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피아/경전]

나척쌀 by 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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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아인,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을 타인의 마음속에서 계속 외면서 살아간다. 네 머리 위 찬란한 광륜도 네가 처음으로 입을 뗀 날에 생겼단다." 언젠가 그를 키운 주교가 그에게 말했다.

"주교님"

그것이 안도아인의 첫 마디였다. 물론 세 살 난 아이의 발음은 정확하지 못했고, -'주-ㄱ-ㅗ-님' 에 더 가까웠다.-그날도 순박하고 안타까운 기도를 올리던 이 망국의 교인들은 순간 빛을 보았다고, 그는 훗날 주교에게 들었다. 그 말은 그들이 신경을 쓰든 않든 죽는 날까지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울리고 있을 것이다. 이베리아 종탑의 음울한 울음이 길이길이 파장을 남기는 것처럼 말이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열하나 그는 생각했다.

반면, 피아메타는 누가 그녀의 첫 마디를 기억해주었을지 몰랐다. 첫 말의 순간 나타나는 표식도, 대신 기억해줄 사람도 없다. 그녀는 일곱에 부모를 여의고 어느 할아버지의 손에 키워졌다. 기억되기를 잠시 바란 적도 있었던 그녀 역시 부모의 얼굴도 이젠 기억 속에서 흐릿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파트리치온은 그녀를 잘 돌봐주었고, 그녀는 여느 라테라노의 소녀로 자라 각종 사격대회의 상을 휩쓸었다. 그녀 역시 또래 소녀와 같이 삶을 둘러싼, 어른의 시점에서 알고 보면 간단한 답이 나오는 고민들에 잠겨있던 짧은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그녀는 주변의 산크타들을 보고 스스로 첫 마디를 추측했다. 엄마? 아빠?....역시 그만두자. 그녀에게는 현재가 있었고,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다섯 달짜리 방황은 그렇게 찰칵 하고 당겨진 방아쇠와 시원하게 공기를 가르지 못한 소녀의 불발탄 대신 과녁 너머의 풀숲으로 날아갔다.

피아메타가 뭐라고 했건 적어도 그 둘은 다른 언어로 말했을 것이다. 그 남자 특유의 유수 같은 억양과 발음이 그것을 어렴풋이 증명한다. 그와 피아메타는 단순히 태생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남기는 말들의, 서로의 근원이 달랐다.


평소라면 이런 생각 따윈 일찍이 집어치우고 총을 닦았을 피아메타는 여전히 오늘 주운 쪽지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 잉크는 분명 대장이 보고서를 쓸 때 서명하는 잉크다. 요즘의 제출 담당은 그녀이기에 알 수밖에 없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본 적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녀가 혀를 움직이면 라테라노의 단어의 발음이 약간씩 뒤틀린듯한 이방인의 말이 종이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대장은 오히려 말이라면 없는 편이었다. 그의 필체는 피아메타의 그것보다 가늘고 난잡스러웠으며 또한 모든 것을 잉크에 실어 흘려보내듯 굽이쳤다. 그러나 단어의 뜻은 물론 무슨 의도로 나열해둔 지 모를 이 글씨에는 망설임이 있었음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살아있는 바다

이베리아의 석양

부두

날아드는 새

부디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안도아인에게서 느껴지는 그 소금기 머금은 바람과 어린 날의 오래된 고해실에서 맡은 적 있는 나무바닥의 냄새. 그것이 여기서부터 날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아메타는 홀린 듯이 그 종이를 접어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소리내어 읽어버린, 입속을 떠난 문자들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문을 닫아두었다. 그녀는 의미를 물어볼 작정이었다. 때가 되면. 언젠가 때가 오면. 그렇게 본적도 없는 비밀스러운 바다가 그녀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안도아인, 내게 네 말을 가르쳐줘. 하루에 하나씩."

피아메타는 그렇게 해서라도 안도아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가 하는 말을 뜯어보고 미지인 그의 근원에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는 기꺼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안도아인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피아메타의 오른손을 잡고 펜으로 살살 필기체를 새겨넣었다. 간단한 두 철자의 단어였다. 피아메타는 더듬거리며 읽었고, 확인받듯 안도아인의 눈을 쳐다보았다.

"이건 신뢰라는 뜻이야."

 "특이하게도 고향 소녀들과 여인들이 신앙을 말할때도 이 단어를 썼었지.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엿듣게 될 때 화제에 따라 그것이 신뢰인지 신앙인지 구분했어야 했어."

말 끝에 따라붙는 그의 맥없는 웃음이 터지자 피아메타는 입을 다물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피아메타는 창문으로 그림자가 기울 무렵마다 안도아인이 들어오면 방문을 닫아두었다. 그녀는 등대도, 뱃사람도, 린수도 본 적이 없었다. 본것만을 믿었던 그녀는 이제 사내의 말을 믿었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눈은 언젠가부터 포말에 휩싸여 젖어갔다. 언젠가부터 안도아인의 말은 그녀의 종아리까지 차올랐다. 그 정도면 좋았다. 내딛는 걸음을 붙잡지 않을 정도. 

난파선

죄를 사하다

잠들다

.

.

.

.

...고요함

주교님

그녀는 그의 근원에 다가갈 수 있었다. 적어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의 입으로 그가 처음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피아메타는 왜인지 떨리는 손을 뻗어 안도아인의 광륜을 만졌다. 안도아인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가 어지러웠다. 그는 비척이며 의자에서 일어나 조용히 온몸이 너덜너덜해져 죽어가는 선교사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천사를 안아주었다. 그에게 이 메스꺼움은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며 입을 막아주는 계시였고 의식이었다.

그들은 이제 종종 이베리아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간단한 안부나 하루 일과를 물을 수 있는 수준까지였지만, 피아메타에게는 가벼운 아침인사, 점심을 같이 먹으며 들은 실없는 농담, 그리고 이런 일상을 정리하는 과정이 소중했다.

그녀가 단어를 배울때 그녀는 이미지를 함께 배웠다. 뱃일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소년과 아낙, 우중충한 나라와 대비되는 정열적인 춤, 묘지에 무릎꿇고 둘러앉아 나눴던 지나간 시대의 전설, 기다란 식탁의 끝자리에 앉아 감사기도를 올렸던 지금 그녀 눈 앞의 사내.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매일 밤 두 몸이 들어가면 푹 꺼지는 부실한 숙소의 침대 위에서 잠들기 전 피아메타는 안도아인과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착각을 하곤 했다.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번지는 미소와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착각이었다. 그들이 하던 것은 대화가 아니었다.

그 착각 때문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적어도 피아메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르무엔을 옮기며 모스티마는 웃지 않았다. 더 이상 자신을 향할 웃음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르무엔의 몸은 사람을 본떠 만들어진 유리조각같아서, 둘은 걸을 때 그 몸이 진동에 부서지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야 했다. 피아메타는 입을 조금 떼었다가 곧 닫아버렸다. 이 모든 것이 비와 함께 휩쓸려 내려가면 좋을 텐데, 마치 거리를 훑고 지나가는 파도처럼. 갑작스러운 사건에 잘라내지 못한 그의 언어가 그녀의 뇌리에 아직 단단히 꽂혀있다. 피아메타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가 했던 말을 외며 살아가는 안도아인을 죽여야 했다.

내가 있었으면 뭔가 달랐을까? 아, 멍청한 피아메타! 애초에 산크타와 리베리가 같은 꿈을 보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넌 뭘 기대한 거야. 그의 저주스럽도록 굳게 닫힌 입에서 무엇이 나오길 기대하며, 희망하며 발버둥친 거야? 알기나 하냐고, 그가 너를 가르치면서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각오를 하고 있었단 것을! 넌 그에게 대체 뭘 배운 거지? 되도 않는 환상을 품는 법? 너 원래 이러지 않았어. 정신 차려. 난 그가 가증스러워 미칠 지경이라고. 영원같이 본 적 없는 것을 선뜻 믿어버린 건 너잖아.

그녀는 그 다음날 다섯 시까지 눈이 감기지 않았다. 형광등이 차갑게 비추는 수술실 앞 의자는 누울 수 있을 만큼 푹신하지 않았다. 피아메타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더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룻밤의 비극에 지쳤다. 그녀는 손가락 사이로 축축한 눈 한쪽을 내놓고 하염없이 어떤 질문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흘 뒤, 안도아인의 수배전단이 붙을 무렵, 이미 그들이 썼던 사무실은 다른 소대의 짐이 들어있는 상자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 사내에게 이베리아어를 배웠던 방도 비워지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갑작스럽게 쏟아진 단어들이, 허상들이 피아메타의 등을 세게 내려쳤고, 덕분에 그녀는 온몸이 젖은 듯 추워져 몸을 떨었다.

그녀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비틀거리며 다시 새로운 밀실을 찾아 헤매었다. 그녀의 '살인'은 성공적이었고 피아메타의 바람대로 그날의 피도, 그날의 눈물도 씻겨 내려갔다. 이제 남은 것은 분노와 의지뿐이었다. 고작 지도의 두칸만큼을 차지하는 좁은 낙원에 그녀는 신앙에 가까운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동작 하나하나에 힘을 주려고 애를 썼다. 앞으로 족히 피아메타가 살아 숨 쉬는 몇십 년은 지속될 발걸음이었다. 피아메타는 나아가려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종이를 발견했다. 앞으로 여러 해 그녀와 동고동락할 부츠 아래 이베리아의 단어가 물에 번지기라도 한 듯 이지러진 작은 쪽지가 붙어있었다. 당신의 말은 나의 경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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