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초청4

실버애쉬x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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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팬텀이 실버애쉬의 일처리에 대해서 관여할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파티에서 입을 옷을 맞추고 기다리는 동안 실버애쉬는 당연하다는 듯이 초대장을 받아냈고 그 사실을 이야기 했으며 팬텀에게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팬텀은 은신처에서 새로운 의상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이대로 좋은지, 정말로 이렇게 지나가도 될 일인지 몇 번이고 반문했다.

자신이 크림슨 극단의 소속이라고 이야기 하면 극단의 남은 무리들이 자신을 찾아오진 않을까? 그들이 또 끔찍하고 음흉한 짓을 하진 않을까? 하지만 그런 무리가 찾아온다면 팬텀은 이전과도 같이 공평하게 죽음을 내려 줄 생각이었고 오히려 이렇게 미끼가 되어 극단의 단원들을 끌어내는 게 앞으로의 있을 비극과 연출을 막기에 알맞은 일처럼 느껴졌다. 팬텀은 실버애쉬가 만든 무대의 뒷편에서 처음으로 고요함과 편안함을 맛보고 있었다.

“미스 크리스틴.”

검은 고양이가 팬텀에게 다가와 꺼내놓은 옷가지의 몸을 부빈다. 팬텀은 옷에 털이 묻어나는 걸 보면서도 만류하지 않았다. 이 옷에는 실버애쉬의 체취가 강하게 나고 있었다. 그녀가 영역을 표시하고 옷가지를 만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스 크리스틴이 옷가지의 위에서 뒹구는 것을 두고 팬텀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암살 일도 하지 않고, 무대 준비도 하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가 담기지 않은 선물을 구경하고, 약속된 파티가 될 때 까지 기다리기만 해야한다. 팬텀은 이 공백같은 시간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다.

그가 자신의 일을 막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죄인에게 죽음을 선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실버애쉬는 팬텀의 행동을 제한하면서 만에 하나 다쳐서 파티에 나가지 못하면 곤란하다는 언급을 했지만, 팬텀은 그 뒤에 담긴 감정과 의도를 읽었다. 실버애쉬는 팬텀이 암살자라는 가면을 쓰고 이 대지라는 무대 위로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걱정이라는 이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통제와 소유욕이라는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팬텀은 실버애쉬의 행동의 후자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도… 사실 팬텀이 지금 당장 암살 일을 받아 밖을 돌아다니더라도 실버애쉬는 팬텀을 제제할 방법과 수단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옷이야 지금 입고 있는 옷을 입으면 그만, 다쳐도 참고 파티에서 아닌척 연기하면 그만이다. 그가 팬텀을 완벽하게 통제하려면 파티의 날 까지 같이 있자는 권유가 아니라 명령과 거래를 했어야 했다. 팬텀은 그가 내미는 거래를 막을 방도가 없었을 뿐더라 그럴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실버애쉬는 팬텀을 놔주었다. 왜지. 왤까. 이대로 옷을 받아 도망쳐 버릴 수도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걸까?

“메우웅.”

검은 고양이가 팬텀의 발치에 다가와 몸을 부빈다. 팬텀은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탈 수 있도록 팔을 내밀었다. 사뿐사뿐 소리없은 발걸음이 가볍게 닿고 곧이어 따뜻한 온기가 팬텀의 옆에 놓인다. 몸을 부비는 그녀의 행동에 맞춰 팬텀도 부드럽게 뺨을 부빈다. 그리고 동시에 후각을 자극하는 은은한 향에 팬텀은 감으려는 눈을 살짝 뜨고 크리스틴을 바라보았다.

“네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괜찮겠나?”

그녀는 관심 없다는 듯이 작게 하품한다. 팬텀은 미스 크리스틴의 턱을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로 긁으면서 그녀의 몸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잔잔히 실버애쉬의 체향을 맡았다. 새로운 옷에 잔뜩 몸을 부비고 그녀의 향으로 뒤덮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그의 향기를 묻혀오다니, 팬텀은 의아함에 눈을 크게 깜박였다. 그녀는 영역을 중요시한다. 새로운 물건에 발톱으로 흔적을 남기거나 머리를 부벼 페로몬을 묻히는 건 그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자 천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옷에 담긴 실버애쉬의 영역을 인정해줬다.

“그가 마음에 드는 건가?”

그제야 미스 크리스틴이 팬텀을 돌아본다. 그리고 혀로 뺨을 핥았다. 까쓸한 감촉을 느끼면서 팬텀은 그녀가 실버애쉬를 만나지 않아도 그를 인정해줬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그는 안전하고 든든한, 팬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사실 체취에는 많은 정보가 담긴다. 팬텀은 어느정도 그 정보를 구별 할 줄 알지만 미스 크리스틴만큼 섬세하게 정보를 얻어내진 못한다. 시람과 고양이, 서로 명확히 전달할 수 없는 종족간의 언어 속에서 팬텀은 그녀가 가진 혜안을 믿었다.

“나도 그가 싫지 않아.”

“뭬우우웅.”

“…그래 나도 그가 마음에 든다.”

싫지 않다는 말과 마음에 든다는 말은 다르다. 미스 크리스틴의 지적에 팬텀은 순순히 말을 인정하고 작게 웃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이 무대 뒷편 이라면 영원히 무대가 시작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노상 무대는 막이 오르고, 또 내려가는 법. 팬텀은 어깨에서 천천히 졸기 시작하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따뜻하게 물컹이는 감촉이 매우 보드랍다. 팬텀은 그녀는 품에 안고 곧장 실버애쉬를 찾아가기로 했다. 파티가 마무리 될 때 까지는 그의 옆에 머물러도 괜찮을 것 같다. 파티가 끝나면 실버애쉬와의 만남도 끝이다. 언젠가 끝날 무대라면 그 무대의 모든 장면과 상황을 즐기리라.

팬텀이 극단을 나가고 나서 처음으로 상황에 쫓기지 않고 홀로 내린 결단이었다. 이 한 걸음이 팬텀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일이 지나고 나면 늘상 들리는 노랫소리를 따라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노래가 극단의 수작이든, 아니든 그저 스스로의 결정을 따라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왔나.”

실버애쉬의 태도는 담백했다. 팬텀이 사복을 입고 그가 머무는 곳에 소리없이 등장했을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굉장히 경계하는 낌새를 보였으나 곧이어 그들의 등을 찔러온 당황스러움에 경계심은 얇게 바람처럼 흩어져 버렸다. 첫 번째로 실버애쉬의 무던한 태도에 당황했고 두 번째로는 팬텀의 품에 안긴 고양이를 보고 당황했다. 아무리 보아도 지금의 팬텀은 암살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팬텀은 그 어떤 무기 하나도 없이 당당하게 실버애쉬의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이… 사람 (팬텀이라고 한다.) 네, 팬텀 씨는 어디로 들어오신 겁니까?”

“그는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

“예? 저는 아무것도 못봤습니다만….”

실버애쉬가 팔을 들고 작게 휘파람을 분다. 맑은 소리와 함께 푸드덕 매가 날아와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그의 팔에 내리 앉았다.

“텐진이 알아챘다.”

“…”

“걱정마라. 괜찮으니 물러가도 좋다. 그저… 다과 정도만 내어주면 좋겠군. 그는 앞으로 있을 파티의 중요한 동행자니까 말이지.”

실버애쉬의 말에 어영부영 머뭇거리던 사용인들이 일제히 물러간다. 갑작스럽게 텅 빈 공간. 그러나 문 밖에서는 아까보다 더 날선 경계와 인원들이 문을 지키고 있다. 팬텀은 따가운 시선과 감정을 고스란히 맞으면서도 품안의 검은 고양이를 쓰담을 뿐,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군. 다들 나쁜 의도를 가진건 아니다.”

“알고있다.”

“이해해줘서 고맙다, 일단 앉지.”

실버애쉬가 가르키는 대로 팬텀은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폭신한 가죽소파가 편안하게 몸을 감싼다. 그 옆에 미스 크리스틴을 내려놓으려던 팬텀은 그녀의 털이 약하게 부풀어 있다는 걸 알고 그대로 품에 추슬러 안고 도닥였다.

“변명하고 싶지 않지만, 네 덕분에 내 경호원이 짧은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어서 말이야. 다들 그 부재를 견디지 못하고 저렇게 예민하게 굴고 있어.”

“그런가.”

“사죄는 따뜻한 우유 한 잔으로 괜찮겠나?”

팬텀을 향한 사죄가 아니다. 그렇기에 팬텀은 묵묵하게 미스 크리스틴을 도닥이기만 하지 입을 열지 않는다. 그러나 미스 크리스틴은 실버애쉬의 사죄를 받아들이는 대신 냉큼 팬텀의 품에서 튀어나와 발을 탁 털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텐진이 부리를 들고 날개를 부풀린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기세에 실버애쉬가 서둘러 매의 목에 단 천을 매만졌다. 텐진은 금새 주인의 말을 듣고 얌전히 횃대로 이동했다. 작게 날개가 푸드덕 거리는 소리만 방에 울린다.

“우리와 달리 둘은 사이가 안좋군.”

“우리도 첫 만남이 마냥 좋았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버애쉬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곧장 손에 쥐던 지팡이를 내려놓고 편안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푸욱 눌리는 소파가 작게 바람빠지는 소리를 낸다. 실버애쉬는 완전히 무방비한 빈 손을 펴 맞대면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웃음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는 지금 자신의 기분이 좋다는 걸 숨길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전혀 귀족스럽지 못한 태도였지만 실버애쉬는 팬텀 앞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귀족의 예법과 방식을 따를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팬텀. 이 방문은 내가 처음 이야기한 권유를 받아들었다고 보아도 되겠나?”

실버애쉬는 손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 굉장히 눈썰미가 좋다. 팬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이유도,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실버애쉬를 따라 본인이 가진 감정 그대로를 털어내면서 팬텀은 대답했다.

“파티가 끝날 때 까지 너와 함께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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