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YOUR D

- by 해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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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한 검은색의 세단, 차의 바퀴는 미국 콜로라도의 연방 고속도로 3번을 타고 도로를 남하한다. 서쪽 하늘은 폭탄이 떨어진 듯 심홍색으로 물들었고 포물선 모양의 긴 구름이 뻗쳐 있었다. 제레미 레인의 눈은 공허했다. 왼쪽 동공은 백내장이 온 마냥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고 반대쪽 시선은 눈 앞에 펼쳐진 고속도로의 점선을 따를 뿐이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고 신호 없는 길목을 무작정 건넜다.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데다 호흡할 때마다 옅은 버번의 향기를 흘렸다. 정신은 그 어떤 때보다도 또렷했고 머리는 맑았다. 핸들을 쥔 손에 묘한 핏기가 어려 있다는걸 확인하고 입고 있던 옷의 어깨춤에 적당히 닦아내었다. 지금껏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루도 제정신인 날이 없었던 어미의 핏줄을 자신이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길목을 따라 차를 움직이면 곧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듯 광채 어린 구름이 머리 위를 감쌌다.

생각을 더듬지 않아도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그건 바로 다나 데블린의 신변이었다. 차의 트렁크에서 버둥대며 차체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뜬다. 죽길 바란 건 아니지만 멀쩡히 살길 바란 것도 아니었기에. 우리의 관계가 끝을 봐야 한다면 그것은 살해로 성립되어야 한다. 애절한 그리움으로 끝나 회한에 잠식되느니 마지막 남은 사랑을 걸레 짜듯 쥐어짜내 끝장을 보아야만 했다. 네가 내게 그랬듯이.

폭행에 의한 영구적인 신체 결함으로 군에서 제대했지만 제레미 레인의 체력과 정신력은 여전히 강인했다. 뇌가 터질 듯 짓눌리는 중력, 퇴로가 없는 상공에서 마주한 적기, 캐노피 안의 수신호. 적국의 낯선 언어가 무전을 통해 귓가에 꽂히는 것, 공중 폭격으로 날아가버린 전투기에서 발견한 동료의 몸 조각. 거룩한 희생인 양 포장한 개죽음을 목도하는 것 마저도 견딜 수 있었고 여전히 그랬다. 눈물로 흐느끼거나 신을 찾는 행위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동이라 생각했으니. 적어도 다나 데블린이 그런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인적이 없는 길목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를 열면 박스 테이프로 어설프게 감긴 다나 데블린이 보인다. 관자놀이는 둔기로 얻어맞은 듯 피가 흘러 말라붙어 있었고, 갑자기 내리쬐어진 노을빛으로 충혈된 푸른 눈은 가늘게 감긴다. 가로막힌 입 덕분에 얼굴 또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후두부를 강타당한 여파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고개를 기울인다. 식은땀으로 이마에 엉겨붙은 옅은 금색 머리카락이 고개를 도리질할때마다 애처롭게 흔들렸고 등 뒤로 묶인 두 팔과 발목은 죽은 듯 가만히 자세를 유지하다 몸을 뒤흔든다. 제레미 레인은 러시아 말을 중얼대며 휘청이다 트렁크 끝자락에 허벅지를 대고 앉아 자켓 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배기 가스 섞인 공기가 호흡기로 흘러들어와 담배 연기와 함께 들이마셨다. 제레미 레인은 대화를 이어가던 중 그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고, 만취한 채 언쟁을 이어가다 그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테이블에 올려진 화병으로 가차없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무릎을 꿇고 비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셈이었다. 함께 쇼핑몰에 들러 고른 부드러운 러그 위에 고꾸라진 네 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삿짐을 포장하고 풀기 위해 장만했던 박스 테이프를 꺼내와 네 몸을 감쌌다. 네가 고치를 찢고 나와 날개를 펼치기라도 할까봐. 내가 아닌 더 넓은 세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될까봐. 중국제 박스 테이프로 그의 몸을 번데기처럼 감싸다 테이프의 심만 남게 되자 그제야 머리를 들고 그가 흘린 피로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낸다. 곧 다나 데블린의 몸과 단 한 발의 총알이 든 글록 19 한 정을 챙겨들고 차에 몸을 실었다.

제레미 레인은 상대를 눈 앞에 두고 고민했다. 나는 그를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할까. 어디를 쏴야 할까. 얼굴? 혹은 심장? 손을 뻗어 그의 가슴팍에 체온을 포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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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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