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초청5

실버애쉬x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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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실버애쉬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올라간다. 옆에 있는 사람도 동조하여 기뻐할 만큼의 감정을 드러내 보임에 팬텀도 덩달아 지금의 상황의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같이 있어도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만.”

“미안하지만, 파티 이후에는 해야할 일이 있다.”

“암살인가?”

“아니.”

실버애쉬는 그 이상으로 묻지 않았다. 그리고 팬텀의 거절에 불쾌해 하지도 않았다. 약간의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마저도 가볍게 떨쳐내고는 그대로 사람을 불러 달콤하고 폭신한 다과와 향기로운 홍차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실버애쉬는 여러모로 사람을 붙잡는데 능한 사람이다. 그는 팬텀을 자신이 붙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자만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실버애쉬의 앞에 팬텀이 찾아왔을 뿐더러, 파티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뭐든 말하도록.”

“없다.”

단호한 말에 실버애쉬는 다시금 웃음을 터트린다. 실버애쉬는 팬텀이라는 사람을 관찰하는게 굉장히 즐거웠다. 예술을 감상하는 입장에서도 또 그저 사람을 관찰하는 성향에 있어서도 그랬다. 원하는 게 있어야 좀 더 자신의 옆에 잡을 수 있을텐데. 실버애쉬의 고민이 부질없게도 팬텀은 바라는 것도 원하는 것도 없었다. 정확히는 스스로도 무엇을 욕구하는지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욕망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준다. 무얼 바라고 무얼 원하는지에 따라서 사람은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이 남자는…. 실버애쉬는 팬텀의 욕구가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로 거세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섬뜩하다.

그는 본연의 성질이라고 할 법한 타고난 성향이 거의 없었다.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연기하고 마치 텅 비어서 뭐든 적고 그려낼 수 있는 하얀 백지 같다. 실버애쉬는 곧장 흥미로움을 거둬냈다. 그리고 홍차를 입에 머금으면서 예리하게 세운 감각으로 눈을 굴려 팬텀을 깊게 바라보았다.

누구든 얼룩 하나 없는 백지를 본다면 그 종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할 것이다. 깨끗한 흰 눈을 보면 발자국을 찍고 싶어 지는 게 당연한 것처럼.

“다과는 입에 맞는게 없나?”

실버애쉬의 말에 팬텀이 홍차를 마시는 걸 그만두고 과자를 하나 집어든다. 실버애쉬는 그 행동에서 팬텀이 방금 전까지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팬텀은 곧장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과자를 입에 물고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버애쉬는 찻잔을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팬텀은 과자를 갉작이던 움직임을 살짝 멈추고 있었다.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는 걸 보면 지금 막 입에 넣은 맛이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다.

팬텀은 달콤한 걸 좋아하는 입맛인가?

아니면 실버애쉬가 바랬기 때문에 그 의도대로 움직여주는 건가?

실버애쉬는 생각을 거듭했다. 팬텀은 백지 같다. 그리고 빈 종이는 거울같은 역할을 한다. 종이의 위에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아니면 종이를 구겨 접어버리든, 어떤 흔적을 남기더라도 종이는 그 어떤 반응도 내어주지 않으니까. 결국 종이를 대한 사람의 태도와 의도만 반영하게 되어 있다. 실버애쉬는 팬텀을 보면서 그에게 자신의 의도를 새기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고 있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이 욕구는 팬텀을 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느낄 거라는 것도 분명히 인지했다.

하지만, 예술 작품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건 못할 짓이지.

실버애쉬는 함정 같은 유혹을 떨쳐내려고 의식적으로 과자를 들어 입에 물었다. 단 맛이 약간 아리게 느껴진다. 혀로 부드러운 크림을 핥으면서 실버애쉬는 팬텀이 소속된 극단에 대해 다시금 끔찍하고 가차없는 평가를 내렸다.

팬텀은 극단의 예술품이다. 팬텀은 접한 사람이 바라는 연기를 한다. 팬텀은 거울과도 같다. 결국 그 거울에 비치는 건 팬텀이 아니라 팬텀을 보는 사람이다. 결국 팬텀을 보는 사람은 그를 통해서 예술품이 된다….

극단의 예술품이.

실버애쉬는 팬텀에게 자신의 일부를 남겨서 자기 자신이 예술품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돋보이며 시선을 잡아끄는 일이야 실버애쉬가 나아갈 길에서 당연히 할 일이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겠지만, 스스로 행하는 것과 타인에 의도로 행하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실버애쉬는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입안에 남은 끈적한 맛을 지우기 위해서 홍차를 단번에 들이마신다. 잠깐의 단맛을 느낀 혀 위로 씁쓸한 홍차의 뒷맛이 자리잡는다. 달콤함은 짧고 떫고 쓴 맛은 길다.

“앞으로 취미 정도는 만들어 보는게 좋겠군.”

“…갑자기?”

“파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하고 싶은 걸 찾아오도록.”

“나는-”

“뭐든 준비해주겠다. 내 성의를 무시하진 않겠지.”

“…”

실버애쉬는 일부러 팬텀의 발언을 자르고 말을 내뱉었다. 순식간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잃어버린 남자가 횡망하게 실버애쉬를 바라본다. 어쩔줄 몰라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느껴져 실버애쉬는 다시금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버애쉬는 팬텀이 취미를 가지지 않으면 했다. 차라리 그 시간을 자신과 나눠주길 바랬다. 파티가 끝나면 사라질 제한된 관계에서 다른 곳에 시간을 쏟다니. 낭비였다.

“나는,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

“미안하지만 이래보아도 한 회사의 사장이라서 말이지.”

시간이 부족해. 실버애쉬는 의도적으로 본심과 반대의 말을 읊었다. 실버애쉬가 바라는 것과 바라지 않는 걸 종용하는 태도 그 모순 사이에서 팬텀은 어떻게 행동할까. 정말로 취미를 찾아오진 않을까. 스스로 욕망이라는 걸 인지하지 않을까. 적어도 하염없이 타인을 위한 연기를 하는 이 행동만큼은 멈추지 않을까. 팬텀은 연신 당황하던 태도를 가다듬었다. 허리를 곧게 피고 당당한 표정으로 실버애쉬를 똑바로 바라본다.

“내가 너를 호위하는 건 안되는 건가?”

실버애쉬는 순식간에 뒷목이 저릴 정도로 아찔함을 느꼈다. 스스로 생각하지도 못한 방안. 지독스레 매혹적인 문장이다.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고, 데겐블레허의 빈자리를 매꾸고, 팬텀에 대해서 더 알아갈 수 있으며 어쩌면 관계를 보다 확장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정말 실버애쉬가 제일 바라고 있는 최고의 이득 같은 말. 실버애쉬는 순식간에 이성을 팽팽하게 당겼다. 빛이 없는 욕망이 아가리를 쩍 벌린다.

“…나를 손님 대접조차 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 작정이군.”

“그건 아니다. 이건 내가 바라는 거야. 폐를 끼치진 않겠다.”

팬텀이 바라는 일. 실버애쉬는 굳은 표정으로 팬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정말로 그가 호위하기를 바라고 있고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실버애쉬의 욕망이 그를 붙잡으라고 시끄럽게 외치기 시작했다. 방금 전에 홍차를 마셨는데도 혀끝이 바짝 마르는 걸 실버애쉬는 느낄 수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실버애쉬는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다면 취미를 찾아와라. 나는 너를 대접하고 싶으니까.”

실버애쉬는 지금 자신이 하는 행위가 분명 나중에 후회가 될 것임을 알았다. 그 후회는 파티가 떠나고 나서 찾아올게 분명했고, 이 대답을 두고두고 떠올리면서 팬텀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아주 손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버애쉬는 스스로의 이성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팬텀과 자신을 향해 거래를 던졌다.

“난 너에게 빚을 지울 생각이다.”

호위라는 빚을 지는 건 나중에 어떤 대가를 치루게 될 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실버애쉬는 팬텀에게 대접이라는 빚을 지게 하고 싶다. 빚과 대가. 거래라는 익숙한 틀 안에서 실버애쉬는 가까스로 욕망을 내리눌렀다. 순간적인 욕망이 모든 일을 이끌도록 둘 수는 없었다.

“…… 네가 정말로 그러길 바란다면.”

잠시의 침묵 후에 대답한 팬텀이 다소 우울한 시선을 거두고 바닥만 내려본다. 실버애쉬는 이 우울감이 팬텀에 본심에서 기인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욕망이 다시금 속삭인다. 지금이라도 무르는게 좋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호위를 부탁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팬텀에 대해서 알아가고 이 관계를 더 길게 얽어서 앞으로의 일에 그를 배치하는게 더 이득이지 않을까? 실버애쉬는 스스로의 욕망을 향해 똑바로 대답했다. 그가 떠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그가 나만을 위한 연기를 할 거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는거지? 그를 통제하고 내 멋대로 다루고 싶다는 일차적인 생각이 앞의 모든 일에 영향을 줄텐데도?

“매우웅.”

갑자기 실버애쉬의 발치에 검은 꼬리가 휘감긴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 실버애쉬는 갑자기 나타난 검은 고양이가 자신의 발을 타고 멋대로 무릎 위로 올라오는 걸 보면서도 내쫓는 대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따스하고 물컹한 온기가 모든 신경을 앗아가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 만든다.

“미스 크리스틴.”

검은 고양이가 실버애쉬의 무릎 위에서 우아하게 고개를 들고 팬텀을 바라본다.

“그 아가씨는 미스 크리스틴이라고 한다.”

“먀앙~.”

실버애쉬는 가만히 검은 고양이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어 그 검은 털결을 쓰다듬었다. 윤기나고 보드랍다. 신경써서 관리를 하는게 손끝에서 느껴진다. 눈 앞의 아가씨는 아주 천천히 손길을 따라서 몸을 늘어트리더니 곧이어 완전히 늘러붙어 실버애쉬의 모든 신경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그의 무릎을 완전히 차지했다.

“그녀는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 제멋대로인 생명체 앞에서 실버애쉬는 자신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부질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쓰다듬는 손가락에 걸리는 붉은 리본을 보며 그녀에게도 팬텀에게 준 사복과 같은 악세사리를 하나 주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색의 천을 써서 팬텀이 그렸던 디자인과 같은 장식을 달아주면 잘 어울릴 거라는 확신, 팬텀도 거절할 것 같지는 않다.

갑자기 실타래처럼 헝크러진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실버애쉬는 미스 크리스틴에게서 시선을 때고 팬텀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방금 같이 실버애쉬를 비추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팬텀의 모든 시선은 미스 크리스틴을 향하고 있다. 그 거울 같은 시선에서 벗어난 실버애쉬는 문득 자신이 진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깨달았다.

팬텀이 거울이라면, 실버애쉬는 그 거울 뒤에 있는 것을 보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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