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1일차
“우리가 헤어져야 할 이유가 있나요?”
“모르는 것부터가 그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이러시기예요?”
아침부터 카페에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 되었으나, 당사자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맞춰 달라는 거 다 맞춰 줬잖아요. 내가 못할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오히려 상식적으로 행동했는데―”
“그 시혜적인 태도가 문제라고 생각은 안 하나 보지.”
“…….”
“안 했나 보네.”
긴 머리의 여자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는 앞에 놓여져 있는 찻잔을 들고 한모금을 넘겼다. 이런 대화를 나눈 게 벌써 일주일 째였다. 이쯤 되면 상대방도 적당히 포기해주면 좋으련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상대는 지치지도 않았다. 좋게 나가려고 해도 본인이 알아서 내치니, 아무리 인내심이 좋은 그라도 이젠 피곤했다.
사흘 전부터 파업 선언을 하고 작동을 멈췄던 머리가 위험을 감지하고 드디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거머리 같은 남자를 떼어내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래, 어떤 것부터 필요할까. 일단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집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는 것? 아니면 가짜 애인을 만드는 것? 아, 그래. 이게 좋겠다. 꼴에 상식은 있어서 임자 있다는 걸 알면 더 이상 건드리지는 않으니까.
집에 돌아가면 애인 행세를 해줄 사람을 찾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와중, 옆에 누군가 앉는 게 느껴졌다. 잠시 생각을 하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자, 첫번째로 보이는 것은 ‘저 사람은 누구야?’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두번째로 보이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옆집 언니였다.
“언니?”
“응, 자기야.”
“……언니,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네가 전화 하도 안 받길래 그냥 갈 만한 카페 추려서 왔지.”
거짓말. 지나가다가 보여서 온 거면서. 애인이랍시고 소개했던 애랑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앉아 있으니까 있는 눈치 없는 눈치 다 발휘해가면서 제 옆에 자리한 게 틀림 없어 보였다. 그래도 알고 지낸지 얼마 되지 않은 쟤한테는 그게 안 읽히겠지만.
여자는 일그러진 남자의 표정을 보며 통쾌함과 고소함을 동시에 느꼈다.
저 표정을 오로지 자신이 선사해주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이미 일어난 일. 그리고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았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이럴 때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있는 거지. 지금은 언니가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이타적인 인간이라 다행이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금방 정리할게. 모처럼 나왔으니까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을까, 우리?”
“늘 먹던 데로 가자.”
다정한 말에다 다정한 미소. 이러니까 내가 언니를 좋아하지. 저도 모르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옆에 앉은 이를 쳐다본 여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바라봤다. 무의식적으로 지은 의기양양한 표정은 덤이었다.
“보다시피 내 상황이 지금 이래서. 더 달라붙지 않았으면 좋겠네?”
“누나!”
“이제 이름에다가 ‘씨’ 붙여서 불러줄래? 이제 저도 존칭 쓰겠습니다. 서로 각자, 갈 길 가죠. 서로. 각자.”
이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어야 상도덕이 아닐까, 잠깐 생각하던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옆에 앉아 있는 이의 팔을 잡았다.
“2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전 애인 씨. 이제 저는 새로운 인연을 찾았으니까 당신도 똑같길 바랄게요.”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물론, 방금 생긴 새로운 인연을 옆에 끼고.
“쟨 뭐야?”
“방금 헤어진 전 애인.”
“분위기가 심상치 않길래 들어갔더니 그런 사연이.”
짧은 생머리의 여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하면서도 젓가락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두 사람은 지금 고깃집에 와 있었다. 마찬가지로 수저를 전투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긴 머리 여자는 그런 와중에 상대를 쳐다봤다.
“왜.”
“아니야, 많이 먹으라고.”
“싱겁긴.”
혀를 쯧 찬 그는 고기를 쌈에다가 야무지게 싸 앞에 있는 이에게 배달했다.
“한우잖아, 많이 먹어.”
“이걸…… 언니가 사나?”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짜식이.”
히히, 웃은 여자는 쌈을 받아 먹었다. 부족한 간은 본인이 반찬 집어 먹으면서 해결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먹느라 바빠서 못 알아챘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불필요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뭐지.’
눈을 잠깐 굴린 그는 입 안에 있던 걸 꿀떡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상대방이 먼저 한 말에 말문이 막힌 나머지 단어조차 완성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야, 너 나랑 사귈래?”
“……언니는 무슨 그런 말을 내가 고기 먹고 있을 때 해…….”
“그럼 언제 해?”
“……적어도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낯 간지럽다.”
“이런.”
“아니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너 같은 애랑 사귀면 떠받들고 살아야지, 네가 떠받들고 산 거 같아. 그래서 내가 떠받들고 사려고.”
“나 아직 안 받아줬는데.”
“받아줄 거잖아?”
여자는 이마를 짚었다. 물론 그건 맞는데……. 잠깐 고민을 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서로 진지한 마음은 아닐 테니까, 여차하면 연 하나 끊는다는 각오로…….
“참고로 난 진지하다.”
“……거절할까.”
“거절하면 잠수 탄다.”
“……받으면.”
“받고 헤어져도 잠수.”
“뭐야, 사귀는 게 이득인데?”
“그런 사고가 가능하는 것부터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중생이여, 구원 받아라.”
“사이비 같다.”
“흉내내긴 했어.”
“말세다, 말세야…….”
“그래서, 사귈 거야 말 거야.”
만담 이후 훅 날아든 질문에 여자는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생각에 빠진 지 삼 초만에 이 고백은 자신이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빠른 판단 이후, 그는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해, 자기야.”
“그럴 줄 알았어 자기야.”
내민 손을 맞잡은 상대방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게 얄미워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그만큼 귀여워서, 혹시 사귀기 시작하면 방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게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도 하냐고 물어볼 뻔 했다.
‘끝은 또다른 시작이라더니, 이럴 줄은 몰랐네…….’
시작과 끝이 동시에 일어난 하루였다.
- 카테고리
-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