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you

[트리오] 배리어 너머

죽더라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Nebula by 소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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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펠



녹트의 강화신체는 축복이 아닌 저주다. 그들은 강화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전한 판도라를 벗어나 재앙이 들끓는 폐허에 내던져진다. 강화 시술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간종을 멸종 직전까지 몰아붙인 크리처와 정면에서 맞붙어야 하며, 강화신체로 인해 인간 같잖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배척받는다. 강화 신체를 한 번 이식 받은 이상 녹트의 마지막은 정해져 있었다. 녹트는 폐허에서 크리처와 싸우다 죽는다. 예외는 없었다. 녹트를 때려치우고 민간인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수천 번씩 제 생명을 위협하는 폐허로 나와 낡은 먼지 냄새가 나는 공기를 함뿍 들이켜야 했다.

죽는 것을 바라는 이는 없다. 설령 생에 내몰려 녹트가 되길 선택한 이조차 죽음을 간원하지는 않는다.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대격변을 겪어본 이상 크리처 득시글한 폐허에 나서기를 반기는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압도적인 수의 녹트들이 판도라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다. 죽고 싶지 않으니까, 전우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나 정상이 '정상'이라 불리는 이유는 언제나 비정상인 개체가 있기 때문이다. 아주 소수의 녹트들은 판도라를 벗어나 폐허에 나가고 싶어했다. 그들은 판도라 내 순찰 근무가 잡히면 숨막혀 죽을 것처럼 헐떡이고 그 너머에 부모라도 두고 온 것처럼 배리어를 응시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폐허로 나갔을 때의 자유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 창공,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형용하기 어려운 해방감이 든다고. 그래서 판도라로 살아 돌아오면 바다를 헤엄치다 어항에 갇힌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고.

당연하게도, 그 개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쿼르펠은 '바다 물고기를 알긴 하나?'하고 생각했다. 쿼르펠은 28살이었고, 대격변은 20년 전에 터졌으며, 그는 19살에 녹트가 된 9년차 고참이었다. 녹트는 언제나 젊은 이들을 우선시해서 선발하니 폐허를 갈망하는 삐약이 중 일부는 출신 자체가 센터 판도라인 놈도 있었다. 판도라 내엔 바다가 존재하지 않으니 그런 놈들이 바다 물고기를 봤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바다를 헤엄치기는 무슨. 쿼르펠은 폐허를 갈망하는 몇 안 되는 머저리들을 기묘한 이상에 취한 등신 새끼로 여겼다.

그러나 이따금 그런 등신 머저리들의 개소리에 어울려주고픈 심정이 들기도 했다. 예컨대, 새파랗게 트인 하늘을 활공하며 거침없이 이능을 휘두르는 요한을 볼 때. 그가 팔을 휘두르자 단단히 응어리진 바다에 흰 포말이 일었다. 생존을 보장하는 선임의 지시를 무시하는 후임은 없었기에 모두가 한 몸처럼 요한의 지시를 따랐다. 고성이 오간다. 누군가가 바닷물에 손을 집어넣더니 창백한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와 동시에 바다의 흐름이 뒤틀린다. 그래봤자 2시 방향으로 흐를 거 2시 30분 방향으로 흐르는 정도일 뿐이지만 바다는 그 자체로 깊고 거대하기에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지시를 완수한 이가 누군가를 호명하고 몇몇 이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요한의 보조를 받아 허공에 뜬 이도 팔을 힘껏 젖혔다. 고작 몇 초. 쿠르르르, 지각 변동을 연상시키는 굉음이 바다 깊은 곳에서 울렸다. 역순으로 숫자를 세던 이가 신호탄을 쏘았다. 탕! 그 직후 고래와 비슷한 것이 바다에서부터 용솟음쳤다. 해일을 연상시키는 파도가 순식간에 일대를 휩쓸었다. 공기마저 떠밀릴 것만 같은 그 위압감에 제때 도망치지 못한 애송이가 있었다. 요한이 손짓해 애송이를 구출함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녹트들이 일제히 무기를 쏘아날린다. 어긋나려는 살까지 완벽히 제 위치에 꽂아넣은 요한의 컨트롤이 빛을 발했다.

단말마는 짧고 강력하다. 그어억,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른 크리처가 다시 바다로 떨어졌다. 텀벙! 바다가 출렁였다. 온갖 곳에 손을 내뻗은 파도가 몇 분에 걸쳐 잠잠해졌다. 몇 녹트가 물에 흠뻑 젖어 콜록거렸다. 바다에 휩쓸려 순식간에 심해로 끌려들어갈 뻔한 놈들을 건져낸 요한이 지상에 내려오며 손짓했다. 잠시 휴식! 수신호를 받은 이가 크게 외쳤다. 공기 중에 팽팽하던 긴장감이 일시에 흩어졌다. 쿼르펠은 그 모든 것을 잠자코 구경하다가 기류가 느슨해졌을 때 느릿느릿 움직였다.


"요한."
"펠?"


요한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쿼르펠을 돌아봤다. 예상치 못한 이를 봐 동그랗게 뜨인 눈이 마냥 귀엽게 보였다. 쿼르펠은 의문으로 가득 찬 요한을 보며 제 검을 설렁설렁 흔들어보였다. 근처에 임무가 있었거든. 혹시 해서 이쪽으로 빙 둘러 복귀하던 길이었어. 넌 아직 임무 중인 것 같은데…….


"도와줘?"
"아니, 괜찮아. 너도 쉬어야지, 펠."


우리 임무는 이제 시작이라서. 덧붙인 요한이 업무용 휴대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삐링, 간결한 알림에 쿼르펠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요한의 일정이 달력에 빼곡했다. 쿼르펠이 눈살을 찌푸렸다. 요한의 일정이 제 것과 미묘하게 맞물려 있었다. 만약 복귀하던 중간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거의 일주일 가까이 요한을 보지 못했으리라. 요한은 미세하게 일그러진 쿼르펠의 눈가를 보며 그의 속내를 짐작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덤덤한 낯에 서린 온기에 휴식하던 후임 몇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는 게 시야에 설핏설핏 보였다. 트리오 기수 직후에 녹트가 된 12기들은 눈치 빠르게 시선을 돌리거나 멀찍이 거리를 두기도 했지만, 쿼르펠의 악명을 모르는 애송이들 몇이 요한의 낯선 표정에 기웃거리는 게 느껴졌다. 인기척도 제대로 죽이지 못하는 것이 폐허에 묻힐 게 뻔해 보였다. 순간 불쾌함이 치밀어 날선 말을 쏘아 붙이려던 쿼르펠이 요한의 평온한 얼굴에 혀끝을 물었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임무에 들어가면 저 평온도 단단한 표정 아래에 사라질 텐데 굳이 제 쪽에서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일정 보니까 쭉 임무던데, 지금 쉬어도 돼?"
"응, 웨일럭스는 3급이거든. 이 근방에서 가장 고등급인데다 덩치도 커서 한 번 움직이면 근처 자잘한 크리처는 휩쓸려서 죽어. 이 정도 등급은 처음 본 애들도 있으니 그냥 조금 쉬는 게 나아."
"그것도 곧 끝날 것 같은데."


쿼르펠이 검집째 검을 들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아주 희미하게, 바닥이 떨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2급짜리 녹트들은 아예 눈치도 못 챘고 이 팀의 유일한 1급인 요한은 공중에서 크리처를 상대하는 사람이다. 지하의 크리처는 땅을 휘젓는 녹트가 쉽게 인식한다.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공중전을 주로 하는 요한은 높은 곳에 떠서 육안으로 보이는 크리처를 포착하곤 했으니, 지하의 일에 쿼르펠만큼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는 어려웠다.

쿼르펠의 사인에 요한의 표정이 일변했다. 검집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둔 요한이 정돈된 어조로 나직이 물었다.


"거리는?"
"내가 서 있는 부분에서부터 1.5km 정도. 시속 90km, 두 마리야. 지면으로부터 100m정도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 웨일럭스 시체를 뜯어먹으려는 모양이야. 속도나 진동의 무게로 짐작하자면 지하상어 같긴 해."
"4급이네."


요한이 서늘한 폐허를 응시하다 쿼르펠을 돌아보았다. 요한의 시선을 받은 쿼르펠이 검집을 흔들었다. 제스처를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요한이 걱정 어린 표정을 하자 쿼르펠이 시큰둥한 얼굴로 검집을 허리춤에 찼다.


"복귀하는 길에 만나는 크리처를 처리하는 것도 녹트의 몫이지. 깔끔하게 처리할 테니까 걱정 마. 바다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테지만, 슬슬 바다의 흐름이 뒤틀린 것에 물 위로 올라올 것들이 있잖아."
"그래, 믿을게, 펠."
"예, 팀장님."


장난스럽게 요한을 일별한 펠이 한쪽에 세워둔 오토바이를 향해 걸어갔다. 그르릉, 사납게 엔진을 달군 오토바이가 폐허를 가로질렀다. 올려 묶은 쿼르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작별인사 하듯 흩날렸다. 오토바이 바퀴가 일으키는 먼지 구름이 오토바이의 형체를 덮을 때까지 쳐다보던 요한이 팀원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쿼르펠의 말마따나, 바다는 요한이 더 잘 알았다. 곧이어 혼란에 가득 찬 크리처가 떼 지어 올라올 것이다.


*


그륵, 끄르르, 피 끓는 그로울링이 검푸른 핏물에 둥근 파동을 만들었다. 꿈틀거리는 손톱이 여기저기 크랙이 생긴 아스팔트를 긁었으나 그것은 쓸데없는 발버둥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어떤 무의미한 발버둥일지라도 쿼르펠은 감히 크리처가 제게 반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서걱, 즉각적으로 움직인 검날이 크리처의 뭉툭한 손을 잘라냈다. 크리처가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으나 이미 기력이 다 빠져나간 상태로는 고양이만도 못한 포효였다. 발버둥이 멎었다. 그저 살아있는 것에 모든 힘을 다 쓰겠다는 양 오르내리는 덩치를 보며 쿼르펠이 얼굴에 튄 검푸른 피를 닦아냈다. 피가 지나치게 넓게 튀어 압축하지 못한 까닭에 온몸이 크리처의 피에 젖어 있었다. 불쾌했으나 혐오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이 피 냄새에 꼬여든 크리처를 토막 낼 생각을 하니 뱃속에서부터 만족감이 기어올랐다.

어쩌면, 폐허를 갈망하는 머저리 중 하나는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도라 내에 갇혀 있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쿼르펠은 자신이 목숨을 걸어서라도 배리어를 뛰어넘어 폐허로 달려나갈 것임을 알았다. 불쑥 치솟는 크리처를 향한 거대한 살심을 감당하지 못해 부엌 식칼 따위를 들고 설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느 등신 새끼들처럼 더 넓은 세상이 어쩌구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폐허에 서기를 바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검을 휘둘러 생명체를 끊어내기 위해, 목숨을 판돈처럼 내걸고 아비규환 속에서 기어코 살아남기 위해.

상념은 여기까지다. 검을 떨쳐내 피를 턴 쿼르펠이 손목을 움직여 납검했다. 가슴의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라이터를 튕기자 이윽고 익숙한 담배 연기에 입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치솟은 아드레날린을 강제로 눌러죽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후욱, 연기를 뿜어낸 그가 단조로운 걸음으로 오토바이쪽을 향해 걸었다. 점 같이 작은 오토바이를 향해 걷는 걸음마다 회색 재가 툭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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