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 7
실버애쉬x팬텀
전편
몇 주간의 생활에서 실버애쉬가 팬텀에 대해 내린 관찰 결과는 생각보다도 간소했다. 이 청년은 절대로 먼저 발언하지 않으면서 또 절대로 먼저 몸을 보이지 않는다. 실버애쉬의 명령으로 팬텀의 방과 팬텀의 식사와 팬텀이 사용할 일상용품이 구비되었으나 식사는 언제나 버려지는 듯 했으며 일상용품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방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하지만 실버애쉬는 팬텀이 다소 불규칙한 식사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자신이 챙겨온 물품만을 고집해서 사용한다는 것, 그나마 검은 고양이인 그녀가 계속 돌아다니면서 팬텀이 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어느정도 보장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미스 크리스틴이 있는 곳에는 팬텀이 있다. 그녀의 영역은 팬텀의 영역이며, 그녀가 있는 곳에는 팬텀도 있다. 미스 크리스틴은 신출귀몰하나 그래도 팬텀 만큼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 사람… 살아있는거 맞습니까?”
불안해 하는 부하들이 조금씩 실버애쉬에게 질문을 던져온다. 하지만 실버애쉬는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일축해 버렸다. 이미 초대권은 받았고 의상도 맞춰줬으며 무대가 다 준비되었는데 무르기에는 너무 손해가 크다. 무엇보다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누가 위험을 무릎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위헙이라는 것도 실버애쉬에게 있어서는 통제할 수 있는 범위의 위험이었다.
“문제 없다. 앞으로 몇 주는 더 묵어야 할텐데 서로 잘 지내길 바라지.”
방긋 웃는 실버애쉬의 말에 아닌듯 하면서도 부하의 안색이 나빠진다. 이들은 명백하게 팬텀을 겁내고 있다. 그리고 실버애쉬는 그런 오해를 풀어주지 않았다. 공포는 사람을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고 이런 거리감은 팬텀의 욕망을 휘두르는 성향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된다. 실버애쉬는 자신의 부하의 욕망에 맞춰주는 팬텀을 상상하기도 싫었지만 팬텀이라면 기꺼이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무대에 올라 그의 욕망을 맞춰줄 것이 틀림없다는 걸 알았다. 유령같이 떠도는 그의 행색은 오히려 실버애쉬에게 큰 안도감을 준다.
호위를 하던 부하의 터벅터벅 힘이 빠진 발걸음이 복도를 지나고 실버애쉬는 복도에 혼자남았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음을 확인 한 뒤 자신이 묵는 방 앞에서 습관적으로 문에 타인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암살자들은 찾아와서 검을 휘두르기만 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독으로 때로는 함정으로 사람의 목숨을 끊기도 하니까. 팬텀이 실버애쉬의 암살을 맡아주고 이렇게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에는 사실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팬텀의 호위를 무른 상황에서는 더 그렇다.
발소리없는 인기척이 들린다.
실버애쉬는 무심코 자신의 검을 꽉 쥐었다.
검날이 서늘하게 공기를 가른다. 맑은 파공음이 퍼지기도 전에 인기척은 사라졌다. 실버애쉬는 검을 쥐고 한참 주변을 살피다가 등 뒤를 더듬어 문고리를 쥐려고 했다.
“잠깐.”
그리고 곧장 장신의 필라인 청년과 부딪혀 넘어졌다.
실버애쉬는 눈앞에 있는 필라인 청년이 하는 행동이 자신을 놀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진심인지 한참을 고민해야했다. 실버애쉬는 짧게 한숨을 내뱉고 눈 앞에 같이 넘어졌던 팬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어지간히 부끄러운 상황에서도 부드러운 카페트는 이 모든 소리를 다 흡수하고 침묵한다. 두 사람의 사이에서도 침묵이 공간을 꽉 매운다.
“…”
실버애쉬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리숙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더니 너무 전문적인 행동으로 사람을 만나러 온게 아닌가? 아마 넘어진 것도 이 배우에게 있어서는 의도된 연기일지도 모른다. 이전과는 달리 자신이 어리숙한 사람이 된 것같은 감각에 실버애쉬 귀가 약간 달아올랐다. 작은 헛기침. 그리고 일어서서 옷가지를 정리하는 팬텀을 바라보다가 실버애쉬는 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검은 털뭉치를 보았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덮어두고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이게 뭐지?”
“재료다.”
“재료?”
재료라니!! 아무리 보아도 미스 크리스틴을 빗질하고 나온 털 덩어리 그 자체였다. 아마 털의 양이 조금만 많았어도 실버애쉬는 팬텀이 미스 크리스틴의 자녀를 가지고 왔었을거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실버애쉬는 서둘러서 질문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찬찬히 팬텀의 말을 기다렸다. 정확히 무엇의 재료인지. 무엇을 하기 위함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하지만 팬텀은 묵묵부답으로 털을 만지작 거리며 오히려 실버애쉬의 말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타인이 바라보기에 팬텀은 스스로가 정말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성 싶었다. 실버애쉬는 더 이상 문 앞에서 이 이상한 상황을 이어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손으로 문을 잡아 열고 털뭉치를 조물거리는 팬텀을 강제로 방안에 밀어넣었다.
“방 앞까지 왔기에 개인적인 방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나보군.”
“… 네가 고요히 잠드는 침묵의 시간에 갑작스러운 종소리가 되었다면 미안하다.”
“됐다.”
실버애쉬는 미간을 살짝 짚고 잠옷 차림의 팬텀을 훝어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 그 검은 고양이에게 꼬리로 뺨을 맞은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참이다. 이제와서 달라질 것도 없고 더 시험할 것도 없다. 다행히도 그 털에도 유용한 기운이 있는건지 아니면 방금전의 상황이 욕망이라는 감정을 내밀기에는 너무나도 알맞지 않았던 건지, 실버애쉬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설명을 듣지.”
다소 고압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팬텀은 이전처럼 그대로 순응하는 대신 그리고 다짜고짜 실버애쉬에게 미스 크리스틴의 털뭉치를 쥐어주고 같이 손을 곰질거렸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손가락 사이로 사락 거리는 털결은 분명 윤기가 있고 부드러웠으며 솔직히 계속 만지고 싶은 촉감을 선사했다. 보드라운 털결이 손바닥을 간질이고 손등위로 얇고 가느다란 하지만 분명 거친 손속을 꺼리낌없이 해왔던 차가운 손이 움찔거린다. 갑자기 무슨 행동을 하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돌발 상황에,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접촉이었음에도 실버애쉬는 전혀 친근감이나 애정어린 기분을 맛보지 못했다. 당황함과 함께 손가락 사이로 검은 미스 크리스틴의 털이 살짝 흘러내리고 결국 두 사람의 손가락 사이에서 털은 작게 뭉쳐 어그러진 공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의중도 알 수 없는 행동이지만 실버애쉬는 일단 묵묵하게 팬텀이 자신의 손을 가지고 하는 행동을 묵과했다.
“완성이다.”
무엇을? 실버애쉬는 다시 답하고 싶었지만 팬텀은 약간 어그러진 털공을 실버애쉬의 손바닥에 남겨두고 손을 물렀다. 차가운 손길이 사라지자 손바닥에 남은 감촉이 미지근하게 변한다. 실버애쉬는 손가락을 펼치지 않고 팬텀을 바라보았다. 팬텀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손으로 털뭉치를 가르킨다. 통제를 벗어나 예측하지 못하는 행동을 보인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당혹감이 가라앉자, 실버애쉬는 속으로 짧게 탄식하고 팬텀을 노려보았다가 다시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타인의 욕망을 알고 이뤄줄 수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타인이 바라는 일과 완전히 반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0점짜리 시험지는 100점짜리 시험지와 같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오래전 유학생활에서 들었던 실없는 농담을 뇌속에 끼워넣으며, 정말 말 그대로 바라지 않는 방식으로만 행동하는 팬텀을 보고 실버애쉬는 이 융통성 없는 청년을 야단을 쳐야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인간관계를 가르쳐야 하는지 짧은 시간동안 아주 깊게 고민했다.
“무엇을, 왜, 어째서 이렇게 만들었는지 목소리로 똑바로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미스 크리스틴의 털을, 네가 바라지 않을 법한 방식으로, 취미로 만들고 싶었다.”
평상시의 장황한 말과 달리 똑부러지는 말에 실버애쉬는 무심코 손아귀를 꽉 쥐었다가 털공을 반쯤 찌그려트렸다. 간질간질한 털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아까전에 느낀 한심함이 올라오려다가 가라앉더니 이제는 실버애쉬도 본인의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당황이라고 하기에는 어느정도 취미와 관련된 일이라 예측한 일이었고 화가 나기에는 아까전과 비교할 일이 못되었다. 그렇다고 짜증난다고 하기에는 그래도 팬텀이 나름 본인의 첫 완성품을 자신에게 준게 아닌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맛보면서 실버애쉬는 천천히 손을 펼치고 좀 더 찌그러진 털 공을 관찰하다가 작게 결심하고 다시 팬텀에게 쥐어주었다. 의아해 하는 팬텀이 실버애쉬를 바라본다.
“내일 내가 필요한 용품을 전부 구비해 주겠다. 제대로 완성해서 다시 주길 바라지.”
실버애쉬는 어중간한 선물을 받고 넘어갈 위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를 위하지 말라는 말이 내가 바라지 않는 행동을 골라서 하라는 뜻은 아니다.”
팬텀은 미스 크리스틴의 털공과 함께 다시금 아까처럼 복도로 내쫓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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