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피아/천저]

나척쌀 by 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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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두드린 듯 손자국이 너저분히 찍혀있는 거울에 비친 상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전신거울 옆 침대가 사람의 몸을 담아 움푹 꺼졌습니다. 나의 손에 들린 머그잔을 그녀는 내 손아귀에서 빼내었습니다. 내가 왜 머그잔을 계속 들고 있었더라. 아, 종종 이러합니다.

"피아메타 누나."

내가 부른 그녀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 눈은 사람들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곤 했었죠.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만, 나는 이 사람을 신의 이름을 빌려 사랑할 수 있음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물론 나를 볼 때면 제 가슴 정 중앙점의 어딘가 너머를 모질게 노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으니까요.

"저는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내가 이렇게 물으면 그녀는 입술을 불편한 듯 달싹이다 마침내 말합니다. 몰라. 좀 쉬어. 그러고는 내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온통 하얀 침대에 함께 눕습니다. 나는 항상 그 사람의 등을 보다 잠듭니다. 그러면 파도가 바닷가에 뉜 나의 몸을 모래와 함께 이 하얀 세상에서 쓸어갑니다. 또 여기서 다른 어딘가로 떠밀려 가겠지요. 저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떠밀면 떠미는 대로, 다른 세상으로 쏟아지는 소금물. 대개 나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처음 그 사람이 방에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다. 당시 나는 심히 앓았는데, 정신을 잃어가던 와중 누나는 제 뺨을 한 대 때렸습니다.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 무엇이 바닷가에서 밧줄을 쥐는 사내만큼이나 되는 흔적을 새겨넣었을까요. 찰나지만 손등을 기어오른 힘줄, 손바닥에 눌어붙은 굳은살과 터진 물집들이 퍽 아프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도아인,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 눈물이 방울져 얼굴에 떨어지자 따가웠습니다. 그때 내가 말했어요.

"...누구세요? 여긴 어디인가요?" 떨어지던 눈물의 유속이 배로 빨라졌습니다. 내 멱살을 잡더니 다시 놓아주는 게 아니겠어요. 세상을 잃은 듯 저를 쥐어흔들며 우는 그 사람을 보고 있자니 나도 서글퍼져서 그녀를 어르고 달래주었습니다.

"피아메타, 들었던 것 그대로지? 역시 널 데려오지 말걸 그랬어."

"...아니, 됐어. 언젠가 봐야 할 얼굴이었어."

"미안, 매일 최면 치료를 진행하고 있으나... 환자의 진척이 없어. 시간이 지나면..."

"있잖아. 그거, 안 하면 안 돼?"

"...왜?"

"내가 아니라고 느끼는 내가 되기 위한 치료는 역시 이상해서."

"너다운 대답이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그럼, 내가 보호자 신분을 맡고, 보호자로서 요청한다면?"

 -

소등된 병실과 대비되는 환한 복도를 타고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여전히 코가 막힌 소리가 나더군요. 

지금 내 세상은 온통 하얗습니다. 이따금 텔레비전이 켜지면 화면의 리베리 남자를 따라 숨 쉬는 법을 배우기도 합니다. 나는 물고기인 걸까요? 어째서 인간이 인간의 땅에서 숨 쉬는 데에 연습이 필요한 걸까요. 채널을 돌려보려 해도 돌려지지 않습니다. 바깥은 폭발음과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로 가득한데 이곳은 이렇게나 정적입니다. 침대보를 꽉 쥐고 하품을 참아내며 방송을 잠자코 시청하는 것이 내 일과입니다. 들이마시고, 뱉어내고. 방송 시간이 끝났지만 여전히 나는 좁고 검은 창을 바라봅니다.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이 비칩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인데, *나는 왜 항상 창을 통해서만 삶을 들여다보는 것일까요?

어제 새벽에는 발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쿠션으로 된 벽을 두드리며 내가 그곳에 머리를 마구 박아댔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나 내가 본 것은 사뭇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열띤 감각 사이를 헤매이다 들었던 반복적인 음, 기계 뇌의 전기신호, 온통 어두웠던 지하실, 늘어진 전선과... 머리가 아프군요. 내가 '발작'을 일으켰다고 들었을 때는 대개 이런 기억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가뜩이나 오늘 아침의 생선구이로 체할 것 같아요. ...아, 저희 고향에서는 토마토를 곁들여 먹거든요. 아무튼 그녀는 저를 보러 오는 것이 익숙한 모양입니다. 창문을 막은 쇠창살 사이로 걸어오는 붉은 머리 여자가 보이면 나는 허리춤을 치켜올리고 급히 세수를 시작합니다. 저희가 만나는 곳은 병원의 뒷마당입니다. 언덕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키가 작달막한 묘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매일 만나는 거예요. 나는 늘 발을 가만히 두고 멀리서 걸어오는 누나를 기다립니다.

지금은 초여름, 우리는 산책을 하곤 합니다. 어떤 의식처럼, 따가운 볕을 쬐며 말없이 조그만 무덤가를 빙빙 돌면서요. 이따금 이 단순한 산책 코스가 기나긴 미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두 손 사이의 애매한 거리에 손 끝이 저릿거리는데, 선생님, 이것도 내가 '병자' 라서 그런 건가요? 하지만 선생님, 병자의 몸이 더 행복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드디어 창 너머에서만 기다리던 내 삶을 다시 넘겨받은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며칠 전에는 그녀가 산책 도중에 처음으로 말을 걸었어요. "난 너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나는 고심 끝에 답했습니다. "누나는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야 어딘가 아픈 이는 아파 보지 않으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나는 어쩌면 누나를 동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베리아의 색채와는 사뭇 다른, 녹슨 쇠 울타리를 휘감은 장미 덩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철들지 못한 생각을 감히 해보았습니다.

가벼운 종이 딸랑이며 환자들을 부르면, 이제 치료 시간입니다. 요즘은 '치료' 방식이 조금 바뀌었는지 날 앉혀두고 이 나라 거리로 추정되는 사진을 내게 보여줍니다. 울지 않는 종탑을 울렸던 또래 소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요. 빳빳한 사진을 손끝으로 훑어보기도 하고 팔랑팔랑 구겨보기도 하지만 전부 낯설기만 합니다. 나는 말없이 사진을 누나에게 전부 건넸습니다. 누나는 라테라노 사람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지니고 있어야 하니까요.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

여름의 하늘은 변화무쌍하여 맑다가도 금세 비가 퍼붓기 시작합니다. 이런 날이면 고향에서는 미망인이 기다리시는 몸들이 하나둘 밀려오기도 합니다. 처음으로 시신을 본 날은 그날이었어요. 그날 나는 침대 밑에 들어가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울고 싶지도 않았고, 공허에 대해 분하지도 않았는데 왠지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안도아인. 천둥이 무서워?" "...아니요, 피아메타.." 나는 팔짱 안에 파묻은 고개를 힘없이 내저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돌아가는 일이에요." 누나의 귓가에 아주 천천히, 한 글자씩 속삭입니다. 바닷바람이 살가죽을 벗겨내고 물살이 남은 뼈를 둥글게 깎아내면 우리는 해변의 작은 조약돌로 돌아갑니다. 죽음은 퇴행이었어요. "누나는 뭐가 두려워요?..." 그녀는 내 등을 쓸어주며 이야기하듯 담담히 중얼거렸습니다.

"넌 모르겠지만 그런 날이 있었어. 한 남자를 사랑했던 날. 그는 쉬는 날이면 의자에 앉아 달아빠진 조각 케이크를 깨작이며 햇빛에 비춰가며 책을 읽었지. 나는 그 옆에서 졸다가 그의 입맞춤에 눈떴어."

"난 그 기억이 아무리 날 쑤셔도 잊고 싶지 않아. 날 웃게 하던 그도, 날 분노하게 하는 그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잊었거든. 나는 모든 것이 나를 두고 변할 때, 그때가 가장 무서웠지."

"그랬군요." 나는 아직도 미숙한 사람을 안았습니다. 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변화를 경외하는 그녀는 너무 작아서 내 품에 들어오고도 남았어요. 마침 번개가 번쩍이더니 병실의 불이 하나씩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리가 빛을 뒤따르자 우리는 서로의 귀를 막고 눈물 맺힌 눈을 마주했습니다. "그리고, 넌 ...가고 싶... 왜 ..아..는 게 무.. 거야?" 죄송해요, 천둥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이 부분은 잘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순간 침대가 하늘로 떠오르더니 빗살을 가로질렀고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익숙한 곳에 다다랐습니다. 물을 머금은 장작 냄새에 눈을 떠보면 이곳은 고향입니다. 나는 로카마레아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작은 광장에 우뚝 선 동상이 목을 잃은 채 재앙 앞에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우리를 반겼습니다. 아마 그것은 폐허라는 단어에 꼭 들어맞았습니다. 채 빠지지 못한 물이 넘실대는 가운데 그녀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녀의 다리 무게보다 무거울 부츠를 가볍게 놀리며 생긴 개울을 폴짝 뛰어넘고 말이에요. 파도는 갈라져 그녀의 무대를 방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어느새 생긴 관객석에 앉아 손뼉을 치고 환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피아메타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소금기 어린 햇살이 구름을 찢고 나와 스포트라이트를 보내주었습니다. 누나가 내 손을 잡아끄니 바람이 내 몸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지만 도는 것에 중심 따위는 없었습니다. "거 봐, 안도아인, 너도 알고 있었잖아. 돌아가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지?" 어지러움에 대답은 할 수 없었지만, 생각했습니다. 만일 내가 사라지고 로카마레아는 황무지가 되고 결국 우주가 뜨거운 한 점으로 '돌아와도' 분명 괜찮을 거라고. 여러 작은 골목들을 쏘다니다 우리는 결국 다시 침대 위에 올랐습니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침대는 다시 날아 그런 일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병원의 뒤뜰, 무덤가에 가볍게 내려앉았습니다. 빗줄기는 약해지고 시트는 축축해졌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한 쌍의 소년과 소녀처럼 천진하게, 연인처럼 다정하게 얽혀 젖어가는 머리칼을 서로 어루만지며 긴 시간 동안 입을 맞추었습니다. '돌아간다' 고 생각지 말아요 '돌아오는' 일은 모두에게 일어나요. 선생님, 그것이 제 환자복이 젖은 이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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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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