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방주

Fearless

리켈레 단문

리켈레&페데리코 페어. 논커플입니다. 커플링 피드백 안 받습니다. (중요)

4000자.

EN Translation>


리켈레는 가족이랄 만한 것을 가져 본 적이 없다. 혼자가 삶의 기본값이기에 반대로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이든 개의치 않고 익살스럽게 말을 붙일 수도 있다. 어차피 지나갈 존재니까.

개인주의자라는 표현은 오히려 결과론적이다. 내일 아침 이유없이 기물이 되어 발견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스치며, 상대가 나를 사랑하기보다 아예 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기원하는 생활에 익숙해지면, 이상하게도 모든 만남이 간단하고 편해진다. 물이 잔뜩 든 양동이를 옮기려면 더듬더듬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살펴야 하지만 빈 양동이는 너끈히 악기도 투구도 의자도 된다. 패밀리의 잔심부름 거리를 호주머니에 꽂아넣고 시라쿠사의 골목과 지붕을 뛰어다니기에는 그런 단출한 몸이 적당했다. (왜 양동이냐고? 그럼 숨어 다닐 때 도움도 안 되는 그 큼직한 광륜을 뭘로 가린단 말야?)

가벼운 걸음으로 내일 죽을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너스레를 떨며 마침 맡길 배달 일이라도 없느냐고 묻는다. 돈은 됐어요, 지폐 냄새 귀신같이 맡는 녀석들이 게임 하자고 달라붙어서 다 뜯어갈 걸요, 거기 오이나 두어 개 주세요. 뱃속에 넣으면 무슨 수로 가져가겠어요. 청과상이나 빵집 주인은 리켈레를 요즘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물게 싹싹하고 살가운 아이라고 불렀다. 산크타라서 명랑함을 타고난 게 아니겠냐느니 같은 영문 모를 소리도. 빵집 주인이 화로 속에서 백골이 되어 발견된 날에 그 살가운 아이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평가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리켈레는 나름대로 자유로웠으나 교회 영감은 그것을 체념이라고 했다 ― 하지만 체념 이외의 무엇이 가능하단 말인가? 연연하지 않을 자유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다. 목숨 이외의 무엇에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마음가짐은 희귀한 재능이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대담하고 겁대가리 없는 놈으로 불릴 수 있었고, 그러면 패밀리가 맡긴 조금 더 까다로운 잡일의 보수로 더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저번 주인이 만든 치아바타가 좋았는데. 아들 건 가게를 갑자기 물려받아서 그런가 영 퍽퍽해. 일찍 좀 어깨너머로 배워 두지 말야, 이렇게 될 걸 모르지도 않았으면서. 우물우물.)

체념에 실패한 적은 몇 번 있었다.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겁대가리없는 놈이라는 평가는 지키는 편이 이득이니까.

그 아들이 새벽마다 제 어머니가 화장당한 화로에서 빵을 구우면서 무엇을 생각할지를 무심코 떠올려 버렸을 때, 리켈레는 예배당의 긴의자 위에 뉘였던 몸을 벌컥 튕겨 일으키며 요란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위액 말고는 넘어오는 것이 없었다. 몸뚱이가 어디 붙어 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머리로 피가 몰렸고 충혈된 눈은 머릿속에서 백열하며 부풀어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한참 뒤에야 소년은 헐떡거리며 바닥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달아오른 몸에 돌바닥의 냉기가 자비롭게 스미는 동안, 그는 목구멍과 혀뿌리를 태우는 위산의 맛을 호흡으로 느끼며 시커먼 천장을 오래도록 마주보았다. 심야, 언제나 빛보다 어둠이 더 두터운 외진 교회당, 라테라노교를 상징하는 겹겹 고리 모양 천장 장식은 최면이라도 걸어올 듯했다. 그의 머리 위에도 꼭 같은 고리가 있다. 그가 골목이 아닌 안전한 교회의 지붕 아래 종종 잠을 청할 수 있게 하는 티켓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광륜과 날개는 율법에 받아들여졌다는 증거라고 수도사가 말했다. 나를 받아들이는 그 율법이란 물건은 비위가 퍽 좋은 모양이다.

라테라노의 입국 심사 시설에 발들였을 때, 그가 가장 강렬하게 느낀 감각은 떠도는 단내도 청결한 거리의 쾌적함도 아닌 산만함이었다. 그는 그토록 많은 산크타에게 둘러싸여 본 적이 없었다. 경계심 없이 함부로 개방된 감정들은 낯선 소음에 가까웠고 옆사람의 말조차 듣기 어려웠다.

리켈레를 데려온 이는 넋이 나가 비틀거리는 소년을 보고 낄낄거렸다.

저런. 소대와 함께 이동하면서 이탈 증상이 약간 나아졌던 모양이군. 곧 적응될 거야.

이탈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익숙해진다고요? 너무 정신 사나운데요……

시라쿠사에서 구슬 발이나 천으로 된 ‘문’을 본 적 있지? 그걸 떠올려. 화살을 막거나 등을 기댈 수도 없고, 소리가 다 오가는데, 다들 그걸 문이라고 ‘치고’ 생활하지. 그래서 그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은 적당히 흘려넘길 수 있어. 정말로 장막을 걷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만 신경쓰면 돼.

리켈레의 일부는 짜증을 낼 뻔했다. (그걸 뭐 대단한 전통이라서 달아놓은 줄 알아요? 진짜로 때려부술 생각 하는 놈들 앞에선 나무문 같은 건 아무 소용이 없어서라고요! 적어도 문짝 고치는 값은 덜 들 테니까!) 하지만 생전 처음 겪는 산란함에 쓰러질 지경이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리켈레는 시도했고, 희미하게 성공했다.

그리고 수 년간 리켈레의 장막은 다시 열린 적이 없었다. 한 겹 너머에서 오가는 두런거림만으로도 사회생활은 문제없이 가능했다. 리켈레는 산크타의 공감 자체보다 그들이 '실제로' 서로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가 더 놀라웠다. 공감의 그물 한켠에 분노나 슬픔을 얼룩처럼 퍼뜨리는 사람이라면 간혹 이채로워하는 눈길을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리켈레의 무던함은 라테라노라는 사해의 염도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기에 금세 섞여들었다. 아니 염도보다는 당도 쪽이 어울리겠다. 누구도 그것을 체념이라 부르지 않았다 ― 만약 그때 그 수도사 영감의 평가가 옳았다면, 지금 리켈레가 보는 라테라노의 국교는 라테라노교가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체념이었다. 혹은 안주. 혹은 천착.

무균실처럼 야만과 폭력을 격리하는 라테라노에는 공포가 희귀하다. 공포는 호위대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도 낙오하는 사유였으나 리켈레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공포가 되는 전이 또한 그는 거의 의식할 필요도 없을 만큼 매끄럽게 피할 수 있었다. 그것은 리켈레가 기억하는 삶 내도록 갈고닦은 생존 기술이었고 그저 사용하는 언어가 바뀌었을 뿐이니까. 그가 고평가받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겁대가리 없는 놈이 살아남기 편한 건 어느 동네든 마찬가지다.


그는 두려움이라고는 없는 사람의 고통을 보고 공포를 느낀 스스로에게 놀랐다. 공감이 아닌 순전히 자기 자신의 감정이었다. 위급할수록 냉정해지는 리켈레의 머리 한켠은 와, 이런 거 오랜만이네, 신선한데. 따위 한가로운 생각을 떠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페데리코를 그늘로 끌어당기며.

한쪽 팔을 관통하다시피 한 석궁 화살을 뽑고, 지혈대를 꽉 조이고, 한 롤에 웬만한 컬럼비아 노동자의 월급은 족히 나갈 치료 아츠 회로가 직조된 붕대를 감고, 진통제를 놓는다. 페데리코의 피로 엉망이 된 손을 옷자락에 억세게 닦아낸 뒤 다시 권총을 바투 쥔다. 리켈레가 적 두엇을 적이었던 기물로 바꿀 즈음 페데리코는 금세 의식을 되찾았다.

"상황은?"

"일단 처리했어. 무슨 짓이야?"

페데리코는 출혈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지혈대를 스스로 풀며 답했다.

"제 산탄은 중장거리 사격에는 부적절합니다. 저격이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슬러그탄으로 교체할 시간이 없는 상황이니, 견제는 당신이 맡는 쪽이 적절하다 판단했습니다."

"넌 그렇다고 날 후배를 고기방패로 쓰는 파렴치한 놈으로 만드냐? 내가 아니었음 벌써 시체 둘 치웠어."

"의논할 말미가 없었으니까요. 당신의 임기응변 능력도 고려한 판단이었습니다. 급소는 피했으니 문제 없습니다."

팔에 환풍구가 생겼는데 문제가 없다고? 리켈레는 엄폐물 너머로 몸을 내밀려다 도로 등을 기대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거 고평가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다신 하지 마. 기절하는 줄 알았네."

"당신은 상황의 변화에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고려한,"

"그래그래. 그 집행자 리켈레를 기겁하게 만들었다고 이력서에 적어."

주변에 산크타라고는 서로뿐인 상황, 다른 상대였다면 황급히 감정을 닫아버리지 않는 한 서로의 긴장이 마주 놓은 거울처럼 반사되어 최악의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넌더리를 내면서도 리켈레는 여전히 머리 한켠으로 놀라워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 얘 앞에서는 뭘 느끼든 상관이 없구나?

한 번도 걷은 적 없는 장막이 흔들린 틈새로 깨끗한 공백을 들여놓는 감각은, 피비린내나는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상쾌했다. 피부처럼 익숙해진 탓에 그 자리에 문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먹을 지경이었는데. 종종 새벽에 눈을 떠 천장을 응시하게 하는 무언가가 여전히 그 뒤에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리켈레는 그 감각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페데리코에 대한 걱정에서 온 두려움과 이 환기가 가능한 상대가 없어지는 두려움 중 어느 쪽이 크냐면, 글쎄, 이걸 질문이랍시고 떠올리는 자체가 좀 개자식 같으니까 구분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래도 전자가 있긴 있단 사실 자체로 충분히 놀랍지.)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공포는 진실하다.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는 게 생긴 게 얼마만이지? 어쩌면 처음인가? 가족조차 가져 본 적이 없는데. 리켈레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권총을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진짜 다신 하지 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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