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잼에는 설탕을 가득 넣어주세요
오리지널 구루메물(?)
블랙체리 두 바구니를 샀다. 정박한 마을에 마침 장이 서고 있었다. 시장 특유의 생기와 소란스러움 사이에서 유독 눈에 들어온 녀석이었다. 초라한 바구니 안에 깊게 들어있는 것들은 조금 물렀고, 군데군데 파인 곳이 있어 오래 버티긴 힘들 것 같았다. 평소라면 이걸 흠잡아 가격을 깎아 보려고 했겠지만, 어쩐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아 그냥 제 값을 치루고 돌아왔다. 배로 돌아오는 내내 맘이 캥겼지만 이미 저지른 일을 번복하는 것 만큼 모양 빠지는 일도 없었다.
마나난이 체리를 바구니째로 들고오자 갑판 위에 있는 선원들은 자연스럽게 줄을 섰다. 맛좀 보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제 앞에 도열한 이들을 내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아, 마나난은 그들의 손에 체리 한 움쿰씩을 놓아 주었다. 손을 움직일 때 마다 농익은 과일의 달큰한 향이 났다. 바다 특유의 짠 내마저 녹여버릴 것 같이 달달했다. 성급하게 체리를 입에 넣은 녀석들이 참 다디달다며 너스레를 떠는 것이 제법 유쾌했다.
“먹고 싶으면 더 먹어!”
‘마법사의 배’에는 선원이 별로 없었지만, 넘치는 인심 덕에 한 바구니는 금방 동나고, 나머지 바구니도 반절이 비었다. 다들 손바닥 위에 체리 씨앗을 한가득 올리고서는 배를 똥똥거리고 있었다. 얼굴도 험한 몇 녀석들은 갑판에 있는 화분에 씨를 심으면 나긴 할까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었다. 이런 건 아르가 잘 아는데. 마나난은 바구니를 안고 선실 입구 근처에 세워둔 제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 앉았다. 기름칠이 덜 된 의자가 끼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배 위에서 굳이 안락의자를 고집하는 선장을 질린 눈으로 보던 선원들이 더 질린 표정으로 하나 둘 씩 제 위치로 돌아갔다.
원래 그 근처 자리가 제 자리인 부선장만이 마나난의 곁에 남아 있었다. 곧 출항할거야- 라고 말하자, 부선장은 그의 말을 곧장 따라하며 곧 출항한다고 쩌렁쩌렁 소리쳤다. 파도 소리를 누를 만큼 큰 목소리였다. 누그러진 배의 분위기가 단숨에 잡히는 것을 느끼며 마나난은 부선장의 손에 체리 두 알 정도를 놓아 주었다. 벌레 먹은 자국 없이 깨끗한 것들을 골라 손에 올려주자, 그것을 곧장 입에 넣으면서 우물거렸다. 맛이 잘 들었다는 말에 마나난은 내가 과일은 잘 고른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마나난은 안락의자에 등을 깊게 기대었다.
“이거 오래 버티긴 힘들 것 같지?” 마나난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아무래도요.” 선원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쾌속선이 시간을 거스르듯 움직인다지만 핀디아스와 팔리아스가 붙은 국경의 끄트머리에서 무리아스의 해변으로 가려면 이틀을 꼬박 항해해야했다. 국경에서 실은 물건의 무게를 생각하고, 항해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과 어린애를 운반하려면 이틀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곤란하네- 생각이 문득 입 밖으로 나왔다. 들었어? 라고 이어 물어보며 옆에 선 사내를 바라보자, 남은걸 다 드시려면 고생꽤나 하시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선원의 얼굴엔 짓궃음이 가득했다. 왜 그런 표정이지이-? 하면서 능청스레 묻자, 선원은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으며 ‘신혼이군요’ 같은 말 따위를 내뱉었다.
이거랑 신혼이 뭔 상관이람. 마나난은 괜히 체리 바구니에 손을 넣어 벌레 파먹은 체리 몇 알을 옆 자리의 사내에게 건넸다. 평소에 과일 잘 안 먹잖아요. 부군 취향이신 게지. 알걸 다 안다는 듯 선원은 주름 가득한 얼굴을 하고 킬킬 웃으며 과육을 받아들었다. 마나난은 쌜쭉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마침 바다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고, 하늘에 깊게 퍼지는 주황의 물결을 바라보다가 마나난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 싶다는 것은 사실이었고, 공들여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입이 짧아 과일도 그닥 안 먹는 주제에 두 바구니가 산 이유를 변명할 수도 없었다. 무리아스는 체리가 제철이었다. 전쟁 전에 마당에 대충 심어놓고 온 나무에도 체리가 가득 열렸다. 마당에 있던 것은 색이 연한 디저트 체리였지만, 그걸 하나하나 따가며 잘도 먹던 아를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떨어져 있으면 보고싶은 것은 사실이라, 마나난은 다음 항해에는 꼭 그를 제 배에 태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막내 선원이라고 놀림받으면 어쩌지 싶어 두고왔는데 어때 떨어져 있을 수록 그가 보고 싶었다.
마나난은 별을 바라보며 수정구슬로 항로를 점쳤다. 이번에도 ‘안전한 항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해도를 보며 부선장에게 지시했다. 어둠을 틈타 밤의 장막을 두르고 곧장 나아갈 생각이었다. 배 위의 사람들이 마나난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갑판 밑에 있는 3등 선실로 운반해야할 사람과 물건들을 모조리 내려보낸 다음, 바람이 움직이는 길을 읽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항로를 설정하자마자 왼손 약지의 진주가 반응하며 ‘그가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닻을 올리고 돛을 펼쳤다. 밤 안에 숨어 곧장 움직이며 마나난은 문득 질문했다.
“내가 어떻게든 남편에게 체리를 먹이고 싶다면?”
“잼으로 만드세요.”
“내 요리실력이 잼병이라면?”
“그러면 바닷속에 돌려드려야죠.”
“봐주질 않네.”
“못 만든 잼도 바닷속에 공양하게 될 겁니다.”
“한 마디를 안 지네에-”
마나난은 안락의자에 깊게 기대 앉았다. 마법을 걸자마자 배는 원하는 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바람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 펼쳐진 돛의 각도를 올려다보며 배의 모습을 밤 안으로 완전히 가렸다. 간단한 마법 몇 개를 배 위에 덧칠한 마나난은 바구니를 다시 고쳐 끌어안았다. 딱딱한 바구니에서 온기따위 느껴지지 않았지만, 체리를 입에 넣으며 즐거워 하던 아를의 모습을 연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잼 만드는 거 어려워? 마나난은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고, 부선장은 배꼽이 빠지게 웃더니 씨를 뺄줄만 알면 어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너 딱 기다려. 성공하고 와서 보자아- 마나난의 말에 선원은 유쾌하게 말을 더했다. 이러다 우리가 평생 못 볼수도 있겠습니다.
체리 반 바구니를 어떻게든 따고 다듬어 손질해 놨더니 반쯤 허탕을 쳤다. 요리 보직도 따로 없는 배에서 체리 손질의 세심함을 아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잼을 만드는 법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마나난이 체리 손질법 따위를 알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식사를 배급받던 손님이 보다 못해 지적하기 전까지, 그는 과즙을 받아야한단 인식도 없이 손 끝을 체리 즙으로 얼룩덜룩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핀디아스에서 제과점을 했다던 손님은 그에게 잼 만드는 법을 손수 알려주었다.
레시피를 대충 ‘이야기를 채록하는 수첩’에 빼곡히 기록했다. 손님은 젊은 선장이 더 헛발질을 할 것이 신경쓰였는지, 아니면 배를 빌려준 선장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려던 건지, 그가 잼을 만드는 동안 옆에 있었다. 덕분에 마나난은 남은 과육을 과즙을 받아가며 씨를 빼고, 뺀 씨는 모슬린 천에 싸서 끈으로 단단히 묶을 수 있었다. 체리 반 바구니가 한번에 들어갈 큰 냄비에 과육과 과즙, 모슬린 주머니를 넣고서 물을 조금 부었다.
“부인, 물을 더 넣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일단 그렇게 끓이면서 과육을 살짝 익히는 거예요.”
배 위에서 체리 잼이라니 손이 많이 가는 걸 하네요. 부인은 인자하게 웃으면서 주걱을 쥐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마나난은 언제나 요령이 좋은 녀석이었음으로, 그는 부인의 말 대로 과육을 끓일 수 있었다. 종종 갑판 위의 상황을 보고하러 내려오는 선원들은 선장이 주걱을 쥐고 있음에 당황했지만, 이내 부군을 끔찍히 생각하는 부분을 놀리고 돌아갔다. 배의 기강이 다 무너졌다며 장난스레 툴툴거리는 마나난에게, 부인은 다음 순서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설탕을 따뜻하게 데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차가운 곳에 있던 설탕에 열을 간접적으로 가해 녹지 않을 정도로 뜨끈하게 만들었다. 레몬즙이 없어 라임즙을 짜 넣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불을 자연스럽게 조절할 수 있는 마도구를 설치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했다. 종종 아를이 배의 부엌을 빌려쓰기 때문에 만들어둔 거였는데, 되려 지금 제게 도움이 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는 약한 불에서 설탕을 천천히 녹였다. 아까 끓여둔 체리 과육은 설탕이 다 녹은 다음에 더한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 조절은 의식적으로 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는 부인에게 핀디아스식 고기파이라던가, 매운 갈비 스튜 같은 것들의 레시피를 채록했다.
잼을 젓는 것은 지루한 작업이었다. 설탕은 달달한 향을 내면서 은은하게 녹았다. 투명하고 뜨끈뜨끈하게 녹아가는 액체를 바라보면서 몇 가지의 농담 따먹기를 하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연인의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다는 건 조금 간질거려서, 마나난은 냄비의 바닥을 긁듯 세게 긁었다가 힘 조절을 하라는 타박을 들었다. 내 아르는 안 그러는데, 라고 장난을 담아 투덜거리자 부인은 원래 신혼은 그렇다면서 잘게 웃었다. 배에서 내려서도 연락하자는 말을 하며 우편함 주소를 나누어 가지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잼이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네에-”
“그래도 체리 잼은 센 불에 팍 졸일 거라서, 다른 잼보다는 덜 걸리지요.”
“그러고보니 저번에 남편이 복숭아랑 라즈베리로 잼을 해준 적이 있는데.”
과육의 모양이 상하지 않은 채로, 시원하게 만들어서 그걸 여러 겹이 켜켜이 쌓인 페스츄리 위에 올려서 먹었어요. 커다란복숭아 과육 안에 일부러 크림치즈를 채워넣은 것도 있었는데- 마나난은 순간 입맛을 다셨다. 복숭아 특유의 달콤함과, 라즈베리의 상큼함을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부인은 그게 손이 참 많이 간다면서 고개를 짧게 저었다. 워낙 이쁜게 아니면 안 해준다는 말에 내가 예쁜가? 하고 괜히 말하다가, 마나난은 불을 세게 올리고 끓인 과육을 넣었다. 달콤한 냄새가 깊게 올라왔다.
이대로 더 끓이다가 씨앗이 든 모슬린 주머니를 넣고 10분 정도 가열하면 완성된단 말에, 마나난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이 많이 가네에- 우리집은 아르가 만든 잼만 먹었는데. 부인은 남편 참 잘 만났다면서 경쾌하게 웃었다. 전쟁에 휘말려 떠난 부인의 남편 이야길 자연스럽게 들으면서 마나난은 작은 유리병과 큰 유리병을 가져왔다. 주머니를 넣고 다시 끓이는 동안 배는 바다 위에서 출렁거렸고, 깊은 파도에서 용캐 병도 냄비도 무사했다. 작은 병에 담긴 체리 잼은 부인께 나누어주고, 큰 병에 담긴 체리잼은 잘 챙겼다. 과육이 살아있는 잼의 붉은 색이 루비처럼 반짝였다.
잼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음식이다. 지루하게 불 앞에 서 있어야 한다. 마나난은 자연스레 제 부엌의 풍경을 떠올렸다. 흰색으로 칠한 벽에는 큰 창문이 두 개 뚫려있다. 아침엔 볕이 깊게 들어와서 눈이 부실테고, 저녁엔 빛이 모잘라서 마도구 램프를 켜두어야 하는 곳이다. 커튼을 달기에도 마땅찮은 곳으로 화구를 놓은 건, 전적으로 요리를 못하는 마나난 때문이었다. 집안에서 불을 쓰지 않으니 어떤 위치가 좋은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과일 철에 맞추어 꾸준히 다른 잼을 만들었다. 마나난은 머쓱하게 머리 끝을 매만지다가, 갑판 위로 나왔다.
험한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는, 땅 위처럼 ‘안정적’이었다. 마나난에서 기인한 마법 때문이었다. 선원들은 모두 그의 마법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별 무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일상같은 풍경이 지속될 수록 연인이 보고 싶었다. 그가 주는 사랑은 한없이 일상적이고 다정해서, 이런 뜬금없는 순간 깨닫고 만다. 이 두근거림을 해소할 길이 없어서 마나난은 그저 안락의자에 앉은 채로 배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항로를 점검하며 왼손 약지의 진주 반지를 다른 손의 엄지로 문질거리며 쓰다듬었다.
손이 많이 가는 잼이라니, 사랑받고 있네요. 부인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마나난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보고 싶어지는 건 ‘반칙’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정작 들을 사람이 저 먼 바다 너머에 있었다. 속력을 더 올릴까 싶어, 마나난은 제게 남은 마력을 생각하며 항로를 다시 점쳤다. 줄어들지 않는 시간을 탓하면서 마나난은 선실에 잘 두고온 잼 병을 떠올렸다. 맛있게 먹어줬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다가 역시 다음 항해에는 자신의 에어리얼을 꼭 데려오리라 마음을 먹고선, 그저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항해가 지루한 건 처음이었다. 그저 체리 잼을 받는 그이의 모습을 생각하게 될 뿐이었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