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 8
실버애쉬x팬텀
전편
팬텀은 눈 앞에 놓인 기구들을 보고 저 멀리 등을 보이고 있는 실버애쉬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기구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긴 바늘 한 뭉치. 길이도 다양하고 끄트머리에 각기 다른 표식이 새겨져 있다. 그 음각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팬텀은 바늘의 생김새를 보고 바늘의 몸체를 조심스럽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일반 바늘과는 다르게 홈이 파여있다. 피가 흐르기 위한 통로일까? 아니면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한 의도 일까? 실버애쉬가 건낸 바늘은 일반적인 바늘 보다는 크기가 길어서 암살용의 도구로도 적합해 보였다. 작은 구멍도 어디를 찌르는 가에 따라서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는 법. 팬텀은 바늘의 끝을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다가 가볍게 손가락 위로 바늘을 회전시켰다. 무게도 가볍고 손바닥이나 소매에 숨기기에도 적절하다. 바늘의 연약한 내구성과 부드러운 탄력을 확인 후 마지막으로 바늘을 벽에 던져보려는 찰나.
“뭐하는거지?”
다른 물건을 가지려 갔던 실버애쉬가 서둘러 팬텀의 손을 잡고 바늘을 단숨에 빼앗아갔다. 던질 도구를 잃은 팬텀의 손이 허공을 가볍게 휘젓는다.
“위험하니까 휘두르지 마라.”
이 바늘은 암살용이 아닌가? 의아한 실버애쉬의 반응에도 그대로 순응한 팬텀은 그가 가지고 온 도구들을 살펴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무기 치고는 지나치게 연약하다. 쉽게 휘어지고 부러진다는 건 분명 암살 도구를 어둠에 감추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장점이나 언제나 장점이 우아하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도 한 번의 찌름 이후로는 그 빛나고 반짝이는 신체가 더럽혀져 타락하고 말 텐데…”
“이건 무기가 아니야.”
길어지는 팬텀의 말을 싹둑 자른 실버애쉬는 바로 들고온 상자를 팬텀에게 밀어버렸다. 그리고 별다른 말 없이 턱짓으로 지시한다. 이 오만한 행동에도 팬텀은 순응하고 그대로 상자를 열었다. 수 많은 털과 뭉친 솜같은 것들이 그득하다. 검은색 흰색 붉은색과 푸른색 등등 팬텀은 털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다시금 실버애쉬의 눈치를 본 후 털을 만지작 거렸다. 손안에 감기는 촉감은 보드랍고 따스하다.
“어떻지?”
무엇을 질문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팬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껏 진심을 담은 표현이었으니 실버애쉬의 눈가는 찌푸려지기만 한다.
“끄덕임은 제대로 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성의껏 대답하길 바라지.”
분명 진심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팬텀은 반박하는 대신 양손으로 털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이 털은 각기 다른 비스트에게서 얻어온 것이 틀림없다. 같은 비스트라도 분명 세부적인 종들이 다를 지도 모른다. 어떤 털은 보드랍고 어떤 털은 뻣뻣하다. 잘 뭉치는 재질이 있는 반면 너무 매끈하여 제대로 섞이지 못하고 나풀거리는 털고 있었다. 팬텀은 촉감 놀이를 하듯 털을 만지작 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실버애쉬를 바라보았다.
이틀간 그와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하고 그저 이 공간을 떠돌며 주변을 돌아다니기만 했는데 도대체 왜 실버애쉬는 갑자기 이런 것을 선물을 하는 걸까? 그리고 자신에게 무슨 반응을 바라는 걸까? 팬텀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입을 열어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보드랍고 따스하다. 마치 어린 혼비스트의 털결이 이렇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든다. 내 짧은 꼬리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는 우아한 털이다.”
“네 꼬리가 짧은게 왜 단점인 것처럼 말하지?”
갑자기 주제가 바뀌었다. 털을 계속 만지던 팬텀이 실버애쉬를 완전히 돌아본다. 실버애쉬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는 다시금 주제를 상자속의 털로 돌렸다.
“짧은 네 꼬리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크흠. 그리고 이건 네가 취미 생활에 쓸 물품들이니 좀 더 자세히 보았으면 하는군.”
앞 문장과 뒷 문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대사가 엉망이지만 팬텀은 굳이 지적하는 대신 그대로 털을 모두 꺼낸 뒤에 아래에 칸막이로 막힌 상자를 열었다. 이중의 칸으로 나누어진 공간 속에는 털과는 다른 물품들이 가득하다. 아주 두껍고 단단한 나무 손잡이와, 아마도 꺼낸 털을 빗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빗과 갈퀴, 털을 자르는데 필요한 가위와 바늘에게서 손을 보호하기 위한 골무 등… 그리고 모든 도구들을 꺼낸 상자의 바닥은 온통 딱딱하고 넓은 스펀지로 채워져 있었다. 모든 털과 도구를 하나하나 꺼내 나열하던 팬텀은 스펀지를 내려다 보았다가 다시금 실버애쉬를 바라보았다. 팬텀이 이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니들펠트라고 한다.”
“니들펠트.”
그저 단어를 배우는 것처럼 따라하는 팬텀의 모습에 실버애쉬는 약한 현기증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있었던 사건은 분명 털로 무엇인가 만들려고 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는 이런 예술 취미 활동을 고려해서 한 행동이 아니란 말인가? 실버애쉬는 팬텀의 행동에 대해서 다시금 되돌아 보고 다시 추측을 했다가 짧게 탄식했다. 미스 크리스틴의 털뭉치는 그저 정말 자신이 꺼려할 것 같은 행동들을 모아서 한 결과로 산출한 거였다고?! 결국 실버애쉬가 미간을 짚고 짧고 깊게 한숨을 내뱉자 팬텀이 나열된 털 옆으로 무엇인게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한다.
“이건. 뭔…”
가느다란 털 몇 조각. 그리고 다시 꺼내는 손가락에 얹어진 것은 또 가느다란 털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작은 털 하나하나 작은 모여 하나의 뭉치를 보이기 시작한다. 실버애쉬가 건낸 비스트의 털보다는 양도 적고 털도 짧은데다가 몇몇은 방치된 듯 질도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지만-.
“이틀간 열심히 모았다.”
실버애쉬는 책상위로 모인 미스 크리스틴의 털을 보고 작게 탄식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전의 제대로 완성하라는 실버애쉬의 말을 듣고 이틀간 털만 잔뜩 모아온 거라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많은 털이 저 작은 고양이의 몸에서 나왔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그것보다도 그냥 곧이 곧대로 행동하는 이 청년의 행동거지도 정말 말이 안되었다. 하지만 이러기를 요구한 것은 실버애쉬다. 조금 어린 아이정도의 행동거지를 반복하는 듯한 착각을 지우기 힘들다. 반사적으로 어린 여동생을 떠올린 실버애쉬는 팬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욕구를 꾸욱 누르면서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럼 그걸로 만들면 되겠군. 책과 참고할 완성품들은 이미 구비해뒀다. 필요하다면 선생도 붙여주지.”
말을 마친 실버애쉬가 다시금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다. 난 이게 네 취미라고 생각해서 준비했는데…”
짧은 한숨.
“그냥 털을 모우고 뭉치는 것이 취미였다니 놀랍군. 다른 취미로 바꾸고 싶다면 지금 이야기 해라. 나는 내가 정하는 걸로 네가 결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걸로 하겠다.”
연극조로 화려하게 말을 하던 팬텀은 정말 이상한 부분에서만 말이 짧고 확고하다. 실버애쉬는 팬텀의 결정이 본의인지 아니면 실버애쉬 자신이 바라는 일인지 관찰하려다가 그대로 생각을 멈추었다. 이 사내와 말을 얽고 사생활을 공유할 수록 조금씩 자신 또한 휘말리고 변해가는 것만 같았으니까. 물론 그런 변화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실버애쉬는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쉐라그, 히라, 가문, 가주, 여동생, 종교, 변화와 진보…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때문에 미쳐 실버애쉬의 근처에 검은 고양이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발목을 부비는 걸 그대로 두었다가… 갑작스럽게 물려 이번엔 팬텀이 있던 공간에서 실버애쉬가 쫓겨났다.
“…하?”
이전처럼 강하게 공격한 것은 아니었으나 미스 크리스틴은 노골적으로 실버애쉬가 방 밖을 나갈 때까지 발목을 찾아 가볍게 물어냈다. 따가움 이상의 충격을 받지 못하는 사소한 공격. 이전에 팬텀을 쫓아낸 것에 대해서 저 검은 고양이가 앙심을 품은게 분명하다. 구두를 신고 있지 않았다면 발가락을 물었을 게 분명하다는 근거없는 확고함을 가지고 실버애쉬는 마음속으로 인내심을 한 번 더 되새겼다.
붕대가 늘어난다. 미스 크리스틴의 우아하고 말도 안되는 응징에 의한 실버애쉬의 발목도 그렇지만 반대로 니들펠트를 배우고 시작한 팬텀의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실버애쉬는 이제 팬텀이 미스 크리스틴의 털을 뽑아서 쓰기 때문에 이렇게 세세하게 응징을 당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저 고양이는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왜 자신을 괴롭히는거지? 실버애쉬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관찰했지만 미스 크리스틴의 변덕스러움과 행동에 별다른 의미와 의도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저 팬텀의 손가락이 다치는 만큼 자신의 발목와 발가락이 다친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대략적으로 맞았다.
“실버애쉬?”
팬텀은 방문 밖에 놓인 커다란 고급스러운 가방을 보고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 까지 인기척과 발걸음 소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실버애쉬가 다녀간게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의 형태는 없고 그저 고급스러운 가방 하나만이 방 밖에 놓여져 있었다.
“메웅.”
미스 크리스틴이 가방의 뒤로 가서 꾹꾹 팬텀을 향해 가방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팬텀은 가방이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받아들면서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바라보았다. 또 알 수 없는 요구를 보내온 것일까. 익명의 선물은 언제나 불유쾌한 경험과 함께 다가오곤 한다. 이전에 있었던 경험들이 팬텀의 발목을 잡았으나 팬텀은 서둘려 작업하던 책상의 위로 가방을 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털어냈다. 그가 나에게 그런 것을 보낼리가 없어. 길지 않은 생활 속에서 팬텀도 팬텀 나름대로 실버애쉬를 관찰하고 판단해 왔다. 그는 여기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욕망을 원하면서도 절제한다. 쉬운길을 알면서도 굳이 먼길을 돌아 직접 행동하기를 원한다. 그는 욕망을 다룰줄 아는 사람이다.
“미스 크리스틴.”
가방을 방으로 떠밀었던 검은 고양이는 가방의 주변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가방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서둘러 팬텀이 이 선물을 개봉해 보기를 그리고 자신에게 구경시켜 주기를 종용한다. 고양이의 손으로 열수 없는 구조의 가방을 꾹꾹 누르던 그녀는 결국 꼬리로 팬텀의 팔을 잡고 톡톡 두드렸다.
“알았다. 이제 이 비밀을 캐어 볼테니 너무 제촉하진 말아줘.”
걸쇠를 풀고 가방을 꾹 눌러 밀어 열자 금색과 오크색으로 된 가방이 마치 오르골이 열리듯 부드럽고 우아한 몸짓으로 작동했다. 바닥에는 네모난 나무틀에 보드라운 천이 감싸져 놓여있고 그 위로는 각종 바늘과 손잡이 그리고 오일과 핀셋 등의 도구가 자리잡고 있다. 666이라고 새겨진 가위라니. 자신의 이름보다도 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가위를 보고 단숨에 팬텀의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방을 빙그르르 돌아보던 미스크리스틴이 가방의 뒤에서 귀와 꼬리를 쫑긋거린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유성 같구나.”
어디서 찍었을지 모르는 미스 크리스틴의 사진 두 장이 나무틀 위로 놓여져 있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과 세로로 갈라진 눈을 확대한 모습. 그야말로 미스 크리스틴의 펠트를 만들기 위한 자료이자 항상 그녀를 옆에 두는 팬텀이 차마 생각치 못하고 있었던 방법이다. 그리고 실버애쉬라면 당연히 생각할 법한 방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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