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초청1

실버애쉬x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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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사회에 있어서 예술은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아래 계급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한 과시의 목적에서도, 귀족만의 은밀한 공통점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의 목적에서도, 드물게 귀족이라는 위치에서 얻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지원의 목적에서도 그렇다. 그 때문에 실버애쉬는 귀족의 일원으로 빅토리아에서 유학을 할 당시부터 오랫동안 예술에 대한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쉐라그의 미래에 있어서 예술보다도 중요한 것들은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실버애쉬는 귀족이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부분만 만족하는 정도로 예술을 다루었다. 다시말해 실버애쉬에게 있어서 예술은 체스말처럼 다루어야하는 소재였지 푹 빠져서 향유해야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던 [크림슨 극단]또한 그런 관심의 일환으로 주변의 귀족 출신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 위한 소재에 불가했다. 때문에 실버애쉬가 크림슨 극단의 녹화된 연극 영상을 보게 되었던 건 순전히 우연에 가까웠다.

이상하게도 녹화된 테이프는 약간 늘어져 있었으며 특정 구간은 노래가 지워진 상태로 유통이 되었다. 이 마저도 금기라느니 귀한거라느니 이상한 소문과 같이 맴돌았고, 실버애쉬는 위험한 예술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빅토리아 유학 당시 크림슨 극단의 연극 상영회에 초대를 받았음에도, 그저 그 영상을 나누어보는 이들의 입장과 위치만을 고려했다. 영상이 틀어지는 동안에도 주변의 사람들을 살필 뿐 사실상 영상에는 신경을 그다지 쓰지 않았다.

분명 그러할 텐데.

실버애쉬는 완전히 무음이 되어버린 영상에서 한 주연이 노래를 하는 모습을 보았고 아주 짧았으나 그 찰나에 순식간에 소리 하나 없는 그의 연기에 온 관심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건 그 영상을 본 이들 모두가 똑같았다. 주연 배우의 얼굴에는 가면이 씌여져있었다. 흐린 화면으로는 세세하게 살펴보기란 무척이나 어려웠음에도 실버애쉬는 뛰어난 눈썰미로 그 가면의 한 쪽이 가지같은 뿔이 돋아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렸다. 분명히 이 예술 모임에서 좋은 이야기 소재가 될거야. 순식간에 실버애쉬는 이 소재를 이용해 대화를 주도할 생각까지 닿았지만, 본능에 가까운 반응으로 주제를 덮어두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이 맞이한 이상하리만치의 예술을 향한 집착과 욕망 그리고 괴담같은 소문을 나직히 들은 이후로 실버애쉬는 자신의 직감을 칭찬하고 크림슨 극단이라는 단어를 머리속 깊숙히 묻어버렸다. 그 극단은 위험하다. 모임의 이들이 겪은 좋지 않은 결말 혹은 이상한 소문 등에 휩쓸린 건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게 실버애쉬가 멀쩡히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를 세웠다는게 그 증거가 아닌가. 실버애쉬는 스스로에게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그 사실을 깊게 숨겨버렸고 다시는 들추지 않았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의 직감이 몇 번이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렇게 잊혀져야만 했던 과거는 실버애쉬에게 전혀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림자가 무겁다. 실버애쉬는 스스로의 발치를 내려다보며 등 뒤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저 온도가 내려갔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버애쉬는 지금 주변의 공기가 평상시와는 전혀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언제나 차가운 공기가 내리앉았던 곳에서 아침을 시작하고 밤을 맞이했던 자에게, 공기중에 바깥 바람이 섞여있는 사실은 손쉽게 넘어갈 사항이 아니다. 쉐라그에서는 작은 바람이 온 집안을 데우는 불을 꺼트릴 수도 있었다.

“아직도 따라오고 있나?”

실버애쉬는 그림자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말을 붙었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림자가 아까보다 조금 더 무거워진 것 같다. 암살을 하려면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데겐블레허와 노시스가 그 찰나를 잡아주기를 바랬건만 지금 실버애쉬의 뒤를 밟는 그림자는 기회가 있어도 노리지 않았고 기회가 없어도 계속해서 실버애쉬를 따라왔다. 암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득하고 정보를 얻기 위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은밀하다. 실버애쉬는 복도의 한 곳에서 가만히 멈춰섰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깥 공기가 코 끝을 스치고 손끝을 타고 내려간다. 데겐블레허가 잡아내지 못한 상대. 노시스가 만든 함정을 밟지 않은 상대. 이 상대는 분명 실버애쉬에게 볼일이 있으나 그게 단순한 죽음의 형태는 아니다. 실버애쉬는 아주 천천히 우아한 몸짓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뒤돌아섰다. 그렇다면 거래를 할 수 있다. 거래에 있어서 실버애쉬는 그 누구와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협상 테이블은 그의 홈그라운드니까.

“단순히 내 목을 따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림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하지만 실버애쉬는 마치 연극의 독백을 하는 느낌을 받으며 입을 벌린다.

“이정도의 탐색을 할 정도라면 나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겠지. 차라리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떤가?”

실버애쉬는 손에 든 지팡이 칼을 꾹 눌러 쥐고 허공을 바라본다. 연기는 처세술에 있어서 필수 교양이다. 실버애쉬는 그런 행위에 능했고 마음만 먹는다면 능숙한 배우까지도 충분히 나아갈 만한 반짝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실버애쉬는 암살자가 가진 성질을 모른다. 하지만 거래를 위해 판을 짜는 건 언제나 그가 해오던 일이었고. 단 한사람을 위해 무대를 만들고 그 무대에 사람을 배치하는 일은 그가 거래를 하고 미래를 그리기 위한 준비와 어느정도 맞닿은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예술에게 있어서 우연이란 다시 없을 최고의 기회이며, 예술에 얽힌 모든 것들이 필연으로 바뀌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림자는 실버애쉬의 행동에서 능숙한 무대의 향을 맡았다. 지금부터 그가 서있는 곳은 단순한 복도가 아니며,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오는 극의 한 장면이다. 자신을 위해 준비된 무대. 그림자는 이제 자신이 무대에 오를 의무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꺼이 실버애쉬가 마련한 공간으로 올라섰다. 샹들리에도, 막도, 객석도 없었으나 배우가 등장하기에는 모자람 없는 공간이다. 그림자는 고의적으로 발걸음의 소리를 내며 사뿐하게 실버애쉬의 앞에 나타난다. 차가운 공기에는 그 어떠한 향도 맡아지지 않는다. 공백의 향내가 났다.

“엔시오데스 실버애쉬.”

그림자는 상대역의 배우를 부른다. 실버애쉬는 그림자의 행동이 맞춰 인사한다. 실버애쉬의 손에 든 지팡에 속 칼날과, 그림자의 망토속 숨겨진 단도는 마치 극의 소품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무대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고 커튼콜이 오를 때 이 둘 모두가 배우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것만 같다. 소프트라이트 대신 환한 달빛이 복도를 비춘다. 그림자의 얼굴위로 음영이 진다.

“…”

실버애쉬는 다음의 대사를 뱉지 않는다. 그림자에게 이름도, 의도도 묻지않고 심지어 암살자라는 단순한 호칭도 하지 않고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망토 속 가려진 가면에 시선을 둔다. 그림자는 그런 상대역의 모습을 두고 이 즉흥극에서 등장한 갑작스러운 침묵을 기다려 주었다.

“…유령 같군.”

가까스로 닿은 언어에 그림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림자, 암살자, 킬러, 배우 등 수많은 역할 중에 유령. 팬텀이라는 호칭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짙은 그림자를 가지는 그에게 몹시나 어울리는 호칭이다.

“그렇게 불러도 좋다.”

실버애쉬는 눈을 깜박인다. 유령, 팬텀이라는 단어는 눈 앞의 암살자의 호칭을 정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닌, 추억 속에 묻어둔 기억이 갑작스럽게 부상하면서 토한 탄식과도 같은 단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그 단어를 마치 능숙한 대본을 읽은 것처럼 받아들인다. 환한 달빛 속에서 행동하는 모습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마치 얼굴같은 가면을 쓰고 모든 관심과 시선을 끌고 소리없이 돋보인다. 실버애쉬는 머리속에 낀 먼지를 아주 재빠르게 털어내었다. 이 자는 [크림슨 극단] 이미 사라진 유랑 극단의 주연 배우다.

“암살하지 않고 나를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지?”

극단에 대한 질문 대신 단도직입적인 질문으로 순간적으로 끊겼던 판을 다시금 이어나간다. 실버애쉬는 방금 전 자신이 보인 빈틈에 대해 실수를 했다며 작게 자책했고 동시에 그런 빈틈을 보였음에도 팬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이 자가 엔시오데스 실버애쉬를 죽일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다. 거래에 있어서는 가장 기초적인 등가교환.

“네가 죽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다.”

팬텀은 순순하게 실버애쉬에게 대답을 해온다. 언듯 들으면 단순한 쾌락 살인마의 발언과도 같으나 실버애쉬는 대사에 현혹되지 않았다. 팬텀은 실버애쉬에게서 죽일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암살자면서도 단순하게 살육을 행하지 않는다. 주도면밀하게 상대방을 관찰하고 판단하고 살육을 행한다. 단순한 쾌락 살인마와는 결이 다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실버애쉬를 따라다닌 이유는 아마도, 암살을 사주한 사람의 말과 다른 부분이 있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짜여진 판의 위에서 실버애쉬는 차근차근 정보를 모우고 다시금 연기를 펼친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누가 있지? 그중에서 이 정도의 실력자를 고용할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자가 누가 있지? 동시에 엔시오데스 실버애쉬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닌 왜곡된 사실을 읊을 사람이 누가 있지?

“단순한 암살자는 아니라고 해도 좋겠지.”

팬텀은 말 없이 실버애쉬를 바라본다. 침묵은 대화의 좋은 수단이다. 상황에 따라 긍정 혹은 부정의 의미를 지니기도 할 뿐만 아니라 단순한 무시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지금 팬텀이 침묵함으로 그의 의사는 알 수 없으나, 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고 오는 커다란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물론 그건 어디서나 상대방이 일반적인 사람일 때나 통했을 법한 행위다. 실버애쉬 역시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무대를 그만두었나?”

순식간의 공기의 밀도가 짙어진다. 무게감마져 생긴 듯한 압박감에도 실버애쉬는 입가의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나를 그저 손쉽게 처리하려고 했으면 오히려 일이 쉬웠을지도 몰랐을텐데, 네가 신중해서 다행이야.”

팬텀의 망토가 들썩인다. 그 아래의 단검을 쥐는 것이 뻔하게 보인다. 실버애쉬는 팬텀이 동요했고 다른 의미의 죽일 이유를 찾아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덕분에 크림슨 극단의 주연 배우를 만나게 되다니.”

[크림슨 극단.] 실버애쉬는 단어를 내뱉으며 동시에 지팡이를 휘두른다. 숨겨져 있던 칼날이 드러나고 냉기같은 검기가 온 복도를 스쳤다. 챙! 맑은 소리가 울린다. 날붙이 끼리 부딪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볍다. 은빛의 아츠가 검날에 휘감기는걸 보며 실버애쉬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일격에 죽지는 않을거라 생각했건만, 그렇다고 아무런 상처조차 없을 거라고는 예상치 않았다.”

순식간에 복도의 벽에 도약한 팬텀이 바닥에 떨어진 가면에 시선을 둔다. 단검을 쥔 손은 아무런 상처도 없다. 검기에 날린 망토, 그리고 충격파로 떨어진 가면 아래의 금안을 바라본 실버애쉬는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감정들을 파악한다. 단 한 합으로 배우의 연기가 깨졌다. 가면은 벗겨졌고 무대는 갑작스럽게 폐막을 알린다. 팬텀이 단검을 다시금 들기전에 실버애쉬는 마치 준비된 것처럼 다음 대사를 뱉었다.

“크림슨 극단에 대해서는 나보다 거기에 속한 네가 더 잘 알겠지. 나는 그 극단과 아무련 연관이 없다. 난 그저 네가 출연한 녹화본을 본 적이 있을 뿐이야. 그저 그 사실 하나로 내가 너에게 죽어야 하나?”

거래에 있어서 제일 좋은 방법은 상대방에게 빚을 지우는 것이다.

“너는 오랫동안 나를 죽일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물며 방금은 오해로 나를 죽이려고 했군.”

팬텀은 시선을 실버애쉬에게서 때고 바닥을 내려다본다.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소리없이 바닥으로 착지한 팬텀이 가볍게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린다. 실버애쉬는 목 뒤의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그가 본인과 똑같은 외모의 분신을 자신의 그림자에서 거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죽일 수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을 보면서도 실버애쉬는 섬뜩함을 느끼기는 커녕 칼날을 거두지도 않고 오만하게 팬텀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제 연기는 그만두지.”

사실 지금 실버애쉬에게 팬텀의 정체는 소소한 이득에 더 가까웠다. 실버애쉬는 이미 암살 미수를 수도 없이 당해보았다. 오는 암살자만 처리 해봤자 다음에 또 다른 암살자를 오는 걸 막지는 못한다. 암살자를 처리하는 것 보다는 사주한 뒷배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야 근원을 뽑을 수 있을게 아닌가. 처음부터 실버애쉬에게 팬텀은 목표가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나와 거래를 해야겠다. 팬텀.”

순식간에 무대는 협상 테이블로 변모했다. 이제 이 곳에 배우는 없다. 그저 죽을 뻔 한 피해자와 그를 암살할 뻔한 죄인이 있을 뿐이다. 이 테이블의 위에서 팬텀은 암살을 행하는 사냥꾼의 위치에서 순식간의 먹잇감의 위치로 변해버렸다. 당했다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팬텀은 이 상황조차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으로 받아들인다. 팬텀은 실버애쉬가 자신을 포식할 것임을 알면서도 순순히 단검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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