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

초청 6

실버애쉬x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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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검은 고양이는 계속해서 실버애쉬를 따라다녔다. 그녀의 발끝에서 실버애쉬는 되도않는 경계심을 읽어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그녀가 발치에서 머물도록 하는 걸 허락했다. 노시스의 흰 옷에 털자국을 남기는 것을 보고 몇 번이나 내쫓김 당했지만 그녀는 기이할 정도로 다시 실버애쉬의 곁에 돌아왔다. 마치 지금의 주인은 팬텀이 아니라 실버애쉬라도 되는 것 마냥.

“우유는 싫나?”

따뜻하게 데운 우유가 그대로 식어가는 걸 보고 실버애쉬는 미스 크리스틴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새초롬하게 발을 핥더니 다시금 실버애쉬의 근처에 다가와 물컹한 몸을 기대고 앉을 뿐 아무런 울음 소리도 내주지 않았다.

“호불호를 이야기 해줘야 내가 입맛에 맞는 걸 준비해 올 수 있다.”

그녀는 여전히 발치에 앉아서 꼬리로 바닥을 두드릴 뿐 별다른 울음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 레이디는 실버애쉬의 옆에 있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분명 그런 것 같다. 실버애쉬는 얼마전 자신의 긴 꼬리에 그녀가 발톱을 세워 박았던 사태를 떠올리고 약간의 아릿함과 함께 왜 그녀가 자꾸 자신의 옆에 머무는지 작게 추측했다. 이건 팬텀과 관련된 일이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경계하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 경계가 자신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실버애쉬는 그녀의 뜻모를 의무감 때문에 자신의 곁에 머문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도 주인된 자의 의무감으로 바지 밑단이 털 투성이가 되어가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둘은 팬텀이라는 공통사 빼고는 서로를 딱히 마음에 두지 않는다. 다소 냉랭한 듯한 공기가 실버애쉬의 사무실에 맴돌았다.

똑똑

“들어오지.”

아무런 기척이 없던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미스 크리스틴의 귀가 종긋하게 솟았다.

“팬텀.”

문이 열리는 작은 틈 사이로 우아하고 날쌔게 들어온 팬텀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실버애쉬의 발치를 보고 천천히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실버애쉬는 유유히 관찰했다. 그녀는 꼬리를 들어올려 가볍게 살랑이더니 아주 반갑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잽싸게 실버애쉬의 발치에서 벗어나 팬텀의 손으로 그리고 어깨로 올라탔다. 꼬리로 팬텀의 뺨을 살살 부비는 건 덤이다.

“그녀가 널 무척이나 좋아하는 군.”

팬텀은 그녀의 이마와 턱을 긁어주다가 뒤늦게 실버애쉬를 바라보고 약간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전혀. 실버애쉬는 속으로 한숨과 함께 대답을 삼켰다. 미스 크리스틴이 살갑게 구는 건 오로지 팬텀의 앞에서 뿐이다. 오히려 이렇게 팬텀을 좋아하면서도 팬텀이 머무는 내내 실버애쉬의 옆에서 알랑거리는게 더 말이 안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옆에 있다면 분명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 그럴 것이라 실버애쉬는 짐작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취미는 정해왔나?”

즐겁게 고양이와 인사하던 팬텀이 쭈뼛쭈뼛 평소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고개를 살살 저었다. 실버애쉬는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고.

“…”

그다음에는 갑자기 돌진한 미스 크리스틴에게 두 번째로 풍성한 꼬리 털 위로 발톱이 찍혔다. 이번에 실버애쉬는 그 어떤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사무실에서는 답지 않는 소독약의 향이 풍긴다. 팬텀은 긴 실버애쉬의 꼬리를 잡고 천천히 그 위에 난 핏자국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다행히 털이 긴 탓에 깊게 상처나지는 않았으나 소독약에 푹 적신 탓에 약간은 볼품없을 정도로 털의 윤기와 숨이 죽어있었다.

“그… 내가 사과하겠다. 그녀는 다른 의도가 있었던게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한다. 너의 긴 꼬리가 풍성하고 아름다운 탓에 마치 미녀에게 끌리는 청년처럼 그녀가 달려들 수 밖에 없었을 거라고-”

“그건 아니다.”

구구절절 길어지는 변명에 실버애쉬는 단칼에 팬텀의 사과를 잘라냈다. 그리고 다소 비쭉거리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으며 팬텀에게 이런 일이 두 번째였다고 말을 붙였다.

“변명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녀는 훈련 할 수 없는 건가?”

실버애쉬는 그녀를 위해 다른 곳에 배치한 텐진을 떠올리며 다소 날카롭게 질문했다. 팬텀은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모른척 하고 있는 미스 크리스틴을 보았다가. 말 없이 실버애쉬의 꼬리를 다시금 빗어내었다. 변명하지 않겠다는 말 그대로 묵묵하게 모든 언행을 참아내겠다는 의사가 느껴진다.

“솔직히 레이디가 굉장히 똑똑하다는 건 인정하지. 다소 멍청한 거래처…. 그래, 그런 거래처의 인물보다도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실버애쉬는 가감없이 솔직한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싫어하면서도 내 옆에 자꾸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군. 팬텀. 네가 말하는 마음에 든다는 것은 곁을 내준다는 의미라는 것.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장소에 얽매여 있는게 무척이나 싫은데도 굳이 내 옆을 고집하다가 이런 심술을 부리는 것으로 보인다.”

팬텀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고 어쩔줄 모른다. 실버애쉬는 팬텀의 이런 융통성 없는 모습을 보면서 짜증이 나다가도 은근히 그가 이렇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한숨 소리에 팬텀이 움찔한다.

“네 탓이 아니다. 내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 때문이지.”

실버애쉬는 팬텀의 곁에서 자꾸 그를 욕망하고 다루고 싶어하는 자신의 추악한 일면을 바라보는 감각에 기분이 불쾌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불쾌감은 결국 인내심을 거두고 욕망을 따르라는 합당한 이유가 되어버리곤 만다. 그래선 안된다. 이성이 다시금 옥망을 억누르고, 실버애쉬는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려는 감정들을 식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갑자기 뺨에 따뜻하고 다소 촉촉한 물컹함이 닿아온다. 실버애쉬는 고개를 들어 눈을 떴다. 그리고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누와 발바닥으로 뺨을 꾹꾹 누르고 있는 미스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드는지 꼬리는 한 껏 내려갔고 눈동자는 가늘어져 불만이 가득하다.

“미스 크리스틴.”

팬텀이 그녀를 부르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실버애쉬는 그녀가 노려보는 만큼 똑같이 노려보았다. 검은 꼬리가 실버애쉬의 뺨에 닿자, 작게 소용돌이치던 감정이 천천히 앙금처럼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

이전처럼 이 모든 사태와 감정이 참 부질없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면서 실버애쉬는 작게 헛웃음 지었다. 이 부질없음은 자신의 진짜 감정이 아니다. 그래. 이 그녀가 자신에게 선사해 주는 감정이지.

“이건 정말…”

말이 안되는 일이다. 아츠를 다루는 걸까? 실버애쉬는 이 모든 것이 우연에 일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으면서도 그녀가 체온을 그리고 안정감과 작은 공허함을 실버애쉬의 품에 넣어두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떤 작용으로 또 어떤 법칙으로 이러한 일이 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팬텀의 옆에서 극단의 광기를 막아주는게 틀림없다.

하지만 실버애쉬는 스스로도 극단의 광기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다. 분명 그렇고 그 사실은 이렇게 몇 주 팬텀과 지내면서도 둘 사이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 증명해주고 있다.

“그녀에게 전해주겠나? 나는 그녀가 돌볼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미스 크리스틴에게서 시선을 땐 실버애쉬가 팬텀을 바라보고 입을 연다. 팬텀은 머뭇거리다가 실버애쉬의 말을 그대로 그녀에게 읊었다.

찰싹

찰싹찰싹

고의적인 꼬리짓. 꼬리 두 짝에 하염없이 뺨을 맞던 실버애쉬는 갑작스럽게 그녀가 떠나가자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정말로 나를 돕기 위해 이 사무실에 그렇게 묶여있던건가? 말이 안되는 일이군. 실버애쉬는 스스로의 한심함을 떠올리며 양 손으로 눈을 가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지 않는 방법은 자신의 눈을 가리는 방법도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떠올리며 그대로 쇼파에 몸을 묻고 맨손으로 세수를 반복한다. 실버애쉬의 귀족적이지 않은 모습을 누구보다도 많이 본 사람은 분명 그녀일게 분명하다.

“팬텀.”

“무슨일이지?”

실버애쉬는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책상 한 군데를 가르켰다.

“그녀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선물이라고 하지. 네 사복과 같은 디자인이다.”

실버애쉬는 원래부터 줄 생각이었으나 노련하게도 그녀가 방금 전 까지 해 주던 일의 댓가로 리본을 팬텀에게 제공했다. 이 선물은 실버애쉬가 그녀에게 주는 형태여서는 안된다. 작은 자존심이 실버애쉬의 행동을 제한한다. 이 정도의 유치함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은가? 실버애쉬는 그녀의 도움이 없어도 팬텀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네 주변에 있던 사람과는 다르다, 팬텀. 그러니 부디 그녀가 한 곳에 머무는, 하기 싫은 행동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걸 다시 주지시켰으면 한다.”

의아해 하던 팬텀이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받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나를 돌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건, 변명이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겠군.”

실버애쉬는 팬텀이 동여맨 자신의 꼬리를 보고 작게 헛웃었다.

“그러니 너도 나에게 맞추려는 태도는 멈췄으면 한다. 정말로 취미를 찾아오고, 어리숙한 모습은 그만둬라.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내가 바라는 모습인 건 맞지만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스스로의 욕망에 한심해 질 뿐이니까.”

팬텀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당황하거나 어리숙하고 어쩔줄 몰라 하지는 않는다. 실버애쉬는 자신의 한심함을 뼈져리게 느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팬텀에게 손짓했다.

“네가 나를 위할수록 내가 한심해진다. 그걸 명심하도록.”

이전과 달리 성의 없는 손짓. 내쫓는 거나 다름없는 행동에도 팬텀은 바닥만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사무실의 밖으로 나섰다. 실버애쉬는 끝까지 팬텀을 바라보지 않았다. 실버애쉬는 팬텀의 주변 사람과 다르다. 팬텀은 다시금 실버애쉬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정말로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한다.

“메우웅.”

소리없는 발걸음으로 자신에게 배정된 방을 찾아 헤매던 팬텀은 방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미스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그가 바라지 않는 일 이라는 건 아주 단순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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