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방주

세 가닥 밧줄

체르니 단문

트위터에서 썼던 체르니 썰.

링거링 에코스 이후. 엑스트라 오퍼레이터가 등장합니다. 4천자.

체르니는 라이타니엔의 탁월한 음악가가 대개 그렇듯 우수한 캐스터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자신의 아츠가 할 수 있는 일과 그것이 닿는 범위에 대해서는 건반 위의 손가락이 닿는 위치만큼이나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싸울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어째서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는지 이상할 만큼.

로도스 아일랜드는 최전방 전출을 강력히 원하는 체르니의 의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체르니의 특기를 전장에 걸맞게 연마할 수 있는 풍부한 지원을 기꺼이 제공했다. 그는 광석병에 좀먹힌 몸뚱이를 지탱할 기초 훈련의 강도를 신중하게 한 단 한 단 높여갔고, 각국의 아츠에 통달한 오퍼레이터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기술부터 기저에 흐르는 계통과 세계관까지 이르는 귀중한 지식을 나날이 새길 수 있었다. 애프터글로에 머물렀다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세계였다. 이국의 아츠의 술식에서 낯익은 화음 전개를 감지한 날에는 그는 표준 객실의 침대에서 늦도록 뒤척이며 잠을 설치기도 했다. 지혜열을 닮은 아스라한 피로감으로, 알아갈 세계에 대한 희열로, 그리고 더욱 깊은 슬픔, 슬픔으로.

살아있는 광맥처럼 찬란하게 일그러진 크라이데의 몸을 ─ 그리고 에벤홀츠가 깡마른 팔다리로 그 광상을 다 덮어 없앨 수 있다고 믿는 듯이 친구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모습을 체르니는 지금도 눈앞에 그릴 수 있다.

누군가는 전장을 택할 권리조차 얻지 못한 채 전사가 된다. 그러나 체르니는 택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택해야만 했다.

한 번 목격해버린 세계를 외면한다면 그 외면이 그의 음악을 잠식하고 말리라. 설령 머지않아 이 몸과 정신이 전장에 부적합하다는 선고가 내려지더라도, 그는 그의 생명이 허락하는 한 몸소 부딪혀 목격하고 알아야 한다. 끝내 그의 제자가 되지 못한 두 제자가 치열하게 투쟁해 왔던 세계를.

슬픔과 분노와 긍지가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언제나 그리했듯.

아츠 프로텍터 오퍼레이터 체르니의 첫 전방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1100-191-32 푸른 분필 작전, 임무 목표 달성, 참여 인원 총 12명 중 사망자 0명, 중상자 0명, 경상자 3명. 임무 보고서 양식의 상단에 미리 채워져 있는 그 가지런한 숫자만을 본다면, 누군가는 전우들이 웃으며 무용담을 나누고 잔을 부딪히는 축하 파티의 광경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르니는 웃지 않았다.

본함으로 복귀한 체르니는 음악실의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망연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로도스의 구조상 창문이 있는 선실은 드물기에 실내에서는 시간의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어쩌면 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음 날이 밝았는지도.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로도스 아일랜드의 거체가 걸음을 내디디는 뭉툭하고 육중한 진동이 적막한 음악실에 습기처럼 차올랐다.

체르니는 건반 위에 두 손을 얹어 보았다. 눈을 감으면 건반의 냉기가 손끝에 스미며 소음들이 다가왔다. 사방으로 스치는 낯선 아츠의 잔광과 번득이고 끓고 튀기는 소리들. 아츠 유닛이면서 방패로 기능할 만큼 보강한 피아노에 쾅 쾅 우악스럽게 부딪혀 불협화음을 만드는 물리력. 내가 밀려난다면 내 뒤의 오퍼레이터가 함께 쓰러진다는 선득한 자각. 주인 모를 비명소리. 패닉에 빠지려는 동료의 청각을 그 순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음악으로 덮으며 저도 모르게 악물었던 턱의 둔통. 임무가 소강에 접어든 뒤에도 다물린 채로 굳어버린 턱이 욱신거려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천천히 다시 눈을 뜨고 건반 위의 손가락을 보았다. 그 모든 무게, 무게들이 열 손톱의 면적 위에 올라앉아 아우성치고 있었다. 이 중량을 견디며 타건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다가오지 않는다. 끝내는 이 감각을 음악으로 번역할 날이 오겠지만 ─ 지금은 아니다. 그는 이번 주에 예정된 음악 수업을 전부 물리기로 결정했다. 건반에서 손을 거두어 단말기를 꺼냈다. 네트워크에 짤막한 사과를 담은 게시물을 올렸다. 이제 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많다.

그는 마음껏 탄식했다. 자신이 가장 긍지롭게 여기는 재능으로 가장 원하는 전장에서 싸울 수 있었던 평생이 얼마나, 가증스러울 만큼, 운좋은 시간이었는지를.

체르니는 맹세코 일생 내내 그 행운을 타인을 위해 쓰는 일에 주저한 적이 없었다. 그의 음악이 수 년간 줄기차게 감염자들에게 건넨 위로와 자랑스러움의 가치를 그는 안다. 그것이 칼을 쥐고 일어난 한 사람이 지킨 감염자의 목숨보다 헐하다고는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서 그 사실이 지금 사무치는 수치심을 외면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음악실의 문에 인기척이 다가왔다.

"체르니 선생님이 여기 계신가요?"

체르니는 그랜드피아노의 건반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두 팔을 괸 채 한참을 침묵하던 중이었다. 청각에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호칭 하나로 손쉽게도 불려나온 음악가 빌헬름 부흐트 체르니가 조율된 현처럼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예. 들어오세요." 그는 대답하면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코드네임을 짓던 때 스스로를 가리킬 다른 이름을 떠올릴 수 없어 실명을 댔던 것을 잠시 후회했다.

쭈뼛거리며 발들인 이는 눈에 익은 뱅가드 오퍼레이터였다. 이번 작전의 팀원. 음악실에 걸음하는 일은 처음이다. 평소 다양한 종족을 만날 기회가 적었던 탓에 사브라의 외견을 섬뻑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나이는 성년을 갓 넘긴 듯하다. 임무 브리핑 때부터 그 앳된 행동거지에 신경이 쓰였던 기억이 있다.

뱅가드는 처음 봤던 때와 달리 한쪽 팔을 간단한 보호대로 고정하고 있었다. 경상자 3명 중 하나. 한동안은 숟가락보다 무거운 물건은 들기 어려울 테다. 체르니는 피아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막상 일어나고 보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간신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사과였다.

"……미안합니다. 임무 후에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제가 경황이 없었군요."

뱅가드는 알아듣지 못한 듯 어깨를 들었다가 머쓱하게 웃었다.

"아, 부상 때문에요? 아니 별거 아녜요. 아물기만 하면 된대요. 헤헤, 제가 실수한 건데 운이 좋았죠 뭐."

성한 쪽 팔로 숫기없이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마주 꾸벅거리는 청년의 모습에 체르니는 가슴을 에는 착잡함을 삼켰다. 임무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순박한 청년이 혼란한 전장에 가장 먼저 뛰어들어 길을 여는 존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겠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용건이 있으십니까? 앉으시죠."

청년은 주변을 둘러보았고, 안온한 난색과 라이타니엔식의 정갈한 가구와 여러 악기로 우아하게 꾸며진 음악실의 모습을 일별했다. 그는 자기에게 걸맞는 의자가 없다고 느꼈는지 문간에서 주춤거리다가 결국 어느 쪽으로도 향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말했다.

"앉을 만큼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고, 그게, 궁금한 게 있어서요."

"아, 예. 말씀하시죠."

"첫 현장 임무셨다고 들어서, 마음 복잡하실 것 뻔히 아니까 찾아뵙기가 좀 그랬는데, 애들이 얘기를 듣더니 그건 꼭 직접 가서 선생님 본인한테 말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문장을 자를 시점을 좀처럼 찾지 못하는 어설픔이 진솔했다. 전장의 잔향으로 참담하던 마음이 꾸밈없는 말씨에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마음 복잡하실 것 뻔히 아니까…… 그 당연한 문장 또한 예의치레가 아닌 경험에서 우러난 염려겠지. 그 온기를 값지게 새기며 체르니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뱅가드는 또 몇 번이나 까닭없이 꾸벅거리고는 마침내 물었다.

"……그 곡 제목이 뭔가요?"

"?"

체르니가 의아한 기색을 띄우자 그렇지 않아도 수줍음을 타는 뱅가드는 거의 반으로 접힐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거의 들리지 않게 된 목소리로 웅얼웅얼 부연했다.

"이번 작전 중에 그, 페이즈 2 때 적 캐스터가 불 아츠 썼을 때 막으면서 치셨던 곡이요, 저는 라이타니엔 아츠는 처음 봐서 그게 무슨 곡인지 아니면 그냥 주문 같은 건지 뭐 하나도 모르고, 어 그나마도 정신이 없어서 앞부분밖에 못 들었지만……"

정지하고 만 체르니 앞에서 그는 긴 귀를 잔뜩 늘어뜨리고는 중언부언을 간신히 마물렀다. 모두가 체르니에게 직접 이야기해야만 한다며 청년의 등을 떠밀게 한 그 말.

"뒤가 너무 궁금해서 꼭 살아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

체르니는 붙박혀 선 채 한참을 조용했다. 이윽고 호흡을 당기면, 폐부를 가득 채우는 숨이 명치에서 줄곧 울렁이던 무언가를 조용히 씻어내리는 흐름을 느낀다. 작은 위안일 뿐임을 안다. 동량의 슬픔과 분노와 긍지가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기에. 하지만 그 중 그의 손아귀에 가장 굳세게 쥐어지는 한 가닥의 팽팽한 밧줄을 꼽는다면.

"저, 음악이고 아츠고 뭣도 모르는 녀석이 갑자기 찾아와서 정말……"

청년이 면목없이 이어가는 주절거림을 체르니는 잔잔한 미소로 만류했다. 그리고 청년의 놀란 얼굴을 보고서야, 자신이 전장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웃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연주해 드릴까요?"

음악가는 그랜드피아노를 열었다. 무게를 기꺼이 견디며. 긍지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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밧줄의 비유는 체르니 승진 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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