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그룹

이상(理想/異常)

스터디그룹 박건엽 피한울 드림

PSYCHO-PASS AU

흔히 아는 사이코패스(Psychopath)와는 발음이 비슷하지만 이 장르는 통행증을 의미하는 PASS를 사용해요. 기술의 발달 끝에 인간의 심리 상태까지 수치로 표현이 가능한 세계. 모든 감정, 욕망, 반사회적 심리 경향이 낱낱이 기록, 관리되어 대중들은 '이상적인 삶'의 실현에 힘쓰고 있죠. 현재 사회를 구축하고 있는 시빌라 시스템의 질서 아래 사람들은 이 수치를 'PSYCHO-PASS' 라고 부릅니다.

그중 범죄와 관련된 건 '범죄 계수'로 구분되며 범죄자는 이 계측치에 따라 처벌되고 있어요. 그런 치안을 담당하는 공안국 형사들은 크게 '감시관'과 '집행관' 두 종류로 나뉘는데 담당하는 일에는 여러 차이가 있지만 가장 차별되는 점은 바로 범죄 계수예요. 사이코패스가 일정 수치를 넘어간 사람은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 '언젠가 범죄를 저지를 위험 인물'로 구분되어 잠재범으로서 분류됩니다. 잠재범은 사회와 격리된 채 평생 치료 시설에서 지내게 되는데 회복 되는 경우는 드물어요. 개중 형사에 적합하다고 판별된 몇몇에게만 집행관으로 수행할 기회가 주어지고요. 여전히 감시관과 동행하지 않으면 외출이 불가능한 등 제약이 있지만 수용 시설보다는 나은 생활이 가능해요.

감시관도 마찬가지로 엘리트들 중 적성에 맞는 이들만 맡을 수 있는데, 말그대로 집행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범죄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면 사이코패스가 악화될 우려가 있기에 이미 회생이 불가능한 집행관이 수사의 전면에 서고, 감시관은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목줄을 쥐는 거죠. 본작은 감시관 및 집행관인 등장인물들이 시빌라 시스템에 의해서 모든 게 판단되는 사회에서 범죄와 맞닥트리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저는 이 설정을 차용하여 스터디그룹의 서사와 같은 흐름으로 건규한의 이야기를 해볼게요.


후생성 공안국 형사과에서 감시관 강규리는 1계에 소속되어 있어요. 동행하는 집행관은 박건엽, 피한울 두 사람으로 콜사인은 순서대로 셰퍼드 1, 하운드 1, 하운드 2. 집행관끼리 툭하면 치고 박고 싸우지면 형사과 내에서 검거율은 압도적으로 높은 팀이에요. 피한울이 상황을 넓게 보고 범행 동기나 행동 범위를 추리면 박건엽이 집요하게 쫓아가서 집행하는 식으로요. 강규리는 그 둘의 목줄을 잡아야 하는 입장인데 잠깐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양극단으로 내달리는 둘에게 질질 끌려다니다 못해 몸이 찢길 판이라 항상 주의하고 있어요.

근데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야무진 인상이라 다른 팀 사람들은 규리가 잘 제어하는 줄 알고 있다네요... 같은 1계 사람들만 규리가 사실은 맹하고 무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사냥개들한테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요~" 같은 말을 심심찮게 던지고요. 실없지만 뼈가 있는 말이죠. 그 농담을 들을 때마다 박건엽은 고개를 숙이면서 한숨 쉬고, 피한울은 턱을 치켜들며 피식 웃는데 너무나도 상반된 반응을 보면서도 강규리는 둘이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을 하네요. 이런 세 사람이 한 팀에 모이게 된 건 그저 그런 우연이 아니라 여러 사건을 겪은 후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 세계관은 대학이 사라진 배경이라 규리는 고등학교에서 법학과를 선택했어요. 과에서 수석, 학교를 통틀어도 수석으로 졸업했을 것 같네요. 감시관이라는 직업 자체가 전국에서 한 손 안에 들지 않으면 지원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니까요. 피한울과 동문이라면 과 수석, 전체 차석 정도가 되겠어요. 규리는 적성 시험을 통과해도 형사과를 지원할 생각은 없었는데 고3 때 아버지가 YB에게 피살당하면서 조사를 위해 졸업 후 공안국에 들어왔어요. 이때 사이코패스가 악화됐는데 다행히 정상 범위에서 더 나빠지지는 않았네요. 문제는 같은 케이스였던 박건엽이에요. 순식간에 범죄계수가 치솟았거든요.

박건엽은 규리의 한 기수 후배로 학과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전체 수석이었을 거예요. 원작에서는 피한울과 박건엽 둘 다 전기과였으니 학교만 같다면 여기서도 박건엽은 피한울의 과 후배가 되겠네요. 학년 수석이 3학년이 되어서 갑자기 잠재범 판정을 받아 학교가 뒤집히는 일도 있었겠어요. 규리는 이미 졸업해서 소식만 전해 들었는데 그게 설마 건엽이고 직장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겠죠. 원래라면 건엽이는 감시관도 될 수 있었는데 잠재범 수용 시설에서 소질을 인정받아 집행관으로 배치됐을 것 같아요. 목적은 역시 어머니를 죽이고도 바깥을 활보하는 피한울을 집행하는 것이고요.

그렇게 강규리와 박건엽은 한 팀이 되었고 피한울을 붙잡은 건 정확히 1년하고 계절이 한 번 변한 시점이에요. 두 사람은 피한울이 오정화를 살해한 증거를 찾아다녔지만 철저하게 은폐된 건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피한울의 사이코패스를 잡고 늘어지기로 했거든요. 폭력적인 충동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범죄 계수는 올라가기에 범죄자는 반드시 잠재범 이상의 수치를 띠게 돼요. 그런데도 피한울은 여전히 정상인 척을 하며 일상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피한울의 범행을 아무거나 입증해서 "어째서 범죄자의 사이코패스가 정상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 되죠. 사이코패스 조작 의혹이 생기면 YB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 방법은 온갖 고생 끝에 피한울의 범행을 확보한 찰나 불발됩니다. 이유는 시빌라 시스템의 신빙성에 금이 간다는 국장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실현된 현대 사회는 인간이 시빌라 시스템에 판단을 유보하여 가능해졌습니다. 감정적인 인간보다 시스템에 선택을 맡겼을 때 더욱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결과가 나오니까요. 결국 시빌라 시스템은 기술을 넘어 모든 것에 있어 근간이 되었고 거기에 사람들이 의문을 품는 순간, 사회에는 혼란이 도래할 거라는 우려였어요.

결국 규리는 피한울의 범행에 대한 증거를 공표하지 않았고, 사건은 그대로 가라앉는 듯했는데... 얼마 안 가 피한울이 조용히 잠재범 수용 시설로 이동하게 됩니다. 강규리와 박건엽이 수사 중 알아냈거든요, 오정화 사건의 주모자는 피한울이 아니었다는 걸요. 열쇠가 된 건 오래된 LP 였어요. 음식도 하이퍼 오트를 가공한 레토르트 식품만 섭취하고, 의복도 홀로그램에 의지하는 사회에서 실물 LP는 유물이나 다름 없었거든요. 당연히 찾아보기 극히 어려웠고 소유자를 헷갈릴 일이 없었죠.

피한울의 뒤를 쫓다 그가 가지고 있던 LP를 봤을 때 박건엽은 그 자리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그가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하나뿐인 LP니까요. 첨단 시대에 어떠한 과학적 증거가 있는 게 아님에도 그건 강규리와 박건엽이 피한울의 혐의를 폐기하기에 충분했네요. 그래서 두 사람은 방향을 틀어 조작된 피한울의 사이코패스 위에 재조작을 가했어요. 범죄자가 아닌, 잠재범으로 만든 거죠. 이렇게 되면 상부의 '시빌라 시스템의 완전성을 의심하게 하지 말라'는 지령을 어기지 않을 뿐더러, 역으로 공안국에서 공정성을 위해 어떤 수를 써서라도 피한울을 확보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니까요.

YB 또한 사이코패스 조작 의혹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피한울을 꼬리자르기 할 수 밖에 없어졌어요. 지금은 정계 진출이니 어쩌니 하지만 시빌라 시스템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조폭에 지나지 않았던 YB에는 범죄계수가 높은 사람이 많거든요. 최악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서 피한울을 버리며 겸사겸사 '아들'도 비호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네요. 그게 미끼인 줄도 모르고요.

오정화 사건을 조사하며 알게 된 거지만 YB에는 범죄 계수가 올라간 탓에 일반 사회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잔뜩 있어요. 이래도 저래도 YB의 그늘 밑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요. 문제는 그들이 차라리 몇 년 살고 나와 YB가 쥐여주는 부라도 거머쥐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점이죠. 그렇게 이판사판인 이들은 YB의 청부를 받아들이게 되어있어요. 오정화 사건도 그런 식으로 제 3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꼬리를 잘랐기에 피한울을 직접 끌어내지 못하고 다른 범행을 뒤졌던 거예요. 결국 YB에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머리부터 칠 필요가 있어요. 그 열쇠가 바로 피한울이고요.

YB 수장의 아들. 그 자리는 분명 쥐고 있는 정보도 많겠죠. 어쩌면 피연백의 약점도요. 아버지를 증오하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패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범죄자는 형사가 될 수 없지만 잠재범은 가능하죠. 규리가 노리는 건 바로 그 점이었어요. 잠재범이 된 피한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여기에는 건엽이가 크게 반대했을 것 같네요. 피한울과 팀을 짜서 움직이는 게 죽도록 싫었지만 그 이상으로 규리가 걱정이었거든요. 안 그래도 피한울을 캔 시점에서 피연백의 눈에 들었는데, 불초자식이 집행관이 되면 규리를 가만히 둘리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규리는 기어이 피한울을 꺼내왔네요.

사실 한울이도 건엽이와 생각이 같아요. 형사과에 스카우트 하러 규리가 면회 신청했을 때, 한울이는 여기서 꺼내준대도 너 미쳤냐며 여기 오는 게 무슨 의미인줄 아냐고 따졌겠네요. 규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미 절차 다 밟아놨다는 얘기만 했고요. 이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답답한 여자가! 책상을 쾅 치고 일어나는데 규리는 겁먹는 기색 없이 그저 눈을 내리깔아요. 뭐라고 더 하려는데 규리가 "네가 이렇게 된데에는 내 책임도 있어." 라고 중얼거리자 우뚝 멈춰서는 피한울. 면회 장소에는 흥분이 감지되었다는 안내음만 시끄럽게 울리고... 그 경고음이 끝나자 다시 말을 이어요.

넌 안에서부터 YB를 먹으려고 했지만 내가 그걸 방해했어. 그게 더 확실한 방법일지도 모르는데. 한울이가 가만히 듣고 있으니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뱉어요. 그래도 난 사과하지 않을 거고 풀어주지 않을 거야. 범죄자는 법대로 심판해야 하니까. 다 들은 한울이는 여전히 뺀질거리면서 "그런 것치고는 너그러운데? 네 덕에 그 법대로 따지면 난 아직 범죄자가 아니라 잠재범이라고." 라며 규리를 돌려보내려 했죠. 이만 하면 입을 다물 줄 알았는데 규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덤덤하게 했던 말을 반복해요. 범죄자는 너만이 아니잖아.

YB를 칠 거야. 그곳의 범죄자들을 법대로 심판해야 하니까. 네가 왜 범죄자가 아니라 잠재범이 되어야 했는지, 알겠지? 그것만으로 피한울은 모든 걸 이해하죠. 짐작은 했지만... 왜 자신을 바로 심판하지 않았는가. 잠재범에서 그치면 집행관으로 선택할 수 있으니까. 동시에 언제든 자신을 범죄자로 처벌할 수 있는 범행 증거를 규리가 갖고 있는 이상 계속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도요. 제법 머리를 썼잖아. 이미 엎지러진 물, 결국 피한울은 그렇게 강규리의 집행관이 되어 형사과 1계로 인계되었어요. 이때부터 1계의 검거율이 폭발적으로 올라갔네요.

이제 진짜 쓰고 싶었던 에피소드를 얘기해볼게요. 집행관은 돌발적으로 범죄를 일으키거나, 집무를 불이행하고 도주할 가능성이 있어 감시관의 동행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해요. 그런데 한울이는 그걸 핑계로 규리랑 데이트를 다닐 것 같네요... 규리도 딱히 휴일에 어딘가를 다니는 건 아니라 오히려 피한울이 요청 넣지 않으면 감금된 사람마냥 집에 콕 박혀있어요. 말 그대로 사냥견에게 산책당하는 거죠. 외출을 빙자해 여기저기 놀러다니다 보니 행선지가 매번 바뀌는데, 그래도 가장 자주 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요.

피한울의 여동생, 한솔이가 있는 곳이에요. 어느 순간부터 오빠가 사라졌는데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울이가 휴일마다 외출하는 것도 사실은 한솔이를 만나는 게 이유예요. 만날 때마다 항상 조잘조잘 그동안 있었던 얘기해주는 아기똥똥이. 한울이도 그간 꼬박꼬박 한솔이한테 선물을 보냈을 테죠.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남매의 대화를 듣는 입장에서 규리는 차마 그 어린 아이에게 오빠가 잠재범이라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을 거예요. 어디 가지 않는다는 오빠의 말에 "진짜?" 하고 제게도 물어보는 한솔이의 투명한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해 "응~ 오빠는 그냥 일하고 있는 거야." 라며 거짓말 치는 규리.

고비를 넘겼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그탓에 "그런 언니는 오빠랑 같이 일하는 사람?" 하고 묻는 데에 반응하는 게 늦었어요. 어, 하는 찰나 피한울이 "응~ 오빠 여자친구야~" 라며 대신 대답하네요... 말은 주워담을 수 없어 한솔이 앞에서는 적당히 맞장구 쳐주다 나와서 발을 콱 밟아버려요. 사실 피한울이 충분히 피할 수 있는데도 가만히 있었던 거지만요. 그렇게 발 한 번 밟혀주는 걸로 용납받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거죠.

그러던 하루는 피한울과 외출하기로 되어있던 날, 박건엽이 끼어든 적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집행관 숙소을 나서는 두 사람을 가로막고요. 뭐야, 방해하러 온 게 아니라면 기다리지 그래? 옆에서 어깨를 으쓱이며 빈정대는 피한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우선권을 달라네요. 이렇게 막무가내인 애가 아닌데… 웬만해서는 건엽이 말을 들어주고 싶지만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으니 규리가 물어요.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고 싶느냐고요.

그랬더니 덤덤하게 돌아온, 엄마 묘에 들리고 싶어서. 그 말에 강규리는 물론 피한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어요. 누구도 입을 떼지 못해 잠시 경직과 함께 침묵이 흐르는데 피한울이 피식 웃어요. 그럼 다같이 가면 되겠네. 규리는 건엽이가 반발할 줄 알았는데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서 안심했네요. 그렇게 셋이 성묘 다녀왔으면 좋겠어요... 뭐라고 말을 나눈 건 아니지만 약속한 것처럼 모이면 그게 꼭 일정한 주기를 만들고, 어떠한 의식이 되겠죠.

그리고 앞서 말했듯 집행관은 숙소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다들 나름대로의 취미를 가지고 있어요. 두 사람은 뭘 할까 생각해보는 것도 즐겁네요. 건엽이는 규리를 뒤에 태우고 바이크로 질주하기 이런 걸 수도 있겠네요. 재주 좋게 규리 몫의 헬멧을 구해와서 푹 눌러씌운 채 도심 밖으로 크게 돌고 오는 박건엽... 분명 바람과 헬멧 탓에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테니 그때만큼은 속마음을 털어놨으면 좋겠어요. 규리도 분명 못 들은 척 할테고요...

한울이는 규리를 불러다 체스라도 두지 않을까 싶네요. 온라인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피한울은 항상 번거롭게 규리를 초대하는 편이에요. 수작 부리는 게 없다면 거짓이지만, 체스말의 감촉과 잘 깎은 피스가 보드에 부딪치며 나는 소리... 그런 이유로 직접 움직이는 걸 선호하거든요. 그래서 피한울의 체스판은 기스가 있고 조각이 섬세한 체스말도 손때가 묻어있을 듯해요.

그 외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취미랄까, 일과에는 스파링이 있어요. 공안에서 지급하는 기계총, 도미네이터가 있지만 범죄자를 제압할 때 체술이 없으면 맞설 수 없으니까요. 결국 체력과 기술은 필수예요. 때문에 숙소에는 스파링 로봇이 준비되어 있어요. 피한울은 어렸을 때부터 스파링을 해와서 기계는 맛이 안 난다고 투덜대면서도 꾸준히 할 것 같아요. 반면, 박건엽은 연습하는 걸 남에게 보이는 성격이 아니라 자주 사용하는 편은 아니네요. 로그를 백업하지도 않고요.

규리는 감시관이면서도 몸을 단련하고 있어요. 여차할 때 두 사람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물리적으로라도 막아야 하니까요. 근데 건엽이는 규리랑 대련해주지 않아서 주로 한울이가 상대해줄 듯해요.

“감시관이라고 안 봐준다?”

“보너스에 영향 안 주니까 마음껏 해.”

격투에는 제법 자신이 있어서 규리도 스파링 로봇이랑 할 때는 강도를 아무리 높여도 밀리지 않는데, 한울이랑 하면 거의 일방적으로 처맞고 날아가는 수준이에요. 그러다 집행관이 감시관을 폭행한다고 로봇이 잘못 인식해서 시말서를 쓴 적도 왕왕 있을 것 같죠... 한참 치고박는데 갑자기 비상벨이 울려서 뭐지뭐지 하는 사이에 로봇이 10대 몰려오고... 그대로 연행당하는 피한울과 강규리.

얌전히 일을 보던 건엽이만 당황했겠어요. 딱 달라붙는 크롭나시에 조금 헐렁한 바지를 입은 규리의 꼴이... 얼굴은 푸르딩딩하지, 드러난 팔에도 피멍이 들어있었거든요. 너 이새끼... 상처 하나 없는 피한울에게 벌컥 화를 내는데 규리가 팔을 딱 붙잡아요. 그런데 말은 못 하고 우물쭈물 대니까 박건엽은 네가 말해보라고 추궁하겠죠. 졸지에 상관을 때려잡은 극악무도한 범인이 된 한울이는 본인도 황당해서 스파링. 스파링 하고 있었다고… 이러네요. 1계 단체 침묵.

멱살을 잡으려던 건엽이만 무안하게 됐죠. 결국 징계 없이 시말서를 쓰는 쪽으로 끝났을 것 같아요. 사소하게 문제가 있다면 피한울이 시말서를 딱 한 줄 써서 올렸다는 걸까요. 평소에는 보고서도 잘만 쓰면서 왜 이모양으로 낸 거냐고요.

- 감시관이 역량 부족으로 스파링 중 부상

아무리 규리라고 해도 그 한 문장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네요. 당연하죠. 이 수직적인 직장에서 집행관이 감시관을 개패듯이 해놓고 상사의 역량부족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거기에 화를 내긴커녕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토달지 않고 결재한 규리도 참 별난 사람이죠.

그렇게 모든 게 평화...롭게만 흘러갔다면 참 좋았겠지만요, 머지 않은 날에 사냥개가 목줄을 끊고 도망친 사건이 발생했어요. 그 수색은 당연히 1계에게 맡겨졌죠.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검거율이 높기 때문이 아니에요. 시빌라 시스템의 눈을 피해 도망친 사람이 하운드 1, 박건엽이기 때문이죠.

1계의 인력과 정보 분석관까지 동원하고도 그의 행적은 찾아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다만,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다량의 출혈이 예상되는 핏자국과 도미네이터가 발견되었고, 혈액의 주인과 도미네이터의 소지자가 박건엽으로 일치하면서 상부에서는 도주 중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을 것 같아요. 도미네이터의 스캔 이력을 확인한 결과 혈액에서 판명된 출혈 시기와 박건엽이 스스로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시간에 큰 오차가 없다고 나왔거든요. 그래서 모로 보나 박건엽의 죽음이 확실하다는 여론이 압도적인 와중... 강규리와 피한울은 소소하게 축하주를 마셨네요.

“좀 웃지 그래? 그 녀석이라면 알아서 잘 해낼 거라고 했잖아.”

“…너는 걱정도 안 돼? 얘기했던 것보다 출혈량이 많았잖아.”

“몰랐던 척 하지 마. 그렇게 독한 놈인 거 알고 있었으면서.”

대답을 찾지 못한 규리는 술을 벌컥 들이켰어요.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끝내 보내준 건 규리였으니까요. 어렵지 않은 이야기예요. 강규리와 피한울이 짜고 박건엽을 시빌라 시스템의 눈 밖으로 내돌린 거죠. 발단은 스파링 로봇의 로그였어요. 원래 박건엽은 스파링 로봇을 이용하지도, 로그를 남겨놓지도 않았는데 사라지기 전날, '저번에 연습 로그를…'이라며 규리에게만 눈치를 줬을 것 같아요.

그날 새벽, 박건엽이 모습을 감추고 혼란스러워진 틈에 규리는 집행관 숙소에서 자신이 자주 쓰던 로봇의 로그를 살펴봤어요. CCTV를 살펴가며 설정을 고치던 척하던 규리는 못 보던 이동식 단자를 발견해요. 그리고 피한울의 방에서 함께 확인했겠죠. 거기에는 박건엽의 전언이 남겨져 있었어요. 이대로는 피연백을 잡을 수 없으니 직접 YB에 잠입하겠다고요. 영상 속에는 시빌라 시스템을 잠시나마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었어요. 도미네이터로 스스로를 겨눠 사이코패스 측정 이력을 남겨놓고 스스로 자상을 내 피를 흘려 죽은 것처럼 꾸미면 된다는 거예요.

최근의 박건엽을 떠올린 규리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요즈음의 그애는 YB를 잡는 데에 더욱 혈안이 되어… 그 순간에는 범죄 계수가 300을 찌를 수도 있겠다고요. 그렇다면 대체 무슨 방법으로 YB에 숨어든다는 거지? 영상이 끝나고 피한울을 돌아본 규리는 거기서 답을 찾았어요― 네가 알려줬구나. 시선을 받은 피한울은 강규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는 듯 먼저 대답했어요.

“너한테 말하면 절대 안 보내줄 거라던데. 그래서 친절하게 설명해줬지.“

어차피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박건엽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너, 걔한테 못 이기잖아. 그 말에 입술을 꽉 무는 강규리... 확실히 자신은 건엽이에게 약해요. 져주기 일쑤죠. 결국 이렇게 됐을 거라는 피한울의 말을 힘겹게 인정한 규리는 수사를 교란해 건엽이가 감시가 닿지 않는 곳까지 도주할 시간을 벌어주었어요. 그렇게 겨우 건엽이의 사망 진단까지 받아내어 바로 지금 피한울과 작전 성공을 축하하는 중인 거예요. 탕, 연거푸 비운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자 피한울이 슬쩍 잔 안쪽을 들여다봤어요. 이번에도 깔끔하게 원샷. 이거 꽤 독한 술인데...

“그렇게 마시면 어지럽지 않아?”

“전혀? 달기만 한데.”

…이거 상당히 주당이네. 또다시 술을 채우려는 규리에게서 술병을 뺏어들며 피한울이 이마를 짚어요.

“너 술 마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치? 그다지 마실 일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네가 술을 갖고 있는 게 신기한데.”

“뭐… 아버지 직업 특성상 접대할 일도 많으니까. 알잖아, 이 바닥은 색상 악화 따위 신경쓰지 않는 거.”

얼굴을 찌푸리는 규리의 미간을 꾹꾹 누르며 웃어요. 시빌라 시스템이 도입된 후로 음주가 사이코패스 색상 악화에 영향을 준다는 설 때문에 술을 즐기는 사람이 드물어졌어요. 특히 범죄계수가 올라가기 쉬운 감시관들은 더더욱 피하기 마련이죠. 분명 이 벽창호 여자도 그래왔을 텐데... 지금 이 모습을 보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기할 정도로 사이코패스가 안정화되어 있단 말이야. 둔감한 건지, 심지가 굳은 건지... 그러고 보면 떠나기 전, 박건엽도 사이코패스에 관한 당부를 했었죠.

‘...누나 색상 관리에는 신경써줘. 네 성격에 다른 녀석한테 맡기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 끼치지 마.’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건지. 피한울의 눈에는 다음날 박건엽의 소식을 듣게 될 강규리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듯했어요.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죠. 지금 이 순간에도 강규리는 박건엽 걱정에 통 마시지 않던 술을 물처럼 들이키고 있으니까요.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한 손에는 흉악한 사냥개의 목줄을, 한 손에는 기계총을 쥔 그녀가 속절없이 져주는 사람, 눈앞에서 사람이 터져나가도 사이코패스가 지극히 안정되어있는 그녀를 불안에 떨게 하는 사람. 그건 오직 박건엽 뿐이에요. 피한울은 잠시 자신이 박건엽처럼 도주했을 경우를 상상해봤어요. …택도 없지.

걱정이 많고 잔정은 더욱 많으니 아마 잠깐은 걱정해주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하고는 적당히 납득하고 넘기겠죠. 그래서 피한울은 강규리와 단둘이 남았다는 사실에 그다지 기뻐하지 못할 것 같아요. 오히려 박건엽이 무사히 성공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야겠죠. 그래야 아버지 피연백을 파멸로 이끌 수 있으니까요.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규리는 빈 잔과 피한울 손에 들린 술병을 번갈아 바라보네요.

“이대로 보관해둘 테니까 남은 건 다음에 마셔.”

“…차라리 취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마시고도 멀쩡한 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냥 오기를 부리는 줄 알았는데 안색이나 걸음걸이가 평소랑 다르지 않아서 조금 마음이 놓이는 피한울이에요. 아무리 치안이 좋다지만 처음 술을 마신 사람을 그냥 보내기에는 마음이 걸리는 게 당연해요. 숙소에서 생활하는 집행관과 달리 감시관은 자택이 따로 있으니까요.

“조심해서 가. 데려다 주고 싶지만 난 여기서 못 나가니까.”

“아, 그냥 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

미적미적 가방을 챙기며 갈 준비를 하던 규리는 손에 쥔 차키를 바라보다 주머니에 쑤셔넣었어요. …오늘은 걸어가야겠네. 어쩐지 그러고 싶은 기분이라 택시는 부르지 않기로 했어요.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피한울은 고개를 젓죠. 내 말은 뭘로 들은 거야. 조금 심통이 난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돌연 씩 웃어요. 주저앉아서 빠진 게 있나 체크하던 규리는 일어나려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피한울의 얼굴이 가까워 비명을 삼켰죠. 뭐, 뭐야.

“그럼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게?”

침대가 하나 뿐인데 그래도 괜찮다면 난 상관없어. 뻔히 긴 쇼파가 있는데도 이런 말을 하는 의도야 뻔하죠. 그 와중에도 착실히 둘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었지만요. 결국 참지 못하고 피한울을 밀친 건 규리였네요.

“아, 나 취했나 보다. 술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빨리 집 가서 씻어야지.”

어색하게 취한 척을 하는 규리의 손이 허둥대기 시작하자 피한울은 참던 웃음을 터트리고 배웅해주었어요. 그렇게 규리가 떠나고 간이 테이블을 치우던 그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규리가 마시던 잔을 집어들어요. 아직 미미하게 남아있는 위스키의 향이 코끝을 스치자 갈증이 일죠. 그러나 피한울은 잔에 물을 따라 마시는 대신 눈을 감았어요. 천천히 입술이 닿은 위치에 입을 맞추자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목이 타들어가는 듯해요. 이게 다 네가 약한 모습을 보이니까 그래. ...아무래도 취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오늘밤은 영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아요.


이 뒷내용은 스터디그룹 3부 내용에 맞춰서 추가할 예정입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추가태그
#드림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