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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애의 이상적 결말 (연성 교환)

2차 CP 연성 교환 / 2024. 05. 23

기억의 조각 by 匿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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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일방주 총웨 X 여박사

지인과의 연성 교환으로 작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자는 괜히 제 방을 둘러본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평소에도 그리 깔끔하지는 않았으나 오늘은 유난히 더 엉망이었다. 평범한 연구 문서는 물론이거니와 로도스 아일랜드사(社) 기밀에 해당하는 자료까지 책상 위에서 마구잡이로 구르고 있었다. 그것 뿐이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도저히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방 구석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뻔뻔스레 앉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반으로 곱게 접힌 종이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초대장 같다. 여자는 그게 그저 그런 것이 아님을 안다. 초대장 표지는 우아하고 고급스럽다. 누가 봐도 그 만듦새에 제법 신경을 쓴 것 같다. 다만 표지의 글자가, 그러니까 이 행사의 목적이 여자는 과하게 부담스러웠다. 축 결혼. 그랬다. 이건 청첩장이다. 두 존재가 만나 연을 맺는 일은 틀림없는 경사였다. 결혼식은 대부분 낮에 열리기 마련이라 허구한 날 밤을 새우며 보고서를 다듬는 여자에게 있어 참석 자체가 조금 피곤할 뿐이었다. 그 정도 피로를 감당 못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박사는 조심스레 종이를 펼쳤다.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는 귀중한 자리에 증인으로써 참석을 부탁드리오니…….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 아래로 날짜가 쓰여 있다. 내일이다. 더 중요한 내용은 그다음 부분에 있다.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둘 다 익숙했다. 신랑 총웨.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음. 신부. 그 낯선 단어 곁에는 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자는 하객이 아니었다. 주역이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무엇 하나도.

여자는 로도스 아일랜드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고위 간부라서. 그런 시답잖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자는 대개 이름보다 사회적 신분으로 불렸다. 박사. 그건 마치 여자만을 위한 명사 같았다. 실제로 이곳에서 ‘박사’는 고유명사처럼 쓰였다. 오리지늄 활용 분야에서 그녀보다 박식한 사람은 없었다. 광석병 연구 쪽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레 명성은 여자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왔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저명한 학자라고 한들 그 모습까지 회자되는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여자는 남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박사는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그 위에 페이스 가드까지 걸친 채로 나타났다. 모두 그 낯을 궁금해했다. 수면 아래의 갈등은 차치하고 어찌 됐든 여러 종족이 공존하는 테라에서 그렇게까지 얼굴을 숨겨야 할 필요가 과연 무엇일까. 호기심은 피할 수 없는 폭력마냥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참석 의사를 밝힌 하객의 수가 유난히 많은 것은 예비 신랑과 신부의 유명세 때문만은 아님을 여자는 알았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궁금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 결혼식에서는 그 대단한 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겠지. 다들 입은 다물고 있었으나 뻔했다. 안타깝게도 박사는 여태 그러했듯 내일도 페이스 가드를 벗을 생각은 없었다. 제 얼굴은 제 신체 일부였으니 그것을 숨기는 것도 드러내는 것도 제 자유였다. 아무 문제 없었다. 여자는 떳떳했으나 동시에, 다가올 날들이 무서웠다. 식을 미루거나 취소한다고 사라질 감정은 아니었다. 박사는 근본적으로 이 결혼이 두려웠다. 겁이 났다. 어디 팔려 가는 것도 아니고 부당한 계약이나 협박에 의한 것도 아닌, 아주 정상적인 혼례임에도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결혼이라니……. 더는 무를 수 없게 하루 앞으로 다가온 식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정작 곧 여자의 남편이 될 남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하기야 그런 식으로 쏟아지는 일개 사람들의 불쾌한 시선을 의식할 사람은 처음부터 아니었다. 여자는 새삼 그를 떠올린다.

총웨. 여자가 익히 아는 링과 니엔과 시의 오라비. 쉐이의 파편 중 하나라고는 해도 일단은 평범한 인간이다. 수백 년에 걸쳐 무예를 갈고 닦았으며 그 힘으로 염국을 오랫동안 지켜 왔다. 일찍이 로도스 아일랜드에 입사한 그의 여동생들로부터 별난 큰오빠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몸을 단련한다나……. 물론 그게 그를 다른 무엇이 아닌 ‘총웨’로서 존재하게 하는 핵이라고는 해도 보고 있으면 징그러울 지경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여자는 그를 단순한 대화 소재 정도로 여겼다. 언젠가 만날 가능성조차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하고 방문객이라는 이름 아래 로도스 아일랜드에 눌러앉은 사안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실제로 일어났으니 무를 수도 없었다. 세 자매가 그를 소개할 때도 그저 또 새로운 이가 이곳에 왔구나, 하는 단순한 감상만 남았다. 감흥조차 없었다. 하루에도 이곳을 찾고 떠나는 사람이 제법 되었기에 쉬이 정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형식뿐인 인사를 나누며 여자는 그가 자신과 엮일 일이 없는 부류라고 짐작했다. 추측보다는 확신에 가까웠다. 예측은 엉망으로 실패했다. 박사는 그에 관해 잘 알지 못했으며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실험실에 틀어박혀 연구를 하거나 전장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지휘하는 게 본업인 여자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서 거침없이 싸우는 남자 사이에 공통점이 뭐가 있겠는가. 박사는 그를 잠깐 머무를 손님 정도로 취급했지만 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총웨는 박사에게 순진한 호의를 보였다. 단순한 호의라고 부르기엔 무거운 감정이었다. 차라리 연정에 가까웠다.

사랑이란 대체 무엇일까. 여자는 그 기이한 감정보다 광석병에 대해 더 많이 알았다. 연구의 최첨단을 달리는 박사조차 그 병에 아주 박식하지는 못했다. 사랑은 여자의 분야가 아니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 감정 자체에 무지하지는 않았다. 여자는 제 주변 사람을 나름대로 사랑해 왔다. 특별하게 어떤 개인을 마음에 두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저 세간의 사랑이 어려웠다. 관련 논문을 아무리 뒤져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겨우 잠들 시간에 일어나 훈련에 임하는, 정반대의 남자가 자꾸 제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도 쉽게 의식할 수 없었다.

박사는 총웨가 잠에 든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혹시 하루가 48시간인가? 그런 되지도 않는 의심을 품은 적도 있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게 아님을 알았다. 여자는 총웨를 꽤 자주 발견했다. 훈련장에서 몸을 단련하는 광경은 흔했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목재를 다듬는 모습도 몇 번이나 보았다. 그걸로 뭘 만드는 걸까. 이따금 호기심이 일었으나 물을 필요는 없었다. 박사를 발견한 그가 먼저 다가와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구구절절 늘어놓았으므로. 싫지는 않았다. 고개를 한참 들어올려야 겨우 시선을 맞출 수 있을 만큼 남자는 여자보다 키가 훨씬 컸다. 허나 박사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총웨는 늘 여자 앞에서 몸을 숙이곤 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떠드는 남자가 신기했다. 향 좋은 커피를 들고 연구실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가 직접 내린 커피였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들었다. 아무 약속도 잡지 않았는데도 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당연하게 차츰 늘어났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꽤 괜찮았다. 아니다. 좋았다. 남자는 첫인상과 다르게 제법 귀여웠다. 산책길에 발견했다면서 꽃을 내민 적도 있었는데 이 근방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행동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주춤거리고 있노라면 그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리곤 했다. 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총웨는 틀림없는 인간이었고 또 인간을 좋아했다. 그러나 여자는 그를 보며 거대한 한 마리 짐승을 떠올렸다. 그의 노련하면서도 서툰, 그 모순적인 행위가 어쩐지 짐승의 구애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저 낯설 뿐이었다.

여자는 생경함을 겁내지 않는다. 박사니까. 실험 설계서에는 단계가 하나씩 명시되어 있어도 현실은 다르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많은 게 변해버린다. 사실 실험 중에도 함부로 그 앞을 벗어나서는 안 되지만……. 아무튼 정신을 차려 보니 여자는 그에게 청혼을 받고 있었다. 난 귀공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네. 이게 청혼인가? 총웨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닿을 법한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박사는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특별하고 거대한 사건 따위는 없었음에도 그것은 갑작스럽게 날아왔다. 확신은 들지 않았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머릿속이 한순간에 복잡해졌다. 중요한 실험 도중에 시약을 잘못 넣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보다 더 아찔했다. 평생. 그 울림이 유난히 어색했다.

“자네가 또, 못 알아들은 척 빠져나갈까 봐 하는 말인데……. 이거, 청혼일세. 귀공의 반려로 삼아 줬으면 하네.”

“……”

또? 괜히 그 말이 귀에 걸린다. 총웨가 부정의 가능성을 먹어 치운다. 여자의 몸이 한 차례 움찔거린다. 남자의 붉은 눈이 바로 앞에 있다. 페이스 가드가 튼튼한 것을 알면서도 두려웠다. 시선이 여자의 낯을 꿰뚫었다. 그는 결코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남자는 이미 저 혼자 답을 정해둔 게 틀림없었다. 도저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박사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제 마음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나?……. 확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말았다. 이것이 세간에서 떠드는 사랑인지는 알 수 없었음에도 박사는 기꺼이 그러했다. 여자가 고개를 아주 조금 움직인 순간 거대한 압력이 몸을 짓눌러왔다.

그 뒤로는 모든 게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박사 본인보다 총웨의 여동생들이 더 들떠 있었다. 그들은 오빠의 결혼보다 박사의 결혼이 더 즐거운 듯했다. 총웨 또한 미리 생각해 뒀던 바가 있었는지 준비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래도 되나? 원래 이런 건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여자는 차츰 불안해졌다. 총웨는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모호한 마음으로 평생을 약속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분에 넘치는 감정을 받아도 되는 걸까. 가끔 숨이 막혔다. 목을 막는 것이 죄책감인지 불안인지 여자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대체로 그런 종류였다. 불안의 씨앗은 결혼을 준비하면서 그에 맞춰 성장했다.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나무는 잎과 가지를 흔들었다. 식이 당장 반나절 앞으로 다가온 지금은 상태가 심각했다. 불안은 한 그루에 그치지 않고 결국 거대한 숲을 이루었다. 여자는 당장이라도 그 숲에 뛰어들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 도망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면서도 그저 달아나고 싶었다. 그 순간 누군가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슬슬 잠자리에 드는 게 좋지 않겠나?”

“총웨, 대체 언제 온 거야? 기척도 없이.”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왜 문도 안 두드리고 들어왔냐고 뭐라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남자가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다. 짐승이 제 짝에게 그러하듯 마구 고개를 비벼댄다. 이런 행동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총웨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드문 일이었다. 박사 앞에서의 그는 꽤 말이 많았으므로. 여자는 남자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예비 신부님.”

“응?”

“설마, 이제 와서 무를 생각은 아니겠지?”

몸이 작게 튀어 오르려고 하는 것을 남자가 힘으로 막는다. 박사가 그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총웨 역시 여자를 볼 수 없다.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박사의 기분을 예리하게 건져내었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남자의 음성으로부터 불안을 읽어냈다. 그냥, 전부 알 수 있었다. 목소리는 떨리지도 않았고 평소와 같았는데도. 셈하기 귀찮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산전수전 다 겪은 청년으로부터 여자는 아주 자그마한 소년을 발견한다. 그의 불안은 들불이 되어 여자의 숲에 화마를 불러 온다. 바닥에 던져진 불씨가 서서히 위로 올라가 숲 전체를 뒤덮는다. 박사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테라의 이방인. 테라에 얼마 남지 않은 무언가. 혹은 유일한……. 박사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을 옮겼다. 손가락 끝이 남자의 뺨을 매만진다. 그는 말이 없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자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염국은 어때?”

남자가 낮게 웃었다. 명백한 긍정이었다. 불안은 끝내 자취를 감췄다. 남자에게서도, 여자에게서도. 여자의 숲은 전소되었다. 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박사는 감히 생각했다. 이 사람이어야만 했다. 이 사람이 좋았다. 결혼에 관하여 여자가 먼저 입을 연 게 그 질문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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