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w in the Woods

Duskwood 제이크 드림

장르연성 by 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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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 10 이후 시점
* OC 설정(클릭 시 이동) 대거 차용
* 차기작 <Moonvale>과 그 선공개 설정 일절 미반영
* 기타 고증 또는 설정 관련 오류 多
* TRIGGER WARNING: 신체, 정신적 질병 및 증상에 관한 묘사 (협심증, 우울증 또는 양극성 장애)
└ 현실의 질환이나 환자를 가볍게 소비하거나 희화할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0.

4년간이라는 단어는 평범하되 비범했다. 여자는 그 한 단어만으로 남자의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하나 끄집어낼 수 있을 만큼 그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여자가 사랑을 후회할 계기가 되었다.



1.

이블린 소여는 그 사건 이후 일상에 지대한 변화를 겪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일상의 A이자 Z인 병원을 말없이 탈출했기 때문이다.

E. 스튜어트라는 이름이 어둠에 싸인 외딴 마을의 브라운관을 장악할 때 대기업 소여 그룹의 하나뿐인 후계자 — 예정 — 는 밤을 틈타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두둑한 돈 봉투를 세느라고 새로운 간호인과 병원 보안팀은 그녀를 쫓을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튜브에서 몇 번이나 봐 예습한 대로 사우스웨스턴의 항공기에 몸을 실었고, 여섯 시간 후엔 평온하게 더스크우드가 있다는 주에 훌쩍 내려앉을 수 있었다. 주목朱木을 이름으로 달아 놓고 그녀는 진짜 주목을 그때 처음 보았다. 가지 끝에 희게 말라붙은 열매에서는 싸하게 단 냄새가 났다.


공항을 막 벗어나려는데 이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보고서 겨울이라는 걸 알았다. 손에 잡히기라도 할 것처럼 내려온 하늘은 못난 색이었지만 마냥 높기만 할 때보다는 그래도 비교적 흥미로워 보였다. 이블린은 사람에게 몇 번 치일 때까지 그곳에 못 박인 듯 서 있었다. 그러다가 떠밀리는 행위에서 재미보다 아픔을 더 느끼게 되었을 때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어깨가 욱신거리는 것이 분명 멍이 들 것 같았다. 모두가 생소한 억양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했다. 그녀는 내가 정말로 친구들이 있는 곳에 왔구나, 하고 생각하며 눈을 몇 번 깜박이고 우버에 몸을 실었다.

팁 없는 택시 사업을 위한 어쩌고저쩌고, 하는 우버의 창업 모토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블린은 괜히 예상 운임의 두 배를 꺼내 들었다. 그게 가장 익숙한 대인 기술이라서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가타부타 입을 열기 싫어서가 더 컸다. 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지폐 뭉치를 대뜸 내밀었더니 운전자는 겨우 두 모금 마셨던 담배를 꺾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부잣집 아가씨를 삼 대째 모시는 리무진 운전기사라도 된다는 듯이 이블린을 각별히 모셔 더스크우드에 데려갔다. 그녀는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내내 카디건과 패딩으로 무장한 자기 옷가지를 만지작거렸다. 링거 바늘 자국이 남은 손등을 계속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나중엔 멀미로 반쯤 구토할 뻔했다.

10월이었지만 이른 눈이 내렸다. 그녀가 택시에서 내릴 즈음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서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부셨다. 이블린은 숲 외곽에서 나무를 하나 붙잡고 조용히 헛구역질을 했다. 기내식을 포함해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이 이번만은 득이 되겠다는 쓸모없는 감상이 의식 한편에서 고개를 들었다.

“…번호 뭐였더라, 기억해 놨는데.”

구역질이 멎고 나서 그녀는 휴대폰을 열어 만지작거리며 그 테두리 너머로 마을을 가만히 넘겨보았다. 마을은 물론이거니와 번호도, 심지어는 손에 쥔 기계마저도 초면이었으므로 하는 일마다 둔해 빠진 것은 당연했지만 그게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밟기 전에 이블린은 은행과 마트를 잠깐씩 들렀다. 전자는 물론 추적당하지 않을 현금을 좀 찾기 위해서였고, 후자는 이 이름만 똑똑하고 하등 쓸모도 없는 값싼 선불 휴대전화를 구매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바로 그 휴대폰은 지금 꽁꽁 언 데다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으로 겨우 개통된 참이었다.

개인정보도 없이 직접 간이 개통한 휴대폰으로는 인터넷 사용조차 원만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스크우드 경찰서를 인터넷에 검색하는 대신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약 두 번쯤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건넨 후에야 기적적으로 알란 블룸게이트의 번호를 기억해 냈다.

“저 지금 더스크우드에 도착했는데 길을 몰라서요.”

“…알겠습니다. 근데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뭐가요?”

“목소리가…….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아, 난 또 뭐라고. 괜찮아요, 멀미를 좀 했을 뿐이에요.”

간단한 통화였다. 알란 블룸게이트는 이블린의 멀미했다는 말에 몹시 신경을 써서, 아예 그녀를 걸어서 데리러 왔다. 내밀어 진 손 마디마다 투박하게 박인 굳은살들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그녀는 한 박자 늦게 손을 마주 뻗어 악수를 했다.

그는 하얗게 세기 시작한 다갈색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면도를 한 독일계 미국인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을 때보다 마주 보고 들을 때 독일식 억양이 조금 더 강했고, 그래서인지 생긴 모습보다 조금 더 고지식하고 완고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그녀가 가장 자신 있는 대인 기술만으로는 이 참고인 조사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캐리어를 그에게 맡기고 — 만류하려고 했지만 자갈투성이에 반은 포장이 안 된 시골길을 이블린의 팔은 견디지 못했다. 알란은 가방을 앗아 들고, 잠깐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는 조용히 손짓했다 — 그리 멀지 않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

서에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물이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녀는 잔을 받아들고 홀짝이면서 알란 블룸게이트에 대해 조용히 평가를 내렸다. 그간 나눈 메시지들과 십여 분간의 관찰을 통해 본 그는 매우 사려 깊고 꼼꼼한 사람이거나, 직업병 때문에 모든 정보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진 사람이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눈을 깜박이고 있으려니 알란은 잠깐 문 뒤로 사라졌다가 종이 뭉치를 들고 돌아왔다. 절 따라오시죠. 직업 하나로 온갖 오명을 쓴 사람답지 않게 진중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알란의 자리로 보이는 책상 옆에 캐리어를 붙여 놓고서 그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또각거리는 발소리를 묻기 위해 아무런 잡담이나 꺼냈다. 배가 너무 고프다든가, 경찰서 내부는 엄청 험악할 줄 알았더니 그냥 병동이랑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든가. 알란은 성심성의껏 모든 문장에 답했다. 원하는 메뉴를 말씀하시면 시켜 드릴 수 있고,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면 병원이 익숙하신 것 같고. 이블린은 취조실인 듯한 곳에 들어가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저께까지 입원해 있다가 탈출해서 온 거거든요.

“예?”

“탈출이요. 이렇게 말하면 경찰서장인 당신한텐 제가 탈옥수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아, 아닙니다. 선생님을 죄인 취급하려고 모신 게 아니니까요.”

그야 물론 아니시겠지, 생각하면서 이블린은 식사는 됐고 물이나 한 잔 더 달라고 청했다. 머리 위에 뜬 펜던트 조명 탓에 눈이 부셨다.

그와의 대화는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블린은 반듯하게 앉아 나는 제이크라는 해커를 이번 일로 처음 만났고 얼굴도 나이도 모른다는 말을 세 번 반복했고, 조금 편하게 등받이에 기댄 채 더스크우드에 관한 것도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얘길 두 번 더 풀어 설명했다가, 종국에는 허리가 아프니 제발 남은 얘긴 내일로 미뤄 달라고 그에게 간청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내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듣던 알란은 낮고 짧게 웃었다. 병원에 오래 계신 건 정말이셨나 보네요. 이블린은 증거로 제 왼손 손등을 내보였다. 볼품없이 마른 손등에 징그럽게 패인 링거 흔적들을 보고 그는 웃음기를 거뒀다.

“흉하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간 고생하셨겠군요.”

“그게 뭐 대수라고요.”

알란은 문을 열어 쥔 채, 이블린이 걸어나가면서 비틀거릴 때를 대비해 다른 손을 그녀 어깨 근처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건 과보호라고 이야기하려 했는데, 바깥에 어둠이 내린 걸 발견했을 땐 말없이 수긍했다. 이블린은 그가 조사 중간에 식사를 한 번 더 권하고, 거절이 돌아오자 그럼 자기도 괜찮다고 이야기를 깔끔하게 넘겼던 짧은 이벤트를 떠올렸다. 나 때문에 식사를 걸렀군요. 이블린이 말하자 알란은 그녀의 말 중 하나를 인용했다. 그게 뭐 대수라고요.

알란 블룸게이트에게 당장은 이블린을 붙잡을 이유가 없으리란 걸 그녀는 알았다. 혐의점도 없고, 하는 말에 일관성이 있으며, 증거는 부실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대개 — 특히 ‘한나 던포트 납치 사건’에 대해서는 — 진실로 판명되는 진술들에 감싸여 앉아 있는 볼품없이 마른 여자. 그는 조명 빛이 희게 부수는 백금발을 내려다보다가, 월터 부인이 운영하는 모텔에 방을 하나 잡아 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며칠간 참고인 자격으로 매일 출석해 달라고 그녀에게 요구했다. 그가 해커나 더스크우드의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대화 내역을 정중히 부탁했을 때 이블린은 이거 사생활 침해라고 뻗대는 대신 새로 구매한 휴대폰을 내밀었었다. 표면적으로나마 협조적인 체하려는 속셈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경찰에겐 그게 증거 인멸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블린은 가만히 수긍했다. 어차피 피의자가 죽은 시점에서 참고인 조사가 진행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바도 아니었고.

월터 부인은 모텔 로비를 홀로 지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릴리를 언급하자 노파는 그녀가 며칠 휴가를 냈다고 이야기했다. 직원이 한 명뿐이라서 휴가가 크게 내키진 않았는데, 하필 그 작은 마을을 뒤집어 놓은 납치 사건의 피해자가 그녀의 언니라는 점 때문에 월터 부인은 마음이 약해졌다고 했다. 이블린은 얼른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사실 그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자기 심정을 얘기해서 잡담을 이어나가는 대신 그녀는 어쩐지 도망치듯 방으로 달음질쳤다. 월터 부인이 입이 싼 인상은 전혀 아니었는데도 누군가에게 그녀가 왔다고 알려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유명세도, 괜히 뻗대는 일도 모두 싫었고 특별한 사유 없이 자기가 뒤집어 놓은 마을에 발을 들이기는 더더욱 싫었으며 무엇보다 제이크가 없는 마을에 정식으로 방문한 꼴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없는 듯 있다 갈 생각이었다. 이블린은 내일도 알란 블룸게이트와 면담해야 할 것을 생각하며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이불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2.

네가 딱 나만큼만 무모했으면 좋겠어.

아무런 당위 없이 뛰어든 폭풍우 속에서 떠밀리며 춤추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어. 짧은 만남을 사랑으로 착각하고서, 오해인 걸 알고도 고집스레 붙들고 있었으면 좋겠어. 평화 속에서 위험을 자초했으면 좋겠고 알지도 못하는 것을 그리워하는 바보가 될 줄 알았으면 좋겠고 체념을 잊을 만큼 몰두했으면 좋겠고 또…….

어둠 속에서 전송 버튼이 푸르게 빛났다. 그녀는 수신인 없이 작성한 메시지를 지웠다.



3.

날짜가 지났다. 두려워하거나 고대하던 연락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다.

아침부터 몹시 배가 고팠지만, 레인보우 카페에서 살라미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켜 급하게 먹었다가 그녀는 첫날과 매한가지로 또 나무를 붙잡고 구역질이나 하게 되었다. 이블린의 패인은 인스턴트 로망에 빠져 자기 위장을 과신했다는 점이었다. 그 사건 이전 그녀의 주식은 우주식량처럼 재료를 갈아 만든 레토르트 죽인지 수프인지 하는 것이었고, 그마저도 그저께 저녁부터는 몇 끼를 내리 굶었다. 어차피 병원 CCTV를 조작할 거였으면 그 튜브라도 몇 개 슬쩍할 걸 그랬다. 이렇게 뼈저린 후회를 해 본 것도 몇 년 만이라고 그녀는 자조적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나무를 끌어안았다. 우웩.

이블린은 오전 내내 음식물의 이동 경로를 역행시키는 데 골몰하다가, 해가 절정의 빛을 낼 즈음에 혼자 그림자란 그림자는 다 끌어안고 어제보다도 해쓱해진 낯으로 알란을 다시 만났다. 그녀의 몰골을 본 알란은 잠깐 침묵했다. 그러고는 BRAT인가 뭔가를 중얼거리다가 그리츠grits와 크림수프를 가져왔다. 그녀는 알란에게 팔자에도 없는 시중을 들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이게 그 유명한 접대의 관습이냐고 물어서 그를 조금 웃게 했다. 그에 대한 이블린의 평가가 수정됐다. 세심한 사람에서, 눈꼬리 주름이 예쁘게 접히는 사람으로. 그가 웃을 때 생기는 주름들은 자꾸 다 잊어 가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했는데 이블린에겐 그걸 회상할 의지도 여력도 없었다. 그녀는 싸구려 가루우유 냄새와 석회 또는 쇳가루 냄새를 맡으며 수프를 휘적였다. 알란이 가져온 구식 탁상시계가 하도 요란하게 째깍거려서 속이 불편했다.

그가 가져온 그리츠만큼이나 오늘의 대화는 영양가 없고 밍밍했다. 이블린은 알란이 자기 가족사를 —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 알려줬던 걸 기억했고, 그 대가로 자기 가족사도 아주아주 간략하게 알려 주었다. 부친의 성surname은 물론이거니와 모친의 국적도 말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알란은 그걸 다 듣고도 이블린의 이름자가 Evelyn이 아니라 Yveline이라는 걸 눈치챌 수 없었다. 그러나 알란은 얘기가 끝났을 때 이블린을 동정하는 눈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알란 블룸게이트 개인의 망가진 가정에 대한 상처, 자기연민과 그리움 등을 뭉쳐 이블린에게 일부 투영한 결과일 수 있겠으나 그걸 받아들이기에 이블린은 조금 몰려 있었다.

마이클 핸슨 건을 생각했는지 알란은, 적어도 오늘만은 이블린을 더 닦달하거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지 않고 놓아 주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덕분에 그녀는 아직 해가 중천에 뜬 동안 파출소를 벗어날 수 있었다. 속이 불편했다. 그리츠를 먹고도 이런다면 중국집 데이트는 기회가 와도 못 할 지경이었다. 비니를 벗고 짧은 금발을 파바박 털며 그녀는 먹었던 걸 모조리 토해 내야겠다고 다짐하고, 그러기 위해 예의 그 단골 나무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수월하진 않았으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제시가 한번 랜선 너머로 구경시켜 주었던 길이 보이자마자 의도치 않게 그 길을 따라가 광장에 다다르는 게 전부였지만. 제시는 엄청 가뿐하고 빠르게 주파했던 길이 이블린에게는 버거웠다. 그녀는 주변의 숱한 인기척을 모조리 무시하고, 조금 지저분한 동심원 모양 분수 옆에 놓인 벤치로 다가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어떤 친절한 주민의 목소리와 그림자가 그녀의 눈가를 차례로 덮었다. 이블린은 단순히 돌아다니다 지쳐서 그런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그 친절한 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흑갈색 눈과 그보다 살짝 밝은 톤의 머리칼, 단단한 매부리코, 얇고 굳건하게 다물린 입술.

“…클레오?”

무심결에 이름을 불렀더니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가득 들어찼다가 곧 반가움으로 탈바꿈했다. 너 이블린이구나, 하고 속삭이듯 묻는 클레오에게 이블린은 넌 그 일이 있고도 여전히 숲길 조깅을 하느냐고 장난스럽게 타박이나 했다. 몇 발짝 더 다가온 클레오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 그때 그녀가 하던 건 조깅이 아니라 수색대 활동이었고 지금은 식료품점에 가는 것뿐이라고 반박도 갖다 붙였지만 역시 밉지 않은 어조였다. 그녀는 한 박자 늦게 클레오가 숲에 들어가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단 사실을 떠올렸다.


단체 메시지 방이 건재한 덕인지, 아니면 더스크우드가 너무 작은 마을이라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크루가 모두 모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간이었다. 겨우 사람 하나 도착한 게 뭐라고 다들 달려오는 상황이 그녀는 이해가 안 됐다. 무엇보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사람맞이를 해 주길 바라지 않았던 심정으로, 심지어 모여 달라는 얘기도 아니고 클레오가 단지 이블린과 광장에서 마주쳤다는 한마디만 보내 놓은 걸 아는 시점에서는 더욱. 오라는 말도 안 했는데 그게 그런 뜻이 되나, 하고 생각하다가 그녀는 별안간 누군가에게 세게 부딪혔다. 초면인 이블린을 멀리서도 곧장 알아본 제시가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넘어뜨릴 듯 거세게 끌어안았는데 이블린은 마구 흔들리느라고 빨간 머리칼을 보고서야 자길 끌어안은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휘적거리고 다가오는 릴리가 보였다. 제시의 손에 계속 흔들리는 동안 저 멀리서 여전히 휠체어 신세인 댄이 바퀴와 입으로 동시에 툴툴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가오다가, 이블린의 측은한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삿대질을 했다. 조금 기다린 후에 이블린이 밟았던 길을 그대로 밟고 아마도 여자 친구 면회를 끝냈는지 터덜거리며 토마스까지 나타났다. 다들 어색하게 쭈뼛거리는 대신 메신저로 나눌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질문들을 했다. 너 계속 오프라인이었잖아! 이젠 꼼짝없이 이블린 실종 사건을 수사해야 하는 줄 알았다고! 이블린은 당황했던 것도 잊고 낄낄거리면서 웃었다.

크루 완전체의 본격적인 회동 장소는 물론 — 댄의 말에 의하면 상식적이게도 — 바 오로라가 되었다. 그저께 오전에 병실을 탈출하면서 이블린은 유선으로 경찰서장에게 필의 석방을 강력히 주장한 바 있었고, 그 결과 최대한 빨리 그를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도 받았으므로 이번 방문에서 필을 만나리라는 건 그녀로서도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항이었다. 물론 필이 이렇게나 빨리 가게를 다시 열 줄은 전혀 몰랐지만.

구치소에 출입하는 것쯤은 예삿일이라는 듯 여상한 낯으로 잔을 닦던 필 호킨스에게 제시가 달려가 이블린이 왔다고 외치는 동안 나머지 크루는 댄의 휠체어를 낑낑거리며 바 안으로 옮겼다. 이블린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릴리가 만류하며 그녀를 먼저 앞으로 들여보내 줘서였다. 그녀는 댄이 으악, 조심 좀 해, 아오 진짜 따위를 외치는 걸 들으며 판자바닥 위로 발을 끌다가, 눈이 마주친 호킨스 오누이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둘이 이복형제이고 생김새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도 제시와 필의 미소는 정도 이상으로 닮아 보였다. 그녀는 한숨처럼 웃고 필이 건네주는 잔을 받아들었다.

“하루만 더 일찍 오지 그랬어.”

“그러려고 했는데 일정이 꼬였어. 홈페이지 예쁘게 꾸몄더라, 필.”

“그걸 봤어? 감동인데.”

그러려고 했긴커녕 사실은 일요일 밤부터 알란과의 약속만 — 그리고 뭔가 다른 꿍꿍이 하나도 — 머리에 욱여넣고 무작정 날아온 것뿐이지만 이블린은 굳이 솔직해지지 않기로 했다. 부디 월터 부인이 릴리에게 ‘이블린 스튜어트 양이라면 경찰서장님이 방을 잡아 주셨단다’ 같은 말을 전하지만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랬다간 친구들을 일부러 뒷전으로 밀어 놓은 일을 쟤네한테 꼼짝없이 해명해야 하니까.

필이 초대한 인디 밴드 뮤지션은 이블린의 취향과 상반되는 노래를 세 곡쯤 부르고 내려갔다. 술은 생각도 없거니와 경험도 없고 그렇다고 거절할 경황도 잘 없어서, 대신 물을 마신다는 게 한번에 다섯 잔쯤을 들이켜는 바람에 — 바라는 이름이 붙은 곳들은 조명이 노란 계열에 어둑해서 물을 꼭 다크 럼처럼 보이게 하는 특징이 있었다. 이블린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말, 정말로 바 오로라가 마음에 들었다 — 이블린은 화장실을 가는 무리에 끼어들 수 있었다. 릴리와 제시가 그녀를 연행하는 모양새로 함께 바 오로라의 구석진 곳을 향했다. 필은 보기와 다르게 정말 꼼꼼하고 성실했지만, 며칠간 어쩔 수 없이 관리를 소홀히 한 화장실에 가까워질수록 흡연자들 손에서나 맡을 수 있는 퀴퀴한 냄새와 물비린내가 났다.

“자, 이제 말해 봐.”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시가 운을 떼자마자 릴리가 눈을 빛내며 한 발짝 다가붙었다. 이블린은 눈만 끔벅거렸다.

“뭘?”

“그 해커 말야.”

“제이크랑 아직 사이 좋아? 그러니까, 아주 진지한 사이가 된 거야?”

릴리가 몸을 가까이 기대는 동안 제시는 옆머리를 손가락에 배배 꼬았고, 제시가 화장실 문을 열면 릴리가 먼저 쏙 들어가 거울 너머로 이블린을 응시했다. 그녀는 오늘 아침에도 지금도 여전히 제이크 생각일랑 그만 하고 싶다는 견해를 고수했지만, 이번엔 두 친구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진심이니. 꿍얼거리자 둘이 입을 맞춰 답했다. 응.

“…왜 알고 싶은데?”

“그야 친구 연애 얘기가 제일 재밌으니까!”

“싱겁기는…….”

“왜애.”

말끝을 늘이며 제시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보니 릴리도 비슷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제야 자기가 자꾸 대화에 못 끼는 걸 알아챈 두 사람이 일부러 분위기를 맞춰 주려고 자길 데리고 나왔다는 사실이 눈에 보였다. 그녀는 손을 씻는 척하며 평범한 여자애들처럼 시시덕거리는 두 친구를 거울 너머로 건너다보았다. 병원에 갇히고 나서는 이런 건 아예 딴 세상 일이 된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생기 넘치는 낯으로 웃는 릴리와 제시는 정말로 그녀의 세상이 아니라 TV 쇼에나 나오는 캐릭터들처럼 보였다. 이블린은 입을 열었다.

“나 걔랑 연락 안 돼.”

정확히 말하면 걔랑 연락할 생각 없어, 에 가까운 의미였다. 애초에 알란과의 통화를 종료한 시점부터 이블린은 이전에 쓰던 휴대폰 전원을 끈 채 캐리어에 넣어 단 한 번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추적이 두려워서라거나 제이크와 함께한 불법 행위에 가책을 느껴서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월마트에서 유심을 구매해 개인정보도 넣지 않고 자동이체도 신청 안 한 싸구려 기기 하나에 그와 나눈 고백이 담겨 있어서였다. 진심이 있거나 없고 그 뒤의 안위를 확인할 수 있거나 없는 쓸모없이 무거운 문장이 이블린은 두려웠다.

눈 두 쌍이 득달같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물론 둘 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블린의 진위를 알 리 없었다. 그러면서도 다정한 걱정들을 담고 있는 눈빛들을 이블린은 너무 쉽게 읽을 수 있었고, 그래서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바쁘잖아. 광산에서 FBI한테 발각되는 바람에 당분간은 죽은 셈 치고 도망 다녀야 해.”

“어쩌다 들킨 거래?”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어. 제이크도 놀란 걸 보면 누가 찔렀을지도…….”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이블린은 혹시 자기 얘기가 크루의 누군가를 탓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귀책사유가 누구에게 있건 간에, 친구들을 눈앞에 두고 반목할 생각은 없었다. 말끝을 어물쩍 흐리자 릴리가 모른 체하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가 엄청 급하게 온 거 같길래, 난 네가 제이크를 만나러 왔나 보다 하고.”

“더스크우드에서 보자고 인사하긴 했었지. 근데 이번엔 아냐.”

“그럼 누구 보러 온 건데? 우리 보러 온 건 딱 봐도 아니고.”

“…왜 그렇게 생각해?”

제시가 팔짱을 꼈다. 이블린은 물론이고 심지어 릴리조차 그녀의 추리를 경악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너, 내가 사진을 그렇게 잔뜩 보내는 동안 단 한 번도 네가 우리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단 얘기 안 했잖아. 내가 은근슬쩍 너 꾀어내서 같이 놀고 싶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그랬어……?”

“응, 나 서운할 뻔했다니까. 물론 그때 당장 오겠다고 하면 말렸겠지만, 언젠가 한번 놀러 오겠다고 말이라도 해 주면 얼마나 좋아?”

“…….”

“무엇보다, 우리한텐 여기 온다고 연락 한 번 없었고!”

그러게 제시 홈즈라고 내가 그랬잖아. 이블린은 제시의 푸른 눈을 이겨내지 못하고 중얼거리며 시선을 피해 버렸다. 무의식중에 그들과 자신을 분리한 탓인가, 항상 친구들과 제이크와 다 함께 있는 시간을 바랐던 것 같은데 한 번도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제이크를 잠깐이라도 스치듯 마주칠 수 있다면 친구들은 영영 만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 걸 어쩌면 들켰는지도 모른다. 이블린은 미안해져서 그냥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이번엔 알란을 만나러 온 거야.”

“알란 블룸게이트?”

“응.”

이블린은 애꿎은 바닥 타일을 노려보았다. 자리로 돌아가면 필에게 화장실 조명이 너무 밝은 것 같다고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일 틈바구니마다 보이는 흰 압착시멘트를 따라 시선으로 덧그리면서 그녀는 알란 블룸게이트를 광산으로 보낼 적의 대화를 떠오르는 대로 친구들에게 전했다. 두 사람은 심각한 낯으로 이블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가 경찰을 덮어놓고 못 믿는 건 사실이야. 그치만 그거랑 별개로 좀……. 위험하지 않아?”

릴리가 머리를 매만지면서 물었다. 그 질문이 뭘 의미하는지 알면서 그녀는 모른 체했다.

“알란은 좋은 사람인걸.”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냐, 이블린. 우리 오빠를 생각해 봐.”

“필 건은 확실히 경찰 측에서 섣부르게 움직이긴 했지.”

“그러니까 네 경우에도 그들이 ‘섣불리 움직이’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 괜찮을 거야. 그녀가 평이한 어조로 말하며 손을 휘휘 내젓자 제시가 거의 누구 들으라는 식으로 릴리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블린 쟤도 은근 클레오 과야, 얌전하고 이성적으로 굴다가 이상한 데에서 충동적이라니까. 이블린은 똑똑히 듣고도 그냥 웃어넘겼다. 사실은 몸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생소해서 어쩔 줄 모르고 웃는 시늉만 해 놓은 거였지만, 적어도 제시와 릴리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알란과 이미 두 번이나 만났고 내일도 만날 예정이란 얘기는 친구들 앞에서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까, 되도록이면.

바 입구로부터 흘러드는 바람에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셋이 나란히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남자들은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클레오를 가운데 두고 각기 늘어져 있었다. 주황빛에 가까운 조명 탓에 그들의 붉어진 얼굴은 거무죽죽하게까지 보였다. 특히 토마스가 고주망태가 된 채 술잔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 잔에 눈물이 몇 방울 섞여들었을지 모른다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이블린은 시험 삼아 그의 곁으로 슬쩍 다가갔다가 코를 틀어쥐고 뒷걸음질을 쳤다. 냄새만으로도 취할 것 같았다. 접시를 닦고, 잔을 닦고, 술병을 닦고, 또 바 테이블까지 문질러 닦다가 더는 그를 모른 체할 수 없게 된 필이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명에서 살짝 비켜서자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들이닥쳤다. 토마스 아직도 밀러 씨 부부랑 같이 살던가? 여상한 물음이 바텐더에게서 튀어나왔다. 취객의 곁을 의리로 지키고 있던 클레오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하고서, 곧장 사선으로 까닥이며 아마도 그의 집이 있을 방향을 가리켰다.

클레오와 필을 번갈아 보면서 이블린은 정말 더스크우드가 지독하게 좁긴 하구나, 하는 가벼운 생각을 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모두가 친구이자 이웃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만큼 서로는 서로에게 어울려 보였고 그 순간 인종이라든가 개인의 개성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였다. 이블린은 제이크와 알란을 차례대로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굳이 내려서 슬퍼지는 대신 곁에 서 있던 제시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이블린 너 취했어? 괜찮아? 술 그렇게 안 마신 거 같았는데.”

“아니, 그건 아니고 조금 지쳐서.”

“그럼 넌 먼저 들어가야겠다, 더스크우드에 며칠간 머무를 예정이……. 아니 근데 너 왜 이렇게 말랐어?!”

안 되겠다, 내일부터 당장 클레오의 애플파이를 질리도록 먹여서 살을 좀 붙여 보내야지. 제시가 팔을 걷어붙일 기세로 결연하게 선언하자 클레오와 릴리, 그리고 어쩐지 필과 댄까지 정신이 제대로 붙은 사람들은 모조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은 눈만 끔벅이면서 서 있었다. 애초에 사과 파이를 속에서 받아줄지부터 의문이었지만 그 질문을 당장 제기해 봤자 아무도 안 들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나도 모르겠다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걸 승리의 사인으로 이해한 제시만 신이 나서 이블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는 이블린을 숙소에 데려다 주고 올게, 너희가 알아서 토마스랑 댄 챙기고 있어 봐.”

“귀염둥이들, 계속 날 그렇게 챙겨 줘야 할 환자 취급할 거야?”

“너 아까 겨우 문턱 하나를 못 넘어서 여기 들어오지도 못할 뻔한 건 벌써 잊어버렸니?”

정신없는 대화들이 뒤섞였다. 술 때문인지 원래 이런 애들인지는 그런 대화들을 듣는다고 이블린이 구별해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웃으며 댄에게 '얌전히 대접받고 있어, 귀염둥이‘ 같은 소리나 해서 그의 속을 득득 긁어 놓고, 결국 질질 짜기 시작한 토마스의 손에 티슈를 잔뜩 쥐여 준 후 — 이블린, 그 휴지는 다 어디서 났어? 으응, 아까 화장실 세면대 쪽에 남은 걸 모조리 뽑아 온 건데. 릴리와 이블린의 대화를 들은 필이 실소하며 티슈 함을 다시 채우라고 언질해 줘서 고맙다고 외쳤다 — 제시의 손을 움켜쥐어 함께 바를 나섰다.

술이 돌아서인지 그녀의 손은 무척 뜨거웠다. 그래서 모텔로 돌아가는 내내 이블린은 지금이 겨울이라는 걸 잊고 단풍색 머리칼에 정신을 팔았다. 오늘 밤은 꿈을 꿔야지. 별 소용 없는 다짐이 머릿속에 가라앉지 못하고 맴을 돌았다.



4.

후에 여자가 회상하길 그 해 단풍은 여자가 봐 온 모든 가을을 통틀어 가장 강렬했고 여자의 시린 눈꺼풀엔 붉은색이 오래 남았다. 빨강을 오래 보다가 눈을 감으면 그걸 파랑과 헷갈리게 되는 탓이었다. 여자는 검정과 파랑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는 병을 새로 앓고 있었다. 줄곧 가졌던 난치병보다도 더 길고 아프게.

그날은 가을도 아니었고 밤은 눈에 휩쓸려 새하얬으므로 여자는 더스크우드의 상록수 숲에서 절대 편안히 잠들 수 없었다.



5.

날짜가 지났다. 고대하던 연락은 오지 않았다.

겨우 두 번 본 게 전부인데도 경찰서장과는 라포가 조금 쌓였다. 다른 말로 하면 이블린이 겉으로나마 보이던 사근사근한 척을 집어치우고, 지난 십여 년간 고수했던 뚱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조금 더 드러낼 때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알란이 그녀의 경계가 느슨해지길 바라고 꼬박꼬박 음식을 갖다 줬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배제할 순 없었다. 원래 취조실이라는 곳에 들락거리는 음식들은 다 그런 의도를 갖고 조리됐다. 안타까운 건 이블린 소여는 배가 부르다는 사실만으로 방만해지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랜 투병 생활을 겪으면 어떤 환자들은 포만감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게 되기도 했는데, 이블린 또한 딱 그 꼴이었다. 어투가 조금 시니컬해진 그녀를 잠깐 바라보던 알란은 그답지 않은 잡담을 집어치웠다.

“…재밌을 것 같아서 도움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하셨죠.”

“네, 뭐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전 줄곧 외톨이였어서, 먼저 말 걸어 주는 친구가 간절했기도 하고요.”

“그런 가벼운 이유로 연루되기엔 조금 큰 사건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도 되나요?”

편하게 하세요. 알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 하나 사라지는 건 이런 개미 눈곱만 한 마을에서나 큰 사건이지, 제가 살던 곳에선 일상이에요.”

그렇다고 더스크우드가 싫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라고 붙여 말하는 이블린의 손끝을 알란은 조금 오래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곧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이 마을은 좀 많이 작으니까요, 모두가 서로 아는 사이죠. 이블린은 뒤에 이어진 말을 들을 때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모두가 서로 그렇게 잘 안다면 이 무뚝뚝하고 매사에 진심인 남자는 좀 더 받아들여지고 이블린 소여는 좀 더 내쳐져야 옳았다. 원래 인간은 그렇게 타인을 잘 알지 못해요. 중얼거리자 알란은 그렇겠죠, 라고 답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그는 상대가 믿을 만하다면 그가 뱉는 실없는 소리에마저 필요 이상으로 성실하게 답해 주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그럼 그건 넘어가고, 선생님께서 사건에 휘말리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한번 따져 보죠.”

알란이 서류를 한 장 팔랑거리며 넘겼다. 이블린은 아 드디어, 하고 몹시 미국인다운 제스처를 취하며 책상에 두 손을 얹었다.

“블룸게이트 씨, 맹세컨대 한나 던포트가 왜 제 번호를 갖고 있는지를 당신보다 더 궁금해하는 사람이 단 한 명 있다면 그게 바로 저일 겁니다.”

“선생님.”

그는 익숙한 대로 부르고서야 이블린의 호칭을 의식한 듯했다. 그가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

“…스튜어트 씨. 안 그래도 제가 그 점에 대해 이미 한나 던포트 양을 심문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가요.”

이블린은 상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대꾸하고서 식어빠진 크림수프 접시를 끝까지 비웠다. 알란이 가져다준 지 두 시간만이었다. 그는 이블린이 배가 고프다든가 어떤 메뉴가 끌린다고 얘기하지 않아도 콘 수프나 거기서 옥수수분말 빠진 것을 꼬박꼬박 준비해 주었다. 상기했듯 그 진의를 매번 의심했지만, 그녀는 어쨌거나 매일 내놓아진 요리를 군말 없이 입으로 퍼 나르곤 했다. 옥수수 맛보다는 쇠 냄새로 이블린은 메뉴를 구분했다. 도대체가 경찰이란 왜 다 이 모양인가, 하고 이블린이 고뇌하는 동안 알란은 그녀가 비운 접시를 테이블 한구석으로 밀어 놓고 목을 다시 가다듬었다.

“한나 양의 말에 의하면 밀러 씨에게 원래 보내려던 번호가 그게 아니라더군요.”

“네?”

“TV에서 유명한 사설탐정private eye 광고를 본 기억이 나서 그쪽으로 의뢰하려고 했다던데요.”

이블린은 잠깐 웃음이 나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프라이빗 아이라는, 경찰답지도 않고 그렇다고 알란다운 건 더욱 아닌 단어 선택 탓에 자연스럽게 니모스Nym-OS가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제이크가 그런 의미로 아이콘을 설정하진 않았겠지마는. 알란은 그녀의 웃음을 곡해한 모양으로 고개를 옆으로 툭 쳤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서류를 슬쩍 기울여, 한나가 봤다던 그 광고 영상의 캡처본을 이블린에게도 잠깐 보여 주었다. 익숙한 무늬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알기로 저 사설수사기관이 또 소여 그룹과 모종의 썸씽이 있다고 했는데, 물론 누구누구가 그 썸씽에 대해 알았다면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을 아직 기관이 건재한 걸 보면 해커의 눈을 잘 피해 다닌 모양이었다.

젠장, 제이크야. 이블린은 아무런 잡념도 없었던 것처럼 눈을 두 번 깜박이고 알란에게 가볍게 웃어 주며 몸을 물렸다.

“확실히 유명하긴 하네요, 저도 면식이 있는 광고예요.”

“공권력에 대한 불신임이 더스크우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죠.”

그녀는 그 말을 반박해 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알란은 이블린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으면서,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한 산뜻한 태도로 서류를 테이블에 세우고 탁탁 두드려 정리했다.

적어도 한나 던포트는 더스크우드의 유일한 경찰서장과 접촉하여 자기 죄를 실토하고자 마음먹을 만큼만은 그와 공권력을 믿고 있었다. 결국 자수할 만큼은 되지 않았지만, 그녀가 미신과 현실을 혼동할 만큼은 되고도 남았다. ‘제니퍼 핸슨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면 처벌이 내려진다’는 생각은, 다른 말로 하면 그 처벌로 자기 죄에 대한 것들을 속죄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당시의 한나에게는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보다 파출소가 훨씬 가까웠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알란에게 자기 영혼이 찢겨 나가 어떤 모양의 구멍이 뚫렸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고, 인간들의 이성적인 잣대로 자기의 죄를 재어, 판사의 의사봉을 닮은 바늘로 뚫린 구멍을 얼기설기 엮어낸 후에 나름의 안식을 찾으며 감옥에 머물 수 있었다. 리치가 무슨 수를 쓰든 구치소에 잠입해 쇠창살에 까마귀를 그려낼 수는 없었을 테다. 얼굴 없는 남자는 한나가 의사봉을 두려워한 시점에 태어났다.

공권력의 불신임. 이블린은 조금 분주한 기색으로 움직이는 경찰서장의 부르트고 굳은살 박인 손가락을 바라보면서 입안으로 그 단어를 몇 번이나 궁글렸다. 한동안 그가 말이 없었기 때문에, 생각들은 자연스레 그녀의 안으로 흘러들었다.

이블린 소여는 한나 던포트의 대척점에 선 사람이었다. 파티 분위기에 취해 어둑한 시골길을 달리다가 사람을 치어 죽여도, 그 시체를 더 깊고 으슥한 숲 속에 유기해도, 심지어는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더라도 그녀는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로렌 소여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어떤 죄목도 선고받지 않을 예정이었다. 소여를 감방에 처넣기보다는 그녀의 입을 영원히 닥치게 만들어서 소여가 재판장에 설 일을 아주 없애 버리는 게 유리했으니까. 물론 비속 살해를 저지른 후의 로렌 소여도 처벌받을 일은 없을 테다.

다시 말해, 알란이 공권력 어쩌고 하는 푸념을 뱉고 싶었다면 대상이 한참 잘못되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블린은 어쩐지 그를 안도하게 만들 어떤 문장이든 떠올리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럴싸한 문장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대신 이블린은 소여들의 영원한 무결성과 감옥에 갇힘으로써 해방된 한나 던포트, 그리고 도주 중인 찰나의 연인이자 또 하나의 던포트를 잠깐 나란히 떠올려 보았다. 알란의 짙은 눈이 그녀의 손 위에 시선을 두었다가 서류 끄트머리로 옮겨 앉았다.

“스튜어트 씨가 이전에 쓰시던 번호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광고에 나온 번호랑 비슷한가요?”

“두 번째 번호만 빼고 일치하시네요. 그녀에게 번호를 확인차 다시 물었을 때도 당신 번호를 읊으며 버벅거린 걸 보면 그녀가 거짓말을 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던포트 양이 당신에게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가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러는 바람에 이블린은 그간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됐고, 마침 담당자가 앞에 있었으므로 거침없이 질문을 던졌다.

“리치는요?”

“리치 로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의식을 잃고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 중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럼 장례는 이미 치러졌겠군요.”

“아뇨, 아직입니다. 부친인 폴 로저 씨의 요청으로 부검을 진행하느라.”

아. 그녀가 작게 탄식했다.

“…부검이라뇨? 리치의 사망 원인을 모른다는 말씀이세요?”

“그건 아닙니다. 그의 사인은 확실히 과다 출혈과 연기 흡입에 의한 호흡기 손상이에요. 다만 로저 씨 부부가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알란은 광산 안 카메라를 통해 CCTV를 모두 확보했었고, 아무리 시골 파출소나 다름없는 더스크우드 경찰서라도 영상 분석 정도는 할 줄 알 테니 지금 시점이라면 경찰이든 주민이든, 하물며 리치의 부모님이든 간에 모두가 한나 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친구들에게는 단체 메시지 창으로 그녀가 직접 이야기를 전달했다. 자기가 쏜 사람이 사실 자기 친구였다는 걸 들었으면서도 댄은 어제 하루종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의연하게 굴었다. 사실은 어제 만난 모두가 그랬다. 이번 일이 사나흘 정도로 이겨낼 정도의 가벼운 사건도 아니었을뿐더러, 부모 세대조차 아직 정정한 덕에 그녀의 친구들은 리치 이전엔 죽음과 가까이 지낼 어떤 이유도 없었다. 이블린은 로저 부부 앞에서 말없이 서로 합의했을 친구들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냈다. 그리고 그 꾸며낸 의연함이 로저 부부에게 의도치 않게 끼쳤을 영향까지도. 이블린은 비쩍 말라 툭 튀어나온 손마디를 만지작거렸다.

폭발 사고. 그녀가 의식하는 곳에서 두 번의 사망을 겪는 리치 로저. 덧없는 어떤 것, 필요하다면 몇 번이나 수단이 되고 그 과정에서 다시 몇 번이나 다른 이들을 괴롭게 하는 그것. 리치의 얼굴을 떠올리면 묘한 막이 그녀의 의식을 가로막았다. 너무 당연한 절차로 그 막을 찢어내고 더 생각을 전개하려던 그녀는, 별안간 토악질이 치미려는 걸 느끼고 그가 저지른 두 번의 자해를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리치의 부모님께 ‘당신 아들은 사실 납치범에게서 한나를 구출해 오려다가 희생당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전하는 상상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전하기 껄끄러워하는 소식을 전하는 데엔 그간 대충 도가 튼 까닭이었다. 이번에도 비슷했다. 리치가 말해 줬던 당초의 계획을 조금 각색해서 들려주면 될 일이다. 그는 몰래 광산에 잠입해서 한나를 구출해 냈어요, 그러다가 상처를 입고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거예요, 그는 영웅이었어요. 그러면 치매 노인과 그 간병인, 또는 한순간에 아들을 잃은 노부부는 위안을 얻고 눈물로써 아들을 영원히 작별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되는가를 생각하면 그녀는 회의적인 축에 속했다. 단지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아니었다. 그건 아들의 부고를 그 부모 앞에서 왜곡하는 행위를 향한 배덕감이었고 가해자의 죽음을 포장하고 추앙하는 데에 관한 거부감이기도 했지만 이블린이 로저 씨들 앞에서까지 리치 로저의 친구일 순 없다는 사실이기도 했다. 리치는 왜 마지막에 진실을 들려줄 상대로 이블린을 골랐던 걸까. 훤히 보이는 함정으로 유인한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왜 하필 가면을 벗고 이런 과제를 줄 때까지 그녀를 고집했을까. 머리가 지끈거리고 팔뚝이 저리기 시작했다.

장례식에 참석하실 겁니까. 알란이 건조하게 물으며 그녀의 상념을 깼다. 이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의외로군요, 당연히 그럴 거라고 대답하실 줄 알았는데요.”

“사람이 항상 고지식한 중년 독일계 미국인의 생각대로만 움직이진 않죠.”

“안 가실 생각이라면 왜 물어보신 겁니까?”

그녀도 자기가 불과 몇 분 전에 대놓고 안도의 제스처를 했던 건 알고 있었다. 이블린은 눈을 슬쩍 돌리고 툭 떨어뜨렸다. 바닥에 있는,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희끄무레한 얼룩이 별안간 몹시 흥미롭게 느껴진 척을 하면서.

“…시간이 흘렀잖아요.”

“시간이요.”

“네.”

그녀의 시선이 점점 바닥을 파고들었다. 눈길이 쏟아졌다. 하지만 알란은 가타부타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끔찍한 시곗바늘 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눈을 계속 고정하고 있었다.



6.

반쯤 녹아 질척이는 눈

얕은 잠에서 깨었을 때 이미 환해진 창문

조용해진 지역 뉴스

최근 메시지 발신: n일 전

페인트가 번진 그림과 해시태그

그러니까, 시간이 흘렀잖아요.



7.

날짜가 지났다. 두려워하던 연락들은 오지 않았다.

금요일이었다. 알란은 사흘을 내리 출석한 참고인에게 인도주의의 원칙을 적용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주말은 물론이고 오늘까지 사흘간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고, 하루가 통째로 붕 떴다는 의미인 동시에 다음 주에도 더스크우드에 머물러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코인 세탁소에 옷들을 모조리 돌렸다가 인형 옷이 되어 버린 카디건 하나를 버렸다. 레인보우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 대신 오트밀 우유를 한 잔 뜨겁게 마셨고 광장의 물때 낀 둥글고 자그마한 분수를 잠깐 구경하다가 객실로 돌아왔다. 짐을 모조리 풀었다가 다시 쌌다. 순전히 할 일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손끝에 옛 휴대폰이 걸렸을 때 그녀는 전원을 켜고 쌓인 알람들 틈에서 대문자 J를 찾는 대신 생리대 파우치 안에 다시 집어넣기나 했다. 병원에서 이블린의 생리대 재고를 챙기는 건 언제나 간병인이었기 때문에 파우치 안에 든 건 겨우 팬티라이너 두어 장이었다. 그녀는 불규칙하기 그지없는 자기 생리 주기를 셈해 보다가 침대에 그대로 풀썩 엎드렸다.

까무룩 잠들었다가 일어났을 때는 세 시간쯤이 지나 있었다. 그녀는 까치집이 된 머리를 손가락으로 북북 빗어 정리하고, 기껏해야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확인한 후 말라빠진 레토르트 맥앤치즈를 — 월터 부인이 어제저녁에 먹으라고 가져다줬으나 이블린은 포크로 딱 두 번 뜨고 다시 덮어 놓았었다 — 데우지도 않은 채 깨작거렸다. 엎드려서 잠든 탓에 속이 메슥거렸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방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 보다가 엉덩이 밑에 깔린 파우치를 보고서야 탐폰을 사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의 끊기다시피 한 월경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눌러앉아 있을 생각은 없긴 한데, 그런 걸 장담하지 못할 만큼 주기가 불규칙했기 때문에 어쨌거나 준비는 해 둬야 했다. 병원에 있을 적엔 그냥 누워 있거나 산책을 나왔을 시간이었다. 양산도 휠체어도 등 뒤에서 선심 쓰듯 떠드는 여자도 없는 산책이라니. 더스크우드에 온 뒤로 매일 서에 출석하느라고 걷기는 많이 걸었지만, 산책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나니 새삼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블린은 이리저리 삐치는 색 바랜 머리를 조금 더 정돈해 보려다가 포기하고, 볼캡에 후드까지 눌러 쓰고서 지갑만 달랑 집어들어 객실에서 다시 기어나왔다. 햇빛이 너무 강해서 그 밑에 서 있으니 날아다니는 먼지 한 톨까지 모조리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애매하긴 해도 월터 부인이든 알피든, 아니면 모텔 관리인인 그레이 씨든 누구 한 명은 보여야 할 텐데 어쩐지 사위가 조용했다. 설마 모텔에 숙박 중인 게 한 명뿐이진 않겠지,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길가로 나와 괜히 신발 앞코로 바닥을 파며 꿍얼거렸다. 그냥 가지 말까…….

“어디 가는데?”

흐아아악. 이블린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토마스?”

“안녕, 이블린.”

어어, 하는 소리로 어영부영 인사를 받다 말고 그녀는 한 발짝 토마스에게 가까이 붙었다. 코를 킁킁거리자 의아한 눈을 했던 그가 곧 깨달았다는 듯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비니 위로 뒤통수를 북북 문질렀다.

“어제오늘은 술 안 마셨어.”

“다행이네. 그저껜 잘 들어갔니, 필이 너 챙기는 거 같던데.”

“기억나……. 널 그때 처음으로 본 건데 내가 너무 추태를 부렸네.”

그래도 그 덕에 내가 너한테 무례하게 굴어도 모르잖아. 이블린이 낄낄거리자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너한테 그간 한 짓이 있는데, 겨우 이런 거 갖고 어떻게 너한테 뭐라고 하겠어. 실은 불편하지도 않아.

“그래서 어디 가는데?”

이블린은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았다. 더스크우드에 그녀의 병원에 입점한 것과 같은 드럭스토어가 있을는지 장담할 수 없어서였다. 거기가 아니면 생리대라는 물건을 어디서 파는지 이블린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마트라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길은 알아? 같이 가 줄까?”

토마스의 눈이 그녀의 발치에 얕게 패인 구덩이를 곁눈질했다. 이블린은 머뭇거리다가 그 위로 발을 디뎌 가렸다.

“…다른 옷 입고 오면?”

지적을 받고서야 그는 자기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새빨간 티셔츠와 새파란 스포츠용 점퍼를 입고 돌아다니는 건 토마스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블린에게는 그랬다. 자연스럽게 토마스의 집이 두 사람의 새로운 경유지가 되었다. 그는 문 앞에 이블린을 세워 두고 잠깐 우당탕탕 하는 소릴 내다가 곧 뛰쳐나왔다. 이번에 입고 나온 건 올리브색 티셔츠에 검은 아노락이었다. 무슨 기준에서인지 수염을 묶고 나왔는데 그래도 전반적으로 아까보다는 훨씬 나았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블린의 체력이 바닥을 보였으므로 의상에 대한 지적은 생략되었다. 그래도 눈치가 아주 없진 않던 토마스는 더스크우드 여자애들만 옷에 깐깐한 게 아니었다고 혼자 꿍얼거렸다. 그녀는 웃다가 사레가 들려 켁켁거렸다.

토마스는 여자 친구가 있는 애답게 생리용품에도 능숙해서, 이블린이 마트에 들어서서 멈칫거리자 별말 없이 그녀를 근처 코너로 안내했다. 심지어는 한나가 뭘 쓰는지도 꿰고 있는 걸 보니 심부름을 한두 번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블린은 그냥저냥 무난한 날개형 생리대와 탐폰을 구매했고, 돌아오는 길 내내 그와 신변잡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대개는 토마스가 한탄을 하고 이블린이 듣는 형태였다.

한나는 제니퍼 핸슨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은 탓에 감옥에 가게 되었고 여태 살아온 삶의 절반 이상을 복역하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는 중에도 어쨌거나 이전보다는 훨씬 후련해 보이더라고 그가 설명했다. 가면 뒤에 있던 게 리치였다는 얘길 들었을 땐 울음을 터뜨렸다고도. 토마스는 안색이 확 죽어서, 이블린이 리치의 이야기를 전한 후 애들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천천히 나열했다. 모두가 딱 이블린이 상상할 수 있는 만큼 암담해했다고 했다. 이블린이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오열하던 제시가 기어코 탈수를 일으켜서, 클레오가 급하게 소금과 설탕을 탄 물을 먹여야 했다는 얘길 들을 땐 그녀도 덩달아 침울해졌다.

아무도 괜찮지 않았다. 그녀가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한 친구들의 모습은 사실 각자의 괜찮지 않은 부분들을 서로에게 떠안기지 않으려고 죽어라 애쓰면서 웃는 척을 하는 것에 불과했다. 줄줄 이야기하던 그는 이블린이 고개를 푹 숙이고서야 말을 멈췄다.

“괜찮아?”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아니, 그런 뜻도 있긴 했지만, 너도 힘들었을 거 아냐……. 내가 널 끌어들이기로 맘대로 결정해서.”

바닥을 노려보며 걷던 그녀가 자리에 덜컥 멈춰 섰다. 요란한 정적이 돌길 위를 내달렸다. 이블린은 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워……. 끝까지 책임을 나눠 줘서. 한나를 무사히 되찾은 건 다 네 덕이야.”

웃는 이모티콘을 보낼 수 없는 상황에서 공치사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 내용이 기껍든 불편하든 간에. 이블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채 눈을 깜박이다가, 가까스로 ‘생리용품을 들고 길 한가운데 서서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토마스는 진지해 보였다. 하여간 언제나 한결같은 애였다. 상황이 상황이었다지만 뭐든 성급히 밀어붙이고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고, 갑갑하기 그지없게 구는데 그 모든 것에 결국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아서 어떻게 트집을 잡아 탓하지도 못했다. 그런 애가 한심해 보여도 아예 밉지만은 않은 건 그의 심정을 알 것 같기 때문이고.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애정 비슷한 거라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은 멍청이일 거라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블린은 생각했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그녀의 한나 던포트에 대한 감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제이크를 생각하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관대해졌다. 비록 토마스의 여자 친구가 저지른 뺑소니 사고 때문에 십 년간 피해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긴 하지만, 그를 구하는 것은 제이크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여기 며칠 있다가 갈 거야? 그저께 왔지?”

“아냐, 사실 도착한 건 화요일이었어……. 조사가 끝나면 돌아가지 않을까.”

“너도 고생이네. 그 해커 때문이야? 제이크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너희 조사받을 때랑 비슷할 거 같은데.”

듣자하니 이블린은 더스크우드의 모든 한나 친구들보다 압도적으로 오래 조사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명수배자 해커와 생판 모르는 이방인이 시골 마을 납치 사건 해결의 주역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기가 경찰이었어도 의심스러울 것 같았으므로 이블린은 크게 불만은 없었다. 토마스가 지난주에 받았던 조사 내용을 더듬거리며 열거했다. 이번 사건으로 삶에 생긴 변화들, 사건 전후 가해자나 피해자의 이상행동, 처벌 희망 여부, 그리고 이방인들의 개입에 관한 다양한 질문들까지. 모두 예상 범위 내였다. 토마스는 제이크와 이블린에 관한 사항까지 모두 솔직히 답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눈치를 슬슬 보는 게 어쩐지 두 사람의 결백을 온전히 믿지는 않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곧 그녀는 토마스가 심리전이나 두뇌싸움 같은 데 젬병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어깨나 으쓱이기로 했다. 그래, 잘했어.

이블린이 딱히 말을 더 잇지 않았기 때문에 대화는 어영부영 끝났다. 노을 직전의 타는 해가 여전히 밝았는데도, 온종일 돌아다닌 까닭에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열 걸음쯤마다 무릎을 부여잡았다. 어리둥절한 토마스가 곁을 지켰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지친 거야? 조용히 해, 토마스 밀러. 투덜거렸더니 토마스는 아 씨, 하고 습관적으로 뱉으려다가 다급하게 숨을 삼키고 말을 골랐다. 제이크와 이블린이 친구들의 대화를 모조리 염탐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둘만의 비밀이었다. 그러니까 토마스는 자기 말버릇을 그녀가 이미 아는 줄은 꿈에도 모를 테고.

“그게 아니라 정말 걱정이 돼서 그래. 너 어디 아파?”

그런 거 아냐. 대충 손을 흔들며 답하다가 그녀는 습관처럼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진동이 울린 탓이다.

짧게 두 번 울리는 진동이 느껴지면 그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든 기계적인 태도로 휴대폰을 들어 문자 앱을 켜곤 했다. 정확히 그 습관 때문에 잘 쓰지도 않던 걸 십 년 넘게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화면을 켤 때 처음에 가졌던 기대감은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부터 점차 마모되어 가다가 나중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병원에서나 들였던 습관인데. 새까만 액정에 새빨갛게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이블린은 화면을 켜려다 말고, 눈을 두 번 깜박이고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뱉었다.

“휠체어 타고 다니는 버릇 때문에 운동을 안 해서 그래. 심장병이 있어서 십몇 년쯤 입원해 있었거든.”

“어, 뭐라고……?”

“환자는 이만 들어가 볼게. 어차피 다 왔고.”

“어, 어어? 어.”

고장 났니? 아무 일 없는 척 툭 내어 물은 그녀가 어느새 모텔 로비에 돌아와 있는 알피와 그레이 씨에게 고개를 한 번씩 까닥여 묵례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도대체 어디에서 들킨 건지 짐작이 안 됐다. 일 년에 그래도 한두 번쯤 전화를 걸어 딸이 얌전히 지내는지 확인하던 아버지는 근 2년간 먼저 연락을 남기지도 않았고, 그녀가 먼저 연락한다고 해서 기꺼이 받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이 진동의 주인이 그 사람이라면, 그건 그가 제 딸의 낯선 일탈을 알아챘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이렇게나 빨리, 겨우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

아니지, 어쩌면 이 연락은 정말 별일 아닌 친구 사이의 잡담을 위해 날아왔을는지도 몰랐다. 예를 들면 제시나 클레오가 저번에 말했던 대로 애플파이를 맛보여 주기 위해 그녀를 집으로 초대하려려고 전화했다든가, 아니면 릴리가 이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감자로부터 답장을 받았다고 알려 주려는지도 몰랐다. 댄이 휠체어 신세를 드디어 면했다고 신이 났다면 어떨까. 그것도 아니면 필이 또 이블린을 향해 낯간지러운 추파를 던지려는 참일 수도 있고, 알란이 조사와 관련해 할 말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내 새 휴대폰을 용케 찾아낸 그일지도. 이블린은 계단을 뛰듯 오르는 내내 자신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을 법한 사람 이름을 더 쥐어짜 내려고 용을 쓰다가, 현관에 들이닥쳤을 때엔 아주 멈춰 버렸다.

센서등이 희게 빛을 발했다가 툭 꺼졌다. 현관에는 자연광이 잘 안 들었기 때문에 어둠이 순식간에 그녀를 뒤덮었다. 지나친 정적. 떠나기 전부터 그녀는 오래 이 시간을 기다려 왔다. 그런데 왜 이렇게나 몸이 통제를 벗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발작하기 직전을 닮은 식은땀과 오한, 저린 팔다리와 치미는 구토감, 그리고 통증과 또 다른 통증…….

심장이 귓가에서 두방망이질 쳤다. 그러나 이블린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숨을 참고, 객실 구석구석에 비치해 둔 병 중 아무거나 낚아채서 니트로글리세린을 두 알 꺼내 혀 밑에 밀어 넣은 후, 바닥에서 새로 발견한 판자 틈에 시선과 상념을 흘려 넣는 데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적막에 모든 신경을 몰아붙인 채 피가 흐르는 소리, 눈알이 굴러가는 소리라든가 얄따란 살갗으로부터 땀이 배어 나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을 뿐인데 실상은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알약이 천천히 녹아내리며 불쾌하게 달고 톡 쏘는 감각이 혀를 좀먹었다. 그녀는 미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몇 초가 지났는지 어림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블린은 손을 움직였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 이블린. ]15:49

[ 너답지 않은 짓을 하는구나. ]15:49


칠 분이 지난 발신 시각을 그녀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애매한 텀을 두고 이어서 세 번째 메시지가 왔다.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라. ]15:56

[ 같잖은 짓 하지 말고. ]15:57

15:57[ 글쎄요 ]

15:59[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


이블린의 부친은, 그러니까 로렌 소여는 정확히 이블린의 생각대로 답했다. 지금 얘기해. 그리고 이블린은 정말 그녀답지 않게 반항하여, 돌아가면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독단으로 일을 진행하겠다고 메시지를 써 보냈다. 이번에는 몹시 빠르게 답장이 돌아왔다.


[ 귀찮게 구는군. ]16:04

[ 인터넷을 진작 끊어버리지 않고 가만 놔둔 탓인가? ]16:04

16:05[ 그게 아니라, 다 위대하신 아버지 밑에서 수학한 덕이죠. ]

16:05[ 안타깝게도요 :) ]


그녀는 참지 못하고 비아냥대고서 휴대폰을 아예 꺼 버렸다. 자길 향한 비방이나 비난은 절대 가만히 들어넘기지 못하는 소여 그룹 회장님께서는 지금쯤 노발대발해서 뭔가 수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게 분명했다. 어쩌면 십 년이 넘게 미뤘던 숙원을 드디어 해치우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그는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병실 인터넷을 모조리 끊고 나서 간호인을 몰래 포섭할 수 있었다. 간호인이 휠체어를 밀다가 살짝 삐끗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엘리베이터나 계단에서 대비 없이 굴러떨어질 것이고 다시는 그를 귀찮게 하지 못할 테니까. 아니면 그는 이블린이 다시 병상에 누웠을 때 팔뚝에 꽂을 링거 수액의 성분을 직접 결정할 수도 있었다. 이때 이블린은 고통스러운 비명도, 낙하하는 몸뚱이를 운 좋게 받아 안아 줄 선량한 타 병실 문병객도 없이 조용히 자다가 떠날 것이다. 솔직히 이블린은 후자가 조금 더 끌린다고 제법 여러 번 생각했었다. 그것 또한 습관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블린을 병상 위에서만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그에겐 정말 안된 일이지만, 그녀는 병원에 간다는 의미로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니었다. 이블린 소여가 자기 부친을 독대할 자리는 폐쇄병동이 아니라 소여 그룹 본사의 회장실에 꾸며질 것이다. 왜냐면 그가 7분이나 기다렸으니까. 로렌 소여는 자기가 유일하게 만들 수 있었던 혈육을 깨끗이 잊어버릴 수도 있으며, 겨우 7분의 방해를 빌미로 언제든 처리할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그러면 안 될 이유를 이블린 소여는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블린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이부자리 위에 몸을 웅크려 누웠다.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은 지나치게 빨갰다. 뜨거운 색채에 비해 과하게 추웠기 때문에, 그녀는 그 순간 그리운 게 뜨겁던 제시의 손인지 아니면 검은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얼굴 모를 누군가인지 알 수 없었다.



8.

여자가 떠올린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그녀가 손바닥에 직접 새긴 숱한 손톱자국들은 일종의 꽃점 역할을 했다. 비행하기 전날 밤, 그 두 가지 가능성을 셈할 때 그녀는 흰 베개에 흰 이마를 기대고 파란 달을 바라보면서 손바닥을 반대쪽 손끝으로 하나하나 더듬고 있었다. 거기서 만나자고 했으니까, 오겠다고 했으니까.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파란 우울에 끔찍스러운 세 글자를 녹여 넣고 그녀는 밤새 손바닥을 쓰다듬었다.



9.

날짜가 지났다.

이블린 소여의 생애 모든 토요일을 통틀어서 오늘만큼 요란한 토요일 아침은 단연코 없었다.

종일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가, 무거운 머리를 붙들고 휴대폰을 켜자마자 쏟아진 친구들의 경악과 걱정이 뒤섞인 연락들을 대처한 게 그 시작이었다. 이블린은 아예 단체 메시지 방을 새로 파서 자길 초대해 달라고 클레오에게 부탁했다. 그런 다음, 모여 있는 모두에게 그녀의 본명을 시작으로 그간 숨겨 왔던 사실을 모조리 토로했다.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 탓이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친구들은 그녀의 원래 성이고 나발이고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더스크우드가 너무 동떨어진 시골 마을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녀가 소여라는 두 음절짜리 단어에 아무런 파급력이 없는 작금의 상황을 어이없어하는 동안 제시는 울었고 토마스는 착잡해했고 댄은 화를 냈다. 다시 제시가 울었고 클레오가 혼란스러워했고 릴리는 의심했다. 또 제시는 울었고 이젠 아예 이블린이 머물던 모텔 방에 쳐들어오기까지 해서는, 성마른 이블린의 갈비뼈를 끌어안다 못해 반쯤 부러뜨릴 뻔했다. 이거 그렇게까지 호들갑 떨 일 아니거든. 이블린은 대수롭잖게 말했다가 방문객에게 어깨를 거세게 붙잡히기도 했다. 심장병이라며! 호들갑이 아니고 심장병이라며! 투숙객이 한 명뿐인 작은 모텔에서 제시가 마구 외치는 바람에, 류머티즘을 앓는 무릎을 쥐고 달려왔던 월터 부인은 릴리에게 연락했고 릴리는 친구들을 모조리 대동해 그녀의 방에 뒤이어 쳐들어왔다. 특히 댄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지켜줘야 하는 대상이 그의 등 뒤에 숨어서도 무력하게 꼴까닥 숨이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알고 보니 그는 이성적 호감이 있는 여자뿐만 아니라 보호 대상이라고 여긴 자기 또래 여자애라면 모조리 귀염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상대는 현재 릴리와 제시 그리고 이블린이었다. …클레오는 어머니들 일 때문인지 무언가 수틀려서 명단에서 제외된 모양인데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 그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고 체력이 조금 달릴 뿐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릴리가 신발장 위에 로고가 반 넘게 지워진 채 놓여 있는 약병을 발견하면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뒤이어 클레오와 토마스는 깔끔히 싸여 있는 그녀의 트렁크를 찾아냈다. 아니 이게 이렇게 된다고. 이블린은 착잡함에 머리를 맡긴 채 제시의 손에 맥없이 흔들렸다.

그래도 그 애들이 이블린을 챙겨준 덕에 여행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클레오가 가장 빠른 항공편을 알아봐 주고, 제시와 릴리는 당장 먹일 수 없으면 싸 주기라도 하겠다며 클레오의 메시지 프로필을 뒤져 애플파이를 정말 구울 셈이었던 거 같은데 그걸 언제가 됐든 먹을 자신이 없는 이블린이 애써 만류했다. 가만히 듣던 댄은 협탁에 말라비틀어진 채 방치된 맥앤치즈 상자를 보았고, 또 역정을 내다가 제풀에 사과했다. 토마스는 울적한 낯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그가 유일하게 고요했기 때문에 이블린은 그 옆에 앉아 있길 택했다. 그가 이블린 빼돌리기 계획인지 뭔지를 구상하기 시작했음을 알았다면 안 그랬을 거였다. 도대체 여자 친구가 납치된 사건이 있은 지 겨우 일주일 지난 시점에 그딴 걸 계획이랍시고 생각해 내는 게 제정신인 머리로 할 짓이냐고 그녀가 사정없이 쏘아붙이자 토마스는 머리를 붙잡고 사과했다. 이번에 떠나면 네가 다시는 안 돌아올 것 같아서, 불안해서 그랬어. 이블린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몸을 뒤로 물렸다.

“…….”

“야 이블린, 너 왜 말이 없냐.”

별안간 입을 꾹 다문 그녀를 댄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진으로 볼 땐 몰랐는데, 수염이 덕지덕지 붙은 남자애 둘이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그대로 받아넘기는 일은 정말 큰 고역이었다.

“…제이크가 더스크우드에서 보쟸어.”

“그래서 그 해커 자식은 지금 어디 있는데.”

“올 거야……. 바빠서 그래.”

“너 ㅆ……. 내가 계속 얘기했잖아, 그 자식 믿지 말라고.”

계속 이럴 거야? 댄이 추궁했지만 이블린은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제이크는 오지 않는다. 이블린도 그럴 것이다. 릴리 혼자서는 가족 간의 비밀을 누설할 수 없는 탓에, 수상한 해커를 의심하던 친구들은 여전히 제이크를 믿을 근거가 부족했고 그런 사람들끼리는 서로 쉽게 알아챌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더스크우드에서 보자. 그 말에 담겼던 감정이 너무 빠르게 마모된 탓에 일주일이나 지나버린 지금 온전한 진심만이 남을 순 없었다.

제이크가 앞으로는 위험하지 않게 길을 찾아낼 수 있도록 그녀는 선물을 남길 작정을 내렸다.

아니, 사실 그녀가 준비하고 있는 이벤트엔 선물이라는 단어보다 독단이라든가 위선, 기만이라는 단어가 더 걸맞았다. 애초에 그 계획이 뜻대로 되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블린은 20년 넘게 살면서 고집스럽게 걱정하고 미련하게 상처를 주고받거나 자기 딴에는 쏟아붓는다고 하는 모든 헌신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 외에 사랑의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새로운 사랑을 가르쳐 줄 뻔한 상대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와 교류하고 역경을 헤친 모든 순간은 시시각각으로 멀어지고 이블린 소여는 관성에 맞춰 이전의 피상적이고 타성적인 병자로 되돌아가는데 그녀를 아주 바꿔버릴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은 그 모진 흐름에 그녀를 방치하고 있었다.

아니. 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제이크를 사랑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비정상적인 속도로 쌓인 친밀감과 동료애를 착각한 것뿐이고 얼굴도 이름도 체온도 목소리도 취미나 특기나 과거사도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차피 만나 보았자 그는 분명히 실망했으리라고 이블린은 확신했다. 제이크는 그때 이블린에게 그녀가 바란다면 그는 그곳에 있겠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말은 가볍고 현실은 막중했다. 그녀는, 다시 말하건대 제이크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묘사했던 검은 머리칼이나 익명성 가득한 도시를, 단답형으로 뚝뚝 끊기다가 어느 때부턴가 길어지기 시작했던 문장들을, 그녀가 그립다고 말할 때 그 문장에서 느껴지던 확신을, 한물간 이모지와 콜론과 서툰 플러팅을, 그럴 때마다 화면 너머로 은근하게 느껴지던 쑥스러움을, 가끔 놀릴 때마다 보이던 철두철미한 그의 허술한 면모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와그작 구겼다. 그런 표정도 지어 본 적이 잘 없어서 얼굴 근육 움직임 하나하나가 몹시 생소했다.

“네 삶을 포기하지 마. 너 그렇게 멍청한 애 아니잖아.”

비행기 좌석 예약을 마쳤는지 어느샌가 등 뒤에 서 있던 클레오가 말을 얹었다. 앞에 있었다면 이블린의 얼굴을 그녀도 보았을 것이고 아마 댄과 토마스처럼 말을 잃었겠으나, 어쨌거나 친구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깔끔하게 말을 마쳤다. 댄이 빗어넘겼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동안 토마스가 우왕좌왕하다가 휴지를 집어 건넸다. 그제야 이블린은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하다면 그러지 마.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해.”

그것이 누구의 말인지 이블린은 구별해낼 수 없었다. 이미 늦었다고 중얼거리며 그녀는 손바닥에 손톱을 꾹꾹 눌렀다. 속이 답답했다. 분노와 조바심, 흥분으로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그 망할 해커 자식도 아직 못 만났는데 벌써 늦었다고?”

“너야말로 내 얘기 들었잖아.”

그녀는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차분하게 말했다. 유예기간은 끝나 버렸어. 지독한 현실로부터 연락이 온 탓에 이젠 꼼짝없이 돌아가야 했다. 그녀가 자기 삶에서 사라질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이별을 잊을 수 있던 시간들을 이젠 모조리, 똑바로 마주하고, 하나씩 세어야 했다.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냐, 또 연락할게.”

“못 믿겠어.”

옆구리로 뜨거운 체온이 파고들었다. 이블린은 빨간 머리통을 꼭 끌어안아 보았지만 제시의 팔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미 리치를 잃었잖아……. 너마저 잃게 하지 마, 응?”

“제시. 넌 날 잃지 않을 거야.”

“네가 그곳으로 되돌아가면 난 널 잃는 것과 다름없게 되는걸.”

널 다시는 끌어안을 수도 없고 애플파이를 줄 수도 없잖아. 다시 안 올 거잖아. 맥없이 말하며 제시가 그녀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블린은 잠깐 손을 띄운 채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조금 어두운 전등에 그녀의 머리칼이 노랗게 떠 보였다.

“떠나기 힘들게 하지 마, 난 돌아가야 해.”

“떠나기 힘들게 할 거야. 필과 알란도 부를 거야. 널 보내지 않을 거라고.”

“다들 왜 그래?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니라니까.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

“원래 자리란 게 뭔데, 도대체!”

고개를 번쩍 치켜든 제시가 비명처럼 외쳤다. 우리한테 그러지 마. 그리고 터지는 울음소리, 그녀가 입을 틀어막는 손의 모양새와 내려앉는 눈썹 그리고 탁해지는 눈동자까지 모든 것을 이블린은 소름이 끼칠 만큼 정확하게 기억했다.

“말해 봐, 이블린. 우리가 사랑했고 한때 영영 잃을 뻔했던 한나가 찾고 나니 사실은 범죄자래. 리치는 또 어떻고? 살인 방조죈가 뭔가로 혼자 자수해도 될 걸, 지멋대로 이 난리를 벌여 놓고는 혼자 무책임하게 떠나 버리기까지 했잖아. 원래 자리란 게 뭐야? 걔네가 있던 자리는, 그러다가 사라진 빈자리는 걔네의 원래 자리가 아니었던 거야? 그럼 네가 있다가 떠난 자리는?”

“…제시.”

“아니, 됐어. 그냥 말하지 마. 언젠가 메워질 거라고 말할 거라면 조용히 하란 말야.”

이블린의 새파란 눈을 밝은색 눈동자가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거 알아, 이블린? 리치가 그린 까마귀 그림은 하나도 완벽하게 지워지질 않았어. 자동차 무덤에 있는 것도 우리 집에 있는 것도 모두 자국이 선명해. 메워질 거라고? 지워질 거라고? 있잖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지워질 거였으면 리치가 북북 문질렀을 때 진작에 지워졌을걸.”

제시가 숨을 몰아쉬었다. 비릿하게 쇳소리가 섞인 날숨은 속이 편한 날이 없는 환자에겐 아주 익숙했다. 그래서 차라리 미움을 사고 떠나는 게 훨씬 간편하고 쉬운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그녀는 그래야 한다는 듯이 사과를 뱉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제시, 그러니까 물부터 좀 마시자, 그러고 얘기하자, 내가 미안해.

“소리 그만 지르고……. 응? 부탁이야, 너 목 쉬었어.”

허리를 끌어안은 친구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으며 이블린이 속삭였다. 온몸이 눈치 없이 저릿거리기 시작해서 답답했고, 그보다 제시를 이번엔 이블린 본인 때문에 다시 탈수로 쓰러지게 할 것 같아서 속상했다. 엉망진창이 된 그녀의 방 한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릴리가 물을 한 잔 들고 시야 범위 안에 끼어들었다.

“자, 제시…….”

“난……. 난 싫어…….”

그때 가슴 통증이 시작됐다. 이블린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힘으로 제시를 뿌리치고 자리에 웅크렸다. 놀라 울음까지 멈춘 제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다시 비명을 지르며 이블린의 어깨에 매달렸다. 클레오가 현관에 여전히 열린 채 뒹굴던 약병을 낚아채고 뜨거운 손이 이블린의 몸을 반쯤 넘어뜨릴 듯이 우악스럽게 침대 헤드에 기대 눕혔다. 물과 알약이 두서없이 입안에 비집고 들었다. 그녀는 가슴께를 꾹 붙잡고 숨도 쉬지 못하며 헐떡이다가, 기어코 구역질을 하는 바람에 입에 들어갔던 약을 방바닥에 모조리 게워냈다. 노란 위액이 섞여 나왔다. 의식이 까무룩 멀어지려다가, 짓눌리듯 몸 어딘가에 들이닥친 충격 때문에 흔들리며 되돌아왔다. 그녀는 위액과 침을 질질 흘리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앞에 어른거리던 약병을 뺏어 들었다. 알약이 혀 밑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이블린은 입을 틀어막고 구역질을 참아냈다. 휘몰아치는 작열감, 도대체 심장병이라면서 턱은 왜 아픈 거지? 등은? 이는 왜 욱신거리는 거지? 몇 번을 앓아도 그 통증은 이해의 영역 밖에 있었다.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누가 그런 얘길 했더라. 불길 같은 고통 속에 혼자 버려질 때면 이블린은 뭔갈 해낼 자신이 깡그리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 원망스러운 웃는 이모티콘이 의식 너머에서 일그러졌다.

눈앞이 희게 셀 즈음이 되어서야 증상이 잦아들었다. 그녀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걸 확인한 릴리가 뒤늦게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토마스가 바닥을 청소하는 동안 클레오는 수건에 물을 적셔 이블린의 얼굴을 몇 번이고 닦아냈다.

“나 환자 된 거 같아.”

“그게 지금 네가 할 말이야?”

환자 맞잖아, 하고 클레오가 확연히 안도한 낯으로 타박했다. 침대 헤드에 미끄러져 등을 대고 누우려다가, 뒤늦게 그녀는 휠체어를 침대에 딱 붙인 누군가가 그녀의 늘어진 어깨와 팔을 계속 마사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댄이 곧장 두 손을 머리 높이로 들며 물러났다. 네가 너무 새파랗게 질려 있잖아, 죽는 줄 알았다고. 다른 의도는 없었어. 변명을 붙이는 그에게 이블린은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입 모양으로 고맙다고 발음했다.

그녀가 자기 심장병을 아주 완벽히 증명해 내는 바람에 지루한 말다툼은 흐지부지하게 끝나 버렸다. 그녀를 제외하고도 우는 애가 둘이나 돼 버려서, 간단하게 설명을 마치고 사과한 후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가망 없던 계획은 이제 아예 물 건너가 버렸다. 클레오는 한숨을 푹 쉬더니, 방금 낑낑대며 예약했던 비행기 표를 취소하겠다고 대뜸 선언했다. 무슨 짓이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방금 협심증 증상을 보인 애를 비행기에 혼자 태울 순 없어. 이블린은 자긴 비행기 기압 차 정도는 견딜 수 있다거나 한 번 발작을 일으키고 나면 적어도 일주일은 괜찮다는 말로 클레오를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모텔 직원이라 체크인 기록을 모조리 살펴볼 수 있던 릴리에게 그것도 곧 탄로가 났다. 네가 여기 일주일간 머물렀는데, 방금 그 발작이 있기 전에도 일주일이라는 유예기간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여기 온 후에도 한 번은 아팠다는 얘기 아냐? 이블린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안을 짜내, 알란에게 공항까지 동행을 부탁해 보겠다고 얘기해야 했다. 어차피 그에게는 앞으로 참고인 조사에 참석하지 못할 테니 진술서로 대체하게 해 달라는 얘기도 전해야 했으니까. 아무리 못미더워도 경찰이 함께 간다는 말에 클레오는 누그러져서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돌아가면 어쩔 셈이야, 이블린.”

그녀를 놓아 주자고 선언한 것도 아닌데 저 한 마디에 친구들의 시선이 몽땅 클레오에게 쏠렸다. 이블린은 어쩐지 덩달아 당황해서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병원부터 들러야겠지……. 치료를 더 받든 퇴원 수속을 밟든 해야 하니까.”

“그래, 그건 잘 생각했어. 댄을 본받아서 병원에서 탈출했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람.”

시선 세례를 받는 사람 목록에 댄이 추가됐다. 댄은 휠체어 바퀴를 질질 끌어 친구들의 시야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방이 하도 작아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그는 쟤랑 내 팔뚝 좀 봐, 나는 튼튼해서 괜찮지만 쟨 안 된다고, 하는 변명을 대기 시작했다. 아무도 듣지 않았지만.

대화가 소강상태에 이르고도 한참을 누구도 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두가, 그중에서도 특히 제시가 이블린의 병을 몹시 불안해했는데 더스크우드의 병·의원은 심장 질환을 다루기에 너무 작고 노후화되었다는 주민들의 판단하에 결국은 이블린이 돌아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녀는 할 일 없이 친구들과 연거푸 포옹을 나눴다. 릴리가 인터넷에서 포옹의 효능인지 뭔지를 찾아 읽은 탓이었다. 자꾸 이블린의 손을 가져가 만지작거리는 제시에게 이블린은 과장없이 대략 여섯 번쯤 네가 놀러 와, 하는 말을 해다 바쳤다. 도대체 언제 불렀는지 나중에는 필과 알란이 정말로 객실에 찾아오기도 했다. 이블린은 손등 키스란 걸 그때 처음 받아 보았다. 필 호킨스가 기쁠 때뿐만 아니라 슬플 때도 제시와 똑같은 입 모양을 짓는단 걸 깨달았을 때 이블린은 조금 울 것 같다고 느꼈다.

“오실 땐 괜찮으셨던 겁니까?”

“저 정말로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다니까요…….”

알란 블룸게이트에게는 끝까지 이블린 스튜어트로 남기로 했다. 일일 우버 기사가 되길 부탁하는 입장에서 이래도 되나 싶긴 했지만, 뭐 대기업 총수의 자제가 사람을 구했다느니 병실에서 일으킨 기적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기자들의 손에 그녀의 행적이 부풀려지긴 원치 않았다. 언론을 타는 건 될 수 있으면 의도적이어야 잃는 게 없는 법이다. 어쨌거나 그녀가 약 없이 당장은 연명하지 못하는 걸 알자 알란도 의심을 아주 거둔 듯했다. 그는 진술서 문서를 가져왔지만, 이블린이 몇 자 대강 휘갈긴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일정에 맞춰 연락 달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비행편 예약 일자는 내일이었다. 일요일에 뜨는 비행기로 탈출했던 이블린은 일요일에 뜨는 비행기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은 시간 동안 이블린은 새벽에 그랬듯 꾸벅꾸벅 졸다 깨길 반복했고, 그녀의 곁을 지키는 내내 친구들은 그녀의 귀가에 관한 단어를 의식적으로 피했다.



10.

22:18[ 나도 사랑해, 제이크. ]

———————— Jake is now offline ————————

01:57[ 네가 보고 싶어 ]

01:59[ 너한테 이 말을 하지 않곤 떠날 수가 없었어 ]

02:08[ 미안해 ]



11.

날짜가 지났다. 예전에 쓰던 휴대폰을 켰는데도 여전히 간절하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참을성 없이 떼를 쓰는 어린애가 된 기분으로 이블린은 알란의 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관성적으로 금욕적인 생활 습관을 지키고 간절히 믿지도 않는 예수 십자가를 룸 미러 밑에 달아 놓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운전대 앞에서는 기계처럼 운전에만 집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새까만 옷을 입고 조수석에 짐짝처럼 처박혀서, 이블린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 정적을 깨려 고군분투하는 알란에게 맞춰 답을 건네다가 결국 꾸벅꾸벅 졸았다. 그는 이블린이 아프다는 말로 모든 무례를 다 이해해 줄 셈인 듯했다. 가볍게 차창에 머릴 부딪히고 깬 그녀에게 알란은 아무 말 없이 물을 내밀었다. 창을 살짝 내리고, 짧은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이블린은 공항까지 가는 두어 시간 동안 물병을 끝까지 비웠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비행기에서 여섯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공항을 나설 땐 밤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겨울일 텐데 눈은 오지 않았고 사위는 시끄러웠으며 그녀는 누구에게 어깨를 치이기도 전에 하얀 정장 차림의 남성에게 팔목을 붙들렸다. 초면인데도 그녀는 곧장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볼품없이 마른 여자를 건장한 남자가 질질 끌고 공항 앞을 가로지르는 동안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블린은 넘어져 무릎걸음으로 걷는 불상사를 면하려고 무던히 애써야 했다.

장식물도 무늬도 없는 흰색 시트와 흰 안전벨트, 하얀 정장이 한데 뭉쳐 작은 감옥처럼 그녀를 집어삼켰다. 소여 그룹 전체가 검은색을 용인할 수 없는 나머지 검은 옷의 이방인을 아주 파묻어 없애 버리려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직원은 이블린을 차에 밀어 넣을 때마저도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당연히 멀미를 하는 그녀를 배려해 줄 리도 없는데다 차 안에 방향제 냄새가 독하게 진동했기 때문에 그녀는 차 바닥에 구토하겠다고 협박해서 차를 네 번쯤 갓길에 대야 했다. 알란이 준 물을 그때 모두 마시면 안 됐는데. 탈수증으로 어지럼증이 도진 그녀가 안전벨트에 매인 채 자꾸 휘청이는데도 직원은 그녀를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로렌 소여의 수족 같은 그 남자의 얼굴을 이블린은 룸 미러를 통해 필사적으로 외웠다. 하얀색이 정말 잘 어울리는 그 남자는 야경을 얼굴에 뒤집어쓰자 더욱 멀겋게 굳은 낯을 하고 이블린의 시선을 끝까지 외면했다.

처음으로 일탈을 저지른 고명딸과의 대화가 어지간히도 급했는지, 새하얀 소여 그룹 본사 건물은 그 시간에도 불이 환하게 다 들어와 있었다. 이블린은 날짜가 넘어간 시계를 휴대폰 액정으로 흘긋 보고서 고개를 돌렸다. 로렌 소여의 원래 퇴근 시간이 언제인지는 알 바가 아니지만 뭐든 귀찮고 거슬리는 건 싫어하는 그의 성정상 아직 일을 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녀는 캐리어 손잡이에 기대 하얀 엘리베이터에 올라, 하얀 벽에 비치는 단 한 벌의 검은 옷에 시선을 두었다. 하얗다 못해 병원을 연상케 하는 엘리베이터였다. 하다하다 엘리베이터에도 멀미를 하려는지 너무 어지러웠고 날개뼈에 불이 붙는 통증이 일었지만, 다행히 발작이 시작될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불쾌하게 뛰는 심장 소리를 뚫고 이블린은 누군가를 이제야말로 깊이 생각하려 애썼다. 그 사람을 위해 그녀가 지금 여기 있는 거니까.

제이크.

“들어와라.”

“아버지.”

말단 직원 하나를 곧바로 알아본 것과 다르게, 자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앉아 있는데도 이블린은 그가 아버지, 로렌 소여라는 걸 인지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블린과 같은 색의 속눈썹과 머리카락이, 디귿 자로 늘어선 하얀 소파나 역시 새하얀 책상과 어우러져 차갑고 딱딱하게 보였다. 이블린은 그를 계속 아버지라고 인식하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그와 알란의 공통점을 찾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려 가며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핏발이 비치는 창백한 피부 위로 주름이 진 눈꼬리가 가까스레 시선 끝에 닿았다. 하지만 그 눈꼬리가 외딴 어느 마을의 경찰서장과 비슷하게 휘어질 일은 없었으므로 단지 그것뿐이었다. 차라리 알란이 저기 앉을 자격을 갖췄다면 좋을 텐데, 하는 곳까지 생각을 흘려보내다가 그녀는 혀끝을 꾹 깨물어 상념에서 벗어났다.

“일탈은 재미있었느냐.”

“네.”

아예 눌러살고 싶어지던데요. 이블린은 그린 듯 웃으며 권하지도 않은 자리에 앉았다. 특색 없이 희어서 정확히 어떤 동물인지 특정할 수 없는, 윤기나는 가죽 소파였다. 등은 곧게 펴 가볍게 등받이에 기대고 다리를 꼬면 역시 하얀 정장을 맞춰 입은 비서가 마실 것을 물어 왔다. 로렌이 끼어들기 전에 그녀는 커피를 한 잔 부탁했다. 며칠 전 레인보우 카페에서 마신 커피를 모조리 게워낸 협심증 환자답지 않게 아주 자연스러운 태도로, 각설탕을 하나 넣어달라는 부탁을 얹어서. 원래 그녀는 음료에 꿀이 아니라 설탕이 들어간 건 마시지 않았다. 그녀를 잠깐 노려본 로렌은 자기 몫의 커피에 우유와 각설탕 두 개를 넣었다.

“휴대폰부터 껐던 걸 보면 네가 아주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더구나.”

“못 알아봐 드리면 자식 된 도리가 아니잖아요.”

“돈도 엉망으로 놀렸고.”

“대기업 총수의 딸다운 소비 패턴 아닌가요?”

열심히 돌려 말하고 있지만 결국 그의 말은 휴대기기와 간호인들을 털어 봐도 나오는 게 없어 번거로웠다는 의미였다. 흰 소파에 앉아 가볍게 웃는 그녀를 흰 소파에 파묻힌 푸른 눈이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무리 매서워 보았자 어제 제시가 보냈던 서슬 퍼런 눈길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지만, 느닷없는 궁금증이 치밀 정도는 되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우셔서 날 가둬 두셨나요? 속삭임이 뇌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작은 목소리를 놓칠 만큼의 소음이 그곳에 없었으므로 로렌 소여는 딸의 말을 곧장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의 물음에 틀린 부분은 없는 셈이었다. 뭔가를 두려워했다는 점도, 제 딸을 수술을 시켜 퇴원하도록 해 줄 생각이 없었던 것도.

“뭘 원하지?”

로렌이 물었다. 이블린은 대답하는 대신 손을 깍지 끼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발음을 좀 더 정돈해서 아예 다른 주제로 말을 틀었다. 사 년 전 일 말이에요.

“4년 전?”

“네, 회사의 비리를 폭로당한 그 일이요.”

이블린 소여가 병원을 탈출하기 위해 그랬듯이 그때도 로렌 소여는 주변의 이해관계로 얽힌 사람들에게 돈을 찔러줬으리라. 연혁을 모조리 뒤져 봐도 소여 기업은 그때 이상으로 크게 휘청여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침착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눈썹을 한쪽 삐죽 올렸다. 이블린은 그 움직임을 보고 입술을 휘어 가벼운 호선을 그렸다. 체스를 두는 기분이었다. 주위가 하얗고 자기 혼자 새까매서 더욱. 

“아직 그 일로 심려가 크시다면서요?”

“누구에게 그 얘길 들었지?”

“본인한테요.”

사건의 주체가 될 사람은 한정되어 있었다. 로렌 소여가 문장의 함의를 읽어내길 기다리는 동안 비서가 소리 없이 다가와 흰 잔에 담긴 커피를 내밀었다. 이블린은 등받이에 등을 더 깊이 기대고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혀가 아리도록 달긴 했지만 향은 제법 괜찮은 것 같았다. 다시 그날로 되돌아간 것처럼, 그녀는 제이크가 저도 모르게 자기 정체를 알려준 순간을 회상했다. 로렌 소여는 정확히 그녀가 예상한 질문을 뱉었다.

“그와 어떻게 컨택했지?”

“글쎄요, 안 궁금하실 텐데.”

계속 웃고 있으려니 광대뼈며 입꼬리가 죄다 당기고 아팠다. 이렇게 오래 의식적으로 미소 지어 본 적이 없어서 곤란할 수준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표정 연습을 좀 할 걸 그랬다고 이블린은 생각했다. 눈앞에 앉은 로렌 소여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희게 앉아 있었다.

로렌 소여가 더스크우드의 일을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임을 물론 그 딸이 가장 잘 알았다. 하지만 이블린은 일단 모조리 함구하기로 했다. 제이크와의 접촉조차 이블린이 처음부터 계획했던 일들 중 하나였던 것처럼 어필한다면 그는, 적어도 이 자리에선, 사실과 무관하게 그녀의 자질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다. 아버지는 사 년씩이나 못 잡은 해커를 아주 간단하게 찾아낸 딸. 언론에 찔러 줄 헤드라인들을 미리 구상하며 살풋 웃자 로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온통 흰 소여의 회장실에 커피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안될 말이죠, 라고 그녀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회사가 크게 자라려면 다들 그런 루트를 조금씩 열어 둬야 하는 법이잖아요.”

“…….”

로렌 소여가 자신의 잔에 각설탕을 두 개 더 넣고 휘저었다. 이블린은 웃음을 흘리고,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닌데. 그들로서도 우리가 자라야 이득일 테고요.”

괜히 어쭙잖은 사감으로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하며 그녀는 잔 위에서 녹아 사라져 가는 크레마를 잠깐 감상했다. 그녀와 똑 닮은 얼굴의 남자는 그녀가 의도한 두 의미를 모두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 두 의미 중에 어둠 속의 서류 가방이나 사과 상자 따위를 선호하는 게 로렌 소여라면 이블린 소여는 마이크와 카메라와 모니터에 흐르는 수많은 프로그래밍 언어의 손을 들어주기로 한 셈이었다. 같지만 다른 길, 제이크가 예상하고 제시하고 기대했던 방식 위에 발을 디딘 이블린.

로렌 소여가 흰 소맷단의 하얀 커프스를 만지작거리자 이블린도 덩달아 새까만 치맛단을 잡아당겨 정리했다. 그리고 그가 잔을 기울이자 이블린도 크레마가 뜬 커피를 들어 다시 몇 모금 들이켰다. 그가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네가 아주 그놈에게 푹 빠졌구나.”

“빠지다뇨, 전 언제나 회사를 위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요.”

“봐라, 이블린. 나나 너나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 않으냐. 회사의 명운 같은 얘길 하긴 늦었다.”

“무슨 소리세요, 아직도 이렇게 정정하시면서. 소여 그룹의 명운은 아직 아버지 손에 단단히 쥐여 있지 않나요.”

커피 한 모금과 눈웃음. 짧고 하얀 정적 틈으로 희미하게 시계 소리를 닮은 소리가 났다. 뉴턴 크래들이 로렌 소여의 뒤쪽, 그의 책상 위에서 똑딱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너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협박이라뇨,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세요.”

그가 이블린에게 행할 일이 곧 소여 그룹의 행방을 결정한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조차 협박이 될 수 있다면 그녀가 한 건 협박일 터였다. 이블린은 잠깐 과거를 회상했다.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더스크우드의 알록달록한 기억. 공항에 도착해 알란의 차에서 내릴 때 그녀는 그를 붙잡고 언질한 바 있었다. 사흘 내로 제가 메시지를 하나 보낼 텐데요, 만약 그 메시지에 어떤 문서가 첨부되어 있다면 곧장 그걸 들고 신문사로 가세요. 알란은 경찰이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장 알아들을 만큼의 경험이 있었다. 이블린은 로렌이 자길 죽이리라고 확신하는 순간 알란을, 그리고 더스크우드를 통째 제2의 제이크로 만들 심산이었다. 이번엔 마을 하나를 통째로, 정부라는 아군 없이 혼자 등질 테니 제이크 때처럼 일이 쉽진 않을 테다. 어쩌면 그런 식의 속죄도 제이크는 받아들여 줄 것 같았다. 그의 징죄를 완성해 준 파트너로서.

짐짓 세상 물정 모르는 애처럼 웃고 있으려니 비서가 세라믹으로 된 하얀 설탕병을 티 나지 않게 슬쩍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어딘가에서 묘하게 희고 비린 쇠 냄새가 났다. 그녀는 비서를 향해서도 똑같이 웃어 주었다.

“아버지, 저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회사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어요.”

“내가 안 받겠다고 하면 어쩔 테냐.”

“받으실 거 알아요.”

골칫거리를 떼어내는 방법은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죠, 아버지께도 그럴 걸 알아요. 그렇게 말한 로렌 소여의 골칫거리는 옷매무새를 다시 정리하고 짐짓 하얗게 웃어 보였다. 소파에 반사된 형광등 불빛이 그녀의 눈을 마구 찔렀다.

“내가 귀찮은 것들을 몽땅 폐기처분할 셈이라면?”

“뭐, 받는 분 마음이겠죠. 사실 제 목숨은 아버지가 주신 것이니만큼 저는 아무 유감도 없고요. 근데 그이를 정말 그렇게까지 척질 셈이세요? 4년 전 그날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함께 폐기될 거예요.”

“그자를 어떻게 그렇게 구워삶은 거냐?”

사랑이요. 그녀는 꿈을 꾸듯 대꾸했다. 이블린은 이미 잊어버린, 믿다가도 믿은 적 없는 것이지만 첫 일탈과 그 충격, 그리고 딸의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백금발의 중년 남성에게 그 말은 터무니없는 만큼 신빙성이 생겼다. 이블린은 같은 조명 아래서 꼭 같은 색으로 빛나는 두 머리통을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 그녀는 사랑을 믿을 수 없노라고 판단했다. 크레마가 다 녹은 커피는 이제 시큼한 맛을 내기 시작했다.

“식장이라도 대여해 달라는 말이냐.”

“아버지를 골탕먹인 자식인데 설마요.”

파란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이제 그는 소여 그룹의 이름으로 제이크에게 가야 할 선물이 뭐가 될지 계산해야 했다. 식은 커피를 이블린이 들이켜는 동안 그는 비서에게 손가락을 까닥이고 그의 귓가에다가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비서는 희게 질린 제 상사의 면전에 고개를 저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이블린은 로렌의 표정이나 비서의 반응으로 무엇이든 유추해 보려고 했지만, 흰 정장을 입은 두 사람의 얼굴은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바심 같은 건 모르는 척 다시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 큰 손해를 나더러 모조리 감수하라고 할 테냐?”

“대신 아버지는 제대로 된 후계자와 든든한 보호벽을 한 번에 얻으실 텐데도요?”

옷감의 검은 잉크가 손바닥에 배어 얼룩지는 것 같았다. 이블린은 그제서야 자기가 치맛단을 손에 쥔 채 손톱으로 꾹꾹 짓누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바보 같은 실수였다. 그가 눈치채지 않길 빌며, 천천히 무릎 위로 손을 미끄러뜨려 주름을 펼친 그녀는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치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잘게 깜박였다. 그가 대놓고 깊게 한숨을 뱉었다.

“…어쨌든, 네 말은 대충 알아들었다.”

“그럼 제 사과의 선물을 받아 주시는 거예요?”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블린은 그와 똑 닮은 파란 눈을 반짝이며 양손을 맞잡아 보였다. 그의 뒤로 뉴턴 크래들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이번에야말로 찾아온 짧은 정적을 이블린은 한껏 긴장한 채,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참으려 애쓰며 기다렸다.

“기어오르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실수한 부분은 꼴도 보기 싫다만 배운 것 없이 그 정도면 키웠을 때 흠은 안 되겠지.”

“감사해요, 아버지.”

후계 문제와 해커라는 두 문제를 해결한 사람치고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손에 넣고 굴리거나 아주 처분해 버리려던 눈엣가시가 통제 범위를 지멋대로 벗어나자 치밀어오르는 수치심과 분노, 또는 이제 그에게 남은 게 없음을 깨달은 뒤에 찾아오는 체념. 대화가 끝나고서야 그녀는 아버지의 표정들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이블린은 비명을 다시금 꾹 삼키고, 마치 가족 간의 따스한 정을 느낀 어린아이라도 된 듯 조심스럽게 웃어 보였다. 원하던 바를 모두 이루고 이제 흰 소파와 흰 로렌 소여에게서 벗어나리라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바들거리는 무릎을 어떻게든 다잡는 데 집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묵례하고 자리를 뜨려는데 등 뒤로 로렌의 목소리가 닿았다.

“어디서 머물 테냐.”

“우선 지금보다 건강해져야 후계자 공표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해라.”

안녕히 계세요. 다시 안 볼 것처럼 이번엔 입 밖으로 꺼내 인사하고서 이블린은 다시, 이번에는 혼자,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어둠에 잠겨 새까맣게 보였다.



12.

02:08[ 미안해 ]

———————— Jake is now online ————————

[ 이블린. ]23:40

[ 믿기 힘든 소리인 건 알지만, ]23:40

[ 추적이 별안간 모두 사라졌다. ]23:41

[ FBI가 수배를 해제했다고. 이제 난 자유가 됐다. ]23:43

[ 널 만나러 갈 수 있어. 이젠 하루가 아닌 평생이라도 네 곁에 있을 수 있다. ]23:44

[ …이블린? ]23:58

[ 떠난다는 건 무슨 의미지? ]11:25

[ 네가 걱정돼. ]

[ 왜 메시지가 발신되지 않지? 지금 어디 있나? ]

[ 단체 메시지방에 있는 메시지 모두 읽었다. 우린 얘길 좀 나눠야 해. ]

[ 너에 대해 이런 식으로 알아내고 싶지 않다. 제발, 이블린. ]

[ 적어도 네가 무사한지만 알려줘. ]



13.

날짜가 셀 수 없이 지났다. 이블린은 휴대폰들을 금고에 넣어 잠갔다. 그러나 애초에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어도 연락을 확인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병원을 옮겼고, 이블린 소여라는 본명을 병실 명패에 끼울 수 있게 되었다. 일정을 잡아 경피 관상동맥 중재술인가 하는 수술을 받기로 했는데 몸이 하도 약해서 그런 비교적 덜 침습적인 수술도 견디기 어려울 수준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 그녀는 휠체어를 장만하는 대신 물리치료사를 들였다. 매일 죽어라 운동했고 식단을 철저히 맞췄다. 전자기기를 일절 멀리하게 되면서 남은 시간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 앉은 자리에서 독일어 기초를 뗐다. 책을 읽지 않을 때는 그냥 허공을 응시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새로 온 간호인이 보다 못해 LP판을 구해 주었는데, 이블린은 패배주의적인 그런지 락grunge rock에 제대로 꽂혀서 치지도 못하는 기타 코드를 모조리 외우기도 했다. 몸도 금세 차도를 보여서 짧은 구간이지만 곧 달릴 수도 있게 되었다. 양손으로 쥐어야 하긴 했지만 3kg짜리 덤벨을 들어도 이젠 곧바로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가씨가 재능이 넘치시네요, 하는 소리를 이블린은 매일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냥 그만큼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렇다고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금고를 잠글 때 자기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모조리 함께 넣어 놓은 것처럼, 그 이후로는 정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중에 듣기로, 수술 이후로 그녀는 나흘간 깨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대놓고 소여라는 이름으로 입원했기 때문에 로렌 소여가 귀찮음을 이기고 병문안을 와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깨어났을 땐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눈물을 쏟았다고 했는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블린은 그 직후부터 무감각한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이 주간 더 병원에 머무르다가 퇴원했다.

그리고 또 삼 주가 지나서 그녀의 얼굴과 이름이 신문과 뉴스를 뒤덮었다. 언론은 이블린 소여의 외모를 평가하거나 로렌 소여가 적당히 지어낸 그녀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에피소드들을 실어나르거나 또는 재벌이라는 개념과 그녀의 나이에 시기심을 느껴서 시대가 언젠데 뭘 믿고 기업을 직계 자손에게 승계하느냐는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작은 신문사 하나는 어떤 시골 마을의 실종사건과 이블린 소여 간의 관계를 어떻게 알고 조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즈음에 이블린 소여는 더욱 기업인답게 돈을 사용할 줄 알았다. 곧 더스크우드는 다시 어둠 속으로, 이블린 소여는 핀 조명 속으로 분리되었다.

주변이 시끄러울 때면 그녀는 간혹 더스크우드를 떠나기 전날로 되돌아가는 기분을 느꼈다. 레이스가 달린 흰 의자를 끌어다 앉으면서 이블린은 제시와 다른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고 그들이 포옹해 주었을 때 느껴지던 체온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 봐, 나는 그들을 이만큼이나 더 아는데도 사랑에 빠지지 않았어. 로렌과 에스더 소여도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러니까 사랑 같은 건 의미가 없는 거야. 없어도 살 수 있는 거야. 그러고 나면 심장은 제이크의 머리색처럼 새까맸고 이블린 소여는 그곳에서와 달리 대신 울어줄 사람이 없어 혼자 우는 줄도 모르고 울어야 했다. 그래도 그녀는 나름 견딜 만하다고 느꼈다.


제이크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도 반년은 더 지난 후의 가을이었다.

로렌 소여는 딸의 요구대로 기업에 해를 끼쳤던 해커를 협상 테이블에 그녀와 마주 앉히기로 했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네 남자 친구 데려오라고 그의 하나뿐인 고명딸에게 부탁하는 간단한 방식을 통해 해커를 불러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이크에게 자기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과시하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그녀는 짐작했다. 의도야 어쨌건 이블린으로서는 다행이었다. 그에게 먼저 다시 메시지를 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예상치 못하게 자유를 품에 가득 안게 된 해커는 — 방심을 해서인지 아니면 배후를 짐작해서인진 몰라도 — 평소보다 조금 덜미를 잡기 쉬워졌으므로, 로렌은 자기 수하 직원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그를 불러낼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언젠가 그녀에게 전화했던 때와 똑같은 후드 차림을 하고 응접실에 앉아 있게 되었다. 이블린이 방에 들어설 때즈음에 그는 부친이 보여주기 식으로 회사 곳곳에 들여 놓았던 주목 분재에 맺힌 새빨간 열매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후드 옆으로 삐져나온 검은 반곱슬 머리카락, 약간 굽은 어깨와 꼿꼿이 세운 등 같은 것이 눈에 담겼다. 발소리를 들었는지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가만히 어깨너머로 지켜보다가 그녀는 아무런 사감도 느끼지 않은 척 그의 뒤통수에 말을 붙였다.

“예쁘죠? 제 이름에 담긴 의미가 주목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아버지께서 특별히 아껴 가꾸신답니다.”

“…….”

“인사가 늦었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크 던포트 씨.”

이블린은 사무적인 태도로 가볍게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손을 내밀었다. 제이크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마주하고, 여전히 마디마디 도드라져 있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기까지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움직이지 않는 그를 두고 그녀는 그냥 가볍게 웃었다. 반갑습니다, 하는 상투적인 인사는 이제 미국 대통령을 데려다 놓고 앞에서 잠을 자면서라도 몇 번이든 할 수 있었다. 실은 몽땅 때려치우고 싶었고, 건물을 뛰쳐나가서 시끄러운 락 음악을 최대 볼륨으로 틀어 놓고 방 한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기나 하고 싶었지만, 어쨌거나 그곳은 직장이었고 이블린은 협상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도 그랬다.

“앉으시죠. 긴장하신 것 같은데, 얘기가 길진 않을 겁니다.”

“…이블린.”

“하하. 저는 다른 호칭을 기대했는데요.”

솔직히 처음에 그가 대인관계에 능하지 못하다는 소릴 했을 땐 반신반의했는데, 이젠 누가 봐도 믿을 수 있겠다. 이블린은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귀 뒤에 꽂으며 속으로 조금 웃었다.

“넌……. 내게 이럴 필요가 없다.”

“아뇨, 당신은 우리 눈에 띌 만큼 유능하잖아요. 꼭 붙잡아야 할 인재인 셈이죠.”

단정지어 말하고서 이블린은 비서를 불렀다. 그녀에게 설탕통을 밀어줬던 사람은 반년 전 수술을 받고 나와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할 즈음에 그녀가 직접 권고사직을 내렸다. 새로 들어온 비서는 눈치가 빨라서 좀 더 나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앞엔 커피가 한 잔씩 놓였다. 제이크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반면 이블린은 이제 하루에 평균 두 잔씩 무조건 커피를 마시곤 했다. 설탕과 프림, 가향 같은 것 없이 쓰고 고소하게. 그녀가 금세 비운 잔은 곧 다시 채워졌다.

“던포트 씨.”

“내게 화가 났나? 왜 이러는 건지 나는…….”

“제가 당신을 부른 이유가 궁금하신가요? 이런 자리는 자주 있으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불안불안하더니, 머리끈이 기어코 끊어지면서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흩어지는 게 주변시에 담겼다. 어쩐지 그녀가 쓰는 머리끈은 죄다 그렇게 쉽게 끊기곤 했다. 길러도 여전히 이리저리 삐치는 답 없는 머리카락을 조금 신경질적으로 모아 뒤로 넘기는 동안 그의 시선이 희미하게 닿는 게 느껴졌다. 백금발이 빛을 반사해서 그런지 괜히 눈이 부셨다. 이블린은 아무렇지 않은 척, 서류를 미리 훑어보며 빠진 건 없는지 점검하는 척 부산스럽게 굴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이블린, 나는.”

“아,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서툴렀나 봅니다. 실은 아버지 없이 혼자 이런 자릴 맡은 게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책상 위에 올라앉은 그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그녀는 못 본 체했다.

“이미 아시다시피, 5년 전에 우리와 던포트 씨 사이에 일종의 마찰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인재들을 그런 식으로 낭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당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온당치 못하다고 그간은 느끼셨겠으나, 그것과 별개로 당신의 정보 수집 능력에는 항상 감탄하고 있었죠. 그래서 우리는 당신과 대척점에 서는 일을 그만두기로 했어요. 그걸 넘어서 지금은 이렇게 영입 제의까지 드리고 있고요. 던포트 씨께선 모든 제약에서 단숨에 자유로워지기보다 계약과 같은 것에 기존보다 느슨하게 묶이는 편이 더 편하실 줄로 우리 측에서는 예상하고 있습니다.”

외운 대로 입술이 알아서 움직여 준다는 건 정말 편리했다. 버튼만 누르면 기계처럼 출력할 수 있을 때까지 달달 암기해 두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목소리를 형편없이 떨었을 테니까. 꼭 더스크우드에 갔을 때처럼 심장이 덜그럭거렸다. 이제 제이크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어서, 이블린은 그의 표정을 아예 쳐다볼 수도 없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역시 네가 그랬군, 하는 문장이 새어나왔다. 새삼스럽게 필터가 걸리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섹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드 아래로 그의 새파란 눈이 바다처럼 일렁이는 것 같다가 순식간에 잠겼다. 그리고,

“…그게 네 선택이라면.”

어떤 단죄의 말보다 무거운 말이 넘치게 밀려와서 이블린은 순식간에 잠겨들었다.

“…음, 정확히 말하면 우리 선택이 되겠죠. 회사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경제적인 선택의 책임을 모든 임직원이 공유하게 되죠.”

그는 고개를 아주 얕게 끄덕이면서 손을 들어 후드를 더 깊이 당겼다. 이제 그녀는 제이크가 눈을 떠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이블린은 자기가 제이크의 얼굴을, 특히 자신과 똑같은 색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후드 모자 끈이라든가 소맷단의 립, 몸을 감싸고 떨어지는 천의 주름. 제이크는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제이크인 채로 남았다. 변한 건 이블린 하나뿐임을 그녀는 절감했다.

“어느 정도 뜻이 맞는 것 같으니, 자세한 사항들을 조율해 볼까요.”

“그래.”

박자를 맞춰 주기로 결심하고도 그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고수했다. 그래서 더 눈에 띄는 줄은 모르고.

이블린은 사전에 준비했던 서류를 해커와 한 부씩 나눠 들고, 낱장을 넘기는 척하며 그 뒤에서 자기도 모르는 새 해커를 자꾸 곁눈질했다. 업무 내용, 근무 시간과 장소 같은 사무적인 얘기들이 오갔지만 눈길은 주고받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모자를 깊이 눌러쓴 제이크가 서류 뭉치에 얼굴을 아예 처박듯 했기 때문이었다. 짙은 쥐색 후드 모자만 집요하게 쳐다보느라 나중에는 직물이 짜인 모양까지 종이에 옮겨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외출이 달갑지 않은 그를 위해 사무실 출근은 최소화하고, 가능한 한 모든 경우에 재택근무를 허용하기로 결론이 났다.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심장이 덜컥거리거나 손발이 저리는 등 이상 증상이 나타나는 걸 애써 무시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크는 따라 일어났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냥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블린은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올리고, 책상 옆으로 비켜 나와서 그에게 잘 부탁한다는 상투적인 말을 건네며 손을 다시 뻗었다. 이번엔 무시당하지 않고 악수를 나눌 수 있었다. 손끝마다 굳은살이 박인 손은 놀라울 만큼 창백했고 또 차가웠으며 단단했다.

“우선 다음 주 월요일에 한 번 출근하시죠. 본격적인 업무는 그때 시작할 겁니다.”

“…그럼, 그때 다시,”

“아, 저는 그날 출근하지 않습니다. 여기 있는 제 비서 에소니카 씨가 대신 안내해 줄 거예요.”

반가웠어요. 그녀가 듣기에도 퍽 미련 없는 듯한 말투였다. 이블린은 이젠 기억에서 흐려져 가는 어느 날 연락 없던 그를 기다리며 한참 메시지 창을 켜 두었던 때와 정확히 같은 기분으로 그의 침묵을 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을 때 먼저 등을 돌렸다. 오늘 비 소식이 있던가요, 공기가 습한 것 같네요. 비서가 그녀의 말을 듣고 에어컨을 조작하기 위해 잰걸음을 놀리기 시작했을 때 제이크도 조용히 떠났다. 이블린은 비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제이크가 손도 대지 않은 커피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14.

그렇게 파베우 보스키는 숙취에 시달리던 그 불면의 밤에 자신의 죽음이 시작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의 인생에서 정오의 시각은 이미 지났음을,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은밀하게, 서서히,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땅거미가 내려앉으리라는 것을. 파베우는 자신이 길가의 한옆에 내던져진 돌멩이나 버려진 아이 같다고 느꼈다. 그는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이 거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바닥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누운 채 스스로가 매초 무(無)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실감해야 했다.¹

¹ 올가 토카르추크, 1996, 『태고의 시간들』 中



15.

날짜가 지났다. 다시 겨울이 왔다.

세 달여의 시간 동안 그녀는 사내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구축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부터는 소여 그룹이 손댄 불법적인 사업을 부친 몰래 하나씩 접는 데에 골몰했다. 제2의 제이크를 만들 순 없었다는 게 그 핑계였다. 사실은 오직 이블린만 보고 자기가 한때 폭로했던 회사에 입사하길 선택한 멍청한 남자를 위해 정의로운 척이라도 해 보고 싶어서였는데, 물론 그런 속내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기업 이미지를 쇄신한답시고 이블린은 기부라는 단어에 헤퍼지기도 했다. 이블린 소여가 오래 병실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로 어디어디 병동에 후원한다는 유의 소식들은 다른 어떤 말들보다 빠르게 퍼졌다. 로렌 소여는 무기력증에 빠져서 딸이 돈을 펑펑 날려도 터치하지 않는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부친을 요양 병원에 넣고, 그 사실이 어디서도 퍼지지 않게 수를 썼다.

다른 각도에서도 그녀는 삶을 조명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블린은 때때로 한 곳에 붙박여 서 있는 습관을 아직 고치지 못했다. 그녀의 명의로 된 휴대폰은 항상 울려 댔지만, 업무 연락은 비서인 에소니카가 전담했고 사적으로는 누구와도 만나거나 메시지를 나누지 않았다. 간혹 병원에 들렀다. 불면증에 대해서도 역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런지 락을 즐겨 들었는데, 어느 날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떠 보니 노트 두어 장을 자기가 모조리 I‘M NOT GONNA CRACK이라는 문구로 채워 놓은 걸 발견했다. SSRI는 한때 한나의 실종에 관한 증거였다가 이젠 이블린의 처방전 최상단에 적혔다. 술을 즐기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누구의 피를 물려받았는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기억했으므로 취할 때까지 마시진 않았다. 다만 약을 가끔 술과 함께 복용했다가 들켜서 혼이 나는 일이 있었다. 이블린은 곧 잊어버렸다.

그래, 곧 잊어버렸다. 뭘 잊는지도 모르고 많은 것을 잊어버렸다.


자기가 거북이나 달팽이처럼 착실하게 겉에서부터 굳어 가고 있다는 걸 느꼈을 때 이블린은 추운 집무실에서 흰 날숨을 내쉬고 있었다. 겨울이지만 기온은 애매하게 떴고 하늘에선 눈이 아닌 비가 을씨년스럽게 흩날렸다. 그녀는 커피잔을 가져오던 비서에게 다분히 충동적으로, 오늘은 반차를 내고 집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로렌이 살던 집은 그대로 이블린의 것이 된 지 오래였다. 그의 알코올 의존증을 생각했을 때 지하에는 당연히 홈 칵테일바가 있었고, 선반에는 그가 별안간 요양 병원에 수감되다시피 하며 챙기지 못한 다양한 주종의 술이 그득했다. 오로지 바 오로라가 그리워서 더스크우드로 돌아가고 싶은 거라고 착각에 빠져 사는 나날이었다. 이제는 그녀와 관련이 없는 그곳을 위해 허비할 하루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이 그리움이랄지 외로움이라고 할 감정을 홀로 해결해야 했다. 이미 있는 바를 마냥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녀는 비서를 통해 가사도우미에게 지하를 청소해 달라고 부탁하고 나서 책상 위에 즐비한 서류들을 대강 밀어 치웠고 약 3초 후 후회했다. 문서들 틈에 제이크의 이름이 있는 걸 처참할 정도로 빠르게 발견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뭐 또 해킹 시도가 있었는데 어련히 잘 치웠다든지 니모스인지 흰동가리 니모인지 하는 도구가 아주 훌륭히 일을 처리해 주었다든지 하는 내용이겠거니 하고 일축하며 서류를 아예 엎어 버렸다. 보안 팀 서류는 올리지 말라고 분명 얘기했는데. 다음 주쯤에 비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코트를 챙겨 집무실을 나섰다. 잔물결 하나 없던 감정이지만 끝없이 차분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푸르게 보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하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취향도 물려주었는지, 바 오로라와 정말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작은 홈 바에는 셰이커가 있었고 각얼음과 칵테일 잔이 크기별로 있었으며 LP 플레이어에서는 레인 스테일리의 목소리가 질질 흘러나왔다. 그래, 너바나보다 앨리스 인 체인스가 더 끌리는 날도 있고 그런 거지. 이블린은 레코드판을 뒤져 Dirt의 A면을 틀었다. 바늘이 원판을 긁으며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본 경험조차 많지 않은데 조주를 해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에 이블린은 ○튜브를 참고해 볼 심산이었는데, 급한 상황을 대비해 비서가 챙겨 넣은 휴대폰을 찾으려고 코트 주머니를 한참 뒤적이다가 문득 귀찮아져서 그만두었다. 그녀에게 근 1년간 전자기기란 축음기들과 업무용 데스크톱 두어 대가 전부였다. 그 사실을 이제 와서 바꾸고 싶지 않았다. 휴대폰은 더스크우드의 의미를 너무 많이 옮아 왔으니까.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선반을 향해 걸어가, 아무 술이나 집히는 대로 모조리 꺼내서는 바에 늘어놓았다. 유리가 서로 부딪치거나 나무 카운터에 부딪힐 때마다 멍이 드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과채음료는 모조리 소비기한이 지나 버려진 까닭에, 이젠 제로 칼로리 사이다 두 캔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무알코올 음료였다. 역시 이블린은 술맛이 어떨는지, 또는 자신이 마구잡이로 음료들을 뒤섞었을 때 도수가 얼마나 높은 술이 튀어나오게 될지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았다. 잔에 얼음을 때려넣고, 지거jigger에 아무 술이나 가득 따라 한 번 또는 두세 번도 옮겨 부었다. 그러던 게 나중엔 계량이 무슨 의미냐 싶어 잔이 넘치게 철철 쏟기도 했다. 문득 제시가 자길 바람 맞혔다고 질질 울며 한탄하던 댄의 문자들이 떠올랐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때의 댄과 자기가 똑같이 한심해 보이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그녀는 더 깊이 사고하는 대신 잔을 꺾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생각도 같이 태워 없애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실시간으로 기억이 깜박이며 지워졌는데, 아마 그동안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레코드판을 뒤집은 거 같았다. 지직거리며 바를 가득 채운 Hate to feel은 그녀가 방금 튼 A면엔 없는 곡이었다. 스스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다가 그녀는 바에 이마를 쿵 찧었다.

잠시 후 그녀는 스툴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오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멍청한 축음기에는 반복 재생 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기가 사실 사무치도록 적막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앨리스 인 체인스는 너무 무겁고 허무해서 이젠 별로 더 듣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정말 좋아하는 너바나를 들을 생각은 나지 않았다. 커트 코베인은 왜 그딴 최후를 맞아야 했던 걸까, 같은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이블린은 바를 꾹 부여잡았다.

“나라고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렇게 일찍 떠나야 할 사람은 아니었지.”

“내 말이 그거야……. 정확히 같은 생각을 했네.”

바닥 판자는 일어서서 걸어 다니고 조명은 저 혼자 빙빙 돌았다. 그리고 눈앞에는 웬 후드를 뒤집어쓴 검은 머리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 서 있는데, 세상에. 이블린은 도대체 지금 자기가 느끼는 게 놀라움인지 만성적인 메스꺼움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래 묵은 서러움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선 자리에서 반 바퀴 돌아 바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바닥이 차갑든가 딱딱하든가 뭘 해야 앉았구나, 하고 느낄 텐데 그녀는 가슴이 선뜩해지고 엉덩이가 아주 땅 밑으로 꺼질 때까지 내려앉는 걸 느꼈다. 그러니까 이건 꿈인 모양이다. 이블린은 바 앞에 늘어서 있던 스툴을 모조리 밀어내 치운 뒤 다리를 쭉 뻗어 타일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그때와 똑같은 핀업 팬츠와 엉덩이를 반쯤 덮은 후드티의 림, 몸을 감싼 굵은 주름의 흐름. 목덜미에 번진 노란 조명, 그리고 새파란 눈. 올려다봤더니 제이크는 바에 올라와 있는 병들을 살피는 듯 시선을 위로 두고 있었다. 홈 바의 새 주인은 기껏해야 서너 잔 정도를 마셨을 뿐이지만, 전 주인이 애용하던 술들은 병마다 모조리 반 넘게 비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주종과 그 도수 같은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억울해졌다. 보드카, 보드카, 그리고 또 보드카로군. 똑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말투가 더스크우드의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게 했다.

“많이도 마셨군.”

“뭐-라고. 아냐. 나 A면하고 B면하고 한 번씩 들었어.”

“그래.”

“Dirt의 총 재생 시간-은 오십칠 분하고 십……. 몇 초더라, 아무튼 얼마, 히끅, 안 됐어.”

“정말 그렇군. 자, 일어날 수 있겠나?”

해커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 그녀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그는 손목이 제법 얇아서 소매 림 사이로 팔뚝이 슬쩍 비쳐 보였다. 이블린은 그의 손을 잡는 대신 핏줄이 도드라진 손목만 멀거니 들여다보며 웅얼거렸다. 

“나 이제 환자 아닌데. 건-강한데. 완전히.”

“안다. 그냥 내가 이러고 싶을 뿐이야.”

아주 명징하고 논리적인 어투로 지적하며 — 적어도 그녀는 정말 자기가 그러고 있다고 생각했다 — 이블린은 제이크에게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너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문자나 대화나 말하는 투가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어. 이블린은 낄낄거리고, 허공에 떠다니는 이모티콘을 아무거나 하나 잡아채서 뒤에 붙였다. 이제는 인정해야 할까 봐. 뭐를? 되묻는 제이크의 목소리가 뜨거워서 죽을 것 같았다.

“우리 안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렇지.”

“응……. 근데 그래도 나는 네가 그리웠나 봐.”

숱하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괜히 서로 네가 그리워, 하는 말을 주고받았던 때가 머릿속을 스쳤다. 있잖아. 웅얼거리면서 그녀는 계속 내밀어 져 있던 제이크의 왼손을 낚아채 자기 가슴팍에 얹었다. 굳은살 박인 손이 파드득 놀라며 굳는 게 우스워서 낄낄 웃는 동안 길다란 손가락들은 꼼지락거리다가, 옷에 스칠 때마다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멈췄다가, 결국 힘을 풀고 얌전히 흉곽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와 대화할 때도 이렇게 움직였을 손가락이다. 이블린은 그새 두꺼워져 버린 시간의 더께를 생각했고 열심히 밀어내 만든 거리감과 어색함과 공유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을 생각했다.

“나 있잖아.”

“응.”

“엄청 외로웠어.”

“그래.”

“아무도 날 안 사랑한다고 생각했거든…….”

이해한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고 얘기했었지. 제이크가 속삭이며 이블린의 머리 위로 뺨을 괴었다. 그녀는 또 웃었다. 기억나, 넌 네 얘기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이라고 해 놓고 막상 나한텐 줄줄 다 얘기해 줬잖아.

“꿈이니까 나도 솔직하게 다 말해 주는 거야.”

제법 현실인 척을 잘하는 제이크는 고개를 들고, 모자를 끌어내려 벗더니 이블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현실에서 봤을 때도 그렇게 그의 눈이 잠겨 죽을 만큼 새파랬었는지, 아니면 그냥 그의 눈이어서 그녀가 제멋대로 착각하고 상상해 내는 건지 그녀는 구분하지 못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려고 했는데, 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는 게 귀여워서 그러지는 않았다. 진심이야, 이블린 소여? 얼굴을 제대로 본 게 진짜 단 한 번뿐인데도 이렇게 미친 애처럼 실실 웃으면서 귀여워하는 게 제정신 박힌 사람으로서 할 짓이야? 직접 만나보기 전까지 제이크 던포트, 하면 콧수염 달리고 끔찍하게 못생긴 가이 포크스 가면밖에 생각 못 했으면서? 이게 맞아?

“솔직히 말한다는 게 그건가?”

“아니! 들어 봐.”

너 원래 이런 거 재촉하는 사람 아니었잖아. 이블린이 그의 가슴팍을 오른손 검지로 쿡 찔렀다. 제이크의 시선이 찌르는 대로 딸려 들어갔다가 되돌아왔다. 그의 속눈썹이 눈동자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도 네가 그리웠다. 그래서 그런가 봐. 제이크가 가만히 대답했다. 이블린은 그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 사랑 같은 거 안 해. 그런 건 다 거짓말이야.”

“그런가?”

“응. 근데 이상하지, 나는 왜 널 사랑하는 거 같을까?”

그녀는 앞으로 쓰러질 듯 몸을 기울이며 다시 그의 가슴팍을 찌르려 했다. 제이크가 그 손을 자기 오른손으로 낚아채서 이블린의 골반 왼쪽에 딱 가져다 붙였다. 그가 보기보다 완력이 센 건지, 아니면 꿈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자기 몸을 안전벨트처럼 끌어안은 상태로 그녀는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되었다. 눈을 두 번 깜박이고 그녀는 제이크의 눈을 마주 보았다. 칵테일 바 조명이 다 그렇듯 누르스름하고 조도 낮은 빛이 얼굴 가득 쏟아졌고, 그녀는 문득 눈이 부셨지만 아직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오른손 손등 위로 제이크가 손을 겹쳐 깍지를 끼었다. 이블린은 어물쩍거리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나는 슬플 거 같아.”

“…….”

“그런 속 편하고 현실성 없는 감정에 몰입하는 덴 적성이 없어, 난.”

나는 빠르게 체념하는 사람이거든. 덧붙이며 한숨을 흘리고, 이블린은 서서히 저리기 시작하는 오른팔을 꿈지럭대며 펼쳤다. 제이크가 그녀의 팔을 아주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각은 얼마 전 더스크우드에서 발작을 일으켰을 때로 되돌아갔다. 그때 누가 자길 챙겨 줬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묘한 향수만은 남아 있었다. 네 손은 시원하구나. 이블린이 중얼거리자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이곤 엷게 웃었다.

“널 속인 일을 사과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늦었지. 네 마음에 기꺼이 답했던 것도, 내 정체를 숨기고 수더분한 척 네게 치댔던 기간도 모두…….”

“결국 믿은 건 나다. 네가 사과할 필요 없어.”

“믿어야지 그럼 네가 뭘 어쩔 건데. 한나를 구하고 싶었잖아.”

제이크는 이블린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피식 웃었다. 그거랑 그건 별개다.

“별개라고. 그거 아니면 대체 네가 내 말을 믿을 이유가 뭐야?”

“네가 날 이상으로부터 현실로 이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근거 없는 억측이잖아. 그래서 내가 사랑을 안 믿는 거야. 역시 그래서 무서운 거고.”

난 네가 과거가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어. 왜냐면 여태 그랬거든, 내가 누군가를 애틋하게 여기면 그 사람은 반드시 떠나가. 이른바 귀납적인 추론이라는 거지…….

“내가 네 단 하나의 반례가 될 텐데. 러셀의 칠면조를 아나?”

“모든 일엔 예외가 있다지만, 그렇다고 귀납 논증을 아예 포기하면 정보 수집은 의미가 없어져. 이건 불가항력이라고, 알만한 애가 왜 이러니.”

투덜거린 이블린이 말을 이었다. 이번엔 진짜 끼어들지 말라는 으름장이 앞에 벌컥 끼어들어 붙었다. 조도 낮은 조명을 뒤집어쓴 제이크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아무튼, 네가 광산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 나한테 고백한 걸 후회해서든, 아니면 네가 내게 마음을 줘 버리는 바람에 무언가 피할 수 있었던 비극을 피할 수 없어서든. 그것도 아니라면 뭐 아무튼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이유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

곧장 반박하려던 제이크는 내리깔려 조금씩 떨리는 흰 속눈썹에 시선이 닿자 입을 다물었다.

“…널 자유롭게 해 주고 싶었어. 나로부터, 그리고 소여 그룹으로부터. 내 이름을 단 무언가가 널 괴롭힌다면 참을 수가 없을 거 같았거든.”

“그건 왜지?”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네.”

입이 열리지 않았다. 네가 내 친구라서, 라는 아주 그럴싸한 대답을 떠올려 놓고도. 하지만 이블린이 들려주지 않은, 사실은 생각해 내지 못한, 대답을 이미 듣기라도 한 것처럼 제이크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날 모른 체했나.”

“응. 나는 널……. 어떻게든 네가 먼저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매듭을 지어 버리고 싶었어. 그래야 덜 아플 거 같았어. 그런데 그게 아닌가 봐.”

“아픈가?”

“응, 죽을 거 같아.”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이젠 괜찮다.”

“네가 내 옆에 있는다고 내가 안 죽을 거 같진 않은데. 도대체 난 네가 뭘 그렇게 확신하면서 말하는지 모르겠어.”

“하하.”

소질 없다고 분명 그랬잖아, 내가. 이블린은 투덜대고서 이모지를 붙였다. :/

제이크는 이블린의 가슴 위에 왼손으로 답장 삼아 이모지를 하나 그렸다. ;)

“내가 널 만나면, 현실의 네게 실망해서 떠날 것 같았나?”

“떠날 것 같은 게 아니고, 분명 떠났을 거야. 솔직히 내가 좀 못생겼긴 하잖아.”

“단체 메시지 창에 릴리가 쓴 글을 읽어 봤는데, 그 글에 의하면 네가 가냘픈 요정처럼 보인다더군.”

“요정은 무슨. 릴리 걔, 이제 보니까 뭐든 과장하는 습관 같은 게 있나 봐.”

“도대체 네 자아존중감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현실에 살면 이렇게 돼.”

“꿈속에서도?”

몰라. 어쩐지 그와 이렇게 만담을 나누고 있는 현실이 웃겨서 이블린은 마구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가슴팍에 또 웃는 이모지를 그린 그의 왼손이 천천히 어깨를 타고 넘어가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벽에서 등을 떼고 해커에게 매달리듯 끌어안겨, 드디어 자유를 얻은 양손을 그의 허리에 두른 채 한참을 웃어댔다. 후드 등 뒤에 바 조명이 번지며 어지러운 그림을 그렸다. 차갑고 크고 단단한 손이 천천히 이블린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이런, 나 머리가 풀렸나 봐.”

“내가 왔을 때부터 넌 머리를 풀고 있었다.”

“그래? 이상하네.”

“괜찮다. 네 모습이 어떻든 넌 날 완벽히 사로잡았으니까.”

그거 참, 내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고려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리네. 그렇다면 내가 말을 잘못 한 것 같군. 넌 객관적으로 봐도 아름다워. 이블린은 실없이 키득거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에게선 흔한 바디 워시 냄새가 났다.

“있잖아, 너 내 생각보다 더 내 취향으로 생겼어. 아닌가? 널 사랑하는 바람에 내 취향이 너로 바뀐 건가?”

“내 생김새가 마음에 드나?”

“응. 그, 뭐더라. 매혹적이야.”

나 그런 말 쓰는 사람 처음 봤잖아. 그러면서 또 웃었더니 제이크가 이번엔 마주 웃었다. 낮고 매끄러운 웃음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자 이블린은 어쩐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고개를 들었다.

“나도 내게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은 처음 봤다.”

“다들 널 제대로 본 적이 없나 봐.”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은 한참 그렇게 안고 있었다.

잠시 후 제이크가 먼저 몸을 일으키고, 이블린의 양손을 쥐어 일으켜 세우고는 어딘가에서 그녀의 코트를 소환해 냈다. 내가 저걸 어디다 벗어 뒀었더라. 비몽사몽한 눈에 힘을 주려고 그녀가 애쓰는 동안 그가 그녀의 어깨에 코트를 둘러 주었다. 너한테서 바디워시 냄새 난다, 하고 이블린이 중얼거리자 제이크가 또 웃었다. 씻고 왔으니까. 이블린은 문득, 꿈이라지만 도대체 그가 어떻게 별안간 자기 집 안에 들어와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는데 곧 잊어버렸다. 어차피 그러다가 잠깐 눈을 깜박이면 침실에 와 있을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그녀의 예상대로, 제이크는 이블린을 순식간에 침실로 데려다 놓았다. 혹시 너 꿈도 해킹할 수 있는 엄청난 대 천재 해커가 되어 버린 거야? 우스갯소리를 던졌는데 그는 아까까지 숱하게 웃어 줬던 것치고 크게 반응해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블린을 잡아당겨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거의 둘둘 감듯이 여며 준 다음 협탁 스탠드를 켜고 형광등은 끄는 배려까지 선보였다. 눈이 아까부터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파렴치한도 아니고 남의 입술만 이렇게 자꾸 시선에 담길 리가 없었으니까.

“…왜 그렇게 봐?”

“나 말인가?”

“응. 너, 그렇게 눈 뜨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그러는 거야?”

“잘 모르겠군.”

협탁 스탠드 불빛이 번진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새파란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간질거려서 정신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잘 들어, 지금 그건 우리가 아주 로맨틱한 사이라는 뜻이야. 다시 말해서 키스하고 싶다는 의미라고.”

“술 취한 사람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그래야 제이크지. 내가 널 좀 잘 알거든.”

“하하. 네가 날 그렇게 잘 안다면 날 도발하진 않았을 거다, 이블린.”

“도-발? 아냐, 난 후회하지 않을 텐데.”

정말이었다. 이블린은 제이크를 잘 알았다. 단 한 번 보고도 그의 보폭과 좋아하는 신발 종류와 자주 짓는 자세, 즐겨 입는 핀업 팬츠 같은 걸 모조리 간파할 정도였는데 뭔들 더 모르겠어. 그녀는 단지 꿈속이라서 좀 더 제멋대로 굴 뿐이었다. 상대방을 모르는 건 그였다. 그러니까 이제 꿈에 다시는 안 나타날 것처럼 굴면서 방을 나서려는 낌새인 그에게 이블린 소여가 서운하고 아쉽고 자꾸 붙잡고 싶은 줄도 모르지.

이만 쉬어, 이블린. 그는 엷게 웃고 그 큰 손으로 이블린의 눈 위를 덮었다. 시원하고 어두워서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그간은 눕기만 하면 머리에 통증이 일고 열이 올라서, 눈꺼풀 뒤로 새빨간 혈관이 모조리 비치도록 뜨겁고 붉고 따가워지는 바람에 제대로 잠들지 못했었다. 제이크, 아무 데도 가지 마. 아침까지 이렇게 손으로 가리고 있어 줘. 바보 해커를 위해 이블린은 친절하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입 밖으로 서술했다. 제발, 넌 꿈이니까 곧 사라진다는 거 알아, 그치만 그래도 나는 널 보내기가 싫단 말이야. 이불 틈으로 팔을 꾸역꾸역 끄집어 휘적이자 그의 후드티 주머니가 잡혔다. 그녀는 무작정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침대가 몸을 집어삼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16.

돈으로 널 여기 묶어 놓을 수 있다면 좋겠어. 근데 그러면 넌 싫어하겠지? 넌 의롭고 무모해서 네 안위를 위험에 빠뜨릴 걸 알고도 개의치 않으니까. 아니지, 지금 말하다가 생각한 건데 너는 우선순위 같은 걸 되게 중요시하잖아. 한나를 구해야 하니까 남의 SNS를 마구 염탐하고, 한나를 구해야 하니까 다른 애들은 좀 위험해져도 참으라고 하고,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내가 네게 아직도 일 순위라면 내가 조금의 위험이나 불법 같은 걸 저질러도 너는 눈감아 줄 것 같아. 나는 소여니까 그럴 일 없겠지만. 게다가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심지어 이젠 술주정까지 부렸네. 난 망했어. 그치? 다 알아, 그러니까 내가 이상한 거 기대하기 전에 그 눈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제이크 던포트.



17.

날짜가 지났다.

이블린은 눈을 뜨기도 전부터 창밖에서 요란하게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었다. 보통은 그런 걸 들으면 기이할 정도의 평화로움을 느낀다고 하는데 그녀는 오롯이 이질감만을 느꼈다. 애초에 그녀는 새라는 생명체를 이렇게 가까이 느낀 일이 없었다. 손에 한가득 움켜쥔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이블린은 반차를 낸 다음 날 연차를 내는 계획이 얼마나 무모할지를 재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젠 이불이 당겨지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조금 더 기억을 되짚어 보면 그녀가 지금 익숙한 침구에 파묻혀 있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질감을 고려했을 때 옷도 갈아입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것도 역시 이상했다. 병원복 질감도 불편하다고 병실에서마저 실크 잠옷을 고수했던 그녀가 트위드 정장 투피스 차림으로 전날 밤이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 깊이 잤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뭐 그것만 떼어 보자면 술을 좀 많이 마신 것 같으니까 그 영향으로 필름이 좀 끊겼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 조금 앞에서 낮은 목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이블린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가, 크고 시원한 손바닥과 그 너머에 뜬 새파란 한 쌍의 눈을 마주쳤다. 손가락 틈으로 햇빛이 새서 그의 손은 약간 빨갛게 보였다.

“…일어났나.”

“……?”

???

“안녕, 이블린.”

“?????”

원래 술을 마시면 다들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느냐고,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으며 제이크가 피식 웃었다. 간밤 내내 그는 이블린의 곁에서 침대 헤드에 기대 잠을 청한 모양이었다. 오른쪽 관자놀이 위가 살짝 눌린 새까만 곱슬머리가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너 왜 여기, 아니 그 뭐야, 이 시간에, 어……?”

“자, 다 대답해 줄 테니까 일단 이걸 좀 놔 줬으면 좋겠군.”

이블린은 파드득 놀라며 손에 잡힌 것을 내던지듯 놓았다. 그의 후드 밑단이 흉하게 늘어나고 구겨져 있었다. 그녀는 자면서도 손바닥에 손톱자국을 내는 습관이 있었다. 어젯밤 희생양은 손바닥 대신 그의 옷가지가 된 모양이었다. 밤새 옷을 저렇게 엉망이 되도록 잡아 뜯고 있었다니. 내가 꼭 변상할게, 하고 절망적으로 웅얼거리자 제이크는 그럴 필요 없다고 즉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해커가 열심히 옷을 털어 봐도 어제의 말끔하고 편평한 직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비서에게 연락해 오늘 쉬는 게 좋겠다고 통보하는 것만으로도 이블린은 혼란스러워했다. 정말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돌아가고 있었고 기억들은 깜박이며 돌아올 듯 말 듯하게 그녀를 괴롭히는데 정작 그녀는 어떤 조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는 그냥 몸을 살짝 움직이기만 해도 모든 기억이 썰물처럼 밀려 나가려 들었다. 그녀는 그냥 매트리스 위에 다시 대 자로 드러눕기나 했다.

그는 이블린이 정신을 좀 더 차리길 기다리며 아래층에서 물을 떠다 주고 토스트를 구워 사과 잼을 발랐다. 집주인이 자기 집 냉장고에 이런 게 있었냐고 물을 즈음에는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뭔가를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바나나를 어슷썰다가 반쯤 작살을 내 놓는 거였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햇빛을 받아 흰색에 가까워진 까치집을 머리에 인 채 튀어나온 이블린은 전투적으로 포크질을 했다. 도마에 무참한 파편들로 흩어져 있던 바나나를 몽땅 주워 먹고 나니 그가 뿌듯한 눈을 했다. 몇 번 보지도 않았던 얼굴이 몇 년 사귄 사람의 얼굴인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이, 말하자면, 약간 꿈 같았기 때문에 그녀는 일 년 전 친구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눌 때처럼 밝은 애 연기도 할 수 있었다.

“너 그 눈빛 말야, 다른 말로 뭐라고 하게?”

“뭐지?”

“바로바로: 잘했어, 이블린.”

제이크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곧 크고 차가운 손이 다가와, 포크를 쥔 이블린의 왼손 손등을 스치듯 토닥거렸다. 잘했어, 이블린. 그녀는 마주 히히 웃고 나서야 예전에도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술을 그렇게 먹었는데도, 잠을 푹 자서 그런지 숙취는커녕 속이 편안했다. 그녀는 조금 시간을 들여야 했지만 약간 딱딱한 토스트와 고르지 않게 발린 사과잼을 또 모조리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 커피가 든 머그잔을 쥐고 제이크는 그녀의 식사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거의 항상 밤을 새우니까 웬만한 카페인은 듣지도 않고 따뜻한 음료를 즐길 여유는 더욱 없어서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었다며 그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커피는 싫어해?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큼 뚜렷한 감정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어깨를 으쓱이고서 자연스럽게 업무를 분담했다. 제이크가 그릇들을 애벌세척하면 이블린이 뚝뚝 물이 흐르는 그릇들을 식기세척기에 넣었고 축축해진 팔꿈치들을 서로 부딪치며 낄낄거렸다. 그녀는 집에서 한 번도 웃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어제를 빼곤 올해 들어 웃는다는 행위 자체를 몇 번 하지 않았다.

기계가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후에야 이블린은 이 모든 게 사실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가 왔다는 걸 자각했다. 진심으로, 이블린 소여, 네가 미쳤구나. 마른 세수를 북북 하고 있으려니 옆에선 태평한 반응이 넘어왔다. 그래, 어제 일이 기억나는 모양이군. 기억? 하나도 안 났다. 하지만 저 반응까지 목도하고 나니 그냥 망했다는 사실만이 그녀의 머릿속을 모조리 잠식하게 되었다. 이왕 병실 탈출도 본받은 김에 댄의 말투도 딱 한 번만 본받아 보자면, 그냥 망한 게 아니라 아주 개망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제이크 던포트랑 연인 놀이 같은 걸 하고 있는 거야.

“…어젯밤엔 의도치 않게 네 방에서 지냈지. 네가 가지 말라면서 내 옷을 잡아끌었던 것만 탓할 순 없다, 결국 나가기 싫어서 남은 건 나니까.”

“내가 가라고 했으면 그냥 집에 갔을 거잖아.”

“그건 그렇다.”

슬슬 그의 느긋한 솔직함에도 짜증이 나려고 했다. 그걸 표출하지 않는 건 단지 모든 원인 제공을 자기가 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 상황에서 자리를 뜰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엇보다 그에게 자기가 우울증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근데 제이크를 밀어내려면 다시 존대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블린은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이크의 말은 이어졌다.

“네게 전화가 왔었어.”

“응?”

“어제 오후를 말하는 거다. 기억 안 나는 것 같아서 처음부터 설명하려고.”

“…….”

그녀는 양손을 모으고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른 어깨로 붙어 앉은 남자의 체온이 느껴졌다.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어. 받자마자 음악 소리가 울리던데. 그 틈으로 아주 희미하게 어딘가의 주소를 부르는 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넌 목소리는 작았을지언정 발음은 아주 명확했기 때문에 나는 네가 취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혀 기억 안 나…….”

제이크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툭 쳤다. 아무래도 제이크는 이블린의 생각과 달리 그녀를 조금은 아는 모양이었다.

“난 네가 불러 준 곳으로 왔고, 문이 잠겨 있는 걸 발견했다. 그즈음에 다시 전화가 울렸고. 네가 내게 뭘 알려줬을 것 같나?”

“…현관 비밀번호랑 지하실 위치?”

“정확해.”

내려가 봤더니 술병들과 코트와 쓰러진 의자들 사이에 엎어져 있는 네가 보였어. 그가 설명하며 왼손을 쥐었다 펴는 걸 손가락 틈으로 훔쳐보다가, 느닷없이 이블린은 그 손이 어제 자신의 흉곽 위에 웃는 이모티콘을 그렸던 걸 기억해 냈다. 손가락을 몽땅 붙이고 뒤에 숨어서 그녀는 절규했다. 하지만 어쩐지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별 얘긴 안 했다. 난 네가 읊어 주는 대로 네 방을 찾아 널 눕혔지.”

“그리고 난 네 옷을 쥐어뜯으면서 퍼질러 잤고…….”

“자는 도중에 잠꼬대를 정말 많이 했다는 것도 말해 줘야 하나?”

뭐.

“나 잠꼬대도 했어?”

“그래. 몰랐나?”

“난 망했어.”

해커는 검지로 그녀의 어깨를 톡 두드렸다. 망하지 않았다.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망했어. 안 그래도 얼굴도 봐 줄 게 없는데, 로렌 소여의 딸이고, 술주정뱅이인데다가, 밤에 시끄럽게 잠꼬대까지 하고 옷까지 망가뜨리고.”

“어떤 목표를 가졌길래 망했다는 표현을 쓰지?”

“그야 당연히 너…….”

고개를 치켜들어 가면서 하던 말을 별안간 뚝 끊고, 재벌가의 영애는 아주 품위 넘치게 입 모양으로 보안팀 직원이자 연인 후보자에게 윽박을 질렀다. 유도신문하지 마. 하지만 이미 들을 것을 다 들은 제이크는 새파란 눈으로 이블린을 바라보고 있을 뿐 말을 물리거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녀는 제풀에 지쳐서 한숨이나 푹푹 내쉬었다. 분명 작년엔 내가 놀리고 바보 해커가 부끄럼을 탔는데. 구시렁거림은 파랑 앞에서 빠르게 힘을 잃었다.

“…너 내가 소여 그룹 후계자인 건 알고 있는 거지?”

“입사하기 전부터 알았다. 단체 메시지 방에서 다들 그 얘길 했으니까.”

“뭐야, 잠깐. 메시지 방 새로 팠었는데……. 너 한나 찾은 뒤에도 애들 메시지 해킹한 거야?”

“그땐 널 찾아야 했으니까. 너에 대해 그런 식으로 알아내고 싶진 않았지만, 내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제이크가 잠깐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만큼 파란 목소리가 돌아왔다. 난 네 이름을 통해 인식되는 사회적인 위치나 의미 때문에 널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럼, 내가 병원에 오래 있었단 것도 알아?”

“그건 어젯밤에 너도 네 입으로 말하더군, 이젠 환자가 아니라고.”

“…그건 맞아, 나 수술받고 이젠 일상생활 잘해.”

시선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제이크의 왼손은 다시 꿈지럭거리기 시작했다.

이블린은 숫제 두려워졌다. 이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제이크의 눈을 이젠 그녀가 먼저 피했다. 손톱 거스러미를 뜯으며 그녀는 제이크를 얼른 실망시키고 필요한 만큼의 상처를 입혀야겠다는 일종의 결단이나 조바심 같은 것을 느꼈다. 눈이 뜨겁고 가슴 언저리부터 짓누르는 듯한 뻐근함이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까처럼 사람 좋은 척하는 게 몽땅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아?”

“난, 아니, 내겐 그게 네 본질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미안, 근데 그건 안 그래. 다 거짓말이야. 너 SSRI 기억하지, 우리 그걸로 내기도 했잖아.”

처방전 가져와서 보여 줄까. 물음을 듣고 잠깐 침묵하던 제이크는 곧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독한 햇살이 그의 옆얼굴을 덧그렸고 이블린은 울 것 같아서 손바닥 안에 손톱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거짓말을 했다니까, 제이크, 정신 차려. 하지만 그는 이블린의 양손을 다 뺏어서 손바닥에 자기 엄지를 비집어 넣을 뿐 그녀가 유도해 내려던 반응은 보일 기미가 없었다. 이블린은 그의 엄지 첫 마디에 실수로 손톱자국을 남기고 자기가 더 놀라 사과했다.

“나 좋은 애 아냐. 사실 더스크우드에 있는 걔네도 그렇게 소중하지 않아. 걔네가 날 좋아해 주는 걸 아니까 괜히 우쭐해서 친구인 척 장단 맞춘 거야.”

“정말 그랬다면 넌 그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겠지.”

“그건 그냥, 걔네가 없으면 아무도 날 친구로 안 대해 주니까…….”

”그들에게 사실을 말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래서 끝까지 거짓말했잖아. 버리는 거 아니라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그래놓고 난 다시 연락 안 했어.”

“그래, 그런 것 같던데. 하지만 내가 지금 보는 넌 그들을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군.”

“내가 뭐 하러 그러겠어?”

“넌 외로움을 끔찍하게 잘 타니까.”

그의 단정적인 어조가 뱃속에 쿵 내려앉았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 판사를 바라보듯 이블린은 검은 머리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넌 나와 같다, 이블린. 난 그걸 느낄 수 있어.”

외로움이 더 편한 사람이 됐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지.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 난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할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내가 그 믿음을 배신한다면?”

“그렇다면 난 슬퍼지겠지. 하지만 네가 결국 내 말대로 될 때까지 옆에 있겠다.”

“왜?”

“네가 내게 그렇게 해 줬으니까.”

이블린은 도대체 자기가 언제 그런 대단한 일을 해 줬다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의미를 담은 반응을 해 보려고 애를 썼다. 이번에는 정말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모조리 실패한 뒤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앞으로 흘러내렸다.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얘긴 여기까지인 것 같군.”

“…나도. 이젠 숨기는 거 없이 전부 말했어.”

해방된 기분은 안 드나? 제이크가 익숙한 질문을 뱉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익숙한 대답을 해야 했다.

“응. 이상하게도 드네.”

그게 진심이었으니까.

“동시에 내가 너무 위험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나한텐 너무 많은 게 걸려 있거든.”

“넌 날 믿어도 된다.”

예전엔 믿어야 한다고 강요했으면서. 이블린이 투덜거리자 제이크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우선, 넌 그때 내게 강요하지 않았다. 두 번째로, 난 그때 널 믿고 싶다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한 개씩 꼽으며 얘기하는 내용이 하도 바보 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마주 보고 웃는 지금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느새 그녀는 손톱을 눕혀 제이크의 엄지들을 쥐고 있었다. 남아 있는 기다란 손가락들이 이블린의 손을 뒤덮듯 감싸 쥐었다. 그리고 언뜻 듣기에 몹시 현학적이고 학구적인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데이터를 입력하듯 또박또박하게.

“이블린.”

“응.”

“이블린 소여.”

“…응.”

“안녕, 이블린 소여.”

“뭐 하는 거야? Hello world인가 뭐 그런 거야?”

“대답을 해야지, 이블린.”

유치해 죽겠네. 투덜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리자 그의 새파란 눈이 마주 휘어졌다.

“알았어. 안녕, 제이크 던포트.”

“사랑해.”

“…….”

“…이블린?”

“재촉하지 좀 마! 너 원래 이렇게 성질 급한 애 아니었잖아.”

“그 얘기 어젯밤에도 했다.”

으휴. 이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사랑해, 제이크.”

기다렸다는 듯 그가 몸을 낮춰 이블린을 끌어안았다. 훨씬 낮은 그녀의 어깨에 매달리듯이. 무게가 생각보다 더 나가는지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이블린은 허리를 세우고 버티며 제이크의 품에 코를 박았다. 바디워시와 아주 옅은 땀 냄새, 아침으로 먹었던 토스트와 모닝커피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별안간 모든 게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밀려왔다.

그날 느즈막한 오후에, 연인과 한 손을 마주쥔 채로 휴대폰을 켠 이블린은 친구들이 있는 새 채팅방에 대뜸 제이크를 초대했다. 그리고 너도나도 온라인 표시가 뜨는 친구들에게 석고대죄를 목적으로 방문하겠다고 적었다. 허락한다면 모두를 자기 소유의 별장인지 호텔인지 아무튼 그런 비슷한 곳에 초대한다고도 썼다. 첫 답장은 제시에게서 왔다. 돌아온다고 한 지가 몇 달이나 됐는지 너 알아! 그리고 뒤에 화난 얼굴 이모티콘이 과장을 조금 보태 백 개는 따라붙었다. 저 뒤에서 제시가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지 생각하다가 이블린은 결국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답장을 보냈다.


17:40[ 미안해! ]

17:41[ 미안해, 제시. 진심이야 :( ]

17:41[ 대신 너희가 궁금해할 만한 사람을 데리고 갈게. ]


이블린이 덧붙인 말에 릴리가 가장 먼저 반색했다. 댄은 언제부터 릴리가 그렇게 제이크를 반겼는지 모르겠다고 툴툴거렸지만, 제이크가 굳이 자기 휴대폰을 꺼내지 않고 이블린의 전화를 가져다가 ‘그러고 보니 밝힌 적이 없군. 나는 한나와 릴리의 오빠다. - J’ 같은 메시지나 보내 놓는 바람에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다. 릴리가 그의 메시지에 부연설명을 붙이는 동안 제이크는 이블린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대화에 끼는 동안 그녀의 어깨 너머로 메시지들을 읽으며 자기 옷에 남은 손톱 자국들을 만지작거렸다.

클레오는 이블린의 수술 경과를 직접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블린은 두 사람의 얼굴이 보이게 엄지를 들고 셀카를 찍어 답장 대신 보내려고 했는데, 둘 다 사진 찍는 실력이 몹시 형편없다는 사실만 깨닫고 포기하게 됐다. 이블린은 괜한 짓을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 답장을 보냈다. 와서 보면 알아. 그러자 클레오는 벌써 반쯤 꾸려 놓은 자기 가방 사진을 보냈다. 물론 그 직후에 토마스의 가방 사진도 올라왔다. 이블린은 이 두 사람의 실행력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건지를 아주 새삼스럽게 다시 고민해야 했다.

며칠 후 소여 그룹 산하의 모 호텔에는 이블린과 제이크 말고도 여섯 명이 모였다 — 원래 초대한 인원은 일곱이었지만 알란은 더스크우드를 오래 벗어나 있고 싶지 않다는 말로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표했다 — 이블린은 제이크를 이끌고 호텔 입구로 나가 친구들을 직접 마중했다. 제이크가 가장 초대하기 싫었던 사람, 필 호킨스는 아주 화려한 핫핑크 상의로 이블린의 감탄과 제이크의 불쾌함을 동시에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날 제이크는 온종일 너무 뜨거워서 거의 탐구욕까지 느껴지는 시선으로 필을 경계하고 나섰다. 이블린은 남자 친구를 위해 필을 초대하는 횟수를 좀 줄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녀도 제이크가 슬쩍 다가와 귀에 대고 ‘저런 대화 스타일을 가진 남자에게 설렘을 느끼곤 하’느냐고 물었을 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왜, 저런 말투가 좋다고 하면 배워 보게?”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할 때 제이크는 이블린이 며칠 간 본 것 중에 단연코 끔찍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블린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나는 실적주의적이고 재미없고 딱딱한 말투에 설렌다고 대답해 주었다. 확연히 안도한 듯한 그의 손이 새빨개진 이블린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서서히 제이크는 이블린의 일상에 침투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소여 그룹의 자본과 기술이 뒷받짐해 준 덕에 천재 해커는 온갖 곳을 날아다니게 되었다. 여론몰이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이블린이 기업 이미지에 매우 심혈을 기울이고 있긴 했지만, 그 대단한 재벌 소여 가가 정신질환 내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나 웬 터무니없는 음모론들이 — 몇 개는 아주 터무니없지만은 않았지만 — 돌아다닐 땐 제이크가 힘을 썼다. 난 모든 일이 끝나면 널 해고시켜 줄 생각이었는데. 이블린이 말하자 제이크가 반색을 했다. 회사에서 사람을 자르는 데 너무 사견이 들어간 거 아니냐는 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입사부터 철저히 윗선의 손익 계산에 의해 이루어진 이 낙하산은 결국 개인 인맥인 회장을 설득해 회사에 남는 데 성공했다.

비서 에소니카는 해고 위기를 면했지만, 징계까지는 피할 수 없었다. 보안 팀의 막내 직원에게 가끔 어린 회장의 몸 상태에 관해 정보를 건넸던 사실을 발각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누가 봐도 두 사람이 사귀는 사이였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제이크는 에소니카를 변호하다가 삐친 이블린에게 그날 문전박대를 당했다. 제이크는 용서를 구하는 말로 채팅방을 도배했다. :(

비가 왔다. 눈발이 가끔 휘날리기도 했다. 하늘은 파랬다가 희었다가, 드물게 잿빛으로 낮게 떴다. 이블린은 제이크가 자기 어깨를 감싸안도록 내버려 둔 채 창 밖으로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너바나를 좋아했지만 그런지 락을 들으며 멍하니 서 있던 습관은 고쳤다. 제이크는 별안간 연차를 내더니 왕복 열두 시간을 써서 한나의 면회를 다녀왔다. 이유인즉슨 SSRI의 부작용을 복용자로부터 직접 듣겠다는 거였는데 한나에게 진정 작용과 성 기능 장애 같은 걸 들어 오더니 이블린의 침대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아서 또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블린은 채팅 방에 이모티콘을 도배했다. :/

콜론과 직선 또는 곡선으로 이루어진 한물 간 이모티콘이 몇 번씩 서로에게 그려지며 관습처럼 굳었다. 이블린은 가끔 그 바보 같은 이모티콘에 기대 미래를 말하기 시작했다.



18.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이블린은 여전히 가끔 슬펐고 가끔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깼지만 그보다 자주 행복했다. 아직도 제이크가 그녀를 끌어안고 싶어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길 향해 열린 연인의 품에 뛰어들어 안길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날에는 오직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63,883자 03. 25. 24.

//65,559자 07. 29. 24.

//70,577자 08.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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