노랑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느니 온 엔지니어링부를 둘러앉혀 놓고 아주 혼쭐을 내는 거야…… 어휴! 이번에는 네가 먼저 요청한 거라고 얘기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빨리 돌려주라고 하는 것 있지.”

이그제큐터는 평소 닥터 켈시의 언어습관으로 미루어 그가 ‘간을 본다’ 같은 비격식적인 표현을 사용했을 확률은 낮을 것 같다고 추측했지만, 지적하지는 않았다.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제가 닥터 켈시에게 따로 말씀드려 정정하겠습니다. 공연히 곤란을 끼쳐 죄송합니다.”

이그제큐터가 얼핏 눈을 내리뜨며 사과하자 클로저는 손을 팔랑팔랑 저어 고사했다.

“네 잘못은 아니지! 뭐, 켈시 입장에선 성도 임명 건 때문에 한동안 상황을 좀 방어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확실히 그 점이 닥터 켈시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담백한 수긍에 클로저가 으쓱했다.

“정작 본인은 이렇게 눈 깜짝 안 하는데 말이지, 정말……. 나중에 켈시한테 들를 거면 나한테 먼저 연락해. 뒤에서 아주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화력 지원할 테니까.”

무슨 화력? “그러죠. 그럼 결론적으로 점검은 다 마치지 못하신 겁니까?”

다른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면 실망이나 비난을 질문으로 꼬아 말했을 확률이 높겠으나 이 표리일체의 화신 같은 청년은 그럴 리가 없다. 듣는 입장에서 공연히 가슴이 푹푹 찔리는 기분이 드는 건 우발적인 사고일 뿐이고.

“으윽, 그게. 마치지 못했다기보다…… 정확히는 시작도 못 했어.”

“?”

클로저는 입을 열기 전 이그제큐터의 어깨 너머에서 해양생물처럼 느리게 부속지를 하늘거리는 드론으로 눈을 돌렸다. 이그제큐터는 클로저의 그 눈길을 ‘거북함’ 정도로 추측했지만, 미묘한 사회적 상호작용에 더 민감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본인을 눈앞에 두고 뒷담화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듯한 껄끄러운 태도’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마치 드론의 눈치를 보듯이.

곧 시선을 주워담은 클로저가 테이블 위에 아예 태블릿을 꺼내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너도 이미 시도해 봐서 알고 있겠지만, 본체를 손상시키지 않고 외장의 체결 구조를 해체할 수 있는 지점이 보이질 않더라구. 표면에선 눈에 띄지 않게끔 정교한 맞물림 같은 게 은닉돼 있는 거겠지. 그래서 스캔해서 내부 구조를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로도스에서 동원할 수 있는 스캔 장비 9할 정도가 완전 먹통이었어. 나머지 1할로 들이받으면 어떨지 몰라도 그건 한 번 기동하는 데 본함의 이틀치 전력을 끌어다 써야 하거나, 캐스터 여섯이 달라붙어서 아츠로 미세조정해야 하거나, 뭐 그런 괴물들이거든…….”

이그제큐터는 클로저가 이후 십여 분간 줄줄 이어가는 한탄을 절반 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그가 집행자의 소양 중 하나로 기계공학을 익혔다 해도 전공자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기적적인 비율이었다), 의미심장함을 전달받기에는 충분했다. 클로저의 태블릿 화면에는 여러 접근법을 휘갈긴 메모와 실패, 실패, 실패를 의미하는 가로줄이 가득 찼다.

“……뭐, 설계자가 뭔가 허를 찌르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해답을 세팅해 뒀는데 우리가 애먼 데서 헤매고 있었던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클로저는 반 농담조로, 즉, 반은 진담으로 물었다.

“그거, 정말 드론이 맞긴 해? 혹시 살아 있다거나……?”


3

박사는 집무 책상 앞에 단정히 선 이그제큐터의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극기심을 발휘해 간신히 웃음을 수습한 뒤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네가 후방지원부에 부탁해서 비스트 먹이를 종류별로 받아 갔다길래, 임무 중에 무슨 덫이라도 칠 일이 있나 싶었는데.”

“확인을 위해서였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하룻밤 동안 늘어놓은 먹이에 변화는 없었습니다만.”

그야……역시 그렇겠지. 박사는 저 큐브 비슷한 존재가 촉수 같은 기계 팔로 백비스트 사료를 오독오독 주워먹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가 떨쳐냈다. 클로저의 분석을 검토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점과는 별개로, 이그제큐터 앞에선 단어선택을 조금만 신중히 해 달라고 귀띔해 둬야겠다.

“가능성을 줄였다고 치자. 커피 마실래?” “괜찮습니다.” “그럼 내 것만 내릴게.”

박사는 이그제큐터에게 손짓으로 의자를 권한 뒤 서류를 아예 옆으로 밀어놓고 일어섰다. 지나쳐가며 클로저가 했듯 검은 드론을 슬쩍 넘겨다보았다. 저 십자 모양 슬릿 안에 아마 시각 센서가 들어 있을 텐데. 이그제큐터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눈’을 마주친 것 같기도 하다.

박사는 커피메이커가 원두를 가는 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이었다.

“흥미로운 화제지만, 고찰이 아니라 결론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나보다 더 좋은 상담 상대가 있을 텐데. 기계 관련 문제에서 클로저가 결론을 못 냈다면 나도 무리야.”

이그제큐터는 박사의 집무 책상을 비스듬히 마주보는 의자에 단정히 앉아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생명체나 그에 준하는 존재일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라면 일단 박사님께 보고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도발적인 추측을 아무런 어조 변화 없이 말할 수 있는 성정도 일종의 재능일지도 모르지. 박사는 커피와 물을 한 잔씩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일단 기억해 둘게, 보고 고마워. 왜 그렇게 생각했어?”

이그제큐터는 건네받은 물잔으로 짧게 입을 축인 뒤 그것을 두 손으로 모아쥐었다. 정면에 앉은 박사는 검은 드론이 살며시 고도를 높이며 몸체를 돌려 물잔을 조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독이 들었는지 감별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이그제큐터도 기척을 느꼈을 테지만 이미 익숙해졌는지 평탄하게 대화를 이었다.

“로도스에서 탑승자가 동물을 동반하기 위해서는 허가 절차가 필요하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생명체라면 저는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규정을 위반하고 있는 상태니까요.”

“아하.”

“그리고 만약 이것이 평범한 드론이더라도, 저는 이것이 실제로 생명체로 오인되기에 무리가 없을 만큼 우수한 인지능력을 보이는 사건을 몇 차례 겪었습니다. 선내의 기술로는 상세한 기능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로도스에는 변수로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이그제큐터에게는 여러모로 중대한 문제일 테다. 하선하는 당일에 일정을 쪼개 박사의 집무실에 들러야만 했을 정도로. 하지만 이그제큐터는 박사가 수긍하는 반응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교황께서 하사하신 것이므로 정당한 이유 없이 오래 떨어뜨려 놓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로도스의 규정상 제가 이것과 함께 승선할 수 없다고 박사님께서 판단하신다면 앞으로 로도스와 협력 업무는 통신으로…….”

심각함의 골짜기로 한없이 굴러떨어지려는 화제에 박사가 제때 제동을 걸었다.

“그런데 너는 어때?”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로 불확실한 뭔가를 거의 항상 대동하고 다니도록 의무를 받은 상황이잖아. 뭔가가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페데리코는 그 질문을 듣고 고개를 돌려 드론을 돌아보았다. ‘아, 이런 게 있었지?’라고 육성으로 말하더라도 저 시선보다 더 선명한 대답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다시 바르게 앉아 대답했다.

“유해성과 불확실성은 다르고, 성하께서 제게 유해한 것을 하사하셨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물론 가능한 한 불확실성의 범위를 좁힐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

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괜찮은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는 제안했다.

“허가 절차 말인데, 그걸 ‘잠정적으로’ 동물이라고 치고 허가를 받아 두면 어때? 행정적인 선제공격 개념으로.”

기상천외한 결론이었으나 이그제큐터는 물론 웃지 않았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를 잠정적으로 동물로 간주하는 행위가 저촉할 만한 법조항을 헤아리는지, 파란 시선을 물잔 쪽으로 떨어뜨린 채 침묵했다. 테라의 법을 통틀어 비슷한 조항이라도 찾으려면 두린 법전쯤은 필요할 것이다(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과연 그는 잠시 뒤 적절한 선례를 찾지 못한 듯 모호하게 되물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등록의 목적은 선내의 불확실성과 위험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까?”

박사는 어깨를 들먹했다.

“맞아. 그치만 네 말대로, 설마 교황님이 성도를 곤란하게 만들 물건을 갖고 다니게 하셨겠어?”

“그 점은 동의합니다만.”

“그럼 됐지. 우리도 교황님과 네 선의를 믿고, 잠깐만, 법률 용어에서 선의는 아예 다른 뜻이었지.” “예. ‘특정한 사실을 인지하지 않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규범 얘기하던 중이니까 개념이 섞이겠다.”

박사는 방금 말한 내용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손을 가로로 그어 보였다. 근 2년간 그와 일하면서 소통의 편의를 위해 정한 신호 중 하나였다. 이그제큐터가 끄덕하는 것을 확인한 뒤 처음부터 말했다.

“나도 그 드론에 대해서 켈시나 클로저랑 얘기는 해 보겠지만, 다소 불확실한 부분이 있더라도 라테라노와 로도스가 지금까지 쌓은 신뢰관계로 충분히 감안할 수 있어. 이런 ‘베일에 싸인 장비’가 로도스에 드나드는 일은 전혀 처음이 아니고, 뭔가 변수가 생기더라도 네가 합당하게 조치할 거라고 믿고 있기도 하니까.”

이그제큐터는 곱씹어본 뒤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신뢰에 보답할 수 있도록 주의깊게 관리하겠습니다.”

“좋아. 정 신경 쓰이면 아까 말한 동물 동반승선 등록 양식 다운받아서 가져가. 애매한 부분은 그냥 빈란으로 두고 다음 승선 때 제출하면 돼.”

아마 서류는 통과되기는커녕 기묘한 농담 취급을 받겠지만, 박사가 따로 확인했으니 넘어가라고 후방지원부에 한 마디 귀띔하면 해결될 테다. 이그제큐터는 절차를 지켰다는 안심을 얻을 테고 지원부에는 며칠쯤 식사 자리에 활기를 더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기겠지.

문제는 일단락된 모양이니, 박사는 커피를 조금 마셔 수위를 낮춘 뒤 조금 전 검토하던 재앙 기록을 자리 앞에 끌어다 놓았다.

“좀 더 쉬고 복귀하는 것도 좋지 않아? 컨디션은 괜찮고?”

“앞서 몇 번 말씀드렸었던 다소의…… ‘충동성’ 외에는 일정을 조정해야 할 수준의 기능부전은 없습니다.”

“나는 ‘직관’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만. 정말 염려된다면 한동안은 위험도가 조금 낮은 작전의 안정성을 보완하는 역할으로 배치해 줄게. 다음 기회에 또 의논하자.”

이그제큐터는 자리를 정돈하고 일어나다가 문득 물었다.

“혹시 전언을 요청드려도 될까요?”

“물론.”

“일정상 결국 닥터 켈시를 직접 접견하지 못했습니다만, 이제 박사님께서도 상황을 파악하셨으니…… 엔지니어링부에 대한 오해를 거두어 달라고 닥터 켈시께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럴게. 켈시라면 금방 납득할 테니까 염려하지 마.”

그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는지 감사를 표하고 물러났다. 문제의 드론은 박사를 우아하게 외면하고 부속지를 하늘거리며 그 뒷모습을 좇았다.


4

이그제큐터를 배웅한 박사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일거리로 눈을 돌렸다. 십수 분 뒤 당연하다는 듯이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사는 방문자의 신원을 확인하지도 않고 재앙정보 데이터를 검토하던 시선 그대로 대뜸 운을 떼었다.

“요즘 이그제큐터를 보고 있자면 착한 동생이 생긴 기분이야.”

들어온 이도 인사를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건조하게 반문했다.

“어떤 점에서?”

“상대가 워낙 귀담아 들어 주니까 계속 조언을 쏟아내고 싶어지는데, 막상 돌아서서 곱씹으면 그냥 경험이 해결할 일에까지 주책스럽게 훈수를 둔 기분이라 머쓱해지는 점?”

켈시가 호흡으로 짧게 웃었다. 박사가 그의 표정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자 켈시는 바로 미간을 좁히고 날카롭지 않게 핀잔했다.

“조언은 좋지만 적당한 선은 지켜.”

“알아. 이그제큐터 본인이 잘 조절하고 있으니 걱정 마.”

켈시는 변명을 들은 듯이 찌푸리더니 집무실의 서류 캐비닛에서 필요한 서류철을 차례대로 뽑아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눈과 손에 전혀 협응하지 않고 유창하게 입만을 움직였다.

“네 언행 하나하나는 네 생각보다 오퍼레이터들의 인격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경각심을 가지고 자각하도록 해.”

박사는 커피잔에 코를 박는 체하며 불평조로 눈을 올려떴지만, 켈시가 반응하지 않자 절레절레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안다니까. 인정할게, ‘충분히’ 알지는 못해. 그래도 조심은 하고 있어. 게다가 내가 꼭 영향을 뿌리기만 하는 쪽도 아니야. 나도 항상 배우는 입장이니까.”

볼멘소리를 하다가 켈시의 표정을 넘겨다보니, 켈시는 팔뚝에 서류철 여러 권을 쌓은 채 놀라움과 착잡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표정을 박사는 익히 안다. 자신이 과거의 박사라면 하지 않을 법한 말을 했을 때 켈시는 종종 저런 얼굴을 한다.

추측과 의도적인 생략, 간혹 무시로 가장된 조심스러운 영역 존중이 뒤섞인 섬세한 의사소통. 박사는 방금 떠난 이그제큐터를 다시 불러서 차 한 잔이라도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만큼 속뜻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담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말상대도 드무니까. 비교 대상이 켈시라면 더더욱 그렇고.

켈시는 곧 미묘한 표정을 거두고 화제를 돌렸다.

“그럼 됐어. 그리고, 그 드론은……”

“아직은 그게 뭔지 세간에 알려지면 안 되는 상황이지?”

박사가 모서리 없이 매끄럽게 뒷말을 받자 켈시는 언제 눈치챘냐는 투로 눈썹을 들었다. 곧이어 순순히 긍정했다.

“적어도 오퍼레이터 이그제큐터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는.”

박사는 의자의 등받이에 어깨를 눌러 기대며 허리를 쭉 폈다.

“아마 네 생각만큼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켈시는 눈매를 흐렸다. 그것이 과연 고무적인 전망인지 확신하기 어려워하는 듯했다. 검은 드론에 대한 내막이 더욱 궁금해졌으나 박사는 채근하지 않기로 했다. 켈시는 여전히 테라 곳곳에 웅크린 수많은 징조들을 부감하고 있고, 그 징조를 알아야 할 순간이 오면 박사도 응당 알게 될 것이다. 기다림을 강제당하는 일은 하루이틀이 아니고 그때마다 갑갑하고 염려되지만…… 내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아서일는지도 모르지.

익숙한 섭섭함을 어깻짓 한 번으로 털어낸 박사가 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한테 감사해. 말 돌리느라 진땀 뺐으니까.”

“맞춰줄 필요까지는 없었다만.”

“어련하겠어. 이그제큐터가 전해 달라더라. 드론 문제로 죄 없이 혼난 엔지니어들한테 제때 사과하라고.”

“그런 논조로 말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짧게 흘겨본 켈시가 이내 표정을 가라앉혔다. “……갈등이 발생하기 전에 중재라. 정말 변했군.”

두 리더의 날숨에 씁쓸함이 섞였다. 암브로시우스 수도원 사건. 이그제큐터 스스로는 자신을 바꾼 것을 의문이라고 일컬었고 그 표현도 물론 옳겠으나, 페데리코 잘로를 가까이하는 모든 사람은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전에 없이 깊이 상처받았다고 느꼈다. 그는 상처를 건설적으로 극복할 방법을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강직한 사람이지만, 그렇다 해도.

그 노력을 뻔히 지켜보면서 외면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켈시는 착잡하게 끄덕였다.

“엔지니어링부에는 오늘 중에 얘기해 두지.”

박사는 푹 웃었다.

“고마워. 1096년 시라쿠사 남부 기상정보는 안 필요해?”

켈시는 생각을 읽힌 듯 찌푸리며 박사를 보았다가, 팔뚝에 받쳐 겹쳐들고 있던 파일들로 눈길을 향했다. 박사는 서류철의 책등에 붙은 레이블을 일별한 것만으로 켈시가 모으던 자료들의 용도를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가 집무 책상 앞으로 다가가자 박사는 얇은 파일을 그가 안은 종이의 산 맨 윗단에 톡 얹어주었다. 켈시가 자료를 고쳐 안으며 들먹했다.

“기분이 괜찮은 모양이지, 장난을 치고.”

“이그제큐터가 다시 승선하는 날이 기대돼서.”

“뭔가 약속이라도 했나?”

“이름 란은 필수기재 항목이거든.”

“……?”


5

공증소 사무실은 사람과 서류와 물자가 끝없이 드나드는 장소답게 다소 어수선하다. 많은 업무가 전산화되었다 해도, 공기관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여전히 행정 서류들이 들쑥날쑥하게 꽂힌 책장에서 책등의 손때가 만드는 은은한 양감, 반투명한 유리 램프갓에 한 겹 걸러진 뱅커스 램프의 뭉툭한 명암 따위다.

세르필리아는 그 주황색 공간에 산뜻한 분홍빛을 휘날리며 익숙한 얼굴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화사함이 무색하게 그는 자료보관소와 정비 작업실 등속이 자리한 서늘한 지하로 곧장 안내받았다.

복도를 한 번 꺾어들어 문을 열자 심각한 표정을 한 페데리코가, 그러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심각해 보이는 페데리코가 낡은 단말 하나와 부품 몇 종류를 엔지니어링 작업대에 펼쳐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정비실의 조명은 맑았지만 서늘했다. 벽을 두른 철제 선반마다 갖가지 기계와 예비 부품, 점검을 위한 정밀기기, 총기 수리용 공구 따위가 번들거리는 금속광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다. 페데리코의 어깨를 두른 붉은 영대와 검은 드론의 슬릿에서 조용히 빛나는 붉은빛이 공간 전체에서 가장 선명한 색채였다.

세르필리아는 쇠 의자를 당기는 몸짓과 동시에 빙글 의자 주변을 반 바퀴 돌아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심문받으러 온 것 같네. 공증소에서 제6청에 협조 요청할 일이 뭐가 있어?”

세르필리아가 인사를 생략한 것을 확인한 페데리코는 마주 짧게 눈을 내려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인사를 갈음했다.

“제6청의 관할 업무보다는 기술자 세르필리아의 능력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사망한 모 라테라노 시민의 계약을 이행하는 도중, 계약자의 ‘생명의 은인’의 소재지를 확인할 수단 중 하나라고 언급된 저장기기가 망가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세르필리아는 가볍게 팔소매를 걷으며 테이블 위에 펼쳐진 부품과 수리 도구들을 좌에서 우로 파악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필요한 것은 거의 갖추어진 모양새였다.

“도전정신 자극하는걸. 웬만한 물건이었다면 페데리코 너도 어련히 고칠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했다면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겠지만 페데리코는 잠잠히 긍정했다.

“예. 구형 모델이기 때문에 부품을 파악하는 일부터 어려움을 겪었으며 몇 종은 이미 단종된 상태였습니다. 수소문해 대체 부품을 수급할 수는 있었지만, 정밀기기인 만큼 작업 도중 새로운 부품과 호환성 문제로 더 큰 손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그냥 있는 부품만이라도 나한테 바로 부치지.”

페데리코에게는 언제나처럼 합당한 사유가 있었기에 설명이 이어졌다. 유언장에는 ‘유품에 얽힌 개인적인 사연이 많으니 담당 집행자 이외의 인물에게 반출하지 말아 달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현재 동원할 수 있는 공증소 집행자 중 이러한 정밀작업에 필요한 기술을 갖춘 자가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집행자의 입회 하에 실시간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인력을 물색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신이 일정, 역량, 신뢰도 모든 면에서 현재 동원 가능한 최선의 인력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세르필리아는 눈과 입을 모두 동그랗게 만들었다가 이어 헤 웃었다.

“고마워. 너무 덤덤해서 잠깐 칭찬인 줄도 몰랐지 뭐야.”

“실적과 여건에 입각한 판단일 뿐 저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았습니다만, 특별히 당신의 해석을 정정할 이유도 없는 것 같군요. 먼저 작업 난이도를 판단해 주시죠. 오늘 중으로 끝마치기 어려우시다면 제6청에 양해를 구해 추가 일정을 잡겠습니다.”

“좋아, 일단 나도 처음 보는 모델이니 파악부터 하고. 제조사 자료를 또 어떻게 구했네. 와! 변색된 것 봐.”

기술자가 흥에 겨운 손짓으로 낡은 매뉴얼을 뒤적이고 선반에서 필요한 공구와 재료를 고를 동안 페데리코는 바르게 앉아 그 모습을 감독했다. 쇼핑하듯 정밀공구의 구성을 한참 고심한 뒤 자리로 돌아온 세르필리아는 동상처럼 앉은 페데리코를 보고 절레절레했다.

“……근데 진짜 계속 쳐다보고 있을 거야? 이렇게 마주앉아서 지그시? 빤히? ‘신뢰도’ 높은 내가 설마 이걸 들고 도망가기라도 하겠어? 뭔지도 모르는데.”

“제 시선이 능률에 영향을 끼친다면 다른 개인적인 작업을 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문은 잠겨 있습니다.”

“그럴 것 같더라. 점심 먹을 땐 열어 줘.”

익숙한 헛웃음을 흘린 뒤 세르필리아는 작업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너덜너덜한 기판에 한참 집중하다가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고개를 드니, 페데리코는 단말에 처음 보는 문서를 띄우고 펜을 공연히 쥔 채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언뜻 보니 공문서 같았지만 공증소나 다른 라테라노 기관의 양식이 아니었다.

“기밀이야?”

“아뇨. 보셔도 됩니다.”

대답을 들은 그는 안심하며 대놓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로도스 양식이네? 임무 보고서라도 밀렸어?”

“아뇨, ……”

페데리코가 설명한 자초지종을 다 들은 세르필리아는 눈을 껌벅였고, 이어 클로저나 박사가 그랬듯 조용한 검은 드론을 곁눈으로 보았다. 어이없음, 경이, 업계인다운 호기심이 조화롭게 뒤섞인 얼굴이다. 나도 뭐 하는 물건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동물은 아닐 것 같은데.

“……박사가 그 페데리코 잘로에게 장난을 쳤을 리는 없고, 다 뜻이 있겠지?”

두 사람이 켈시의 의중까지 짐작할 수야 없었다. 페데리코는 흐린 눈을 하며 세르필리아가 말한 설의 반 의문 반의 문장을 되짚어보았다. 이어 박사를 떠올렸다. 피로가 역력한 얼굴에 곧잘 환대하는 웃음을 띄우며 마주보는 의자를 권하고, 대화 중간중간 단어의 결을 단정하게 고르는 모습.

“저를 배려하신 겁니다. 제가 상세불명의 장비를 선내에 반입하는 일에 불편이 없도록, 변칙적인 방식으로나마 절차를 거칠 수 있게 박사님의 권한을 할애하셨겠죠.”

“와.”

세르필리아가 책상에 팔을 고쳐 괴며 감탄사를 내자 페데리코는 의아한 기색을 띄웠다. 기색이래봐야 눈매가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을 뿐이지만. 세르필리아는 으쓱했다.

“아니, 너는 암시나 위트를 해독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써먹지는 않는다는 게 확 와닿아서? 네가 유용한 패를 덱에서 빼 버리고 너무 공평하게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말야.”

“…….” 비유를 해석하는 짧은 간격 동안 페데리코는 세르필리아로부터 가늘게 진동하는 육각형을 감각했다. 순도 높은 감탄과 극미량의 질투. 페데리코는 자신의 언행이 세간에서 ‘정직함’으로 분류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몇몇 사람에게는 미덕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세르필리아의 질투는 통상적인 범위이며 갈등의 원인이 될 소지가 낮다고 판단했다. 대화를 카드 게임과 덱에 빗대는 비유는 유용할 것 같으니 따로 기억해 두고, 그는 앞의 감탄에 대해서만 부연했다.

“율법은 ‘공평함’을 권장하니까요. 또한 암시는 처리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각자의 경험과 맥락에 의존하기에 해석에 변수가 많습니다. 실용적 대화에서는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배제하는 쪽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실용적인 정보 교환에서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발화로 이행하는 시점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꽤 긴 설명이었지만 세르필리아는 납득조로 끄덕끄덕했다. “아하. 하긴 경전은 비유 투성이니까 따로 배우긴 했겠네. 유형을 외우는 식으로?”

“그렇죠.”

“흠, 변수라. 맞긴 맞는데 바로 그 점이 필요할 때는 무기가 되는 거지. 오류가 많다는 건 빠져나가거나 이용할 구석도 많다는 의미잖아. 뭐, 어쨌든 리켈레가 왜 너를 챙기는지는 알겠어.”

“분명 집행자 리켈레는 객관적으로 저보다 우수한 사회적 상호작용 기술을 구사합니다만, 대부분의 임무는 저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리켈레가 저를 ‘챙긴다’는 표현에는 과장이 있군요.”

세르필리아는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오……방금 그건 자존심?”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사실을 적시했을 뿐입니다.”

“그래 그래. 농담이었어.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드론 문제는 그 동물 어쩌고 문서로 때우자는 걸 너도 납득했다고?”

“예. 성하를 알현하면 드론에 대해 질문을 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근시일에 정해진 알현 일정이 없으니 그 동안 임시조치는 필요하겠죠. 박사님께서 행정상의 불편을 감수하고 예외를 만드는 배려를 보이셨으니 저도 요청받은 문서를 성실히 제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왜? 상황이 영 웃겨서 그렇지 복잡한 서류는 아닐 텐데.”

페데리코는 다시 단말로 시선을 떨어뜨렸고, 가능한 한 채워넣은 서류의 맨 위에 덩그러니 빈란으로 남은 항목을 보았다. 세르필리아는 몸을 살짝 일으켜서 공구들과 기판 위로 허리를 빼고 화면의 글자를 자세히 살폈다.

“이름?”

“예.”

세르필리아는 책상에 두 팔을 짚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려 말없는 드론을 흘깃 보았다. 그리고 다시 페데리코를.

“쟤 이름이 없어?”

“예.”

“……교황님께서 주실 때 안 알려 주셨어?”

“예.”

여쭈어 볼 생각은……그야 당연히 안 했을 테다. 어디서 나온 물건인지도 이제껏 신경쓴 적이 없는데 이름은 알 게 뭐야. 세르필리아는 유쾌해졌고, 아예 한 번 일어났다가 몸의 중심을 가뜬히 뒤로 던져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래. 이름이 중요하다면 진작 알려 주셨겠지. 그럼 이 기회에 네가 지어 붙이면 되겠네? 동물 등록 양식이니까, 반려동물 이름 짓듯이?”

그는 드물게도 문장 가운데에서 머뭇거렸다.

“동물을……관리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일단 이 작업 하는 동안 같이 고민해 줄게.”


6

박사와 이그제큐터는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의 식당에서 마주쳤다. 박사는 식사시간의 막간을 틈타 아미야와 담소를 나누다가 그를 먼저 보내고 자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의 머리 위에서 부유하는 검은 육면체는 어디서든 꽤 눈에 띄었다. 그것을 발견한 박사가 손짓하자 이그제큐터는 언제나 그랬듯 이의 없이 다가왔다.

“필요한 일이 있으실까요, 박사님.”

있다고 대답한다면 방금 점심을 퍼온 쟁반을 내려놓고 총을 뽑을지 궁금하다.

“그냥 인사. 따로 동석할 사람 없다면 옆에 앉을래?”

“예정은 없습니다만. 정리하던 도중이 아니셨나요?”

“후식도 먹을까 했어.” 방금 결정했지만. “금방 가져올게.”

일어나면서 그의 쟁반을 일별했다. 곡물과 콩을 갈아서 부쳐 사르곤식 참깨 소스를 곁들인 프리터를 주메뉴로, 곁에는 버터로 볶은 버섯, 샐러드, 과일 등등이 정확한 영양균형을 뽐내며 실속있게 담겨 있다. 라테라노인의 고전적인 입맛을 기준으로 한다면 유감스러울 메뉴지만, 히비스커스가 이 쟁반을 본다면 감격하며 로도스 본함의 표준 식단으로 삼으려 들지도 모르겠다.

박사는 사과 타르트와 커피를 들고 돌아와 앉았다.

“얼마나 머물 것 같아? 당장은 따로 줄 임무는 없는데.”

이그제큐터는 질문이 다가오자마자 즉시 식기를 놓고 자세를 바로했다. 빅토리아 군인에 비견할 만한 절도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동 경로가 본함이 정박한 위치를 교차하는지라 휴식과 검진을 겸해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그런데 승선하고 보니 저번 섬멸에 대한 작전기록 평가 회의 일정이 오늘 저녁으로 변경되었더군요.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회의에 참석한 뒤 기타 행정 절차를 처리하고 내일 하선할 예정입니다.”

박사는 끄덕이며 PRTS 단말을 테이블에 꺼내놓았다. 식사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확인했어. 난 신경쓰지 말고 식사 해, 잠깐 일이 있어서.” “예.”

그는 이그제큐터의 쟁반에 과일만 남을 때까지 신입 오퍼레이터들의 인사 자료를 검토하며 기다렸다. 멋모르는 사람에게는 소원해 보이는 모습이겠지만 둘 모두 개의치 않았다. 점심때가 무르익은 식당의 활기찬 소음들은 파이프가 가득한 천장에도 채 흡수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자리에 다다를 때쯤에는 편안한 침묵에 물든 듯 반투명하게 사그라졌다. 식탁에서도 일을 하는 박사를 본 오퍼레이터들이 주변 자리를 비워준 덕도 있었다. 이그제큐터가 식사를 마무리할 즈음 박사가 고개를 들었다.

“켈시는 만났어?”

이그제큐터는 사과 두 조각만 남은 접시 옆에 포크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예, 어제 의료시설에서 검진 결과를 기다리던 중에 만나뵈었습니다. 전언에 대해 고려해 주셨더군요. 닥터 켈시는 성도 임명을 계기로 로도스와 교황청의 관계를 방어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당사자인 저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은 점을 인정하고 사과해 주셨습니다.”

박사는 좋은 의미로 놀랐고, 다음으로 긴장했다. “……싸우진 않았지?”

“아닙니다. 엔지니어 클로저는 그러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따로 대화에 반영하지는 못했습니다.”

클로저, 제발.

“잘 풀렸으면 다행이고. 실은 서류를 아직 안 냈길래, 뭔가 어려운 점이 있나 물어보려고 불렀어.”

“양식은 완성했지만 제출하기 전 이름에 대해 박사님께 의견을 구하려 했습니다.”

“지어 왔구나?”

만약 박사가 산크타였다면 다른 산크타들은 이 시점에 박사에게서 ‘기대감’을 읽고 의아해했을 것이다.

“예. 먼저 동물을 키우는 동료들과 오퍼레이터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렸습니다. 비스트의 이름을 붙일 때에는 크게 색상이나 형태 같은 외형적 특징, 단순히 발음하기 쉽고 친근한 단어, 일반적인 인명, 종 특성이나 성격과 관련된 단어, 장수나 건강 등 바라는 바 등이 작명에 반영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열은 빈도순입니다.”

박사는 상상해 보았다. 오퍼레이터에게 대뜸 다가간 이그제큐터가 한없이 심각한 얼굴로 ‘혹시 동물에 이름을 붙여 본 적이 있으신가요?’라는 질문을 건네고, 어리벙벙해진 오퍼레이터 앞에서 성실하게 답변을 기록하는 광경을. 클로저가 돌멩이를 넣고 박사가 굴린 눈덩이가 기막힌 방향으로 굴러가 버렸다(거기에 스푸리아가 귀와 뿔을 달아줬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된다).

박사는 이번에는 웃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그제큐터에게 양해를 구한 뒤,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테이블 가운데로 안전하게 밀어놓고, 엎어져 10초 정도 흐느꼈다. 조금 뒤 박사는 헐떡거리며 간신히 허리를 폈다.

“하, 하아. 죽겠다. 그 조사 결과 언제 한번 구경하게 해 줘……”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가까스로 진정하고 커피로 호록 입을 축였다. “그래서 후보는 정했어?”

“예. 낫과 유사한 보조무기를 탑재하고 있는 외형적 특징을 인용해 ‘리퍼’로…….”

무시무시하게 편견 없는 작명감각이다. 방심했던 박사는 커피가 목에 걸려 드라마틱하게 쿨럭거렸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 교황님께서 직, 접 주신 거잖아? 흉흉하지 않을까?”

“라테라노 문화권에서는 다소 불길하게 여겨지지만, 오퍼레이터 직책 분류에도 쓰이는 단어이니 국제적인 견지에서는 우호적 대상에게도 충분히 쓰일 수 있는 단어로 보인다 판단했습니다.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요? 이런 점을 우려해 서류 제출 전 먼저 조언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박사는 기침을 하느라 제때 대답하지 못해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본인이 적절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그게 제일 좋은 이름이지……. 첫 시도로는 괜찮다고 생각해……, 콜록, 콜록. 등 좀 두드려 줄래?”

“예.”

박사는 이번에는 다른 이유로 테이블 위에 쓰러지고 싶어졌다. 성도의 손바닥은 눈물 나게 아팠다. 켈시가 봤다면 자업자득이라고 평했겠지.


7

드론으로 추정되는 것에 이름을 붙인 후 이그제큐터의 주변에 변화가 생겼다. 그것을 감정을 지닌 존재로 간주하거나 심지어 사람처럼 여기는 이들이 이전의 몇 배로 많아진 것이다. 단순히 동물 동반승선 양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작전기록을 복기하던 중 어떤 오퍼레이터가 “리퍼는 주인을 닮아서 겁이 없다니까.”라고 평했다. 활유법이다. 혹은 정말로 리퍼가 감정을 가졌다고 판단했거나. 이그제큐터는 회의적이다. ‘작전행동에서 정확성, 효율, 신속성을 우선하며, 부수적인 코스트를 판단에 덜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정도로 서술하는 쪽이 적절하리라.

다른 오퍼레이터는 “이 타이밍에 리퍼가 후방에서 오는 공격을 미리 막아줬네. 기특한걸.”이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이그제큐터는 ‘기특하다’라는 단어의 의미소를 분리해 보았다. 기대되는 수준 이상의 성취를 특히 연소자나 초심자가 보일 때에 대한 고평가. 의인화다. 아마도 부피가 작기 때문에 연소자로 빗대었겠지. 소수 오퍼레이터가 리퍼를 “귀엽다”고 표현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부를 이름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리퍼가 갑작스럽게 의인화와 이입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기에는 비약이 있다. 의문이 생겼다면 질문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임무가 끝나고 돌아가는 차량 안에서, 작전기록을 복기하는 영상자료실에서, ‘왜 그렇게 느끼셨나요?’라고 이그제큐터가 질문하자 동료들은 당혹했지만, 그가 정말로 궁금해한다는 것을 금세 이해하고 더듬더듬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한참 질답을 주고받고서야 이그제큐터는 가까스로 그들이 넘겨짚은 전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흔들리는 다인용 수송차 안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누구도 큰 부상을 입지 않은 작전이었으니까. 이그제큐터의 화력이 투입된 이유도 작전의 난이도 문제보다는 빠른 마무리를 위해서였다. 안전한 안쪽 자리에서 경상자가 메딕에게 간단한 처치를 받으며 한숨을 돌리는 동안, 탑승구에 가까운 쪽 좌석에서는 머리를 맞댄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던 칸타빌레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그가 먼저 나서서 운을 떼는 일은 드물다. 오퍼레이터들이 이채로워하는 시선을 보냈다.

“당신이 리퍼의 이름을 직접 붙였다는 점을 사람들이 인상깊게 느껴서라고 생각해. 특별한 이유가 있겠거니 짐작했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칸타빌레의 옆자리에 앉은 필라인 오퍼레이터가 박수를 딱 쳤다. “일리가 있네, 소문 쫙 났었잖아요. 이그제큐터 씨가 빈스토크 씨한테 찾아가서 메탈 크랩 이름 열심히 수집해 갔을 때부터. 대관절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시냐고 막. 아, 그때 혹시 칸타빌레 씨한테도 가셨었어요?”

“예. 오퍼레이터 칸타빌레가 파울비스트를 돌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지만 나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서 도움이 못 되었었거든…….”

심지어 동물 승선양식에 기재한 이름도 ‘무명’이라고 했다. 그런 방법도 있었나.

“그때는 질문드리지 않았습니다만, 그러기로 결정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이그제큐터가 맞은편의 칸타빌레에게 물었다. 그 시선에 가치판단은 없었으나 칸타빌레는 지레 추궁당한 사람처럼 안전벨트를 의기소침하게 만지작거리며 눈을 떨어뜨렸다.

“……그애가 내가 준 이름으로 불린다니, 내가 그애의 삶에 지나치게 참견하게 되는 것 같아.”

“또 그러신다 또. 그녀석이 사람 말을 할 줄 알았으면 고마워요 언니~ 할 거라니깐요.”

붙임성 있는 동료들이 칸타빌레를 격려하기 시작하며 그날의 토론은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이그제큐터는 돌아가는 길 내내 차량의 흔들림 속에서 곱씹어 보았다. 오퍼레이터들은 명명을 근거로 이그제큐터가 리퍼에게 일종의……책임, 나아가……애착 관계를 형성했다고 추측하는 듯했다. 리퍼가 이그제큐터에게 있어 단순한 장비가 아닌 애착의 대상으로 격상되었다고 여겨지자, 이그제큐터에 대한 존중의 연장선으로 리퍼에 대한 인상을 재설정하는 사람들이 여럿 생긴 것이다. 물론 점차 진심으로 이입하게 된 사람도, 처음부터 리퍼를 ‘귀엽게’ 여기고 있었으나 이그제큐터가 무서워서 티내지 못했었다고 수줍게 고백한 사람도 (주로 엔지니어링 팀원 중)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경향성의 계기는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자신이 리퍼의 ‘주인’으로 여겨지는 오해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정정해 두었다. 수호총이 그렇듯 라테라노로부터 받은 것은 그의 재산이 아니다. 그는 리퍼를 팔거나 버리거나 양도할 수 없다.

하지만 의인화는? 리퍼는 대화를 하지 않을 뿐 이그제큐터의 간략한 자연어 지시를 맥락에 입각해 이행했다. 한편 따로 지시하지 않더라도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혼란스러운 전황을 읽고 이그제큐터의 안전을 위해 스스로 움직였다. 자연어 인식까지는 흔한 기술이었지만 극히 드물게 리퍼가 드러내는 정확한 계산과 예측은 종종 고도의 인지능력, 심지어 자아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로도스 아일랜드에서는 이미 여러 자율행동 로봇이 인격체로 간주되어 오퍼레이터들과 친분을 나누고 작전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그제큐터는 리퍼에 대한 몇몇 오퍼레이터의 태도가 옳다는 증거만큼이나 부적절하다는 논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그제큐터 자신은 왜 그런 논거를 검토하고 있는가?

오퍼레이터들의 행동을 본 뒤에야, 개인의 관점에 따라 리퍼가 ‘다루는’ 대상이 아닌 ‘대하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당장 선택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그제큐터는, 자신의 선택이 리퍼의 기능이나 특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해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만은 기억해 두었다.


8

집행자 페데리코에게 맡겨진 공증 임무가 손쉬운 일일 리가 없다. 페데리코는 의식을 되찾고서야 자신이 기절했었음을 알았다.

세르필리아가 도와준 그 임무였다. 페데리코는 의뢰인이 유언의 내용을 공증소 밖으로 유출하지 말아 달라고 거듭거듭 당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의뢰인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언급한 ‘생명의 은인’, 유산 수탁인은 살카즈였다. 페데리코는 지난한 정보수집 끝에 완성된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단단한 무장을 챙긴 뒤 출발했다.

유사한 임무는 이전에도 몇 번 맡아 보았다. 라테라노 바깥의 사회에서 고난을 겪고 라테라노로 돌아온 공민 중에는, 낙원 바깥에 두고 온 누군가에게 평생 해소되지 못한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가 종종 있다. 대상이 살카즈인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 또한 페데리코가 완전히 처음 겪는 일은 아니다. 라테라노에 살카즈와의 만남 자체를 금지하는 법은 없었으니까.

이번 수탁인은 집행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언젠가 한 공민과 한 방랑자를 이어 주었을 우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라테라노를 저주했고, 산크타를, 페데리코를 저주했다.

그 개자식이 날 동정했다는 거잖아! 너도 한통속이고! ─ 답변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집행자로서 수리된 유언의 내용을 실현할 뿐 의뢰인의 생각 자체를 대변할 수 없습니다. ─ 그 자식이 시킨 대로 할 뿐이다? 그리고 시킨 놈은 이미 죽었고. 편리하네. 이런 욕을 보느니 그때 죽게 놔뒀어야 하는데.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 옥타비아노 님의 유품에 단서가 흩어져 있었습니다. 의뢰인은 당신의 신원과 소재지를 담당 집행자 외에는 알 수 없도록 안전을 기했습니다. ─ 안전? 산크타 놈을 여기까지 쫓아오게 만드는 게 안전이라고! 죽어서도 날 놀리는 거겠지! ─ ……

페데리코는 말을 멈추었다. 의뢰인의 유언에 동정이나 모욕의 의도가 있었는지를 판단할 권리는 그에게 없으며, 설득을 위해 유언장에 명시하지 않은 의중을 지어내려 한다면 설령 그것이 의뢰를 성공시키기 위한 수단이라 해도 월권이다.

냉기를 맞은 잡목림의 마른 나뭇잎 소리만이 바스락거리며 침묵을 한 번 쓸고 지나갔다. 분노에 찬 살카즈의 고성에 근방의 파울비스트는 혼비백산해 날아간 지 오래였다. 적의는 살카즈 자신마저 찢을 듯 날카로웠다. 이종족에 대한 모호한 편견이나 혐오가 아닌, 페데리코가 접근할 수 없는 어느 구체적인 고통의 경험으로 벼려졌을 적의였다. 대화는 쳇바퀴를 돌았고 상대는 이미 무기를 들고 있다. 잘 관리된 단검이었다.

적어도 아직 공격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의 팔할은 페데리코의 허리에 총이 걸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리퍼는 페데리코의 등뒤 대신 먼발치의 사각에서 조용히 형세를 살피고 있었다. 페데리코는 자신의 직선적인 시선이 수탁인을 더 자극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눈을 돌리기 위해 잡목림 한가운데에 지은 외진 움막을 돌아보았다.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지 오래 된 사람의 전형적인 주거형태다. 텃밭은 작은 짐승을 막는 울타리로 단단히 감싸였고 문간에는 사냥용 폭발 화살로 보이는 것을 장전한 크로스보우가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옷도 가능한 한 직접 지어 입는지 건조대에는 가죽 몇 장이 걸려 있었고 직물들의 올은 하나같이 성겼다.

그 옷감을 보고, 그는 자신의 예스러운 복식에서 갑작스럽게 중량감을 느꼈다. 상징성의 무게를.

어쩌면 수탁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공민이 아닌 자는 라테라노의 온유와 자비를 일회용의 동정으로밖에는 접할 수 없다. 이 옷을 입고 있는 이상 페데리코의 말에는 수탁인의 모욕감을 가라앉힐 만한 어떤 설득도 담길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페데리코는 늦지 않게, 바르게 질문하는 방법을 배우려 애써 왔다. 이곳까지 다다르는 길에 그는 여러 질문을 떠올려 보았다. 만약 수탁인이 옛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면, 아마도 이제껏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었을 그 이례적인 경험을 낯선 집행자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어한다면, 묻고 싶었다. 의뢰인과 수탁인이 서로에게서 무엇을 배웠고 또 무엇에 상심했는지, 그 간격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성공했고 어디서부터 실패했는지를 묻고 싶었다.

불가능했다.

페데리코는 품에서 작은 기계를 꺼냈다. 수탁인은 흠칫했다.

“안심하세요. 녹음기입니다. 다른 기능은 없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녹음기를 내밀어 보였다. 물론 단검의 공격 범위 안이기도 했지만 감수했다. 수탁인은 긴장한 기색으로 기계를 살필 뿐 다가오지도, 쳐내지도 않았다. 의도를 캐묻지 않는다 ─ 왜 일견 뜬금없어 보이는 이 시점에 녹음기가 필요한지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공증소의 구체적인 집행 절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했다. 누구에게 들었을까. 묻는 대신 페데리코는 녹음 스위치를 눌렀다.

“……수탁인 그레타는 라테라노 공민 옥타비아노 카피치의 유산 50%에 대한 상속을 거부하며, 상속권은 다음 순위로 이전됩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답변은 기록되어 즉시 법적 효력을 가지며 이후 번복될 수 없습니다.”

그는 더 말을 섞고 싶지도 않다는 듯 싸늘하게 답했다.

“필요 없어. 꺼져.”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녹음기가 꺼졌다. 수탁인은 담담한 즉답에 말문이 막혔다가 신음했다. “도발당할 가치도 없다 그거지.”

페데리코는 멈칫했고,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탁인의 이익을 위해서.

“저는 원래 모욕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한 행동양식을 알려 주신다면 반영할 수 있습니다.”

상대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적으로 당혹했다. 경계를 비집는 가느다란 틈. 그러나 단검을 고쳐쥐는 떨리는 손과 함께 그 틈은 페데리코의 눈앞에서 다시 닫혔다.

“내가 그쪽한테 원하는 건 하나뿐이야. 꺼지라고 했어, 산크타. 제발 좀!”

“…….”

페데리코는 수탁인의 음성이 제대로 녹음되었는지 확인했다. 짧고 정중하게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숲 바깥을 향해 조금만 나아가면 더는, 어쩌면 영영,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물론, 그가 무사히 숲을 빠져나갈 경우에.

……움막으로부터 한참 멀어졌을 때, 페데리코는 무언가를 느꼈다.

먼저 육성으로 경고할지 혹은 바로 총을 뽑고 몸을 돌릴지 짧은 판단을 거치려는 때

……한순간에 은신을 거둔 리퍼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비현실적인 움직임으로 숲을 가로질렀다.

……뒤늦은 풍압에 머리칼이 확 날렸다 검은 형상은 페데리코를 스쳐 저편에 있을 존재를 향해 쇄도하려 했다 쇠기둥도 베어넘길 수 있는 새카만 낫을 짓쳐들고

그만두세요.

리퍼가 공중에 예각을 그으며 급선회해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무언가가 페데리코의 몸을 떠밀어 바닥에 처박았다. 이명이 의식을 잘라냈다─ ─ ─ ─ ─ ─ ─

─ ─ ─. 광륜이 무기물에 넓게 접촉할 때의 특징적인 현기증.

눈 앞에는 낙엽.

낙엽?

페데리코는 모로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키려다 등에서 둔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정지했다가, 골절이나 다른 부상이 없는지 차근차근 전신을 감각하며 동작을 몇 단계로 나누어 가까운 나무등걸에 기대 앉았다. 조금 욱신거리고 귀가 먹먹할 뿐 다행히 움직임에 지장은 없었다.

무사를 확인하자마자 페데리코는 빠르게 주변을 파악했다. 숲바닥에는 그의 가방이 펼쳐져 있었고 리퍼는 부속지가 땅에 끌릴 만큼 낮게 그 곁에서 부유했다. 가방의 덮개 위에는 활성화된 구조요청 비컨 기기가 번득였고, 사용된 스프링 주사기가 눈에 잘 뜨이도록 그 옆에 놓여 있다. 진통제다. 뻣뻣해진 목덜미를 쓸어 보니 주삿바늘이 닿았을 자리에서 피가 몇 방울 묻어나왔다. 리퍼가 바로 주사했겠지. 그가 깨어난 후 실수로 이중 투약을 하지 않도록 빈 주사기를 남겨두어 표시했을 테고.

합리적인 조치라고 생각하며 다음 사고로 넘어가려 했던 페데리코는 문득 시선을 고쳐 주사기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목격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깜빡인 눈이 다시 열릴 때, 깨달음과 함께, 그 명료해진 시야 전체가 페데리코의 기억에 사진처럼 새겨졌다.

그것은 대화였다.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물에 맥락과 상징을 부여해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 리퍼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움직임 중 직접적인 의사소통에 가장 가까웠다.

리퍼의 무언가가 변화했다.

그 사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었지만, 당장은 시급히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일단 페데리코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손을 깨물어 통증이 얼마나 느껴지는지 확인해 보았다. 약효가 도는 정도로 미루어 보니 주사 후 5분 가량 지난 듯하다. 그만한 시간 동안 다시 습격을 받지 않았다면 위협은 사라졌다고 봐도 좋았다. 이어 단말으로 확인한 시간도 일치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폭발의 흔적이 있었다. 나무를 통째로 쓰러뜨릴 만큼은 아니었지만 직격한 나무기둥이 패일 정도, 무방비한 사람을 죽이기에는 충분한 살상력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폭발로 인한 충격보다는 리퍼가 그를 밀어내느라 등에 힘껏 부딪히며 생긴 타박상이 더 컸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이유도 그저 너무 가까이에서 큰 폭음에 노출된 탓이었다. 사냥감을 기절시키기 위해서 폭발 규모에 비해 큰 소리를 내도록 폭탄에 모종의 조치를 했는가? 지금은 알 길이 없다.

그레타는 페데리코를 살려 보낼 경우 ‘산크타들에게’ 신원과 위치가 노출된 자신이 어떤 화를 입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습격을 감행했다. 일격에 죽이지 못했다고 깨닫자마자 도주했을 테다. 리퍼의 존재에 허를 찔렸으리라.

익숙한 지형의 이점을 이용한 습격이었다. 하지만 페데리코는 이미 상대에게서 높은 경계심을, 아니 공포를 읽었고, 공격당할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예상했고, 설령 리퍼가 없었더라도 적절히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왜 그대로 당했었지? 정신을 잃기 몇 초 전의 기억은 명료하게 복기하기 어려웠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서 리퍼의 싯붉은 슬릿과 눈이 마주쳤다.

……성도 페데리코의 생명이 명백히 위협받는 상황에서, 리퍼는 위협의 원인인 그레타를 배제하려 했다.

……페데리코는 거부했다. 피하거나 반격할 수 있었던 시점을 리퍼를 제지하기 위해 소모했다.

……리퍼는 페데리코의 ‘요청’대로 그레타를 공격하는 대신 페데리코를 보호했다. 그리고 그레타를 보내주었다.

상대를 차마 죽일 수 없으니 내가 죽겠다는 식의, 목숨을 내놓은 비이성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몇 가지 선행된 계산이 있었다. 먼저 그레타가 그를 대적하기 위해 꺼냈던 무기는 단검이었다. 그렇게 강한 경계심을 드러낸 사람이 아츠 유닛처럼 더 위험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진짜’ 무기를 은닉했다가 습격에만 따로 사용할 공산은 낮다. 무기와 개인의 정체성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살카즈는 통상적으로 무기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지 않으니까.

한편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장비는 크로스보우와 사냥용 폭발 화살. 이 숲의 식생은 대형 포유류가 서식하기에 부적합하니, 주로 텃밭의 울타리를 넘지 못할 몸집의 중소형 비스트를 수렵할 용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동물을 사살할 수 있으나 완전히 분해하지는 않을 만큼 화살의 폭발력을 적절히 낮게 조정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움막에 걸려 있던 가죽들의 상태가 추측을 뒷받침했다. 떠나는 페데리코를 급히 추적하는 와중에 화력을 보강하기는 어려웠으리라. 크로스보우는 고립된 생활에서 잔고장이 일어날 여지를 최소화한 구식 크랭크 수동장전 구조였으므로 그레타에게 주어진 저격 기회는 단 한 번이었다.

더불어 성도복의 관통 저항과 폭발 저항은 매우 우수하다. 로도스의 분석 실험 당시에 페데리코는 직접 구체적인 수치를 확인했으며 임무 중에 성능을 몇 번 체험하기도 했다.

옷으로 감싸지 않은 머리를 저격할 리는 없었다. 폭발 화살의 도움을 받아야 사냥을 할 수 있을 수준의 사냥꾼이 단 한 번뿐인 저격 기회를 굳이 더 작고 어려운 표적에 할애할 공산은 매우 낮다. 만일 그가 충분히 실력 있는 사수였다면 평범한 화살로 비스트의 급소를 노렸을 것이다. 고작 수렵에 귀한 폭약을 소모해 고기와 가죽을 하나같이 망가뜨리고 낮은 확률로 활성 오리지늄이 잔류할 위험까지 감수할 필요가 없이.

모든 근거를 조합하면, 설령 낮은 확률로 페데리코가 인기척을 제때 눈치채지 못하고, 리퍼가 방어에 실패하고, 조금 전의 폭발 화살이 등에 직격하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페데리코는 유효한 타격을 입지 않았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다. 페데리코는 움막을 떠나기도 전부터 이 모든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페데리코를 죽일 수 없었던 그레타의 그 공격은, 그레타가 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그레타가 페데리코가 채 발견하지 못한 고화력 장비를 사용할 확률은 분명 있었다. 반격 대신 다른 행동을 택한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 아니, 애초에 의식적인 선택이 맞았던가? 최근 문제가 되는 ‘충동성’이 생명을 좌우할 수준으로 악화된 징후는 아닌가? 그 답을 아는 사람은 5분 전의 페데리코뿐이었다. 쓰러져 버린 탓에 장기기억으로 채 저장되지 못한.

현재의 페데리코는?

그는 라테라노로 돌아가면 일정 수준 이상의 소음만을 선택적으로 경감하는 귀마개가 존재하는지 알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절은 확실히 예상치 못한 변수였으니까. 그리고 이제 무리없이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빈 주사기를 회수하고, 리퍼가 켜둔 구조요청 비컨에 암호를 새로 입력했다. 상황 종료. 사망자 없음. 요구조자 없음. 점멸하던 빛이 완전히 멈추는지 확인한 뒤 비컨도 집어넣었다. 휴대용 신호기의 전파가 닿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으니, 주변에서 우연찮게 전달자나 다른 집행자가 활동하던 도중이 아니라면 비컨 신호가 그사이 어딘가에 감지되었을 공산은 낮다. 그레타는 쫓기지 않을 것이다.

기대어 있던 나무를 의지해 신중하게 일어섰다. 바닥 가까이에서 도사리던 리퍼는 그와 눈높이를 맞추듯 떠올랐다.

그 존재를 향해 페데리코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해 보았다. 역시 대답이나 대답으로 간주할 만한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혼잣말을 하는 감각은 들지 않았다.

숲을 빠져나가는 길에는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페데리코 잘로는 자신의 덱을 들여다보았다. 앞면과 뒷면을 보이며 쏟아진 카드 더미 한가운데에 그을린 꽃이 그려진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는 검은 큐브가 그려진 카드 한 장을 더했다.

그리고 그 청보랏빛 꽃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0

꿈을 꾸었다. 드문 일이기에 선명히 기억한다.

잿빛 바닥만이 펼쳐진 공간에서 리퍼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먼편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말을 걸어왔다. 산크타가 서로의 광륜에 집중할 때 감지되는 촉각이나 향이나 온습도에 해당되는 무언가로. 그 말씨, 혹은 ph값, 혹은 전압, 무엇이든 그것이 번지는 소통의 수단이 정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존재가 나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자신의 안전보다 그의 생존을 우위에 두었습니까?)

어쩌면 저것이 자신을 모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저것의 전체상을 감지할 수 있는 적절한 수용기가 없기 때문에 자신을 덮어씌웠을 뿐일는지도 모른다. 뇌에는 정의내리기 어려운 자극을 익숙한 것으로 수렴시켜 버리는 기능이 있으므로. 많은 사람이 커피 얼룩이나 그을린 빵에서 사람의 실루엣을 떠올리듯이. 그의 뇌는 평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단계로 정보를 분절하기에, 모호한 수렴의 감각은 그에게는 낯설었다.

페데리코는 입을 열었다. 질문하는 목소리와 답하는 목소리가 같다니 기묘했다.

수탁인의 공격으로 제가 입을 수 있는 타격은 실질적으로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 페데리코는 자신이 입에 올리려는 단어가 자신이 내린 어떤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을 새겼다.

당신이 수탁인을 배제했을 때에 예상되는 손실은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손실이란?)

제게는 하지 못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가능성이 남습니다.

검은 큐브는 조용했다. 부연설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페데리코는 받아들였다. 문장을 잠시 골라야 ─ 기억해내야 했다.

저의 기술이나 지식이 필요에 따라 덱에 더하고 뺄 수 있는 카드의 앞면이라면, 그 모든 카드에는 공통된 뒷면이 있습니다. 제가 산크타이고, 라테라노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 많은 사람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한다는 사실, 성도의 칭호, 그런 뒷면은 덱에서 빼기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상대를 공평하게 대할 것을 명하며 저는 그러도록 노력합니다. 그렇기에 세르필리아는 제가 공평한 게임을 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틀렸습니다. 어떤 게임에서는 제 카드의 뒷면 그 자체가 공평한 소통을 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어떤 대화는 제가 저라는 이유로 시작되기 전에 끝나고 맙니다. 물론 저는 필요하다면 대화라는 게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규칙을 조정할 수 있고, 상대의 의견을 반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평함은 설득으로 일시에 이루는 합의가 아닌 양자의 행동과 장기적인 영향으로만 증명될 수 있는 양태이며, 이것이 한 번의 대면으로 실현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더 많은 조우의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위험과 실패를 의미하더라도. 서로를 살피고, 규칙을 의논하고, 상대를 일컬을 이름을 결정할 기회를 남겨 두어야 한다고.

그것은 기억되지 못한 페데리코의 말이었다. 페데리코는 말하면서 자신의 말을 들었다.

……당신에게 이름을 짓지 않았다면, 당신을 부를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겠죠.

꿈은 거기서 툭 끝났다. 눈꺼풀이 열리면 세상은 적막한 밤중, 어느 임무와 임무의 틈바구니에 책갈피처럼 끼워진 소박한 숙소의 천장이 보였다. 검은 형상은 언제 말을 걸었냐는 듯이 조용히 부유하고 있다. 페데리코는 느리게 깜박깜박 그 최면적인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담요를 여미며 다시 눈을 감았고, 이번에는 꿈 없이 깊이 잤다.

다음 날 길을 떠날 채비를 하며 페데리코는 선명한 대화를 되짚었다. 꿈은 예견하거나 상징하지 않는다. 무의식의 재조합일 뿐이다. 역대 성도들이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기억났지만 그들은 모두 교황이었으며 자신은 아니었다.

다만 아침식사를 하다가 문득, 불합리하게, 떠올렸다.

이름이 마음에 드냐고 물어 보아야 했을까?


(글과 별 관련은 없는) 그레타와 옥타비아노의 이야기

몇 년 전 방랑하던 그레타는 우연히 위험에 처한 옥타비아노를 구조했다. 옥타비아노는 산크타 특유의 위기감 결핍으로 “그레타는 나를 구해준 *좋은 살카즈*니까 다른 산크타들도 용인해줄 것”이라고 안일하게 확신했다. 옥타비아노는 그레타를 산크타인 주변인들에게 해맑게 소개해주었고, 옥타비아노의 설득에 반신반의하며 만남에 나섰던 그레타는 순진한 옥타비아노를 현혹한 악마 취급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고 도망쳤다. 그때 그레타가 느낀 것은 분노나 배신감보다는 친절하고 쾌활한 친구로만 생각했던 옥타비아노의 사고방식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경계 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공포였다.

240505 추가

츠빌링슈튀르메를 못 읽은 시점에서 썼는데… 이하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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