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피아/최전선 에트랑제]

나척쌀 by 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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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넓은 평원 위 크게 공명했다. 풍채 좋은 사내가 억눌린 비명과 함께 그리도 쉽게 휘청였다. 그가 넘어지기 바로 직전,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렸다. "대장!" 그는 순간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기 시작했다. 처음 받아보는 총알에 눈앞이 캄캄해지면서도 가능한 한 눈을 똑바로 뜨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자꾸 초점이 풀렸다. 살카즈가 탈취한 총을 발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상황을 되짚어보며 정신을 차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오게 된 배경부터 생각해 보자. 사내는 한 눈에 봐도 상당히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는 사람들은 "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그것이 각자의 집이든 남자의 꺼림칙한 신조와 뱃사람의 허무맹랑한 미신으로 가득할법한 집이든-단단히 결속됨의 축복을 체감했다. 이질성을 입사시켜 친숙함을 반사시키는 거울. 확실히 이런 비유는 머릿속이 복잡한 그에게는 불쾌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가 최대한 이 느낌을 밀어내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안도아인! 대장! 눈 감으면 안 돼. 조금만...! 젠장, 출혈이 심한 것 같아, 모스티마!" 안도아인이 스스로 주마등을 그리기 시작할 동안 피아메타는 힘겹게 그의 몸을 제 등 위에 실었다.

어쩌다 부두 위까지 끌려왔는지 이따금 그를 태우고 얕은 바다까지 나갔던, 선실의 못 박힌 나무판자 결에 난 무늬마저 되짚어낼 수 있는 배 한 척만이 기울어진 채 죽어가는 것들 특유의 삐걱이는 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건네면서 그를 반겨주었다. 다음 순간 이미 숨을 멈춘 배에게 나머지 잔해의 행방을 물었다. 모두 어디 갔으며 또 당신은 어느 세상으로 떠나려고 하시나요. 죽은 자에게 물어 돌아오지 않는 대답처럼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들에 대하여 떠올렸다. 이를테면 바다 밑 가라앉은 외로운 유리병 편지와 '이베리아의 영광', '황금 시대' 같은 것들. 모두 주교가 멀리하라고 했던 것들이다. 안도아인이 이 도시에 온 후 처음으로 몰두한 것은 그런 풍경이었다. 그는 그 풍경 속에 침잠해서 차라리 천천히 익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싸락눈이 그의 머리칼과 속눈썹 위에서 녹던 성탄절 아침, 어김없이 공원의 벤치 위에서 그는 앳된 산크타 소녀에게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라는 말과 함께 따끈한 빵 한 조각을 받았다. 순간 안도아인은 좋은 날이라는 단어에 갇혀버렸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다른 누군가를 저주하기 좋은 날일 것이다. 굳은 이가 갈렸다. 그는 그 대신 빵을 입 속에 허겁지겁 구겨 넣었다. 그렇다. 그날은 정말로 좋은 날이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애인 한 쌍이 공원을 가로질러 뛰어갔고 남색 더플코트를 입은 아이들 무리는 혓바닥 위에 눈송이를 올려놓고 웃고 있었다. 모금함의 작은 종이 규칙적으로 딸랑이는 소리가 눈발을 갈랐다. 온기가 돌아옴과 동시에 아주 오랫동안 보려 하지 않은 라테라노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는 스스로 정상적이다 못해 이상적인 그것들을 마다하기에는 아직 창창하다고 느꼈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노스텔지어에 대한 욕망이 눈떴다. 이름이 르무엔이라고 밝힌 소녀는 어느새 작은 눈덩이를 굴려와 그에게 장난스럽게 던졌다. 명중이었다. 

이후 수호총과 역할을 가진 어엿한 산크타가 된 그는 곧 한 소대에 배치되었다. 안도아인은 굳이 시키지 않은 일까지 맡아 하며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다. 아무도 쓰지 않으려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버릇은 그때 들였다. 분명, 우리라는 말은 우선 에 대한 정의를 확립해야 말할 수 있는 단어이다. 르무엔과 모스티마가 소대에 합류하고 대장이 된 것은 그가 고민하고 망설였던 '우리'라는 말을 내뱉는 것이 이렇게나 쉽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사내는 그야말로 충만했다. 술자리에서 오고가는 건배사, 웃어넘기는 조금은 속된 농담들이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잔을 맞부딪히고 술을 흘릴 수 있었다. 머리 위 광륜이라는 실체 없는 연결이 그의 집이 되어준 덕분이다. 

"예, 오늘부터 본 소대에 배치된 피아메타입니다."

그 자리의 누구보다 옷이며 자세의 각이 빳빳하게 제대로 잡힌 여자가 안도아인 앞에 섰다. 그 모습이 생소해 그는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훑어보았다. 잘 정돈된 붉은 머리와 꼬리깃, 끝까지 잠긴 셔츠 단추, 똑바른 위치에 맨 넥타이, 살짝 내려 자칫 퉁명스러워 보이는 경직된 입꼬리, 무엇보다 희미한 화약냄새로 보건데 이 리베리는 타고난 군인이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경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돼. 피아메타, 춥지? 차 한잔 내올게." 피아메타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기까지 했다. 모스티마와 르무엔이 작게 큭큭댔다. "대장이 원래 그래. 너도 그냥 편하게 안도아인이라 불러."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 고개를 저었다.

갓 내온 찻잔 속 장미 꽃잎의 향기가 작은 방 안에 가득 찼다. "아, 네가 그 아이인지 궁금해서, 긴장할 것 없어." 유령처럼 투명한 사내의 분명한 질량을 알려주듯 1인용 소파가 푹 꺼졌다. 피아메타는 상급자의 눈을 되려 쫓으며 열정적으로 마주치려 노력했다. "최초의 리베리 총기사가 될 거라며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던걸." 그녀는 입술을 찻잔에서 떼고 말했다. "과찬입니다, 대장님. 라테라노를 지킬 수만 있다면 저는..." 안도아인은 머리 위 광륜도 없는 이 리베리를 보며 집이 있는 인간들 특유의 견고함을 느꼈다. 오래된 나무의 밑동에서 느껴지는 견고함이 아닌, 우뚝 솟은 요새 벽의 뿌리 없는 견고함을. 그가 찾은 그녀는 고결한 노력으로 지어 올린 최전선의 벽이었다.

마지막으로 떠올린 기억은 안도아인의 소대가 이베리아 국경 인근의 적을 소탕하기 위해 파견된 날이었다. 출발 전부터 모스티마는 그가 평소와 다르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고 말했다.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들을 추구하고 자부하는 그 나라 특유의 정서는 거리를 가득 메운 망령들이 되어 걸어 다녔다. 잘못 들어섰다고 믿고 싶을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다. 길을 묻기 위해 찾은 민가, 삐그덕거리는 나무 문을 밀고 나온 얼굴가죽은 수난에 너덜거렸다. 원래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늙어 보이는 여인 뒤에는 무구한 소년 소녀가 매달려 있었다. 앙상한 몸에 전구를 매단 고기잡이 배가 뜬 밤바다같이 배고픔에 반들반들 닦인 그들의 눈동자는 안도아인을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태엽이 다 풀려서 뚝뚝 끊어지는 오르골의 노래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뱉은 말은 더욱-물론 그에게만-오싹했다. 말을 마친 여자는 힘없이 문틀에 기대 태연하고 구슬픈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당신, 이베리아인이었나요?... 당신의 눈에는... 향수가 있어요."

"정예 저격수 소대 대장, 안도아인입니다. 파견을 명령받았습니다." 수염을 기른 늙은 리베리는 거만한 자세를 유지하며 안도아인의 내민 손을 물리쳤다. "그래, 자네. 라테라노인인가?" 피아메타가 그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휴식시간, 회랑을 끊임없이 돌며 진리를 찾으려는 수도사처럼 안도아인은 바닷가를 맴돌았다. 그가 방금 본 사람들은 이베리아인이다. 이베리아의 화려한 만큼 폭력적인 과거를 하루하루 조금씩 뜯어먹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취해 살지?' 물론 라테라노인의 쾌락인 단맛, 환각같은 폭발이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지금껏 인정을 빌려 살아갔다. '아니, 아니야.' 부정하고 싶었다. 그를 '라테라노인'으로 만든 라테라노가 증오스러웠고, 정체성을 버리고 무릎 꿇은 자신이 치욕스러웠다. '나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이지?' 천만에. 이런 그를 받아줄 곳, 그가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간만에 그의 뭍으로 떠오른 간단한 질문 하나가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결국 그는 그날 모든 탄환을 불발시켰다.

그녀는 정신없이 젖은 셔츠의 단추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여기서 진료소는 너무 멀어. 내가... 어떻게든 빼볼게." 어느새 피아메타의 손에는 핀셋이 들려있었다. 차갑고 독한 소독약이 상처 위로 쏟아졌다. 그 전에 입에 물린 낡은 헝겊의 덕택에 안도아인은 비명을 참아낼 수 있었다. 액체가 환부에 흡수되자 그는 헛구역질을 연거푸 해댔다. 피아메타는 그런 그의 손을 안심시키듯 잡아주었다. 그동안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묻은 다정한 손이다. 차가운 핀셋이 살 밑에 들어오자 그는 참았던 신음을 내뱉었다. "피아메타... 너무... 아파..." 숨이 섞인 목소리가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마치 파도에 휩쓸리며 잡아보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그는 그녀의 손을 쥐었다. 식은땀과 뒤섞인 눈물이 사내의 턱에 매달렸다. "이제 끝났어." 그녀는 상처들을 그 순간에도 붉게 물들고 있는 붕대로 감으며 말했다. 소녀 세 명이 붙어 들것 위로 옮겨진 그는 그제야 눈을 감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하게 뜨인 눈에 얼핏 형형히 빛나는 광륜 세 개가 들어왔다. 아이리스로 장식된 관 속에서 내세의 숨을 내쉰다. 눈이 새까맣게 내리고 있다. 라테라노를 사랑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눈이, 닿을 수 없는 곳을 저열히도 욕망했던 그날들의 흔적이 하늘에서 긁혀 떨어져 나갔다. 금세 관 위로 하얗게 눈이 덮였다. 흩어지는 입김을 관찰하며 그는 사자라는 범주에 묶인 자신이 진정 이 경치에 속해있다고 느꼈다. 적어도 이방인을 받아주는 곳인 죽음은 진정한 낙원임이 틀림없었다. 바다도, 하늘도 아닌 경계에서 그는 죽었지만 살았다. "대장 생각보다 무겁네." 팔이 저려오기 시작한 모스티마가 투덜거렸다. "입술이 파래졌어." 르무엔의 낭랑한 목소리가 좁은 하수도에 울려 퍼졌다. 오직 피아메타만이 침묵을 지켰다. 유감스럽게도 안도아인은 띄엄띄엄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반응하거나 소대원들의 발목까지 차올라 고여 썩어가는 물비린내를 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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