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 델루치 Cesare Dellucci

Cake

여러 빛깔로 찬란한 길거리를, 그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심해 by L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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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ground Music

HONNE - free love


맑은 종소리가 북적이는 시내에 울려 퍼진다.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목소리와 작년 즈음에도 들은 적 있는 캐롤이 섞이고, 오색의 조명이 푸른 나무를 휘감아 반짝거린다. 짙은 어둠만 내려앉던 돌담길조차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간다. 인색하던 누군가의 창가조차 난로의 따뜻함이 비치는 시기. 한숨마저 흰 입김으로 화해 오르는 계절. 몇 번이나 반복하고, 반복할 하얀 겨울의 한기가 다시금 뺨을 간질이면, 이제는 잊고 살 만큼이나 오래된 흉을 슬그머니 눌러본다. 새삼스럽게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언제는 칭얼거리던 작은 아이였다가, 언제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던 소년이었다가, 언제는 세상을 등지고 살길 자처한 청년이었다. …펑펑 내리는 눈송이와 반짝이는 조명 사이로 희미하게 옛 기억이 떠오른다.

‘첫번째 크리스마스구나, 세세야.’

‘메리 크리스마스, 세세.’

페데리코의 인자한 웃음과 싱글벙글 올라간 콧수염. 요정이나 빨간 모자는 없었지만 내게는 누구보다 산타 그 자체였던 한 노인이 있었고, 어린 시기를 질투로 보내지 않도록 이끌어주었던 어른이 있었다. 다만 그들을 잃은 후로는 한 번도 크리스마스라는 날을 제대로 챙겨본 적이 없었다. 그저 12월의 날짜 중 하나였을 뿐. ―딸랑, 문득 종소리가 파도처럼 쏠려와 정신을 퍼뜩 깨운다.

“크리스마스 케이크 있습니다! 사가세요!”

누군가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들린다. 그쪽으로 고갤 돌리자 작은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를 몇 안 되는 진열대에 잔뜩 만들어두고 파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마르셀로가 첫 번째 크리스마스 때 케이크를 가져온 것 같기도 하다. 딸기가 올라가고 금가루가 뿌려진 생크림 케이크. 당시엔 단 걸 좋아하지 않아 마르셀로 혼자 며칠 동안 퍼먹었지. 생각보다 흔한 모양인지 진열대 안에도 비슷한 케이크가 몇 개 있었다. 그날이 생각나 목도리를 입술 언저리까지 올리며 다가가자 금세 알아챈 종업원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서 오세요.”

크리스마스라.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감상적이지 않았는데, 오래된 추억을 다시 되새긴다는 건 그만큼 여유가 생긴 탓인가. 이유라 한다면 하나밖에 없다. 하얗고 밝은 제 연인, 솔라 마리넬리가 아니라면 누구겠나. 그의 얼굴을 떠올리자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오른다. 어릴 때부터 단 걸 좋아했으니 케이크도 좋아하겠지. 다만 막상 고르려고 하자, 그의 케이크 취향은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침 곁에서 눈치를 보던 종업원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떤 케이크를 찾으시나요?”

“…아, 제가 먹을 건 아닙니다.”

“그럼 어떤 분과 함께하시는지 알려주시면 추천해 드릴게요.”

눈동자가 진열대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것을 금세 알아챈 모양이었다. 입술을 조그맣게 옹송그려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연인과 함께할 겁니다. 제 입술로 그의 의미를 타인에게 말하자 잔잔하던 가슴께에 미미한 화톳불이 켜지는 게 느껴졌다. 간질거리고 살짝 답답한… 그러나 나쁘지만은 않은, 묘한 긴장감도. 제 간단한 대답에도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케이크 하나를 진열대 유리 위로 콕 찍었다.

“이건 어떠세요? 요즘 아주 잘 나가는 케이크예요.”

그가 가리킨 케이크는, 마침 보고 있었던 것과 닮아있었다. 다만 위에 올라간 장식이 조금 달랐는데, 하트 모양 트리와 빨간 산타 모자를 쓴 채 웃고 있는 눈사람 두 개가 올라가 있었고, 산처럼 둘러싸듯 딸기가 얹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왠지 두 개의 눈사람에서 그와 내 모습이 그려져서 비식 웃음이 샌다.

“예, 이걸로 주십시오.”

하얀 케이크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어지고 빨간 리본으로 묶는 모습을 보자 자연스럽게 저 리본을 풀 솔라의 모습 또한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처음 케이크 상자를 풀어본 날에 얼마나 놀랍고 즐거웠는지. 아니, 솔라는 미셸과 자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름 세심한 사람이었으니. 그래도 좋아했으면 하는데. 건네주는 상자를 조심히 받고서 나오자 희미하게 번졌던 종소리가 다시금 선명하게 들려온다. 캐롤의 가사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더 선명해진 듯했다. 트리의 붉은 장식, 반짝이는 전구, 꼭대기에서 빛나는 별의 색채까지도 말이다. 그저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리 달라질 수 있는 건가. 혹은….

“지금껏 모른 척해왔던 걸지도 모르지.”

나는 이날의 소소한 행복을 모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기념일을 축하한 날도 있었으며, 함께 촛불을 끈 날도 있었으니. 다만 이러한 행복을 느꼈던 순간들이 전부 상실로 끝났으니까, 기어코 모른 척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도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휴대폰을 꺼내 그의 번호를 꾹 누른다. 잠시간의 벨소리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입술 사이로 몽글몽글 피어오른 입김이 목도리 안에서 맴돌다 사라진다.

“솔라, 이제 곧 들어갈 거야.”

선물도 있어. 아니, 말 안 해주려고. 대단한 건 아닌데. 조잘거리는 목소리에 하나하나 답하며 자잘한 웃음소릴 내었다. 끝까지 선물 얘기를 안 해주던 마르셀로의 마음도 조금 알 것 같은데. 품에 간직한 선물 상자 하나를 떠올리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길을 걸어간다. 

여러 빛깔로 찬란한 길거리를, 그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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