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은재

언더프로모션

박사x실버애쉬/BL/둘이 이미 사귀는 중

무지몽매 by koor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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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우여."

박사는 느릿하게 뒤돌아선다. 이 넓은 테라에서 자신을 맹우라고 부르는 자는 몇 없다. 과거에 얼마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로도스 아일랜드 내에서는 한 명 뿐이다. 멀찍히 다가오는 발걸음은 조금 무겁다. 익숙해진 습관에서 이 연인의 기분이 조금 언짢다는 걸 재빨리 알아차린 박사는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완전히 몸을 돌려 그를 맞이한다.

"무슨 일?"

"그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다."

박사는 버릇처럼 페이스 가드를 두드린다. 무엇 때문일까. 사실은 어렴풋하게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그저 행동으로 생각을 표현했다.

"앞선 전투에서 왜 나를 부르지 않았나."

역시나. 박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카란 무역 회사의 사장이자 한 국가의 권력자인 실버애쉬를 로도스 아일랜드의 전장에 언제든 투입할 수 있는 불합리한 조약. 이 조약을 아무렇게나 써온 박사가 갑자기 정신차리고 실버애쉬에게 대우를 한다는 식의 예의를 차리거나 할 리가 없다. 같이 있고 싶다는 낮간지러운 이유일 수도 없고. 이를 잘 알고 있는 실버애쉬는 그저 궁금증을 해소하러 온 것 뿐이다. 약간의 언짢음은 정보를 박사의 입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들은 탓이겠지.

박사는 한 손으로 입을 막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들켜서 놀란 것 처럼 보이지만 뻔한 수다. 박사의 비서로 붙어있는 실버애쉬에게 이정도의 속임수는 통하지 않았다.

"들어가지."

마치 자신의 사무실일 마냥 박사를 끌고간다. 박사는 서류철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는 다른 오퍼레이터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또 좋지 않은 소문이 돌 거 같은데 문제 없어.

쿵.

이러다가 문 고장나는거 아닐까. 박사는 먼저 들어서 자리잡은 실버애쉬를 두고 서류를 천천히 놓을 만한 장소를 찾아 보았다. 시선이 행동 하나하나에 꽂히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서류는 적당히 떨어지지 않을 장소에 쌓아두고 박사는 후드에 달린 캡을 손끝으로 매만진다. 말해보라는 뜻이다.

"나를 투입하면 쉽게 이길 수 있는 전투를 왜 굳이 돌아가려고 하는지 묻고 싶다만."

"로도스의 일에 그렇게 적극적인줄은 차마 몰랐는데."

"로도스의 일에 언제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조약에도 있는 사항이다."

"알아."

박사는 손 끝으로 캡을 튕긴다. 실버애쉬의 시선이 박사의 얼굴로 옮겨가지만 거기에서 읽을 수 있는 표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저?"

"너를 배치하는 순간 모든 일이 해결되기 때문이야."

실버애쉬는 자신의 지팡이를 매만졌다. 본인이 박사에게 누누이 속삭여온 말이기도 하고, 말 그대로의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왜 자신이 전투에서 제외되는 일이란 말인가. 빠른 해결과 해답은 전략가라면 누구나 원하는 일임에도.

"대답이 되지 않는다."

"충분한 대답이 돼."

박사는 사무실 구석에 박혀있는 체스판을 꺼내 들었다. 이전엔 자주, 요즘엔 가끔씩 실버애쉬와 두는 '시간을 죽이는 좋은 방법'. 박사의 손가락이 체스판의 한 기물에 닿는다. 퀸. 누구나 인정하는 체스에서의 최고의 전략성을 품은 말이다. 박사는 퀸을 손아귀에 넣고 굴린다.

"너의 판에서 넌 킹이겠지만-, 내가 짠 판에서는 있어서 퀸이나 다름없어. 이건 네가 요구한 자리기도 하지."

실버애쉬는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로도스 아일랜드와 체결한 불평등한 조약을 한 번 더 머리속에서 훑어봤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게 어느 방향이든 어느 상황이든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을 요하든-"

박사는 한 바퀴 구른 퀸을 그대로 던져 실버애쉬에게 건낸다. 

"네가 배치되는 순간 대다수는 엔드게임으로 갔다고 봐야 해."

실버애쉬는 한 손으로 기물을 잡았다. 박사가 주로 사용하는 흑색. 검은 라인을 따라 엄지로 쓰다듬으면서 박사의 얼굴을 바라본다. 저 아래의 얼굴은 어떤 표정일까.

"몇몇의 상황, 몇몇의 오퍼레이터를 꼽아도 말이야, 너와의 전장은 마치 퀸 하나를 제외하곤 나머지 기물은 폰만 둔 체스를 하는 것 같이 느껴져."

"전략을 게임처럼 생각하는 편은 아니지 않았나."

"그랬지."

박사는 이번에 백의 킹을 잡는다.

"하지만 누구처럼 즐기는 법을 알아버려서 말이야."

정해진 승리라면, 그 안에서 펼칠 수 있는 전략이 얼마나 즐거운지. 박사는 체스판을 내려다본다. 양 팔에 가둬진 네모난 판은 책상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으나 박사의 아래에서는 너무나도 작게 보였다.

"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 안에서 다양하게 접하고 만들 수 있는 전략이 나를 즐겁게 해. 물론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건 알아."

"즐기기 위해서는 나를 빼야만 한다?"

"응. 거기다가 압도적인 힘은 전략을 단순하게 만들고, 또 전술가를 멍청하게 만들잖아."

박사는 킹을 손가락에 끼워 들더니 실버애쉬를 가르키고 삿대질 했다.

"전장에서 넌 내 지능을 낮게 만드는 요인이야."

"그게 나를 이제 팀장에서 세우지 않는 것 뿐만이 아니라 팀 자체에서 제외하는 요인이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군. 이젠 힘까지 빼야 하나."

"그건 싫은데. 최선을 다해줘."

"억지도 정도껏 부려라... 하지만 킹의 말이라면 들어줘야겠지."

박사가 킹을 다시 체스판에 올려놓는다. 퀸만 비어있는 체스판에 삐뚜름하게 얹어진 킹은 언제 쓰러지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 아슬함을 바라보던 실버애쉬는 바닥에 지팡이를 탁 두드렸다. 덜걱. 작은 파동에 킹은 손쉽게 넘어진다. 박사는 킹이 넘어지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킹이 체스판에서 굴러떨어지지만 않도록 잡아챘다. 

"실버애쉬. 홀로 전장에 설게 아니라면, 내 언더프로모션을 받아줘야겠어."

"난 폰이 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혼자서라도 이길 수 있다만."

박사는 작게 킬킬거렸다. 실제로 오로지 실버애쉬만을 전장에 배치하여 이긴 적이 적잖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 옆에 있는 기사들과 기물들이 널 혼자 배치하는 것에 많이 불안해 해. 그리고 이기더라도 네가 다치는 걸 나도 원하진 않고. "

박사는 툭툭 체스판에 놓인 기물들을 쓸어 담아 상자에 넣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략과 전술을 바라는 거라면 내가 상대해주지."

"원치 않아도 언젠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데... 싫어. 정 전장에 나가지 못하는 게 불만이라면 상사의 말이 아니라 연인의 말로 부탁할게."

탁. 상자가 맞물리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울린다. 이 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실버애쉬도 박사도 알 수 없다. 박사는 텅 비어버린 체스판에서 몸을 돌렸다. 그리곤 상자를 자신의 연인에게 내민다. 실버애쉬는 퀸을 그 상자 사이로 밀어넣었다.

"대가는 치러야 할거다."

박사는 그대로 다가가 실버애쉬의 옷깃을 잡고 사무실 너머의 방문을 열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언더프로모션: 체스판의 끝에 다다른 폰이 퀸이 아니라 다른 기물로 승진하는 것.

(사실 체스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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