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남 - 대중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로맨스판타지 장르의 독자 성향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몇 번이나 얘기해서 알겠지만 로맨스판타지 독자층은 연령대가 다양하고 취향의 폭이 넓지만 동시에 대부분이 여성이기에 두드러지는 특징도 있다. 여성독자들은 작가와 작품에게 다른 장르보다 더 높고 단단한 도덕적 잣대를 요구한다. 당연하지만 이 때문에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는데 먼저 주인공 캐릭터에 한정 시켜 얘기하자면 주인공은 어쨌든 선량해야하지만 그 선량함 때문에 손해를 보는 호구는 아니어야한다. 주인공이 욕망하는 범주 또한 극도로 개인적이다. 개인의 부유하고 안온한 삶이 전부다.

이런 주인공 캐릭터를 대중이 원하는 것 자체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데에는 돈이 들고 일상의 불합리를 바로 고치는데에는 지난한 노력과 번거로움을 넘어 때론 생계의 위협까지도 받는다. 그러니 좀 적당히 살고 싶은 게 보통 사람의 평범한 마음가짐이다. 아예 눈 딱 감고 나쁜 사람이 되긴 싫지만 그렇다고 직접 싸워서 다 고쳐나가기에는 피로감이 심하니 적당히 대응해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찬사 받는 세상이 보고 싶다고 도피하는 것 쯤이야, 이해 못 할 정도도 아니다.

이러한 욕망에 기반해 나온 결과물이 요즘 유행인 '나는 악녀고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모두를 구원해버렸고 모두가 나한테 집착하네 꺗☆' 스타일의 자칭악녀형 주인공이다. 사실 이런 주인공은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라 특별할 게 없긴 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데 어쩌다보니 모두가 좋아하는 뭐 그런 게으른 흐름 자체는 옛날 옛적부터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로맨스와 로판에서는 다른 장르와 달리 안티 히어로형 주인공이 정말 없다는 점은 특이하다. 물론 안티 히어로형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제멋대로 폭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는 7살 남자아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어지간 하면 메이져 성향으로 올라가지 않는 편인데 한동안 판타지와 무협에서 흥했단 점도 특이하다면 특이한, 그리고 한심한 일이다... 

자칭악녀형 주인공이 특별할 건 없다지만 서사에 로맨스 장르의 특성이 섞여들어가며 집착남 코드가 흥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장르에서 연인간의 사랑은 성욕의 대체어거나 성공을 묘사하는 일종의 액세서리, 지위의 상징물 등으로 묘사되는데... 왜 여성향에서는 사랑이 집착으로 묘사되느냐에 대해서 한번 진지하게 얘기해보자. 

집착남 코드가 인기 있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대중이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보고 반발감이 먼저 들지도 모르겠으나 현실이 이미 그런 걸 뭘 어쩌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을 대중은 이미 은연중에 받아들이고 있다. 사랑은 너무도 변질되기 쉬운 감정이고 오랜 세월을 거쳐 지나치게 미화되었기에 대부분의 경우 변명으로 쓰이는 걸 목도하며 자랐고 때로는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도 그럴 게, 여성은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인생 난이도가 크레이지 하드 모드다.

무례하다는 이유만으로 목이 날아가지 않는 위대한 문명사회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여성에게는 그 문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습을 주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매일 같이 쏟아져나오는 뉴스 중에서 여성이 자기랑 안 사귀어 준다고(더 정확히는 지랑 섹스 안 해준다고) 협박, 폭행, 감금, 납치, 가택 침입에서 토막살인까지 다양한 버라이어티를 보여주는 범죄자 놈들이 주변에 널려있다. 

무슨 러시안 룰렛도 아니고 별 어이 없는 이유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중 살해당할 확률이 존재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연애를 하면 거기서 더 살해당할 확률이 올라간다. 안전이별이 왜 생긴 말이겠는가.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여성은 가장 취약하고 영향도 많이 받는 유년기에 어떤 가족에게서 태어나느냐는 운에 따라 기본적인 보호는 물론 정서적 지원과 재정적 지원마저 받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남들이 볼 땐 참 남 부러울 거 없겠구나 싶은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도 사실 까보면 여자아이만이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건 전세계 공통이라 미국의 수도 없이 많은 여성 연예인들부터 저 중동 지역의 왕가에서 난 공주들이 자유롭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다 약물에 취해 강제로 결혼당해 공식 석상에 인형처럼 세워놓은 형태까지 예시가 아주 지나치게 다양하다. 

그렇기에 여성 독자들은 웹소설에서 매우 적극적인 형태로 모든 종류의 현실 도피를 받아 삼킨다. 사랑은 하고 싶은데, 막상 하자니 이것도 저것도 다 지뢰 같아서 직접 밟기도 피곤해질만하지 않은가. 어쨌든 지금 당장 억압과 폭력이 산재해있는 현실에서 도피하고는 싶지만 여성은 도피 자체도 비난 받지 않도록 안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기방어적 심리와 자기검열을 통하다 보니 주인공의 욕망이 흐리멍텅하더라도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욕망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이러한 적극적인 현실 도피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발달한 게 집착남 코드와 가족부둥물 코드다.

가족부둥물 코드가 흥한 이유는 그냥 이게 이유의 전부다. 그냥 일상에 널려있는 적대적 환경으로부터 안전하기라도 하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받고 싶은 독자층이 있기에 이 코드가 흥했다. 어린아이를 보호할 이유는 그저 어린 개체기 때문에 충분하지만 여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종류의 지원과 보호를 가족과 사회로부터 공평하게 분배받지 못한다. 여아낙태로 아예 태어나지도 못 하거나, 자라는 내내 체형을 빌미로 식단을 통제 받는다거나, 아이가 많은 가정이든 적은 가정이든 여자아이는 집안일을 도울 것을 요구 받거나, 여자애한테 왜 그런 게 필요하냐는 말로 학업이나 스포츠, 더 자잘하게는 취미 영역까지 통제받는다. 

특히 이 통제를 통한 학대는 그 뿌리가 깊다.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않고 자란 사람이 있을까.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가족부둥물 코드 내에서 묘사되는 화목한 가정상은 엉망진창이다. 화목하다는 게 어떤 건지 대중이 영 갈피를 못 잡다보니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보통은 입양을 통해 편입된 주인공을 오냐오냐 해주고 과보호를 한다. 

사실 대부분의 웹소설에서 새로운 여주의 가족들이 여주를 대하는 행동 양상은 과보호라 부르고 끝낼 게 아니라 물화이자 행동통제라서 매우 유해하지만 이게 오히려 욕망의 대상이 되어 대중에게 먹히는 건 그만큼 현실의 여성들은 불안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대중이 가족들끼리 나누는 애정을 겪어본 적도 전적으로 신용하지도 않기에 이 코드는 흥할 수 있었고 더 슬픈 사실은 이게 해외에서도 먹힌단 사실이다. 여성인권에 국경도 인종도 상관 없다는 반증이라면 반증이다.

집착남 코드도 가족부둥물과 마찬가지로 큰 맥락에서 벗어나진 않는다. 매번 강조하고 있지만 웹소설 시장 내 모든 장르의 공통된 정서는 현실 도피다. 고로, 주인공이 남자와 연애를 하긴 해야겠는데 이성 간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으니 사랑보다 더 확실한 관계성을 원하게 된다. 그렇게 나온 답이 바로 '개인적 구원에 대한 집착'이다.

그럼 이 구원에 대한 집착이 어떤 식으로 사랑을 상회한다고 묘사하는지 나열해보자. 집착남 코드 속 남주들은 보통 여주가 구출 해주거나 잘 대해줬다고 홀랑 반해서 처음엔 말랑말랑하게 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변 인간들에겐 한없이 제멋대로거나 적대적/비사교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 편이고 여주가 모종의 사정이 생겨서 일시적으로 연이 끊기기라도 하면 여주 한정이었던 정상인 코스프레마저 때려친다. 이때부터 벌이는 행각의 범주는 상당히 넓다. 부드러운 방식이지만 그래봤자 감금이고, 주변인의 안위를 두고 협박한다던가... 그나마 말랑말랑한 수준이 스토킹인 경우가 흔하다.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사랑을 집착욕과 소유욕, 독점욕으로 표현하는 거다.

그럼 여기서부터 진짜 문제인, 이 집착에 대한 미화로 현실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언급해보자.

솔직히 말해 이런 집착과 구원에 대해 낭만화 하는 걸 보고 있으면 뱃속 깊은데서부터 쓰려온다... 생존을 위해 가출 형태로 도망치는 여성청소년을 꾀어내기 위해 범죄자 집단이 제일 자주 써먹는 게 유사가족 관계와 연인 형태인 걸 짚고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랜 기간 형성된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자신의 거처에 불러들이고 나면 감금을 기본으로 폭행이나 성폭행, 지원을 통한 가스라이팅 등의 방법으로 길들여 착취하는데 그들은 진심으로 이 범죄자들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현실에서 이런 케이스는 조기에 구조가 이뤄지기 정말 극도로 어렵다. 캡쳐본딩(Capture-bonding)이라고 하는 가설적 구성 개념이 있다. 스톡홀름 증후군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이해할 텐데 아무리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관계여도 그 영향 아래서 장기간 노출되어있으면 자신의 학대자에게 의존해버리는 일종의 유대 관계가 형성이 된다. 당연하지만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런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심각한 학대를 당하던 당사자가 신뢰를 얻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하기 힘들어하는 이유가 이러한 유대 관계일 때도 있다.(전부는 아니다, 전부는.) 

더 심플하게 설명하라면 학대를 받고 있음에도 자신은 사랑받고 있다며 구조를 거부한다는 소리다. 학대를 당하는 사람은 자신감도 자존감도 차곡차곡 박살나 의존을 하지 않고선 생존 자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판단력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학대로부터 탈출할 기회가 와서 자신이 선택만 하면 벗어날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활동가가 만들어줘도 학대 받던 당사자는 이를 자신을 속이거나 시험하려는 학대자의 술책이 아닌가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가장 먼저 이들을 돕는 활동가에게도 이런 점은 전혀 달갑지 않다.

2011년 아이티에서 지진이 났을 때 파견된 유엔평화유지군과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이 지원물품을 빌미로 아동성매매를 강요한 사건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긴 하지만(역겨운 이야기지만 진짜다...) 아이티 사람들에게 대가 없이 주라고 기부해서 돈과 물품 쥐어줬더니 그거 나눠주고 아니고는 지가 한다고 도움받아야할 아이에게 성교를 강요하는 꼬라지를 보라. 

아동성범죄자들은 직업을 고를 때 아동에게 접근이 용이한지만을 고려해서 직종을 선택한다. 이 말인 즉 학교와 학원의 선생처럼 돌봄과 학습에 관련된 직종이나 복지, 봉사 관련한 직종에도 널려있다.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을 단체 내에서 바로 잡아내는 건 매우 힘든 일이고 그렇기에 고용을 해서 책임을 물리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국내라고 이런 인간이 없을 것 같은가? 당연히 있다. 괜히 활동가들이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가정 내 성폭력 때문에 도망치고 싶은 상황이라면 정부시설에 들어가는 걸 가장 먼저 권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아까도 말했듯 대부분의 여성 가출청소년의 경우 범죄집단의 넘버 원 타겟이라 까딱 잘못하면 성매매 시장으로 인신매매 당한다. 관련한 논문이나 책도 꽤 나왔지만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인신매매 당한 당사자가 아닌 성구매남을 조져야하는데 못 조지고 있으니 고쳐지질 않는다. 당장의 현실이 이러니 그나마 정부시설이 베스트다. 정부시설은 여자가 됐든 남자가 됐든 고용할 때 무조건 성범죄 이력이 있는지 확인하기 때문에 약간 더 안전하다. 

그렇기에 제정신이 박힌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도움을 요청해온 사람들과 사적인 관계를 일절 가지지 않으려 한다. 이쪽이 활동가나 당사자 모두에게 낫다. 그렇지만 도움을 요청한 당사자들은 이런 활동가들의 반응을 굉장히 고통스러워한다. 당장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에게서 제도적 지원 말고도 정서적으로도 지원받고 싶어하고, 갖은 미디어에서 '구원'을 미화하기 때문인데 그런 건 할 수도 없고 해도 안 된다. 타인과의 성애적 관계는 절대 구원이 될 수 없다. 현장에서 하고 있는 구조는 기계적이어야 오히려 가장 안전한 거다. 

이런 거지 같은 현실을 트라우마 상태인 피해자들에게 설명하기조차 난감한 일인데 그 난감함을 극복하고 설명한다해도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다 보니 활동가와 유대/성애적 관계를 맺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들 때도 있는데 때로는 스토킹 범죄를 저지르거나 협박, 자해, 자살 시도까지도 간다.

타인이 해주는 손쉬운 개인적 구원에 대한 미화는 이런 형태로 현실에 영향을 준다. 

이해는 한다. 백날천날 이런 유해성을 지적해봤자 대중 문화 코드 안에 있는 유해한 낭만화가 깨끗하게 사라질 리도 없고 사회적으로 학습된 낭만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긴 하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런 선택을 하고 마는 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나 기본적인 인식이라도 바뀐다면 상황은 지금보다 나아질 테다.

사랑은 절대 독점욕이나 소유욕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독점욕이나 소유욕으로 사랑을 포장하는 건 결국 당사자인 여성에게 가장 유해하다. 독점욕이나 소유욕으로 표출되는 요소들은 기실 살펴보면 범죄의 전조다. 행선지를 지나치게 캐묻거나 일상의 스케쥴을 전부 파악하려 든다거나 핸드폰의 비밀번호를 못 참는다거나 직업을 그만두게 하는 것 모두 폭력이고 통제며 당사자를 고립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시그널을 빠르게 잡는다면 그나마 상황이 악화하기 전에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생기는데 설마 아니겠지, 괜찮아지겠지, 사랑해서 그러는 거겠지 하고 넘어간다면 정말 심각하게 위험해진다.

쉽게 넘어가면 안 된다. 가정폭력 생존자와 전쟁포로의 트라우마 분류가 같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보통 모른다.(가볍게 언급만 할 수밖에 없는 이 글의 특성상 이 부분에 관심이 간다면 정신의학자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란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사실 이 두 폭력의 양상은 따져보면 매우 흡사하다. 생존 자체가 타인의 의사에 달려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긴장하며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해야하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더라도 단순히 재미나 화풀이를 빌미로 생존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폭력은 개인의 자아를 무너트릴 정도로 압도적인 강도로 가해진다. 가정폭력만이 아니라 강간, 가정내 성폭력도 마찬가지다. 단지 가정폭력과 강간, 가정내 성폭력의 경우 전쟁포로나 자연재해, 사고로 인한 PTSD와 달리 이 사회 내에서 침묵하길 강요당하기에 잘 안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유명인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용기를 내 고발하면 꽃뱀이란 소리가 척추반사처럼 튀어나오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 드디어 이걸 설명할 기회가 왔으니 왜 피해자(victim)란 단어 대신 생존자(survivor)란 단어를 요즘에는 쓰는지도 약간 덧붙이고 싶다. 첫번째로는 그들이 그런 극도로 적대적 환경 속에서도 살해당하지 않고 생존했기 때문이고 피해자란 말로 인생을 정의당하고 싶지 않다는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PTSD는 이제 충분히 알려진 증상이나 PTG(post-traumatic growth)는 아직 그렇지 않다. PTG는 PTSD를 겪고 난 후에도 충분히 회복해 과거보다 더 성장한 상태를 이르는데 이 부분을 주목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때로는 어떤 불행을 포르노로 소모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나 정작 그 불행에서 생존한 이들은 더 강하고 훌륭하게 발전해나간다. 아동학대가 그렇고 가정폭력이 그러며 강간과 가정내 성폭력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당한 폭력이 불합리하기에 맞서 싸우길 선택한 사람들은 폭력에서부터 벗어나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을 보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고 방지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2차 가해도 이젠 낯선 개념이 아니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존자들에게 지금 당장은 힘들고 막막하더라도 당장의 고통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런 길도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우리 곁에 조금 더 많은 생존자들이 생겨날 수 있다.

그렇기에 바라는 바는 하나다. 19금을 달아달라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BL에서 그렇듯 작가의 코멘트가 붙어있으면 좋겠다. 성애적 관계를 통한 구원은 현실의 범죄 때문에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박아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그리 해가 될 리도 없다. 현실에서 이런 관계를 찾으면 안 된다고 말해서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사람은 이미 위험한 상태에 접어들어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길 힘들어하는 거니 말이다.

사랑은 폭력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당신에게 사랑의 정의는 무엇인가? 

사족 1. 포스타입은 시리즈의 설정을 정기적으로 리셋하는 건지 뭔지 모르겠으나 상당히 귀찮을 정도로 빈번하게 시리즈의 설정이 날아가 있어 글을 올리기 전에 영 번거롭다. 이유를 아시는 분은 모쪼록 알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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