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허상

박사x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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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는 서류를 정리하던 도중 자신의 비서를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자신의 옆에 있어야 할 팬텀은 자리에 없다. 박사는 가면을 쓴 존재가 자신의 옆에서 나지막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걸 느낀다. 팬텀의 능력, 거울속 환영이다.

환영이 정말 독립적 자아를 가지고 있는지, 팬텀과 구분할 수 있는지, 팬텀의 정신적인 부분과 맞닿아 있는지... 박사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박사는 팬텀의 환영에 기꺼이 솔리테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가 크림슨 극단에 있었을 적에 코드네임으로 추정되는 명칭이다.

"솔리테어."

가면이 가만히 고개를 돌리고 박사를 바라본다. 검은 구멍이 박사를 담는다. 그 아래의 있는 얼굴은 분명 팬텀과 같겠지만... 박사는 뒷목의 서늘함을 참고 목소리를 깔았다. 겁먹지 않은 연기를, 두렵지 않은 행동을 해야만 하니까. 

"팬텀은?"

가만히 들여다보는 모습에는 어떠한 의문도 없다. 이 질문이 자신의 배역에 맞는지 확인을 하고 있을까? 모르겠다. 팬텀은 알아도 솔리테어에 대해 박사는 무지하다.

팬텀은 루시안이다. 솔리테어는 루시안이다. 루시안은 팬텀이자 솔리테어다. 박사는 팬텀을 루시안이라 감히 부르지 못한다.

"자아가 가라앉았다."

짧은 말과 끄덕임. 솔리테어는 명료하게 사실만을 고한다. 박사가 요구한 연기에 맞춰주는거다. 다시 고요해진 방 안에서 박사는 현기증을 느꼈다.

바벨의 망령, 과거의 자신, 수 많은 사람들을 지휘하고 피 속에 파묻어버린 자신. 그리고 기억을 잃은 자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자신, 여전히 사람을 지휘하고 사지로 내몰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둘은 같은 닥터라는 명칭에 묶여있지. 루시안 아래에 팬텀과 솔리테어가 묶여 있듯이.

"팬텀을 불러와."

솔리테어는 침묵한다.

팬텀의 자아, 솔리테어의 자아 그 중에서 박사는 명백하게 팬텀을 요구한다. 자신은 망각이라는 은총 아래 바벨의 망령을 잊어버렸으니까. 하지만 루시안은 그러지 못해.

"솔리테어."

부름에도 응답하지 않는다. 극단에 박사가 간섭할 권리따위 있을리가 없다. 둘을 구분짓지 말아야 했었나. 하지만 구분 짓지 않으면 팬텀은 극단의 광기에 영원히 빠져있어야 한다. 그 환영에 피에 노래에 지배에... 둘을 합치는 건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루시안이라 부르는 건 아마도 이후에 그가 자아를 의지를 확립하고 나면.

"팬텀이 필요해."

솔리테어는 여전히 가만히 박사를 응시한다. 그리고 불현듯 쓰러져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환영이라는 이름 그대로 흔적도 없이. 뒷목의 서늘함도 같이 사라졌다. 박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팬텀을 찾으러 갈 필요는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박사는 언제나 찾아야 했다. 그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자아를 찾아야 했다.

박사는 천천히 팬텀에게 부여된 선실의 내로 들어갔다. 방은 어둑하고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완벽한 어둠이다. 방공호이자 팬텀이 살아온, 어쩌면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곳이다. 박사는 문틈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빛을 보았다. 그 빛 아래에 검은 고양이가 나타나 꼬리를 살랑인다. 이 검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빛을 받고 눈을 반짝이는 존재다. 푸른 빛의 눈동자를 보고 박사는 천천히 몸음 웅크려 그녀를 맞이했다.

“팬텀은 어디에 있나요?”

아까같은 서늘함 대신 따스하고 포근한 고양이의 체온이 닿는다. 어떤 울음소리도 어떤 행동도 없이 그저 포근하게 안겨온다. 박사는 이 방 안에 팬텀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육신은 비록 지금 박사의 사무실 안에 있지만 그의 자아는 언제나 허공을 맴돈다. 미스 크리스틴을 안아들어올리고 박사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이 어둑한 곳이 빛에 녹아내리지 않도록 어둠에 익숙한 그가 자극받지 않도록.

끼이익.

작은 소음과 함께 아주 천천히 열린 문 그 빛을 받은 방은 그 어떤 인기척도 없이 그저 존재만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먼지 한 톨도 없고 누가 생활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살벌할 정도의 방이다. 박사는 문을 활짝 연 다음 아주 천천히 문 옆에 기대고 섰다. 팬텀이 정신을 차리면 분명 이쪽으로 올테니까.

박사는 품안에 안긴 체온을 안아들고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어디서 그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가. 자신은 그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아미야, 켈시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엘리트 오퍼레이터. 그리고 자신이 기억한 엘리트 오퍼레이터. 자신을 위해 죽음을 불사른 자들과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지만 결국 갈라선 자들.

박사는 눈을 감았다가 다급하게 눈을 떴다. 어둠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미약한 빛 속에서 박사는 유령처럼 기척도 없이 다가와 무릎을 꿇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 자는 솔리테어일까? 아니면 팬텀일까? 박사는 한참을 말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내뱉었다.

“루시안.”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이름을. 루시안이 고개를 든다. 눈동자 속에는 혼란과 공포 그리고 읽어낼 수 없는 수많은 감정들과 대본들이 자리잡는다. 박사는 특출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런 주어진 것들에 막혀 루시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박사와 루시안 사이에는 수 많은 장벽이 있다. 박사는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솔리테어인지 팬텀인지 구분해야한다. 박사의 편을 들고 박사의 암살자로서 살아가는 자는 팬텀 뿐이니까.

“팬텀.”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는다. 박사는 서늘하게 다가오는 듯한 공기를 느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솔리테어.”

그럼에도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절박함에 빠진 눈동자를 바라본다.

“박사.”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정신을 차렸나? 너의 자객을 연기하고 있는게 맞는건가? 지금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건지 아니면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다.”

목소리가 점점 격렬해진다. 박사는 다급하게 루시안의 목을 잡았다. 순식간에 고양이가 뛰쳐나가 빛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이 어둑한 방에 남은 존재는 박사와 루시안 밖에 없다.

“쿨럭.”

제어구를 강하게 잡고 조이는 모습은 흡사 목을 조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박사는 더 강하게 제어구를 다잡았다. 루시안의 목소리는 위험하다. 루시안이 바라는 것은… 아니 팬텀이 바라는 것은 다정하고 그의 노래를 들어주는 박사가 아니다. 그의 목소리를 제어하고 그의 칼날을 이용해 목표를 이루는 그런 모습일테니까. 하지만…

“…”

기침소리조차 멈춘 공간. 잠시의 침묵을 타고 가면이 슬그머니 루시안의 얼굴위로 쏟아진다. 그림자처럼, 어둠처럼. 커다란 검은 구멍이 박사를 바라본다. 박사는 그 찰나에 이 구멍 속에도 루시안의 황금빛 눈동자가 비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박사의 앞에 있는 존재는 솔리테어다. 분명하다. 하지만 박사는 서늘함을 느끼는 대신 어쩔 줄 모르는 감정 속에 갇혔다.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게 과연 환영일까? 아니면 루시안 본인일까? 허상을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가면 속의 미약한 꿀빛이 박사의 손아귀를 잡아 끌었다.

박사는 천천히 목을 놓았다. 그리고 거울 속 유리를 만지듯 그렇게 손을 뻗는다. 어둑한 가면 위에서, 박사는 허상을 더듬어 루시안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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