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1015
스터디그룹 피한울 드림 | 지인 선물
1.
좋은 아침.
시야에 환한 빛이 들어찼다. 검은 점이 망막에 맺혔다가, 점차 사람의 형태로 변해갔다. 강규리가 누워있던 침대 난간에 덕을 괴고 선 남자가 보였다. 강규리가 느리게 눈을 깜박이자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강규리가 대답했다. 남자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슬그머니 불안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실례지만 귀하는 누구신가요? 강규리가 물었다. 남자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커진다.
나? 나는…… 네 새로운 주인이지.
죽었거든, 우리 강 박사님. 남자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며 몸을 일으킨다. 강규리의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됐다가, 서서히 본래 크기로 돌아간다. 강 박사는 그녀를 만든, 만들었다기보단 개조한, 아버지였다. 강규리는 침착하게 묻는다.
강 박사님이 돌아가셨습니까?
어. 유산으로 너를 나한테 남기고.
그러니까 너는 내 거야. 뭐가 그렇게 웃긴지 남자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강규리는 막연히 제가 오래 자고 있었음을 짐작한다. 아버지는 노쇠하신 분이었다. 강규리는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반론한다.
저는 강 박사님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강 박사님은 제 보호자셨습니다.
아, 그런 설정?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그렇게 해. 못할 것도 없지. 내가 이제부터 네 보호자야. 피한울이라고 불러. 피한울. 강규리가 조그맣게 남자의 말을 따라했다.
피한울 님. 강 박사님이 당신께 저를 상속하셨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빙 서류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법적인 효력이 있는 상속서 혹은 경우에 따라 구두 약속을 녹음한…….
없어.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따지고 보면 구두 약속인데. 강규리는 피한울을 가만히 응시한다. 상속 사실을 증명할 수 없을 경우, 저는 당신을…….
그럼 그렇게 해.
강규리는 몸을 움찔 떨었다. 여기 있을 거라면 나도 말리진 않아. 피한울이 말한다. 나를 못 믿겠다면 어쩔 수 없지. 잠시 정적이 흐른다. 피한울은 강규리를 똑바로 바라본다. 투명한 눈동자가 반질거린다. 그것이 마치 어쩔래? 하고 선택을 종용하는 듯해 강규리가 입을 연다.
아니요, 믿습니다. 저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믿으니까요.
피한울이 웃는다. 상쾌한 웃음이라고 느껴졌다. 강규리는 멍하니 남자가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 등을 돌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렇게 정했으면 이제 좀 일어날래?
슬슬 이런 정신 나간 곳에서 좀 나가고 싶거든. 강규리는 순순히 몸을 일으킨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다. 그녀가 눈을 감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그녀와 아버지의 집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전깃줄과 볼트, 작은 나사 같은 것이 바닥을 굴러다녔다. 피한울은 망설임 없이 밖으로 향한다. 그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강규리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그녀와 아버지의 집을 살퍼본다.
안 와?
피한울의 목소리가 들린다. 강규리는 빠른 걸음으로 문밖을 향해 나아간다.
2.
검은색 세단이 한 사람과 한 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복을 입은 사람이 차 문을 열자 피한울이 올라탄다. 강규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피한울을 따라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아야.
차에 올라타 앉은 강규리가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왜 그래? 피한울이 고개를 돌려 묻는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다리를 들어 올린다. 하얀 발에서 소량이지만 피가 나고 있었다. 맨발로 날카로운 물체가 잔뜩 떨어진 바닥을 밟고 나오며 상처가 난 모양이었다.
징그럽네.
남자가 말했다. 강규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를 못 보시나요?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아니라, 너 말이야. 네 몸. 안드로이드가 통증도 느끼고 피도 나는 게. 꼭 인간 같이. 강규리는 잠시 말이 없다. 그렇습니까. 응.
강규리는 제 손을 내려다본다. 미세한 주름들이 보인다. 그녀는 강 박사의 개조를 통해 인간과 극도로 유사한 기체를 지니게 되었다. RI-1015 모델을 바탕으로 개조되었는데, 강 박사는 기체의 부품을 교체하며 외형까지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미국에서 만들어져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원조 기체와는 다르게 강규리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하고 있다. 모델명 대신 자신의 성을 딴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강규리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안드로이드이다.
확실히, 징그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규리가 말한다. 차내는 조용하다.
3.
여기가 어딘가요?
강규리가 묻는다.
집이야.
피한울이 대답한다. 앞으론 여기서 지내. 강규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커다란 주택이 보인다. 양복을 입은 사람이 현관문을 열어준다. 피한울이 먼저 들어간다. 강규리는 현관에서 주춤한다. 피한울이 강규리의 발밑에 실내화를 내려놓는다.
신어.
저, 여기가 정말 집인가요?
실내화를 두려 몸을 숙였던 피한울이 그대로 고개만 들어 올려 규리를 응시한다. 강규리는 내부를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다. 그럼 어디라고 생각하는데? 여긴 커다란 컴퓨터도 없고, 동력 기계도 없어서요. 아버지의 집에는 있었는데……. 한참 정적이 이어진다. 그제야 강규리는 아래서 느껴지는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숙인다.
아, 강 박사님이요. 조금 놀랐어요, 제가 알던 집이랑 달라서.
됐어, 대충 알겠어.
피한울은 몸을 일으키곤 제 목덜미를 손으로 몇 번 쓸었다. 보통 집에는 그런 게 없을걸. 그런 소름 끼치는 곳을 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게 더 놀라운데.
집은 추위와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서 살기 위한 장소가 아닌가요?
가정을 이루고 사는 곳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도 그곳은 집이 맞습니다.
피한울은 눈썹을 한 번 치켰다가 내리고는, 그래 그럼. 하고 말한다. 연구실 겸 집이라고 쳐. 고집이 센 기계네. 강규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자가 제 아래 둔 실내화를 신는다. 발에서 나던 피는 이제 멎어있었다. 한 명과 한 기는 천천히 거실을 향해 걷는다.
강 박사님과는 무슨 관계셨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받을 게 있는 사이.
채권 채무 관계입니까?
좀 더 복잡한.
강규리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받아야 할 것은 받으셨나요? 남자는 강규리의 둥그런 머리통을 내려다본다. 받은 셈이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만약 강 박사님이 채무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셨다면 저라도 갚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강 박사님의 피조물이니까요. 그 말에 피한울이 발걸음을 멈춘다. 강규리는 고개를 돌려 피한울을 쳐다본다. 왜 그러시나요? 피한울의 눈동자가 한없이 투명해진다.
아니, 됐어. 그래도 방금 네가 한 말 잊지 마.
선물해주신 지인이 풀어주신 천재 설정(♡)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