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판의 기본 세계관은 정말 구린 걸까?

로판이라는 장르 내에서 흔하게 통용되는, 일명 '디폴트 세계관'을 떠올릴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세계관을 떠올릴 것이다. 

엘프, 오크, 드워프, 용, 요정, 정령 뭐 이런 인외종족도 있고 마법이니 신성력이니 검기니 있는데 기본이 서양 문화권이라 여성은 일명 공주님 드레스를 입고(여성은 대충 르네상스 언저리의 패션이지만 남성은 빅토리안 어드메부터의 근대 의상이다. 누구도 쫄쫄이를 입은 남자를 사랑할 수 없으니 이건 당연하다.) 풀 플레이트 아머나 제복을 입는 기사가 존재하며, 암만 그래도 너무 피곤하고 추레하게 살긴 싫으니 과학 대신에 마법이 그 기능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사람 한 명이 산을 없애는 정도의 화력을 가지고 있다 보니 전쟁으로 인한 소모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사교계를 통해 어느 정도 서로를 견제한다. 대부분 제국주의 국가로 설정되어있는 편이라 당연히 전제군주제지만 간혹 시대 배경상 근대에 가까워도 시민운동이나 혁명 얘기는 잘 없다. 가끔 가다 혁명이 나오긴 하는데 대부분이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혁명 얘기가 나와?' 할 사람이 있겠지만 의외로 공화주의자 얘기가 주 소재는 아니어도 언급 자체는 드문찮게 나오는 판타지에 비해 로판에서 이런 공화주의자 얘기가 정~말 드물어서 그렇다. 한국의 장르 문학의 기반을 닦은 전민희 작가님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에도 공화주의자는 나온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선 한국 장르소설에서 공화주의자는 나름 뼈대있는 전통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데(!) 후대의 여성 작가들이 기피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 지는 않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면 지면이 너무 길어지니 다음 기회에 얘기하겠다. 

여하튼 최근 연재 작품 중 혁명 소재가 가장 흥미롭고 뛰어난 작품은 역시 유안나 작가의 '펜들턴 혁명'이다. 평범한 작품에 질렸다면 반드시 한 번 읽어보길 원한다. 혁명이라며 역성혁명이 나오면 미적지근해지는 사람이라면 두번 읽어라. 내게 로판에 다시 애정을 갖게 해준 작품을 꼽으라면 이 작품을 꼭 얘기해야 할 정도다.

자, 얘기를 돌려서 이 로판의 디폴트 세계관을 살펴보면 사실은 판타지의 디폴트 세계관과 겹치는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판타지에서도 패션은 대충 르네상스 언저리고, 인외종족이나 마법, 신성력에 대한 설정도 로판과 대단히 다를 것도 없다. 

사실 천천히 생각해보면 이건 당연한 일이다. 애초 로판이 판타지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탄생한 장르고 대중의 욕망을 반영하는 장르의 특성상 대단히 기발한 발상이 쉽게 '디폴트'로 받아들여질 리도 없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대중의 욕망엔 어느 정도 저속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장르 내에서 디폴트 세계관을 조명하는 지점이 다르다보니 어떤 방식으로 어디가 부각되는지가 달라서 그닥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로판에서 주로 조명하는 부분은 시각적으로 즐겁도록 화려한 묘사에 힘을 준 부와 주변인으로부터 사랑 받는 주인공의 모습, 연애 관계에 집중되어있고 판타지에서 주로 조명하는 부분은 한 번에 산 하나를 날리는 정도의 무력과 주변인으로부터의 인정, 어디 가서 꿀릴 게 없는 권력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가 장르에 따라 추구하는 대리만족의 형태가 살짝 다르다보니 장르마다 그 특징들이 일종의 세부화 된 코드로 진화하는데 다른 장르에 비해 로판의 코드는 로맨스의 영향이 강하다. 로맨스가 여성들을 위한 장르라고 기본적으로 꼽히다 보니 그런 것도 있고 집착남 코드에 대한 글에서 언급했듯 연애는 하고 싶지만 안전하고 싶다는 욕망 때문인데... 기본 문화권이 서양이 된 이유도 그렇다.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는 선명하지만 한국 사회의 구린 점에 신물이 나있기 때문에 굳이 한국에 국한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거니와 작가가 좀 더 크게 동양 문화권으로 설정해도 어쨌든 서양보다는 가깝게 느껴지다보니 자연스레 현실을 연상하게 되는 게 싫어서 그렇다.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해도 주인공과 연인이 되는 남자 주인공이 한국인보다는 외국인을 선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남성을 연인으로 설정했다가 몇대 손이니 제사니 시집살이 어쩌고 언급이라도 하면 비명을 지르며 책을 내던져버리는 독자가 대다수다. 덧붙여 판타지에서 외국인 설정의 여성 주인공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맥락이 틀리다. 애초에 처가와의 관계까지 갈 것도 없이 연인관계만 하더라도 판타지에선 어떻게 다뤄야할지 모르는 작가가 태반이고, 작가가 다룰 줄 알아도 독자의 성향이 인셀에 가까우면 못 먹고 기어코 뱉는다. 이 모양인데 여성 주인공이 외국인이라 해서 그로 인한 관계성이나 설정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직설적으로 말해 남성향에서 말하는 여성 주인공의 조형은 대체로 어떤 외형의 트로피인지 따지는데에 가깝다. 그나마 요즘엔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다. 

그럼 여기서부터 심화한 얘기 해보자. 같은 서양 문화권 배경인 판타지 장르와 로맨스판타지 장르에서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는 역시 후궁제를 꼽아야 한다. 더 정확히는 로판 내 세계관이 크게 둘 중 하나로 나뉜다고 볼 수도 있다. 후궁제를 채택하거나 사교계를 채택하는 걸로 말이다. 물론 딱 떨어지는 게 아니라 후궁제가 있음에도 사교계에서의 영향력으로 다툰다거나 하는 식으로 진행되기도 하는데 이 또한 기본적으론 후궁제로 본다. 아무래도 작가도 독자도 한국인이다 보니 동양 문화권 특성이 섞여들어간 것이라 볼 수도 있는데 사실 동양의 후궁제와 서양의 사교계는 양립하기가 힘든 걸 모두가 알고 있긴 하다.

이 부분을 많은 작가들이 간과하는데 기본적으로 결혼에 대한 인식은 종교에 굉장히 종속된다. 서양은 결혼은 신 앞에서 하는 약속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영향이 굉장히 강하기 때문에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두고, 권력자라 해서 바람을 피거나 정부를 둔다 해도 그들의 애인이나 정부에겐 아무런 제도적 권리를 주지 않는다. 정부에게서 본 서자에게 또한 마찬가지다. 괜히 영국의 헨리 8세가 이혼하고 싶어서 청교도를 발명한 게 아니다. 

그나마 서양에서 동양의 후궁제와 비슷한 쪽을 꼽으라면 불륜이 문화나 다름 없는 프랑스(인종차별적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프랑스 문학이나 영화를 접하다보면 정말 지겹도록 나와서 달리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일 텐데 으레 그렇듯 왕의 결혼은 정략결혼으로 하고 정부를 두긴 하지만 그 정부는 미혼의 여성이 아니어야 해서 일단 결혼을 시킨다. 그리고 정부의 명목상 남편을 슥삭 하든 이혼을 시키든 아니면 그냥 영지에 처박아두든 하고 신나게 바람을 피워댄다. 어쨌든 결혼은 신성한 것이라는 명제를 함부로 깰 수는 없으니 이런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게다. 

또 동양의 후궁제와 달리 자신의 정부에게 왕이 가진 권한의 일부를 나눠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마담 퐁피두르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18세기 프랑스의 모든 예술과 철학은 퐁피두르의 영향 아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가는 물론이고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주의자들도 마담 퐁피두르의 살롱을 드나들었고 당시 프랑스 귀족들이 지금 마담 퐁피두르는 국무총리의 일을 하고 있다고 항의할 정도였는데 마담 퐁피두르가 루이 15세에게 하사 받은 엘리제 궁은 지금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다. 뿐만 아니라 외교에서도 당시 마담 퐁피두르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7년 전쟁과 관련된 자료를 참고하면 좋다. 

반면에 동양에선 서양만큼 종교가 권위를 내내 가지고 있지는 않고 가문과 가문 간의 결합과 견제를 더 효과적으로 발휘할 방법을 찾다보니 후궁제라는 형태가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뭐 어떤 때는 특정 종교가 상당히 강했다가도 왕권 엎어지면서 같이 엎어진다거나 다른 종교들과 함께 묶여서 왕권신수설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견제당한다거나 해서 특정 문화권 내에서 풍습으로 흔적을 남기거나 시대에 따라 탄압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동양에서는 결혼에 그렇게까지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종교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는 상당히 애매하다. 이 부분이 많이 아쉽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동네지만 개신교도가 유난히 설쳐대고 서구에 대한 미묘한 동경 때문인지 기독교스러운 종교의 형태가 작품에서 은연 중에 나오기도 하는데... 고증을 지키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좀 더 자유로워도 좋다는 소리가 하고 싶다. 

로맨스 성향이 짙지 않으면 안 팔릴 거라고 생각하고 보수적으로 묘사하는 것까진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기독교 색채를 띄게 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종교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곤 하지만 동시에 타 종교에 대해 가장 배타적으로 구는 게 기독교, 특히 개신교다. 굳이 그런 특정 종교의 구린 일면까지 도피처로 만든 세계관이 답습해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런 점을 가장 크게 체감하는 게 '성녀' 코드다. 물론 마녀라거나 악마, 마족도 일부 포함되긴 하지만 제일 구리다고 느끼는 게 성녀 코드라 대표로 꼽았다. 

성녀는 그 종교의 직위 체계 안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 성녀는 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이유가 특별히 있는가? 종교 최고 지도자의 명칭이 '성녀'인 거라면 여성이라는 단어가 최고의 형용사가 될 수 있는 사회상인가? 여성도 사제가 될 수 있게 하자는 논의 자체도 나온지 오래 되었는데 굳이 성녀에 대한 로망을 옛날 방식 그대로 키울 필요가 있을까?

사실 이런 식으로 성녀 코드가 흥할 수 있었던 건 신성을 위시해 일반 대중으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권력을 확보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권력의 속성이 무엇인지 권력이 발생하는 구조가 무엇인지는 어렴풋하게 짐작만 하고 있기에 오히려 성녀 코드를 채택한 작품은 쉽게 루즈해지기 마련이다. 사소한 부분에서 디테일을 살리는 것만으로 작품의 질이 높아지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적한 부분에 대해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호쾌하게 비틀어낸 대가로 히트 친 작품이 바로 태선 작가의 '치트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판의 디폴트 세계관은 전혀 구리지 않다. 주인공이 여자라도 이런 세계관에서 모험을 하거나 강해지거나 돈을 벌 수도 있고, 사교계를 휘어잡거나 아니면 권력의 정점에 설 수도 있다. 단지 만들어진지 워낙 오래된 세계관이다 보니(근원을 따지면 톨킨까지 올라가야 한다...) 미소지니가 덕지덕지 붙어 구린 면모가 있는데 이걸 굳이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쓸 필요가 없음을 지적하고 싶다. 

물론 요즘은 과거와 달리 여성이 황제가 된다거나 하는 약간 나아진 면모도 드문찮게 발견할 수 있다. 작위가 있는 여성 캐릭터나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여성 캐릭터도 조금씩 늘어나는데에 반가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제는 여성 캐릭터로도 권력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구해도 되지 않나 싶다. 이미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일원으로 살면서 투표로 최고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고, 어떤 방향으로 권력이 움직이면 좋은지 내심 알고 있잖은가. 어차피 하는 현실도피가 현실의 스트레스 유발 요인을 굳이 그대로 가져와 기존의 억압 안에서 가부장제에 종속되거나 성애적 관계를 통해 사적인 구원 받을 거라는 약속을 애써 믿어볼 필요는 없다. 이런 디폴트 세계관에서도 로맨스에만 치중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현실에 충실한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작가라면 세계사와 각국의 이런 저런 문화들을 공부해보길 권한다. 아는 게 많다면 쓸 수 있는 이야기의 바운더리가 어마어마하게 넓어지기 마련이니 완벽하고 싶단 맘에 너무 겁부터 먹지 말고 이것저것 배우고 조금씩 자잘한 시도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천의얼 작가의 '램프의 아미나'도 우리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페르시아 문화를 상당 요소 섞었지만 꾸준히 입소문 난 덕에 히트치지 않았는가.

이 글은 여기까지 해 두고 다음엔 치트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볼 생각이다. 그럼 이만 줄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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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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