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방주

[명일방주/박사총웨]그래도 되는 관계

솔새둥지 by 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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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타왼에 지배당한 적폐의 로도스 쿠소연성

-이 집 독타는 좀 쓰레기입니다 


[박사총웨] 그래도 되는 관계

by. 솔방울새

늦은 밤을 맞이해 곳곳에 불이 꺼지기 시작한 로도스 아일랜드의 함선. 그곳의 가장 중추에 자리한 박사의 개인 숙소에 맑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집중력에 물오른 밤이면 늘 그렇듯 새벽을 하얗게 불사를 기세로 일하던 박사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으로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다. 오늘은 누구도 부르지 않았고,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문도 잠가 둔 참이었으니 약간의 짜증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박사? 내가 왔네만...음, 벌써 자고 있지는 않을 테고."

의문을 품은 나긋한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일부러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박사가 금방 다가가 문을 열었다.

"총웨?"

오늘은 안 불렀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가, 종사와 시선이 마주치자 도로 들어가 버렸다. 최근 사흘째 총웨는 이 시간마다 박사의 방에 찾아오고 있었다. 물론 박사가 계속 불렀기 때문이다. 종사와 함께 보내는 밤이 자신의 불면증에 특효를 보이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미안, 오늘은 밤을 새우려고 부르지 않은 거였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네. 미리 말을 해둘 걸 그랬나 봐."

"아. 일을 방해한 건가? 나야말로 미안하군.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일이 마무리되면 꼭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 몸이 상할 수 있으니..."

종사가 인사와 함께 몸을 돌리자 박사는 문을 소리 내 두드렸다. 고개가 다시 돌아가며 총웨의 긴 꽁지머리가 경쾌하게 허공을 갈랐다. 

"됐어, 들어와. 아예 생각이 바뀌었으니까. 아깐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피로가 꽤 쌓여 있던 것 같아서 내일 마저 하고 그냥 쉴까 싶어. 커피를 많이 마셔서 잠이 올진 모르겠지만."

뻑뻑한 눈가를 문지른 박사가 손짓하자 총웨가 안도한 기색으로 방 안에 완전히 들어섰다. 곧장 시야를 가득 채운 난장판을 보고 잠시 그의 걸음이 멈추었지만, 박사가 등을 떠밀자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물건들을 사이사이로 피하며 나아갔다. 총웨의 그 성의가 무색하게 박사는 서류들과 파일은 피해도 빈 캔이나 과자봉지 따위는 대충 발로 툭툭 차며 뒤따랐다. 

"박사...되도록 귀공에겐 잔소리하고 싶지 않았지만, 숙소의 청결도가 놀랍도록 악화되어 있어 아무래도 염려가 되는군.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방의 모습이 불과 하루 전이라는 게 믿기질 않는 수준이네."

"내가 일에 집중하면 다른 건 전혀 신경을 못 써서....에이, 여기만 이래. 침실은 괜찮으니까 걱정 마."

그 말대로 침실이 평소와 같은 상태임을 확인하곤 총웨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박사는 그 한숨이 안도의 의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저나 총웨, 그 규칙적인 매일의 일과에 날 넣어주기라도 한 거야?"

"우린 이제 그래도 되는 관계라고 생각했네만..."

"뭐..."

총웨가 붉은 눈을 소처럼 끔벅여 박사는 잠시 대꾸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부정할 것도 없었다.

"...그렇지. 내가 어떻게 종사의 방문을 마다하겠어."

뭐, 몇 번 같이 밤을 보낸 사이니까. 그러지 못할 관계도 아니긴 하다. 잠자리도 잘 맞고, 총웨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매력적인 사람인 데다, 나긋하니 성격도 좋고, 아무튼 박사 입장에서 그는 품에 굴러들어 온 순오리지늄 덩어리였다.

게다가 최근 박사는 염국 종사에게 수면 보조 효능이 있음을 발견한 참이었다.

첫날 밤, 그들은 다른 오퍼레이터들과 다함께 회식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건 총웨와 링, 그리고 박사였다. 테이블에 엎어져 그대로 잠들어 가는 총웨를 박사가 깨워 방으로 가자고 권했다. 염국에서 온 귀한 방문객을 그런 데서 재울 수는 없었으니까. 빈 술병들을 한 번씩 흔들어 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시던 링도 그녀의 오라버니와 박사에게 들어가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박사는 총웨를 가장 가까운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고...아침 일찍 눈을 떠 보니 두 사람은 알몸으로 뒤엉켜 있었다. 박사가 굳이 자신의 문란한 밤 생활을 떠올릴 것도 없이, 명백하게 질펀한 밤을 보낸 꼴이었다. 밤을 그렇게 불사르고도 총웨는 아침 훈련 시간에 칼같이 맞추어 자신을 가다듬었다. 박사의 욕실에서 몸을 씻고, 머리를 정리한 뒤 옷을 입고 훈련실로 향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과 함께였다.

두 번째 밤은 그 말에 의한 만남이었다. 박사의 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총웨는 지난밤의 일을 사과했다. 박사는 개의치 않았기에 그저 그가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새벽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너무 늦어서, 박사는 그에게 자고 가라고 권했다. 그렇게 그들은 말 그대로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에 뒤척일 때마다 따뜻한 체온이 조금씩 스칠 뿐인 평온한 밤이었다.

셋째 날 밤, 박사는 지난 이틀간 수면의 질이 전례없이 좋았음을 인정했다. 그래서 또다시 총웨를 방으로 초대했다. 이날은 아침에 깨어보니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박사가 장난스레 총웨의 콧등에 입 맞추자,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비좁은 박사의 품에 파고들었다. 분명 이런 관계는 처음인데...귀공과 함께 있으면 다른 걱정들이 눈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네. 그런 다디단 말과 함께. 

박사는 그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매일 밤 다른 오퍼레이터와 손만 잡고도 자보고, 포근하게 안고 자보기도 하고, 끈적하게 뒹굴다 자보기도 했다. 그 수많은 밤 속에서도 박사는 제대로 수면을 취해 본 역사를 몇 꼽지 못했다. 이젠 슬슬 자포자기하고 어차피 못 잘 거, 끝내주게 즐기는 밤을 보내자는 마인드를 품던 참이었다. 

그런데 웬걸, 우연한 계기를 시작으로 총웨와 함께 맞이한 아침들은 한결같이 개운했다. 먼저 잠든 오퍼레이터의 품에 갇혀 사로잡힌 올빼미처럼 눈을 멀뚱거릴 일도 없었고, 애매한 새벽에 혼자 깨어 불쾌감을 곱씹는 흔할 일조차 없었다. 피로에 절어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흘겨보며 욕지기를 삼킬 필요도 없었다.

전례 없는 일이라 여기까지만 해도 박사로서는 충분히 신기했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거듭해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총웨가 지속적으로 만남을 이어간다면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이후에 다른 오퍼레이터를 부르고 싶어도 그러질 못할 거란 점인데.'

안정된 수면 패턴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박사의 숙면은 그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때만으로도 충분했다. 박사는 이미 매일 밤 다른 자극을 찾는 즐거움에 반쯤 중독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시간이 총웨의 일과에 포함되는 건 문제를 야기하기 쉬웠다. 

'그럴 땐 총웨에게 미리 말해두면 되려나? 오늘은 다른 사람과 잘 테니 오지 말라고..? 거짓말을 하긴 싫지만, 솔직히 말한다고 쳐도 괜히 좀 미안한 기분이 드는데. 쓰레기 같은 놈이 된 것 같고.'

사실 객관적으로 쓰레기가 맞긴 했다. 박사의 말이라면 웬만해선 긍정해 주는 아미야도 그의 속내를 직접 들었다면 귀를 의심하며 말을 정정해 주길 기다렸을 것이다. 차라리 아미야면 다행이지, 무에나 같은 오퍼레이터가 들었다면 전신에서 머리끝까지 경멸을 끌어올려 눈빛과 입으로 쏘아냈을 터였다. 켈시는...그래, 말을 말자.

'됐다. 이런 건 고민해봤자 답이 없어.'

총웨의 셋째 여동생. 링 가라사대, 묻고 물어도 답이 없는 물음엔 끝이 없으니 그저 자신으로 있으라 하였다. 속세의 근심과 걱정 따위는 술로 씻어내라고도 했다. 마침 그녀의 오라버니인 총웨 역시도 술을 즐기니 이 상황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박사는 염국 술을 꺼내 들어 주의를 환기했다. 술이 출렁이며 흔들리는 소리에 총웨가 눈꼬리를 나붓이 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박사의 얼룩진 속은 짐작지 못하고 그저 순수한 기쁨만을 머금은 채였다. 

"총웨, 안주는 염국식으로 볶은 땅콩밖에 없지만 괜찮지?"

"맛있는 술과 각별한 인연이 함께 있으니, 부족함이 없이 충만한 밤일세."

총웨와 함께 보낸 네 번째 밤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다 자연스레 체온을 맞대었다. 서로를 충족감으로 가득 채운 뒤에야 잠든 두 사람은 오늘도 총웨의 규칙적인 하루일정에 따라 기상했다. 박사는 회의에 참여하고, 총웨는 아침 훈련을 위해 각자 흩어진 뒤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그러나 오전 업무를 마치고 식당에 들어선 뒤로 박사는 슬슬 껄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이저를 빼고 식사를 이어가던 박사가 입에 있던 새우를 씹어 삼키곤 포크로 주변을 가리켰다.

"아미야, 나만 느끼는 건진 모르겠는데...오늘 함선 분위기가 은근히 어수선하지 않아?"

"저도 느꼈어요. 아까부터 다들 묘하게 박사님을 보고 있네요."

"아까는 크루스가 의미 모를 응원을 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 갔어."

"무슨...소문이라도 퍼진 걸까요?"

아미야가 긴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자 박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소곤거리다 눈이 마주친 오퍼레이터들이 고개를 돌려 피하거나,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웃어 보이고 있었다. 아침부터 정오에 이르기까지 내내 이런 분위기였던 걸까? 오전에는 회의에 들어갔다 온 참이라 알 수 없었다.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어? 어쩐지 내가 직접 물어보면 속 시원한 답을 못 들을 것 같거든."

"네, 어렵지 않죠."

당차게 대답하는 아미야에게 부탁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박사의 옆자리에 식판 하나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놓였다.

"번거롭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내가 말해줄 수 있거든. 근데 박사,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앗. 어서 오세요! 니엔 씨는 무슨 일인지 알고 계신가요?"

니엔이 아미야를 향해 짓궂게 혀를 삐죽 내밀어 보이곤 박사를 향해 날벼락을 떨어뜨렸다.

"너, 우리 맏오빠와 교제한다며?"

"컥-."

주스를 마시다 사레들린 박사가 기침을 시작하자 아미야가 놀란 토끼 눈으로 돌아보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몇 박자를 놓친 뒤에야 박사의 등을 두드려 주며 그녀가 덩달아 물었다. 

"총웨 종사님 말인가요? 박사님, 그게 정말이에요?"

"뭐야, 박사. 아미야도 몰랐던 거야? 이거 숨기고 있던 거라면 꽤 철저했는데?"

"콜록, 아니. 아니 잠시만, 지금 이거 좀 조심스럽게 답해야 할 것 같거든? 일단 이것부터 알려줘, 니엔. 어디서 들은 소리야?"

니엔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빠."

"...총웨? 본인이 그렇게 말했어?"

"그럼 둘째 오빠겠어? 이야, 그쪽이 말해 준 거였으면 그건 그거대로 난리였겠는데. 아무튼 진짜냐고."

분명 우리 오퍼레이터들 사이에 앉아있는데, 왜 리유니온 병력에 둘러싸인 것처럼 등골이 서늘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박사는 후드에 덮인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잘 대답하지 않으면 심히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만약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돼?"

"박사 네가 여기서 지내는 몇몇 사람들이랑 돌아가며 어울리는 건 알고 있어. 나도 주변이랑 어울리며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근데 그게 내가 상관할 일은 전혀 아니었잖아. 본인들이 합의하에 시간을 보낸다는데 그럴 필요가 하등 없지."

안 그래? 니엔의 물음에 박사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맏오빠가 그중 일부로 여겨진다면 그때부턴 얘기가 많이 달라져. 당연하잖아. 말할 것도 없는 일이야. 무슨 얘긴지 알겠지? 심지어 그는 이런 일에 있어서 고지식한 면이 있다고. 우리 중 누구보다 인간들과 깊게 어울리면서도 사실은 가장 섬세한 축이란 말이야."

"...이해했어, 만약 사실이라고 하면?"

"방금 한 말을 굳이 또 할 필욘 없겠지? 덧붙일 건 하나야. 오빠에게 잘해줘."

아니라고 정정하면 1400도의 분노를 온몸으로 맞이하게 될 거라는 건 예감만이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니엔의 앞에서 섣불리 긍정하면 최종승인을 하게 되는 셈이다. 박사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알겠어, 다 떠나서 일단...총웨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눠야 할 것 같네. 솔직히 이렇게 소문이 퍼지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뭐, 오빠도 이렇게 일파만파 퍼질 거라곤 생각 못 했던 눈치더라. 훈련소서 나올 때 나랑 짧게 얘기 좀 나눈다는 게, 주변에 귀가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너무 잘 들렸나 봐."

니엔이 아미야의 길게 뻗은 귀를 눈짓했다. 아미야는 내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빠르게 오가는 대화를 따라가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정시켜 주고 싶어도 박사 본인도 난감한 마당이라 어떻게 말하고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뭐랬더라? '로도스의 박사와 진지한 마음으로 만나고 있다.'고. 굳이 숨길 사실은 아니란 식으로 말했던 건데, 소문이 무섭게 퍼지더라고. 근데 솔직히 이건 박사의 평소 행실 탓이 크다고 보거든?"

"부정은 안 할게. 어쨌든 총웨에게 내 방...음, 아니다. 훈련실로 좀 와달라고 말을 전해 줄 수 있을까?"

"어려울 것 없지."

직접 가거나 방으로 부르는 건 소문에 부채질하는 짓이다. 지금이라면 다들 식사 중이거나, 식후 휴식 중이거나, 각자 업무를 보는 중이라 훈련실은 텅 비어있을 시간이다. 박사는 비울 만큼 비운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미안해, 아미야. 니엔이랑 같이 마저 먹을래? 나는 먼저 가 있을게."

"네 박사님. 어느 쪽이든 부디 잘 해결하고 돌아오세요."

니엔이 빨리 전해주었는지 총웨는 금방 훈련실로 찾아왔다. 먼저 훈련실로 오는 길에서도 내내 주변의 시선을 받고, 심지어 때로 그럼 이제 나는 다시 안 불러주겠네, 즐거웠는데 아쉽게 됐어. 같은 말을 듣기까지 했던 박사는 다시 바이저로 얼굴을 철저히 가린 채였다.

"...박사."

"음...총웨, 생각보다 더 빨리 왔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까 박사가 고민하는 사이 총웨가 먼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모두 나의 실책이네. 형제들과, 친분을 쌓은 이들에게만 조용히 밝힌다는 게 이렇게 퍼져나갈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어...분명 귀공에게도 그 여파가 미쳤을 테지."

"...잠깐만, 종사. 난 그건 다 괜찮아.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를 같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거악처럼 단단한 총웨의 넓은 어깨가 아래로 무겁게 늘어진 것을 보니 박사는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분명 말해야 할 문제였다.

"그, 우리가...사귀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던가?"

특정한 규칙에 따라 일정하게 토납되던 무인의 호흡이 잠시 멈추었다. 박사는 열심히 말을 골랐지만 결국 나오는 말은 본인이 생각해도 시원찮았다.

"혹시 내 태도가 오해를 야기했다면 정말 미안해. 음,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말한 적 있지? 적어도 그 이후로는 누구와도 연애를 한 적이 없거든. 그래서 나도 잘 모르고 기준이 이상할 수 있어. 아마 내 잘못이 맞을거야...염국과의 문화 차이도 있을 수 있고. 그래서 확인차 묻는 거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고....총웨?"

"...듣고 있네."

"미안해."

난처함, 민망함, 부끄러움. 온갖 감정이 뒤섞여 총웨의 얼굴에 먹물처럼 번져갔다. 평범한 인간은 상상도 하지 못할 긴 세월을 거친 존재가, 취기의 힘을 빌려 그만의 아픔이 담긴 오래전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조차 보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박사는 일단 다 덮어놓고 자신이 사과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유감스럽게도 총웨의 생각은 달랐다. 멍하니 벌어졌던 그의 입이 다물리며 많은 감정을 삼켰다. 감긴 눈꺼풀을 따라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박사는 어쩐지 속이 쥐어짜이고 목이 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함께 몇 번이나 밤을 보내고 깊은 관계를 쌓았으니, 우리가 당연하게 교제하는 사이라 생각했네. 나 역시 이런 관계는 처음이었던 탓도 있고...귀공의 말대로 문화 차이도 있을 수 있겠군. 염국 외의 국가들은 성적으로 조금 더 개방적인 경향이 있다 들은 바 있네. 지식으론 알았지만 내가 당사자가 되니 미처 감안하지 못했던 모양이군...내가 경솔했네."

"아니야, 정말로 괜찮으니까..."

"나의 실수이니, 박사에게 번거로운 일이 없도록 책임지고 확실히 바로잡도록 하겠네."

"아냐, 그럴 것까진 없어. 총웨. 잠시만...!"

박사가 뻗은 손끝에 몸을 돌린 총웨의 검은 창파오 옷자락 끄트머리가 스쳤다. 펄럭이는 옷자락과 반대로 기다란 용의 꼬리는 맥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걱정 말도록."

묵직한 고독이 그의 목소리에 매달려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유 모를 추락감에 박사는 급히 종사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순식간에 복도를 돌아 사라져 버린 뒤였다. 

박사는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어거지로 붙들고 있던 서류를 탁 소리 나게 책상에 내려놓으며 의자 등받이에 늘어지듯 기댔다. 괜스레 심란하고 초조한 감정이 손끝으로 애꿎은 펜을 빙글빙글 돌려댔다.

소문을 바로잡겠다며 떠나던 총웨의 표정이 뇌리에선 영 떠나질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늘 공중을 유영하던 그의 꼬리가 바닥에 질질 끌리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함께 침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면 박사의 몸에 가볍게 휘감겨 살랑거리곤 하던 꼬리다. 처음 박사가 당황했을 때 그는 수줍은 듯 웃으며 팔짱이나 어깨동무 같은 거라고 생각하라고 했었다. 이후에 잠자리에서 총웨의 꼬리가 그를 꽤 강하게 죄였을 땐, 이것도 팔짱이냐는 물음에 얼굴을 홧홧하게 붉혔더랬다. "이건...포옹 같은 거로 생각해 주겠나?" 박사는 그 붉어진 뺨을 쓰다듬다 그대로 감싸고 처음 입을 맞추었다. 총웨에게는 첫 입맞춤이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다. 

놀란 듯 눈만 크게 떴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받아들였을 때 그의 마음은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졌던 것일까. 

웬만큼 거친 운동에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던 종사가 숨을 몰아쉬고,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의 소리가 박사에게까지 들릴 정도였을 때는. 어떤 감정이 자리 잡은 뒤였던 걸까. 

"우린 이제 그래도 되는 관계라고 생각했네만..."

박사가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방에 찾아왔던 총웨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툭, 또르르-

빙글빙글 돌아가던 펜이 박사의 손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총웨와 함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던 아침 이후로, 박사는 다른 오퍼레이터를 찾지 않았다. 상황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기 전까지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내가 뒤늦게 질려서 다른 사람을 찾게 되면 어떻게 해? 하지만 미리 떠올려봤자 당장은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지금은 전혀 그럴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에. 이전에는 겪어본 적 없는 변화였다.

총웨의 곁에 누워있다보면 잠들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희미해졌다. 철벽같은 거악이 몸을 둘러싸 지켜주는 것 같은 안정감이 들었고, 묵직하고 힘 있는 박동 소리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며 박사의 초조함마저 거두어 갔다. 

수면이 필요 없던 본신을 스스로 포기하고 평범한 인간의 몸을 입은 존재가 곁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곱씹다 보면, 그 사실의 어느 지점이 안도감을 주는지도 모르는 채 박사는 까무룩 수마에 빠져들곤 했다.

그 전도 마찬가지다.

술잔이나 찻잔을 기울이며 웃던 총웨의 웃음은 너무도 맑았다. 링에게 전해 들은 그의 신상을 생각하면 신기한 모습이었다. 백 년 동안 옥문을 지킨 존재, 국경의 전란, 도적의 환란, 수적 토벌, 끊임없이 내려진 조정의 명령.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깊게 엮여버린 군사 기밀과 정무까지. 

박사는 로도스의 수뇌부에 앉은 자신의 입장과 그의 위치를 비교해 봤다. 염국 상부의 사정이 어땠는지는 잘 몰라도, 능히 그 고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총웨는 맑고 유장하였다. 경애라는 낯선 단어가 우스울 정도로 쉽게 떠올랐지만..

'경애는 아니야. 그런 것보단 좀 더 단순한....'

그 맑은 웃음에 취한 내가 뭘 했더라.

수많은 연구와 전술 작전을 뽑아내면서도 팽팽 돌아가던 박사의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의 잔을 빼앗아 들고, 총웨의 입이 닿았던 곳에 입을 대어 보란 듯 대신 비웠었다. 그가 술과 차를 넘기며 하나둘 꺼내놓던 과거의 인연들까지 제가 모두 마셔버릴 것처럼. 그래도 되는 관계라는 듯이.

그때 내가 어떤 감정이었더라.

"......."

총웨는 지금 소문을 정정하러 다니고 있는 건가?

박사는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급한 걸음이 인연을 붙잡으러 문을 박차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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