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

사적인 관계

박사x실버애쉬/BL/둘이 이미 사귀는 중.

무지몽매 by koorii
14
0
0

못 볼 걸 봤다.

박사는 나름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발걸음을 옮다. 문틈으로 시선이 마주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마주치면 어떻고 안마주치면 또 어떤가. 하지만 귀찮아 지는 건 질색이다. 로도스 업무도 잔뜩 쌓여있는데 이런-. 박사는 혀와 속마음을 같이 씹는다.

박사가 카란 무역회사에 들리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카란 무역회사의 사장인 실버애쉬의 요청에 따라 회사를 돌아다니면서 직원들을 보고 약품을 나눠주며 이미지를 좋게 만들거나, 카란 무역회사와 연결된 다른 권력들과 마주하기도 하고, 카란과 로도스 아일랜드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논의하거나, 아주 가끔 로도스에서 자리를 비운 실버애쉬를 찾아 출전 및 지휘 조언을 듣는 등. 대다수가 로도스 아일랜드의 이익을 가져다 주는 업무일 뿐이다.

하지만 로도스에서 내려 다른 곳에 방문한다는 뜻은 로도스에는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밀려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동시에 무조건 외근 보고서라는 또 다른 일이 생긴다는 일이기도 하고.

박사의 기준에서 재미있는 일이라면 없는 틈이라도 만들어서 참견하겠지만. 방금 전에 본 건 그다지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박사는 검지로 페이스가드를 톡톡 두드린다.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생각중이라는 표시를 내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 행동은 지금 등 뒤에서 박사의 어깨를 잡는 사람에게도 보였다.

"맹우여."

"아. 미안."

인사와 통성명을 하기도 전에 나오는 목소리는 무덤덤하기만 하다.

"보려고 한건 아니었어. 사적인 관계같던데."

박사는 등을 돌려 실버애쉬와 마주한다. 192의 장신의 남자. 방금 전의 흐트러짐이 감쪽 같을 뿐이다. 그마저도 박사의 눈에는 평소와는 다른 부분이 세세하게 잡힌다. 박사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이 문득 치솟는걸 느꼈다. 불쾌감? 질투? 아니 이건 귀찮음에 가깝다.

"..."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박사는 실버애쉬가 생각을 고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방금 전의 행동에 대한 변명 혹은 그냥 넘기기 아니면 뭐 이것저것 다양한 방도를 찾고 있을테지. 그리고 곧 그 해답을 꺼내올 거고. 박사는 실버애쉬가 자신과 같은 동류라는 걸 안다. 동족혐오까지는 아니었지만 머리와 수작을 다양한 방식으로 쓰는 상대방과 마주하는 상황이라니. 솔직히 말해 박사는 이 뒤에 이어질 것들이 매우 귀찮았다.

"할 말이 있다면 나중에 개인 사무실에서 하도록. 오퍼레이터 실버애쉬"

"그러지."

박사는 로도스 아일랜드가 카란 무역회사와 맺은 조약을 이용해서 자신이 그의 상사임을 각인시켰다. 말도 안되는 조약을 맺기로 한 건 이 작자였고 박사는 그걸 제멋대로 굴릴 줄 아는 수완이 있다.

'손님은 주인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법.'

누누이 실버애쉬가 해오던 말이었으나 카란 무역에 방문한 손님의 입장에서도 박사는 이 회사의 주인의 하자는 대로 따랄 이유가 하등 없었다.

실버애쉬의 눈이 살짝 감긴다. 의외라는 건지 아니면 나중에 더 큰 파도로 올 일을 생각하는 건지. 박사의 표정을 보지 못하서 그저 가늠을 하는 건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는 제스쳐였으나 그마저도 진실이 아니라 그저 흉내낸 표면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귀찮다. 박사는 페이스가드를 다시 한 번 두드렸다. '생각 중이야.'

"이따 로도스에 들리도록 하겠다."

실버애쉬는 대답하나 듣지 않고 돌아서 다시 아까 그 방으로 들어선다. 살짝 벌여진 문틈 사이로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이 따갑다. 방해받아서 기분이 나쁜가봐. 박사는 손을 흔들고 뒤돌아섰다. 알게뭐람.


박사는 서둘러 로도스에 복귀했다. 자신이 처리하는 서류의 범위는 오퍼레이터들로 한정 되어있다. 사실 이 로도스 아일랜드의 규모를 생각하면 이 범위는 비교적 많지 않은 편이다. 비교적. 그래 비교적.

소리 하나 없이 매끄럽게 열리는 문 너머는 가희 마경이라 할 법하다. 어지럽고 복잡한 방. 서류와 온갖 것들이 널부러져 있어서 사람이 자리잡기에는 마땅찮은 공간. 밀린 서류와 보고서가 박사를 반기고 말라붙은 펜과 커피잔 등이 굴러다닌다. 쓰다만 서류와 완료한 서류 그리고 다시 또 검토해야하는 서류들. 원래는 이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외근만 다녀오면 일거리가 잔뜩 쌓이고 만다. 박사는 제일 위에 올려진 종이를 한 장 들었다.

"쿠리어... 부상. 치료 및 오리지늄 오염 검사와..."

생각하기 싫은 탓에 억지로 머리에 주입하려는 정보를 입으로 읽어 내린다. 실버애쉬가 뭐라고 하겠군. 박사는 종이 끝이 살짝 구겨지는 걸 느끼면서 손가락으로 치료 결과 그리고 잡다한 오퍼레이션 관리 내역에 사인했다.

쿠리어는 실버애쉬의 측근이다. 문제가 생기면 1순위로 제 주인을 섬기고 로도스를 뒤로 미뤄둘 수 있는 인원. 실버애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거고 자신에게 보이는 호감에 진심이 없진 않겠으나... 실버애쉬와 박사를 비교한다면 박사를 헌신짝 처럼 버릴 준비를 언제나 하고 있을거다. 비교할 가치조차 되지 못한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박사는 대충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아 오퍼레이터의 광석병 진행 단계 및 최근 보고서의 서류를 들었다. 이번에는 엔시아다. 오늘 카란 무역에 다녀온다고 한 탓일까 아니면 우연히 이런 상황이 이뤄지는 건가. 실버애쉬의 여동생의 관련된 서류의 내용을 읽다 주변을 살펴보던 박사는 지금 책상에 올라온 대다수가 모두 카란 무역과 연관된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약품의 판매와 계약부터 오퍼레이터나 가족관계나 뭐 그런거. 아 물론 카란 무역 회사에 방문하는 동안 처리하면 좋을 일이긴 하지. 그럼 또 보고하러 올 필요가 없으니까. 박사는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구겨서 이성 저 멀리 무관심의 영역에 던져두었다. 할 일이 많다. 헛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양손으로 페이스가드를 쓸어내린다. 적당히 하다가 졸아야겠다.

얼마나 서류를 만지작 거렸을까. 쌓여있던 대다수의 서류가 처리완료 쪽으로 나열이 될 즈음 박사는 수마에 순순히 자신의 의식을 맡겼다. 서류 일을 하다가 조는 거야 드문 일이 아니고 가끔은 이렇게 바닥이 난 기력과 이성치를 회복시켜 줘야 했다. 합리화의 노곤함에서 타협을 보자. 얉은 잠과 의식 위에서 부유하던 박사는 근처에 작은 인기척을 느꼈다. 자신이 인기척을 느낄 정도면 대놓고 나 여기 있소 하고 주장하는 꼴이다. 누구지. 박사는 궁금해 하면서도 몸을 뒤척이며 의자 뒤로 몸을 푹 파묻었다. 지금은 일어나기 싫어. 방금 전에 졸기 시작했다구. 그러나 인기척의 주인은 박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페이스가드까지 손을 올렸다. 박사는 가늘게 눈을 떴다가 상대방을 확인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엔-시오데스..."

늘어지는 박사의 목소리에도 상대방은 대답이 없다. 몽롱해 하는 박사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내려다 보고 있을 뿐. 완전히 페이스가드가 벗겨졌다. 바깥의 공기가 드물게 묵직하다고 느껴지던 와중 입술에 부드러운 온기가 닿았다. 설산의 권력자도 입술은 단련하지 못하나. 

아랫입술이 빨리고 살짝 벌려진 입술을 톡톡 혀가 건든다. 끈적할 정도의 스킨쉽에 박사는 고의적으로 입술을 꾹 닫고 얼굴 위를 덮어 간지러운 은발을 손으로 밀어냈다. 잠시 남아있던 수면이 완전히 날아갔다. 입술을 탐하던 상대방은 거부 의사에 순순히 떨어진다. 박사는 손등으로 거칠게 북북 입술을 문질렀다. 입술이 까져 피가 나는지 약한 피맛이 난다. 그래도 박사는 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후드를 뒤로 넘기고 살짝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을 뿐이다.

진짜로 올 줄은 몰랐는데 드물게 드러난 맨 얼굴을 마주한 실버애쉬의 표정은 변화가 없다. 자신은 페이스가드라도 쓰고 있지 정말 이 작자는 뭘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니까.

"...왜."

왔는데? 박사의 눈 아래의 거뭇한 다크서클을 바라보는 듯한 실버애쉬는 턱짓으로 박사에게 도리어 질문을 던진다. 내가 할 말이 있던가? 박사는 주춤거리며 의자에서 팔을 뻗어 주변의 서류들을 바라본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다. 저 서류는 나중에 정리를 좀 더 하고 회의실이나 갖춰진 곳에서 이야기를 할 법한 것들이 대다수인데. 그게 아니라면. 으음.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덮어 터진 피를 빨아 삼키던 박사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연다.

"엔시아의 광석병은 호전 되지 않겠지만 더 이상 진행되지도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겠지. 호전이 가능한 약물은 아직 부작용이 심해. 실제로 효험이 있냐는 건 둘째치고 실험 자체가 큰 문제가 많으니까... 그래도 마냥 불가능 한 건 아니야. 그래서 말인데..."

"그 사안은 이미 알고 있으니 다른 이야기를 하면 좋겠군."

다른 사안? 박사는 이로 입술을 깨문다. 기억도 생각도 몽롱한데. 유일하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순간이라는 걸 알고 온건지. 박사가 졸고 있을 때 건들지 않는 건 오퍼레이터들의 불문율이었으나 이 실버애쉬는 과감하게도 박사의 정신을 잡고 흔들 줄 알았다.

"쿠리어와 관련된 거라면 분명 감염자들과의 전투에 나가서 다치긴 했지만 감염되진 않았어. 치료도 다 했고 팔에 스친건 오리지늄 아츠나 파편이 아니라 주변 전투에서 잘려 튀어나간 차체 파편이었을 뿐이야."

박사는 종종 전술 조언을 해주는 실버애쉬에게 이렇게까지 해명할 필요는 없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오리지늄 감염이 관련되면 말이 좀 달라지긴 했다. 보고서에도 올라갈 일을 다시 한 번 읊으면서 박사는 살짝 몸을 움츠렸다. 친히 이렇게 말까지 들으려고 올 정도라니 진짜 직원 사랑이 엄청난 사장님이네.

"정찰병인 뱅가드를 그렇게 깊숙히 침투 시키고 뒤늦은 퇴각을 명한건 분명 내 탓이지만 오염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 실제로도 그랬고. 걱정하지 마."

박사의 항변에도 오히려 실버애쉬의 분위기는 바뀔 줄 모른다. 높게 솟은 꼬리가 살살 바닥으로 내려오더니 작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불만이 있다는 표시다. 그것도 아주 의도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듯한 행동이다. 아 뭔데. 박사는 페이스가드를 두드리는 대신 손가락으로 뺨을 톡톡 두드린다. 혹시 이건가?

"엔야...는 지금 로도스 아일랜드에 있어."

박사는 양손을 들었다. 엔시오데스의 동생 엔야. 실버애쉬 가문에서 두 사람의 충돌과 사이 나쁨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나름 자부할 수 있는 입장에서 양쪽에 대한 정보는 서로에게 흘리지 않는 게 예의라는 걸 알면서도. 박사는 한 손가락으로 위층을 가르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그럼에도 한 숨 쉰 실버애쉬의 꼬리는 다시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온게 아니다. 너는 내가 타인과 뭘 하든 관심이 없나?"

박사는 그제야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아 설마. 아까 서류를 처리하기 전, 저 무의식의 영역으로 미뤄놨던 일 때문인가?

박사는 의식을 가다듬고 저 멀리 치워두었던 사건을 다시금 건져왔다.

"...네가... 누구랑 키스하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방금 전에 입맞춤으로 깨어나 아랫입술에는 아직도 핏방울이 맺혀있음에도 박사는 눈만 깜박일 뿐이다. 실버애쉬가 다시 한숨을 쉰다. 박사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따라서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의 관계를 좀 더 고려해봐야 하나."

작은 목소리의 혼잣말. 그러나 분명 박사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박사는 어처구니가 없어 살짝 실소를 머금었다. 지금 들킨게 누구인데 이런 태도로 나오는 건지. 그 상황에서 계획을 세우고 머리를 굴린 결과가 고작 이거 뿐인지. 아니면 일종의 함정이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마치 우리 둘의 관계에 실버애쉬가 매달리는 것만 같다.

"딱히 고려할 필요는 없지?"

박사는 연극적으로 어깨를 늘어트리고 말을 잇는다.

"네가 히라와 카란, 그리고 실버애쉬 가문과 가족들을 위해서 어떤 이득이든 취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알아."

이 눈앞의 남자가 수단으로 이용하는 듯한 엔시아와 대외적으로 사이가 나쁜 엔야 까지도 아닌척 아주 끔찍하게 아낀다는 걸 박사만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적으로 누구랑 뭘 해서 이득을 얻는거에 참견할 생각 없어. 아까 그 방에 있던 분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으니까."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박사는 살풋 봤던 적대적인 시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알기 싫어도 알법한 사람이기도 했다.

"네가 그 사람이랑 키스를 하든 뒹굴든 무슨 감정을 담아서 행동하든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이걸로 이성을 소모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냥 네가 조심해."

들키지 않게. 박사는 엄지로 피맺힌 입술을 훝는다. 방금 전의 스킨십이 말라붙은 느낌이다. 그리고 박사의 대답이 나오면 나올 수록 실버애쉬의 꼬리는 점점 움직임을 멈춘다. 꼬리의 방향은 이제 완전히 더 바닥을 향해서 낮아져 있었다. 그리고 표정 또한 여전히 무뚝뚝하나 분위기 만큼은 바깥 날씨에 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아리게 변해있었다.

"우리의 관계도 비슷하나까 말인가."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그럴리가. 박사는 대놓고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리가.

"그 반대지? 우리.. 우리 관계는 그러니까. 손해밖에 없지?"

"손해?"

손해? 다시금 되묻는 말에는 약간의 감정이 실렸다. 이번에는 화가 났다. 심장이 뛰거나 눈꺼풀이 닫히는 걸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생리적인 감정에 따라 살짝 부푸는 꼬리를 보면서 박사는 입을 딱 다물었다. 감정적인 실버애쉬를 보는 것도 드문데 그 장소가 자신의 사무실이라니. 절대 여기서는 화나게 하고 싶지 않다. 이건 귀찮음의 정도가 아니다. 나중에 침실에서 호되게 당할 징조에 가깝다. 이 침대 위에서 탐욕스럽고 뭐든 하고 싶어 하는 카란 무역회사 사장을 만족시키기란 너무나도 어려워서... 박사는 등 뒤로 작은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면서 자신이 앞서 화를 냈어야 했는지 작게 가늠했다.

"로도스와 카란의 신뢰관계가 우리 둘에게 달려있음을 너도 모르지 않을텐데."

"거기에 섹스가 왜 필요하냐?!!"

안그래도 침실에서 기빨려 죽겠는데. 조심히 말하겠다는 다짐과 달리 본심이 비죽 솟아나온다. 

"끈끈한 관게일수록 좋다고 생각한다만."

"그건 결혼이나, 그 법적으로 보장받을 뭔가가 있을 때의 이야기지."

박사는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습관이란 무섭다. 저 엔시오데스 실버애쉬가 지금 얼굴 표정을 다 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페이스가드에 익숙해져 무심코 감정을 표현하는 듯한 연극적인 행동을 하고 만다. 좋아 화를 내자. 지금 꿀릴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다.

"엔시오데스. 넌 잘생겼고-"

박사는 대놓고 실버애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재력에 권력에 뭐하나 빠질 게 없는 사람이야. 더군다나 그래, 매력적이기까지 하지."

"그건 잘 알고 있다."

부정하지 않는 연인의 태도에 박사는 짜증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 새끼가 남이랑 키스하다 들킨건데 왜 내가 변명해야하는데?!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실버애쉬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서 쿡쿡 찔러낸다. 무례하고 어쩌면 모욕적일 정도의 행동이다.

"미인계 한 두 번 써볼거도 아닐테고, 아까처럼 얼굴로 해결하는 일이 없지도 않잖아. 호감이라는 감정. 나아가 사랑이라는 게 얼마나 변덕스럽고 통제불가능한지 알면서 지금 우리둘의 관계가 손해가 아니라고...?"

한 마디 한 마디 마다 가슴팍을 찌르는 손가락에 힘이 강하게 들어가지만 이 카란 무역 회사의 젊은 사장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찾아온거지 않나."

그게 이 상황에서 나올 태도는 아니지. 박사는 손가락을 거두었다.

"우린 둘 다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흐음. 침음성을 삼키는 소리가 거슬린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지금 사귄다고. 단순한 섹스 파트너도, 친구도 아니고. 어느 한 쪽이 변심하는 순간 대참사가 날걸 알면서도."

"변절할 생각을 하나?"

이 실버애쉬는 박사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내뱉고 본다.

"지금 하는 말은 그게 아니잖아."

박사의 항변에도 실버애쉬는 그저 박사를 지긋하게 내려다 보기만 할 뿐이다.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태도. 박사는 자신도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내뱉고 볼까 생각하다가 멈추었다. 어차피 정해진 결말이고 본심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떠보기 수법에 또 당할태니까.

"배신 당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언제나 해. 절대적이라는 건 없으니까."

사람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 사고방식이 감정에 가깝고 이성에 멀어질 수록 더 그렇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실버애쉬와 박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쿠리어 같이 드문, 변절하지 않는 사람을 서로의 아군으로 침투시키는 것 아닌가.

"그래.... 그렇군.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염려하면서 미리 손해를 계산한다라. 그런 시각도 있었지."

부풀던 꼬리가 가라앉고 찬찬히 솟아오르는 것을 보며 박사는 한심하게 말하는 실버애쉬의 어투에 눈을 꾹 감았다. 화내봤자 의미 없음. 감정적인 소모 하기 싫음. 밀린 서류 많음. 낮잠 못잤음. 그리고...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다.

박사는 눈을 번뜩 떴다.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단언하는 말이다. 자신은 절대 배신하지 않으니 우리의 관계는 손해가 아니고 지금처럼 미리 손해를 계산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이 이해득실을 따지는 남자가.

그러나 실버애쉬는 제멋대로 방문한 만큼 그대로 재멋대로 떠나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찰나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박사는 문소리를 잡고 고개를 내밀어 뒤통수에 소리쳤다.

"어디가?!"

"기다리는 분이 계셔서 에스코트하러 갈 예정이다."

"대화 아직 안끝났어."

"사적인 일이 바빠서 이만 오늘은 가야겠군."

배신은 하지 않지만 이 이해득실을 따지는 남자는 박사가 내준 사적인 관계의 허용을 그대로 받아들었다. 아까 그 사람을 지금 만나러 간다고? 다른 대화나 해명 하나 없이? 곧장?!

박사의 속에 어이없는 감정과 분노가 그리고 그 뒤로 허탈함이 따라온다. 그 사이에 실버애쉬의 등은 복도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지금 당장 달려 쫓더라도 192의 장신의 다리를 따라 잡지 못할게 분명하다. 그리고 아까의 사람과 마주치기나 하겠지. 허! 대놓고 큰소리로 감탄사를 뱉은 박사는 그대로 문을 닫고 개인 사무실에 다시 틀어박혔다.

하지말라고 할 생각도 없고 붙잡을 생각도 없다. 알아서 하라지!

쿵. 닫히는 문소리에 실버애쉬는 잠시 복도의 코너 끝내서 멈춰섰으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박사가 붙잡지 않으리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