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바로그

축하

조그만 행복


널찍한 사이즈의 거실소파에 앉은 두 사람은 예고되지 않은 조용한 파티를 하고 있었다. 숫자로 따지자면 두 번째 파티였다. 다만 이번엔 축하하는 대상이 달랐다. 본사에서 한바탕 늦은 시간까지 떠들썩한 파티를 마치고 난 뒤 은밀하게 열린 단 한 사람을 위한 파티다. 생일파티를 제대로 챙겨본 적이 언제냐고 애머디가 질문했을 때 일라이저가 고개를 가로저었기 때문이다.

애머딘 기가막히단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소소한 기념일이나 남들의 생일은 칼같이 챙기는 녀석이 제 것은 챙긴 적이 없어? 잠시 머릴 굴리는가 싶던 그가 마지막으로 내린 결론은 그럼 이쪽이 챙겨주는 수밖에 없나, 였다.

엄밀히 보면 애머디에게 그렇게 할 의무는 딱히 없다. 그럼에도 챙기기로 한 것은 애머디의 소소한 변심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거창할 것도 없었다. 그저 파티를 조금 연장할 뿐이니 케이크의 개수가 늘어나는 건 서류가 쌓이는 것보단 편했다.

" 감사합니다, 선배님. 매번 선물도 두개씩 챙기시느라 고생하시네요. "

선물이라고 준비한 것도 무난한 디자인의 디지털 알림 시계가 다였다.

" 그래 봤자 파티 흉내를 내는 정도지만 말이다. "

딸기가 올려진 전형적인 외관의 생크림 케이크를 자르며 애머디가 작게 덧붙였다. 이 케이크도 동네 앞에서 파는 시판 케이크이고.

파티의 피곤함을 줄이기 위해 축하 장소는 같이 사는 집으로 고정되었다. 다른 축객, 특별한 장식과 고깔 모조차 없는 조촐한 분위기였지만 초는 있었다. 정말 구색만 맞춘 파티이기는 하지만 캐롤 다음으로 생일 축하노랠 부르는 것은 생각외로 어색하지 않았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파티에 있을 때보다 약간 더 생기있는 표정을 지어주는 그를 감상하는 건 나쁘지 않은 경험이기도 하고.

제 그릇에 담긴 케이크 조각을 빤히 보던 일라이저가 다시금 감사를 전했다. 애머디는 담담히 답하며 다른 한 조각을 제 접시에 올렸다. 감사는 아까도 받은 것 아니냐고 일축하고 싶었지만, 생일이기도 하니 말을 줄였다. 애머디가 묵묵히 포크로 케이크를 찍어누른다. 단맛은 선호하지 않았으나 편식할 정도는 아니다. 사내 파티에서도 식사를 많이 한 것은 아니기에 케이크 한 조각 쯤은 거뜬했다. 기름진 크림의 맛을 혀끝으로 느끼면 시선이 반대편으로 자연스레 굴러갔다.

만족하는 표정인 걸까? 원체 불평하고 투덜거리질 않던 놈이니 가늠하긴 힘들었다. 이 행위에는 어떤 의미가 남을까. 잔물결이 일렁이면 애머디는 그를 무시하고자 케이크 뭉치를 마저 입에 넣고 으깼다.

다 비워진 깨끗한 접시가 나란히 싱크대 옆에 놓였다. 설거지는 제가 하겠다며 접시를 가져두는 녀석을 굳이 말리진 않았다. 그 사이 나는 남은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고 주변을 정리했다. 애초에 정리할 것도 많지는 않았지만.


떠들썩한 파티를 한 직후라 그런가 분위기는 그렇게 달아오르지 않았다. 케이크를 먹는 중에도 맛이나 가게에 대한 담소를 조금 나눴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다음에 케이크가게를 고른다면 포르티에란 곳도 괜찮다고 했던가. 잠시 검색해 보니 달지 않은 케이크 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미묘한 표정을 짓던 차 마침 똑같이 정리를 마친 일라이저가 와인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가볍게 마시기 좋은 와인을 내가 준비해온 탓이다. 뚱한 시선을 잠시 접고는 코르크 마개를 딴 뒤 양측의 잔에 알맞게 따라주었다.

음식은 가리는 것이 없던 일라이저니까 와인도 임의로 골랐다. 선물도 마찬가지. 평범한 딸기생크림 케이크와 추천받아 골라온 와인의 맛, 무난하게 쓸만한 선물. 과연 기호에 맞았을런지 의문이 남았으나 끝내 묻지 않는다.

찰랑찰랑 둥그런 자리에 들어찬 음료의 색은 투명했다. 전부 따르자 주저할 것 없이 서로 잔을 들고 부딪혔다. 칭, 하고 다소 둔탁한 유리소리가 울린다. 문득 그것이 우스워서 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 이건 결국 내가 만족하고 싶어서 연 파티에 불과하다만, 그래도... "

애머디가 문득 중얼거렸으나 문장의 뒷부분을 와인과 함께 삼켜냈다. 목소릴 들은 일라이저가 멈칫한 것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쭉 들이킨 고개를 내리며 천천히 시선을 마주하면 집중한 얼굴의 일라이저가 자리했다.

" 나름 재밌었어. 가끔이라면 남을 챙기는 것도 할만하다 느꼈다. "

이런 귀찮고 번거로운 절차를 자의로 밟게 될 일은 많지 않으리라. 적어도 애머디는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선물을 고르고 준비하던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더라 하더라도 다음번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목구멍 너머로 삼켜 희석된 말 너머엔 네게 다음을 기대하란 염원이 담겨있었다. 그대로 마셔버린 이유는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두번째 파티는 당초 계획한대로 꽤나 즉흥적이었고 소소한 분위기에 그쳤다.

지금부터 네 생일파티를 시작하겠다. 라고 케이크를 꺼내 들고 거실로 나왔을 때의 일라이저 표정은 볼만했지. 그러나 과연 그에게 감동적인 파티가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아까부터 불확실한 기분만 드는걸. 어쩐지 이유를 알 것 같아 애머디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비뚤게 꼬았던 자세를 조금 틀어 일라이저의 어깨를 시야 한켠에 담았다.

" 너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으니 부담 갖지 마라. "

말을 내뱉곤 곧장 시선을 떨어트려 와인잔을 소리 없이 매만졌다. 그러기도 잠시 다시금 애머디가 입술을 달싹였다. 영 마뜩잖은지 눈썹을 구부리기도 하면서.

" 그래, 친구라면... 이 정돈 해야겠지. "

실로 오랜만에 그가 진심을 덧댄 문장이었다.


코끝이 시리다. 과연 연말이라 그런가 바깥에 몇십 분 서 있었을 뿐인데 뺨이 얼얼해졌다. 필요한 것들은 전부 챙겼으니 됐나. 결이 예쁘게 짜인 목도리를 더욱 안쪽으로 여몄다. 방한효과가 특별히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쓸 때마다 마음이 든든해지는 물건이다. 곧 집에 도착한다.

철컥, 부드럽게 열쇠를 꽂고 집안에 들어갔다.

다녀왔다는 인사에 반응이 한 박자 늦어진다. 저쪽도 바쁜 모양이군. 안쪽에선 어쩐지 향긋한 냄새가 공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크림스튜라도 만드는 걸까? 가벼운 의문은 접어두고 챙겨온 짐 더미를 거실 한 쪽에 두고 정리한다. 반듯하게 포장된 상자가 하나, 둘... 서너 개가 넘어간다. 좀 많은가 싶지만 괜찮겠지. 이래 봬도 실속있게 사온 것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정리하던 애머디가 조금 있자 허리를 폈다. 

짐풀기를 끝마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부엌에 들어선다. 그러자 딱 몸을 돌리던 일라이저와 마주쳤다. 허둥대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나가기 전보다 훨씬 다양한 재료가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걸 보면 그새 많은 걸 준비한 듯했다. 마주 선 채로 한동안 각자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다 서서히 몸을 맞댔다. 따끈하고 기분 좋은 감촉이 피부 결에 닿자 애머디가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 좀 녹이시는 게 좋겠어요. "

곧 일라이저가 양손을 꽉 잡아 끌어안은 채 애머디를 놓지 않는다.

" 요리는 괜찮은가? "

약불에 졸여지는 스튜나 깔끔하게 다듬어져 싱싱해 보이는 채소들을 눈에 담으면서 애머디가 부러 물었다. 그리고 약속된 것처럼 그가 당연하죠, 라고 답한다. 걱정거리가 전혀 없다곤 할 수 없지만 침울한 마음보다는 고양된 기분이 차오르는 밤이다. 

찬 공기가 폐를 들어찼던 게 거짓말처럼 뼛속까지 단숨에 홧홧해졌다. 어쩌면 밖에 있을 때보다 더 뺨이 발개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대로 품에 몸을 맡기면서 애머디가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았다. 바깥도 난리다. 낮에도 같이 봤지만, 밤이 더한 것 같다. 예약한 물건을 받을 때도 정신이 없었다. 날씨는 또 얼마나 매섭던지. 장갑보단 사람이 훨씬 낫다. 덕분에 감기들진 않을 것 같아 안심이다. 손이 풀리면 부엌일도... 애머디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어간다.

" 네, 그럼요. 조금씩 쉬면서 합시다. "

간간히 부드럽게 대답하던 일라이저가 제 머릿결을 만지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등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끼면 포근히 허리를 감싸던 손이 어느새 제 뺨에 올라와 있다. 제법 차게 식은 내 얼굴과는 다르게 적당히 미적지근 한 것이 기분 좋다. 이런 것은 원래 일라이저가 자주 하던 것이지만, 가끔은 나도 괜찮으려나. 뺨에 닿아있는 손으로 고갤 돌려 매끄럽게 입술을 포갰다. 촉촉한 울림이 나직하게 들리면 흘끗 일라이저의 눈빛을 살핀다. 움찔하는 몸짓이 잠깐 놀란 듯 보였다. 그를 짓궂게 바라본다. 깨무실 줄 알았는데. 매번 그러면 재미가 없지. 실없는 농을 주고받으며 희희덕거리자 금세 추위가 씻겨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키스를 짧게 나누고 몸을 떼면 일라이저가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놓아준다.

충분한 충전을 했으니 다시 파티준비에 힘쓸 타이밍이다.


가지런히 테이블에 나열된 음식들을 한눈에 지켜보던 애머디는 샐러드부터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음은 스튜에 빵을 조금씩 찍어 먹었다. 모두 훌륭한 맛이다. 흡족한 듯이 입가를 끌어올리면 반대편의 일라이저도 마주 웃는다.  

"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네요. "

" 예상한대로였다. 음, 아니지... 오늘 기분은 예상을 뛰어넘는군. 알겠나? "

애머디가 툭툭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 네, 만족하신 것 같아 기쁩니다. "

그에 화답하듯 일라이저도 팔꿈치를 테이블에 걸치고 환하게 웃었다.

짧은 대화를 마치면 다시 식사에 집중한다. 인원수에 비해 화려한 감은 있지만 그렇다고 성대한 만찬까지는 아닌 조금 기합이 들어간 저녁식사였다. 배경음악으론 잔잔한 재즈를 틀어두었다. 식사가 끝나면 곧 캐럴로 바뀔 예정이다.

창문밖 풍경은 늘 그랬듯 하얀 솜에 덮여 고요했다. 날이 춥다고 투정부리긴 했지만, 막상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오지 않았으면 섭섭했겠지. 기분의 문제라고 할까. 눈앞의 이와 함께하는 크리스마스가 언제나 완벽하길 바라는 그런 마음.

이전까지는 아주 약간 신경 써야 하는 날에 불과했지만 이젠 다르다. 

선물에 담긴 의미도 함께하는 시간의 가치도 모든 것이 더욱 무거워졌다. 쌓아졌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유대는 두터워질수록 더욱 단단해지고 견고해져서 결코 무너질 수 없는 튼튼한 집이 된다. 만약 문 너머에 있는 것이 혼자라면 쓸쓸했겠으나 지금 우리는 같은 문 안에 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으며 그런만큼 돌아올때 반겨줄 수 있는 보금자리. 그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건 분명한 행운이자 행복이다. 벌써 몇 년을 맞이하고 축복하였을까, 말로 담지 못할 만큼 다사다난하였고 복잡한 사건들을 겪어왔다. 무언가는 버려지고 또 어떤 것은 새로 생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형태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앞으로도 이 연결고리가 쉽게 끊어질 일은 없으리라.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커진다. 양손에는 밀크티와 카페라떼를 손에 든 채 일라이저가 허리를 굽히면 그의 뺨에 키스하며 머그잔을 받아든다. 책상에는 서로가 준비한 선물상자가 펼쳐져 있었다. 애들처럼 손짓이 분주하진 않았으나 들뜬 기색은 적게나마 서려 있다. 내가 준비해온 것은 서로의 이니셜이 박힌 만년필이다. 동봉된 편지지나 잉크색도 물론 고급진 것들로 고려해 맞추었으나 손이 조금 떨려온다. 이번에도 부디 네 기대에 충족했길 바랄 뿐이다. 

선물을 개봉하고 감상을 나누는 차에 시간이 흘러 적막이 짙어졌다. 그림자는 어둠으로 바뀌고 희미했던 빛은 서서히 짙은 색을 뽐내기 시작한다. 은연중에 시계로 눈을 돌리면 아니나 다를까 달빛이 선연한 시간대다. 걱정되는 눈빛을 숨기지 않은 채 애머디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 졸리진 않나? 슬슬 피곤해질 때도 됐지. "

하루종일 분주하게 움직인 것을 안다. 서로가 오늘을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는지도. 만반의 준비를 마친 만큼 파티의 종막이 내려올수록 그간의 피로도 같이 몰려왔다. 난로의 불빛이 사그라지지 않고 타닥타닥, 기척을 뽐낸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래 시선을 끌진 못했다. 몸을 돌리려던 애머디를 일라이저가 한가득 끌어안았고, 그 상태에서 괜찮으니 잠시만 더 이렇게 있자고 웅얼거리는 연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애머디의 머릿속을 꽉 채운 탓이다.

그렇담 어쩔 수 없지. 애머디는 마주 등을 토닥이며 그 품에 고개를 묻었다. 어찌하겠는가. 세계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이가 품에 안기는 걸 거부할 방법은 없다. 그대로 나른하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에 몸을 맡긴다. 흠뻑 온기에 젖은 표정을 짓던 애머디가 문득 떠오른 문장을 중얼거렸다.

Happy birthday, my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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