閉月
믾양
*중종반정을 각색했습니다.
"도련님, 뛰면 아니 되옵니다."
"괜찮다, 만수야. 내 그저 정인이가 다 나았나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니 된다는 뜻⋯."
덩치큰 남자가 소년의 뒤를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뒤쫓는다. 귀한 도련님 혹여나 넘어져 몸에 상흔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 뒷모습에 시선을 놓지 못했다.
도착한 문 앞에서 민호의 우렁찬 목소리가 기와집 담벼락을 넘어갔다. 그 탓에 마당에 있던 시종들이 전부 흠칫 놀란 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를 보았다.
"얼른 문 열지 않고 무엇하더냐!"
역정내는 목소리가 십초도 못 참고 나무판자를 쾅쾅 두드린다. 옆에 가만히 선 만수는 다 큰 도련님이 체면도 내려놓고 객기 부리는 것을 말리지도 못하고 쳐다본다. 아이고, 마님께서 아시면 또 한 소리 들으실 텐데⋯ 그저 걸어온 길 끝에 있는 집 안까지 이 작은 소란이 닿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열리는 대문 뒤로 얼떨떨한 표정의 노비가 서 있었다. 한 손에 열악한 나무 빗자루를 들고 이마 옆 머리카락이 땀에 절여있는 것으로 보아 마당을 쓸다 온 듯했다.
"이러다 날밤 다 새겠다. 얼른, 작은 방으로 안내하거라."
민호가 큰 보따리를 들고 있는 만수에게 눈치를 주며 제 뒤를 따라올 것을 일렀다. 앞서가는 시종의 뒤를 따라 작은 방에 도착한 민호는 급한 마음에 신을 마루 아래에 내팽개치고 문고리를 확 잡아 당긴다.
그러니 갑작스레 불어오는 한기에 두터운 이불 위로 빼꼼 튀어나온 얼굴이 문 쪽을 쳐다봤다.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두 눈이 크게 떠지더니 얼굴 위로 반색하는 기색이 떠오른다.
"형님!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네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내 참을 수가 있어야지. 사흘이나 경과하였는데 몸 상태는 좀 나아졌느냐?"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괜한 심려를 끼쳐드린 듯하여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그게 어찌 네 잘못이더냐. 아직 잔기침을 하는 걸 보니 다 낫지는 못한 듯싶구나."
"예, 그렇습니다."
정인이 말할 때마다 쿨럭이는 기침 소리가 사이사이 침범하였다. 끝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괜찮다고 말해오는 모습이 왜인지 더 아린 듯하여 듣는 사람은 울상을 짓는다.
"이 작은 몸이 아플 곳이 어디 있다고 그러는지⋯ 하늘이 이리 무심할 수가 없도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끼니는 좀 챙겼느냐?"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 한 끼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럴 줄 알고 내 요깃거리를 좀 가져왔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호가 바깥에 있는 제 시종에게서 짐을 가로채어 돌아온다. 정인의 옆에 앉은 조그마한 손이 매듭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아우야,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 형님이 금방⋯. 아니다. 안 될 것 같구나. 뭐가 이리 꽉 묶여있냔 말이야."
"푸흡. 형님, 저는 괜찮사옵니다. 천천히 하십시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정인이 작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그게 부끄럽다기 보단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여태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저 눈웃음 보다 예쁜 웃음을 본 적이 없어 그랬다. 초승달같이 휘어지는 눈가는 언제 보아도 이 세상의 빛나는 모든 것을 바치고 싶게 했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내 너를 위해 광대 짓도 자처할 터인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한번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두 소년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던 유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민호의 표정이 밝아지며 재빠르게 제 앞에 있는 것을 넘겨준다. 유모는 손가락들을 사용하여 가장자리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신기하게도 꽉 맞물려있던 천이 스르륵 풀리는 게 보였다. 그 안에 아픈 동생을 위해 시장에서 사들인 귀한 주전부리들이 한가득이었다. 약과, 유과, 그리고 경단 등. 전부 보기 드문 것들 뿐이란 걸 알아차린 정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형님, 이것들을 다 어디서 공수해 오신 겁니까? 제가 이리 귀한 것들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기뻐할 모습만 떠올리며 온종일 운종가를 돌아다녔다. 그러니 그저 편하게 즐겨주었으면 하는구나."
"황송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일 형님이 아프게 된다면 저도 꼭 찾아뵙겠습니다."
"안 아프길 바라야지, 이놈아."
말과는 다르게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정인을 쳐다본 민호가 보드라운 두 뺨을 살짝 잡아당긴다. 아흐이다. 양쪽으로 벌어진 틈으로 아프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세모난 입에서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민호는 한참을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 이윽고 감정을 사그라트린 뒤엔 부드러운 손길로 정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만 가봐야겠구나. 네 상태를 보아하니 큰 시름은 덜어낸 듯하다."
"예, 형님. 조만간 다 나으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음식은 제가 잘 보관해두겠습니다. 둘의 작별을 바라보던 여자가 나긋하게 말을 덧붙였다. 민호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처마 밑 그늘로 나오니 쨍한 햇빛이 괴롭히고 있는 제 오랜 시종이 눈에 들어온다. 날이 참 좋구나. 민호는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듯 제 기분만 신경 쓰고 있었다.
"도련님, 기분이 참 좋아 보이십니다."
"암. 좋고 말고. 내 며칠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다."
들뜬 발걸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팔랑거린다. 그 탓에 부리가 누렇게 바래지고 있었으나 이 역시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
민호와 정인은 종친 사이로,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기르게 된 민호의 모와 정인의 모가 육아로 품앗이를 하여 이어진 연이었다. 나이대가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여 금세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이 시를 짓거나 글을 쓰는 등의 사소한 일부터 누구에게 말 못할 깊은 고민까지 공유하는 돈독한 사이가 되었는지라. 현재는 서로가 있는 삶만이 전부라 봐도 무방하였다.
어느덧 혼기가 된 둘에게 좋은 혼사 자리가 줄을 섰으나 아무도 그 혼사를 받지 않고 있었다. 정인은 아직은 이른 듯하다며 거절하였고 민호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민호가 흠모하는 사람에 대해 발설할 당시, 누군지 데리고 오라며 집안에서 소소하게 난리가 났었으나, 아직은 조심스러운 단계라 잘 되면 데리고 오겠다는 말로 어물쩍 넘어간 사건도 존재하였다.
며칠 뒤, 정인이 회복된 몸을 이끌고 민호를 찾아왔다. 으리으리한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나갈 채비를 하는 민호가 보였다.
"형님, 어디 가십니까?"
"마침 잘 왔느니라. 지금 시장에 가려 했는데 같이 가겠느냐?"
"어찌 시종을 시키지 아니하고요."
"가을의 정취도 즐길 겸 내 옷 한 벌 직접 고르고 싶어서 그러하다."
"그러면 저도 따라가는 김에 하나 살펴 보아야겠습니다."
허락을 구한 정인의 손을 이끌어 민호는 전에 한 번 와봤던 곳으로 향한다. 한낮의 시전은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모습이었는데, 엉겨 붙는 인파 속에서 민호가 정인의 손 위로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얽히는 느낌이 꽤 낯설어 정인이 제 앞의 뒤통수를 쳐다보니 갓 아래 붉게 물든 귓등이 보인다. 보기 드문 모습에 정인은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속으로 삭힌 채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선전으로 확실히 보기 드문 빛깔의 옷감들이 많았다. 형형색색 이어진 물결을 보고 침 흘릴 듯 쳐다보는 정인에게 민호가 비단 하나를 꺼내어 대어본다.
"괜찮은 거 같기도 한데."
"예? 어, 제 옷을 골라주시려는 겁니까?"
"온 김에 뭐⋯, 같이 사면 좋지 아니한가."
민호가 상인에게 다른 색상을 요청하며 무심히 대답했다.
새롭게 건네받은 것은 청명한 청색으로 화려하긴 했으나 정인의 뚜렷한 이목구비와 퍽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걸로 하자."
"너무 튀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입고 싶으면 입는게지. 가끔 기분 내고 싶을 때 딱 좋을 듯한데."
"그러면, 제가 민호형 옷도 골라드리겠습니다."
"됐다. 내 이미 마음에 담아둔 것이 있다."
민호가 입구에 걸려있는 상앗빛 비단을 가리키며 두 필의 값을 물어보았다. 상인이 요구하는 금액을 별말 없이 지불한 민호가 이레 뒤에 오라는 말에 제 시종을 시켜 가지러 오겠다 대답했다.
"이리 도산을 받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받았으면 내게 뭘 해주어야지. 내 그냥 베푼 줄 아느냐."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그림 하나 그려다오."
"제 그림 실력을 알지 않으십니까. 차라리 글을 적어드리는 건 어떠하신지요."
"네 실력을 알고는 있다만, 오늘은 왠지 그림이 당기는구나. 곧장 내 집에서 그리고 가거라."
차마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다시 민호의 집으로 돌아왔다. 행랑 마당에서 만수에게 이것저것 지시한 민호가 정인을 방으로 이끌었다. 곧 두 사람 분의 먹과 벼루 등 필요한 물품들이 바닥 위에 놓인다. 정인은 익숙한 손짓으로 신중히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동안 민호는 가만히 옆에 누워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 그냥. 생각해보니 청색이 그리 잘 어울리기도 쉽지 않은 듯하여."
"그래도 형님만 하겠습니까."
정성들여 벼루 위에 먹물을 만들어낸 정인이 제 것과 비어있는 민호 것을 바꾸어 다시 새것 위로 먹을 문대었다.
"내 할 수 있는데도."
"압니다. 그저 해드리고 싶어서 그리한 것입니다."
"이리 다정하니 도성 내 여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하하. 그럼 무얼 합니까. 저는 아직 생각이 없는 것을."
"그러고 보니 내 전부터 궁금하였던 것인데, 왜 혼사 생각이 없다 하는 건가?"
"음⋯ . 여러 이유가 있지만, 모든 건 장유유서가 아니 옵니까. 민호형께서 혼사를 올린 뒤에 저도 따라 하고 싶습니다."
"허어, 이걸 내 탓을 하다니. 내 양 대감에게 얼굴 들 면목이 없어졌도다."
"하하. 염려 마십시오. 이건 저만 아는 비밀이옵니다."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는 옆모습을 바라보던 민호가 적당한 농도의 먹을 붓에 묻힌 뒤 살며시 휘두른다. 거침없는 손길에서 꼭 전부터 생각해둔 게 있어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하얀 설화지 위에 자리한 검은 선들이 가득했다. 서로의 그림을 바꿔 바라본 두 사람은 역시나 형편없는 상황에 자연히 말을 아끼게 되었다.
"아우야, 이게 난이 맞느냐."
"예⋯."
"고고함은 물론 충성심도 엿볼 수가 없구나. 간신이 그렸다고 해도 되겠어."
"무슨 농을 그리 하십니까. 하면 형님은 잘 그린 줄 아시는지요."
"내 그림이 어떠하다고. 딱 봐도 알아볼 수 있지 않겠는가?"
"예. 절대 아닙니다. 아무리 봐도 둘 다 그림엔 연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단호하게 종이를 옆에 내려둔 정인이 어질러진 붓과 벼루를 정리하는 동안 민호는 그저 비스듬히 상체를 뒤로 기댄 채 쳐다만 봤다. 내버려 두면 시종들이 알아서 정리할 텐데 왜 사서 고생하는지. 언제나 부지런한 성품을 바라보며 넋 놓고 있으면 하얀 손이 붓을 놓치는 게 보였다. 결국 민호의 그림 위로 점 하나를 남기며 요란하게 바닥 위를 굴러갔다.
"헉, 이거. 어찌해야⋯ "
"그래. 하루도 조용히 지나갈 네가 아니지. 내버려 두거라. 더 하다간 이 집안 노비들 일거리를 더 늘려주는 듯하니."
"저는 그저, 도우려고 그랬습니다⋯."
"누가 모른다더냐. 다만 가만히 있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걸 이제는 알아야 할 듯싶다."
무안한 듯 조용히 귓불을 문지르던 정인이 얼룩진 민호의 그림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형님."
"오냐."
"왜 이걸 그리셨습니까?"
질문을 받은 민호가 위를 올려다보자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이 종이와 자신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혹, 무슨 뜻이 있는 것입니까?"
"네가 보기엔 무슨 의중이 있어 보이느냐."
"아무래도 비목어는 사랑을 뜻하는지라⋯ 떨어지지 않는 존재라면야. 아, 혹시 이거 형님과 제 이야기입니까? 한 쪽 없이는 못 산다는 점에서 닮은 듯합니다."
"눈치가 반 밖에 없구나."
"예?"
"됐다. 꿈보다 해몽인 거지. 알아서 생각하거라."
살짝 쿵쿵거리는 발걸음이 방 밖으로 넘어가 멀어져가면, 열린 문틈으로 쌀쌀한 바람이 홀로 남은 정인을 훑어보곤 떠났다.
***
백로가 지나 추분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걷이를 기다리는 밭 위에 허리를 굽힌 농민들만이 분주히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민호 또한 아침에 잠시 벗을 만나 회포를 풀다 오후엔 정인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다. 일이 틀어지는 게 싫어 조금 이르게 도착한 집 안으로 들어선 민호는 먼저 사랑채로 향했다. 웃어른을 만나 뵙고 이후 제 친구를 만날 예정이었다. 쪽문을 지나 누마루로 향하니 사랑방 너머로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요새 민심이 너무 흉흉합니다.'
'그러하고 말고요. 세금을 내면 남는 곡식이 없다 하온데⋯ .'
'이게 다 중심이 흔들려서 그런 거 아니겠사옵니까.'
민호는 그저 가만히 서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이거 인사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원래 없는 자리에서 나라님 욕하는 게 당연하다 여기는 터라 들려오는 내용에 화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모르고 있던 제 형 소식을 이렇게나마 듣는 구나 싶었다. 흙길 위에 앞코를 툭툭 부딪히며 적당한 순간을 간만 보다가 그냥 되돌아가려는 때에 중첩이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탓에 민호가 어정쩡한 자세로 방에서 나온 사람과 마주했다.
"수안대군?"
"아, 박 대감. 오랜만일세."
"여긴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원 군을 보러 왔다가 생각이 나 인사하러 들린 참일세. 꽤 중요한 얘기를 하는 듯하여 돌아가려던 때 우연히 마주했구먼. 하하."
남자가 민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민호는 뭔지 모르게 불편한 상황에 놓인 듯했다. 인사를 끝마친 뒤론 내내 굳은 몸으로 주변을 힐끔대고 있었다. 그러다 남자가 멀어진 거리를 좁혀오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시작했다.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나는, 아무것도⋯"
"수안대군께선 세상을 속이는 게 가능하다고 믿으십니까?"
"아니, 잠깐, 내 거짓을 고한 것이 아니고⋯"
횡설수설 말을 잇는 사이 남자가 손바닥을 펴 민호의 시야를 가린다. 파랗고 하얗던 하늘이 가려지며 민호의 두 눈이 그늘 속에 자리했다.
"근래 들어서 말입니다. 하늘을 이렇게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습니다."
"⋯."
"손 틈으로 빛이 새어드는 건 찰나일 뿐인데 말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어리석은 사람은 그마저도 제 하늘인 줄 착각할 수야 있겠지만, 이미 드넓은 자유를 아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
"본디 새가 좋은 나무를 가려야지 어찌 나무가 새를 가려 맞이하냐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무슨 뜻인지 아시리라 믿겠습니다."
모호한 말을 끝으로 예의를 차린 남자가 멀어져 간다. 자신이 언제부터 나무가 되었는지. 민호는 제 발목을 붙잡는 손을 느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의뭉스러운 만남 뒤로 무슨 정신으로 교우를 만나고 돌아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 고대하던 만남에서도 민호는 사색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깊이 잠긴 눈을 보며 정인이 손뼉을 짝, 맞붙이자 민호가 옆을 돌아본다.
"무슨 일 있사옵니까?"
"아⋯."
"정신이 없어 보이십니다. 혹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닌가 염려되어⋯⋯."
"아니다, 그런 게 아니고. 내 미안하구나."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혹 무리하시는 거라면 오늘 약조를 미루는 것은 어떻습니까."
"보름달이 돌아올 때까지 언제 기다린단 말이냐. 내 잠시 생각할게 있어서 그러했다. 이제 네게 집중하겠노라."
"말 못 할 고민이옵니까? 된다면 짐을 덜어드리고 싶사옵니다."
"그렇게 중요한 사안은 아니니라. 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예. 형님께서 그러하시다면 믿어보겠습니다."
약간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매달고 두 사람은 목적지인 다리 위에 도착했다. 시간이 늦은 탓인지 사람의 왕래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풀벌레가 우는 소리로 가득 채워져 다행히 껄끄러운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유명해진 데에는 다 까닭이 있는 듯했다. 물낯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의 모습에 두 사람 다 큰 감명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맑은 물 밑으로 물고기들이 자유로이 유영하며 보름달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 어떤 간섭도 없이 제 길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며 민호가 입을 열었다.
"정인아."
"예."
"달이 참 예쁜 것 같다. 보러 오길 잘했구나."
"동시에 두 개나 볼 수 있어 더 재밌는 듯합니다."
"그러하더냐."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정인은 제 밑으로 울렁이는 인영들을 바라본다.
"우리 달로 도망갈까."
"⋯⋯."
"저곳에 궁이 있다고 하던데. 두 명 정도는 받아줄 수 있겠지."
"광한전⋯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래, 그곳. 내 비록 불사의 약은 못 구해도 가보고는 싶구나."
"형님이 가신다면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
"민호형이 계신 곳이 제가 있을 곳 아니겠습니까. 너무 어릴 적부터 붙어 다녀 이제 형님 없는 하루가 더 어색한 지경이 됐습니다."
물 위로 시선을 내린 옆모습을 민호가 빤히 쳐다봤다. 정인 또한 수면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민호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한참을 아무 말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정인이 아직 제게 닿아있는 시선을 향해 웃어 보였다. 민호는 어스름한 달빛이 내려앉는 말간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는다. 꼭 시샘하는 듯 수려한 외모를 하얗게 날리는 달빛을 손으로 가리며 그 앞으로 다가간다. 하늘이 아닌 달을 가리며 민호는 정인의 숨에 제 비밀을 털어놓는다.
부끄러워 감겼던 눈을 뜨면 그 앞으로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이 가득 들어찬다. 시끄럽게 울던 생명들이 한순간에 숨을 죽인다. 탁해지는 물빛 위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밀담만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엊그제의 꺼림직한 기억이 있는 곳에 민호가 다시 한번 발을 들인다. 이번엔 제가 올 걸 알았는지 마당에서 시종이 길을 안내하러 나와 있었다. 이전에는 넘지 못한 문턱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서책 하나를 든 남자가 눈인사를 해온다.
"대군 오셨습니까."
"예, 간밤 평안하셨는지요."
"수안대군을 뵐 생각에 푹 잔 듯합니다."
"누구는 밤잠 설치느라 피곤한 상태인데, 참으로 축하하오."
"허허. 편히 앉으시지요. 제가 다 말해드릴 터이니."
민호가 맞은 편에 자리하며 머리에 쓰고 있던 갓을 내려두었다.
"그 전에 하나 말해도 되겠는가."
"예, 괜찮습니다."
"알고 있겠지만, 전하가 즉위한 순간부터 정계와 멀리한 사람인지라 정세에 까막눈인 편이라네."
"영민하신 분이라 그러한 선택을 하신 거 아니십니까."
민호가 앞에 앉은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계에 남아 욕심내던 사성대군, 윤안군 모두 죽었습니다. 주상의 검을 통해서 말입니다."
"⋯⋯."
"지금의 주상은 치마폭에 둘러싸여 매일 술과 함께 하시는 것도 모자라 기어이 환까지 손을 대셨습니다."
"믿기지 아니하다. 어릴 적 기억엔 총민함이 하늘이 시샘할 정도였는데⋯. 정통성을 떠나 따져보아도 왕세자에 적격인 사람이지 않았는가."
"처음에는 저희 대신들도 긴가민가하였습니다. 어찌 신하가 섬기는 자의 말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상태이옵니다."
남자가 창밖을 보던 시선을 거두고 민호와 눈을 맞춘다. 전부터 느꼈지만 기백이 넘치는 사내인 듯하다.
"대군. 이제 모른다고 할 시기는 지났습니다. 본인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선택을 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 왜 하필 나인가? 그저 형님의 다음 순번이라 선택된 건가?"
"물론 그런 이유도 무시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가장 역모와 거리가 멀다는 점과 남아있는 왕자 중에 가장 성군과 가까운 모습이셔서 그렇습니다. 필시 천지가 따르는 왕이 되실 겁니다."
민호는 자신이 사면초가에 놓인 듯하였다. 진퇴양난인 순간에 어디를 골라야 하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미래가 뒤 바뀌는 건 어느 쪽이든 매한가지였다. 그때 문득 어제 저와 사랑을 속삭인 사람이 스쳐가는 게 꼭 물어야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어디까지 구상되어 있는가."
"시기는 돌아오는 친제 날이 목표입니다. 반군은 모두 4조로 나뉘어 활동할 예정입니다. 1열에서 무사들이 창덕궁 통로를 뚫어놓으면 그대로 대군과 저희가 들어가 왕을 제거하고 옥새를 가져올 겁니다. 일이 틀어지지만 않는다면 곧장 대비전으로 이동하여 세상이 바뀌었음을 선언하겠지요. 그럼 남은 무리가 측근들을 제거하고 궁으로 복귀할 겁니다."
"측근이라 하면 혹, 양 대감도 포함인 건가?"
"아직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저희 쪽에 합류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력이 되어줄 건 확실합니다."
"물어보면 꼭, 내게 알려주길 바라네. 허나 만일 거절한다 하여도 그의 아내와 자식은 건들지 않는 게 어떻겠는가."
"연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좋은 분들이라 그러하다. 내 어릴 적부터 정도 들고 도움도 많이 받은 분들이니 많이는 잃고 싶지 않구나."
"허어⋯. 이리 정이 많으신지 미처 몰랐습니다."
"이것만 지키면 된다. 약조 하지 않겠다면 다른 적임자를 찾아가길 바라네. 내 모른 척해줄 터이니."
남자가 맹랑한 발언에 고민하는 듯 수염을 쓰다듬더니 마침내 약조하겠다고 대답했다. 애초에 민호를 예정하고 세운 계획이라 이제 와 다른 사람을 앉히는 것 따위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몸가짐을 더욱 조심히 하시되 일상은 유지하셔야 합니다. 다음 연락은 제 시중을 통해 보내놓겠습니다."
"알겠노라. 박 대감도 몸 조심하길 바라네."
인사와 함께 문밖으로 나온 민호는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어둠이 서려오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직 달이 채우지 못한 빈 곳이 아득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또 정인의 얼굴이 떠오르는지라 민호는 결국 집으로 가던 걸음을 바꾼다.
여전히 대문 앞에서 소리치는 것으로 제가 왔음을 알리는 민호를 전에 봤던 유모가 반겨주었다. 마치 제집처럼 익숙한 곳을 누비다가 정인의 방 앞에 자리를 잡는다. 양 대감네 가족은 좀 유별나지만, 사랑이 가득하여 석반만큼은 꼭 함께해야하는 터라. 아마 지금도 안채에서 다 같이 즐기는 시간을 보낼 게 분명하였다. 쪽마루에 앉은 민호는 마당을 빨빨거리는 참새들을 보며 그저 아무 말 없이 정인의 귀가를 기다렸다.
"민호형! 오셨다고 하셔서, 앗!"
정인이 저 멀리서 뛰어오다 휘청하며 발을 꼬았다. 놀란 민호가 벌떡 일어나자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은 요상한 자세로 웃어 보인다. 하하. 너무 흥분하였나 봅니다. 자세를 바로 하며 다가오는 얼굴이 봉숭아를 물들인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어찌 하루도 조용히 넘어가는 날이 없는 게냐."
"오랜만에 형님을 뵙는다는 생각에 그만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리 칠칠치 못해서야. 누가 데리고 갈지 심히 궁금하구나."
"당연히."
"당연히?"
"형님 아니십니까?"
"허."
"형님께서 저의 처음을 가져가셨지 않사옵니까."
"우리가 상압한 기억까진 없는 듯한데."
민호가 질 낮은 농을 던지자 정인의 낯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형님⋯, 아직 해가 떠있사옵니다."
"그게 뭐 어떠하다고. 내 낮에는 연인에게 이런 말도 못하는가?"
"아니, 그런 게 아니옵고. 아무튼, 듣는 귀가 너무 많습니다."
우물쭈물 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던 민호는 그저 입꼬리를 씨익 올려 웃어 보였다.
"정인아, 그럼 누가 들어도 상관 없는 곳으로 갈까."
"예? 어딜, 어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보면 알 터이니 그저 따라오거라."
질질 끌리는 발걸음을 무시한 채 민호는 즐거운 표정으로 보폭을 넓혀 걸었다.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가는 동안 정인은 혹시 도착지가 폐가는 아닐지 하는 걱정을 했다. 귀신은 좀 무서운데⋯ 말 해야 하나. 실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화려한 연등이 펼쳐진 담벼락 아래에 민호가 정인을 돌려세웠다.
"⋯ 여깁니까?"
"그래."
"기생집 담벼락이 아닙니까."
"모든 연인들이 여기서 밀회를 즐긴다 하지 않느냐. 우리 또한 그런 낭만을 즐겨보아야지."
"아니, 그게 무슨."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정인을 앞에 두고 민호는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 입고 온 도포를 두사람 위로 덮어내며 이제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는 달빛을 등진 채로 두 사람의 입이 맞붙는다. 떠오른 달은 한쪽 눈을 감으며 저를 속이는 두 사람을 모른 척해주었다.
***
하인들이 분주히 제 주인들의 신발을 마루 아래 숨기며 흔적을 지워내고 있었다. 서슬 퍼런 작두 위에 있는 듯한 긴장감이 맺힌 집안에 인기척이 사라진다. 호롱불이 비춰낸 방 안으로 여러 개의 그림자가 겹쳐 짙은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시 안에 모든 걸 끝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제일 적합한 시간대인 듯 합니다. 약도를 보면 대조전 뒤로도 무사를 보내야 할 거 같습니다."
"도주로를 완전히 폐쇄하자는 말씀이시군요."
민호를 포함한 4명의 사람들이 바람 소리보다 더 작게 속삭이며 약도 위를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다. 계획의 허점을 찾아가며 구체화하고 있을 때 이조판서가 작게 한탄하였다.
"이럴 때 양 대감이 있으면 좋을 텐데. 비책 하나는 참 뛰어난 양반이 아니오."
"아쉽지만, 어쩌겠소. 자신이 받아들인다고 한 일인데."
"오래된 벗과 이리 뜻이 갈라지니, 가끔 운명이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소."
대신들이 나누는 얘기를 담담히 듣던 민호가 이제 달포 정도 남았으니 마지막까지 모두 몸 조심하시길 바란다는 끝마무리를 하며 일어났다. 빳빳한 새 옷이 서로 스치니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금세 외출 준비를 마친 민호를 본 영의정이 말을 걸었다.
"수안대군, 혹 중요한 약조라도 있으십니까."
"오래된 벗과 함께 술 한잔 걸칠 예정이라네."
"그렇습니까. 듣기만 해도 재밌어 보이는 게 좋은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대충 고개를 까딱인 민호가 서두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세 사람이 시선을 맞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들은 한 가지의 생각을 동시에 떠올리는 중이었다.
민호는 급히 발걸음을 옮기며 자기 집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말로 같이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한 정인에게 제집에서 마시자고 약조한 터였다. 미리 만수에게 늦을 수도 있다고 귀띔을 해두긴 했지만 정말 늦게 되자 마음이 다급해지고 있었다.
양반이 뛰는 게 흔한 일은 아니어서 지나치는 행인들 몇몇이 민호를 흘끔거렸다. 쯧쯧. 멀쩡하게 생겨서 체통이 없다니. 뭐 하는 양반인가. 같이 욕을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민호는 그저 앞만 바라보며 도착한 대문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섰을 뿐이었다.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평상 위로 펼쳐진 술상 앞에 앉아있는 정인이 있었다. 그 앞에 가서 앉자니 넋 놓고 있던 시선이 위로 이동한다.
"형님, 땀이 엄청납니다. 어디 편찮으신 겁니까?"
"내 뛰어와서 그런 거니 걱정 말거라. 혹 너무 늦은 건 아니더냐?"
"아닙니다. 저도 방금 도착하였습니다. 상도 방금 막 나온 터라 아직 온기가 가득합니다. 자,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정인이 건네는 술잔을 받은 민호는 그 속에 채워지는 투명한 액체를 마주한다. 번갈아 술병을 나눠 든 두 사람은 짠, 하는 입소리와 함께 잔을 부딪혔다. 한 잔, 두 잔. 도자기가 부딪히며 내는 까랑까랑한 소리가 끝도 없이 오갔을 때 정인이 앞뒤로 몸을 움직이며 말끝을 늘려왔다.
"혀엉니임⋯."
"⋯."
"민호혀엉⋯."
"어휴. 술이 이리 약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예에? 저 안 취했습니다. 어어, 그런데 형님⋯ 왜 두 명이 되셨습니까? 이상합니다⋯."
아하하. 정인이 흐리멍덩한 눈을 치켜뜨며 하는 말에 민호가 저항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 세상이 막⋯, 막. 안주가 알아서 움직입, 우욱."
창백히 질린 얼굴이 입을 막고 앞으로 고꾸라지자 민호가 빠르게 팔을 뻗어 받쳐주었다. 제 아래 있는 팔뚝을 느낀 정인이 헤실헤실 웃다 끝내 속에 있는 걸 바닥에 게워내기 시작했다.
"아, 읍. 형님, 속이. 아."
"그래, 그래⋯. 내 미안하다."
헛구역질하며 위액을 쏟는 정인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본다. 속으로 다시는, 술을 먹여선 안 되겠다 다짐하는 것도 잊지 아니했다. 조금 진정이 되었을 때 민호가 하인을 시켜 물 한잔을 떠오게 했다. 넘겨받은 물잔으로 껄끄러워 할 입 안을 헹구어 낸 뒤엔 제 어깨에 팔을 두른 자세로 힘겹게 방으로 걸음 하였다.
늘어지는 몸이 여간 무거운 게 아니어서 느리게 허리를 숙이는 게 고되었다. 둥그런 뒤통수를 바친 손이 이불 위로 살며시 내려앉는다. 시야를 일으키니 그제야 엉망이 된 옷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이건 아무래도⋯ 불편할 거니까⋯. 그, 뭐 딱히 보고 싶은 건 아니고. 잘 땐 옷을 벗어야 하니까. 그렇지? 속으로 자문자답을 한 민호가 천천히 정인의 옷고름을 풀어냈다.
날이 추워진 탓일까 두터운 옷 안으로 얇은 옷이 여러 겹이어서 민호는 또 한 번 고비를 맞이했다. 헛나가는 손을 바로 하며 집중을 기울이자 어느샌가 새하얀 침의만 내버려 두고 모두 바닥에 흩어져있었다. 괜히 찔리는 양심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벗겨진 옷가지를 더듬더듬 집어내었다. 한 덩이로 뭉친 옷가지를 밖에 내놓으며 만수를 찾았다.
"이것도 빨랫감에 넣어두거라."
"예, 도련님."
"아, 그리고 내일 조반은 들이지 말라 전해라. 아마도 늑장을 부려야 할 듯싶다."
표정은 태연했으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오른 민호가 삐끗하는 손짓으로 문을 닫았다. 만수는 제 도련님의 새로운 면모를 되새기며 조금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정인이 관자놀이 근처를 짚으며 힘겨운 아침을 맞이한다. 이게 무슨. 아, 머리야⋯. 눈두덩이도 부어 흐릿한 시야 사이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어제를 회상하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니 옷은 언제 벗었지⋯. 아, 일단 집에 가야겠다.
아직도 핑핑 도는 세상을 도리질 치며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은 순간 딱딱한 바닥의 촉감 대신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놀란 마음으로 옆을 보니 새근새근 자는 민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만 의아했던 점은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제 옆에 누워있었다는 점이다. 정인이 일순간 사고를 멈추며 민호가 덮은 이불 아래 사정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설마⋯ 잤나?"
"아니니까 걱정 말거라⋯⋯."
졸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가 정인의 혼잣말에 반응해왔다. 무엇 때문인지 하루아침에 새가슴이 된 정인이 또 한 번 움찔하며 민호를 쳐다보았다. 정인의 뒤로 비춰오는 아침햇살과 마주한 민호가 외마디와 함께 다시 눈을 질끈 감고는 정인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조금 더 자거라."
"예?"
"⋯⋯."
되물었지만 대답 없는 민호를 바라보며 정인이 몸을 꿈틀거렸다. 잠든 척 하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얽혀있는 팔 때문에 빠져나가는 건 포기해야 했다. 에라, 모르겠다. 정인은 포근한 체향을 들이마시며 조금씩 가시는 두통을 느낀다. 안정이 되돌아오는 감각에 빠져들며 잠이 든 정인이 다시 눈을 떴을 땐 텅 빈 옆자리가 있었다. 끔벅이며 시선을 옮긴 문 앞에서 외출준비를 하는 민호의 모습이 보인다.
"어디 가십니까?"
"아,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이제 막 진시가 된 참이다. 더 자는 게 좋지 않겠느냐?"
"아닙니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꼬물꼬물 몸을 웅크린 정인이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일으키며 하품을 참지 못하였다. 귀여운 모습에 민호가 살포시 웃으며 정인에게 제 바람을 흘린다.
"돌아왔을 때 네가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말이지."
"이하동문입니다. 왜인지 오늘 돌아가면 부모님께 혼날 듯하여 걱정인지라⋯."
"내 양 대감에게 잘 얘기해두겠네. 참. 어제 옷은 빨래를 하여 못 입을 거 같아 만수에게 새 옷을 부탁해두었다."
"예, 감사합니다. 옷은 다음에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민호가 떠난 방에서 정인은 하룻밤을 보낸 이부자리 정리까지 끝낸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문 바로 앞에서 만수가 제게 줄 옷을 들고 서 있었다.
"도련님께서 부탁하신 겁니다."
"아아, 고맙네."
어차피 돌려주러 와야 하는 옷을 뭘 그리 많이 준비했는지. 정인이 한겹씩 껴입으며 따뜻하지만 무거운 어깨를 느꼈다. 그래도 사랑받는 느낌이 들어 부드러운 비단 소매를 매만지며 슬며시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정인이 집에 막 도착했을 시기에 민호 또한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번 모임은 예행연습을 위한 만남이라 평소보다 더 엄중한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대신들의 설명을 통해 각자 어느 위치로 들어가 빠져나올지, 어디에 있을 누구부터 쳐야 할지 상의하며 계획을 구체화했다.
민호는 땀이 나는 손바닥을 옷에 쓱쓱 문지르며 제게 주어진 임무를 위해 손에 칼을 쥐었다. 오랜만에 잡아본 거지만 감겨오는 손잡이가 낯설지 않았다. 무사들과 합을 맞춰보며 칼을 길들이다 보니 이마 위로 송골송골 땀이 맺혀온다. 이후 마찰에 의해 손바닥마저 빨갛게 쓸렸을 때 밖에서 한 무관이 뛰어들어와서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었다 알려주었다. 난감한 소식에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그가 전하는 바뀐 일정에 귀기울였다.
다행히 거사 일이 좀 당겨졌다는 얘기였을 뿐 다른 건 그대로인 상태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오히려 모두가 투합하여 사기가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계획을 수정해야 하는 건 맞아서 조율을 위해 민호는 몇 날 며칠을 그곳에서 살았다. 간간이 찾아오는 만수에게 정인의 안부를 듣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을 전할 뿐이었다.
그러다 거사가 닷새도 안 남았을 때 잠시 시간이 생기게 되었다. 지체 없이 정인에게로 달려가는 동안 하늘에서 첫눈이 내려왔다. 민호가 마당으로 들어설 즈음엔 약했던 눈발이 거세지며 그동안 걸어온 길 위를 하얗게 덮고 있었다.
"정인아, 첫 눈이 오는구나."
"민호형!"
정인이 놀란 토끼 눈을 하며 창밖에 서 있는 민호를 쳐다봤다. 잠시만, 잠깐만 기다리세요! 다급한 외침을 내뱉고 정인이 빠르게 외출복을 걸쳐 마루로 뛰쳐나왔다. 너무 급해 맨발 차림인 것도 잊고 민호에게 다가갔다가 이내 발에 닿는 눈송이를 보며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 기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내 사랑하는 이를 보러 온다는데 이유가 꼭 필요할까."
"그건 그러하지요. 너무 오랜만이라 귀신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하하. 하긴 내 죽어서도 너를 보러 찾아올 거 같구나."
반가운 마음에 부둥켜 껴안은 민호의 뒤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정인이 빠르게 뺨에 입을 붙이고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민호가 저를 쳐다보자 배시시 웃는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눈이 좀 많이 오긴 하나 이때 걷는 것도 나름 운치 있다 생각하는데⋯."
"같이 걷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금방 준비하고 나오겠습니다."
들뜬 몸짓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외투 하나와 버선을 손에 쥐고 다시 나오는 게 보였다. 마루 위에 앉아 모든 준비를 마친 정인이 쫄래쫄래 민호에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포개어진 두 손이 차가운 공기를 녹이며 온기를 퍼트렸다. 두 쌍의 발자국이 나란히 이동하며 새하얀 길 위를 수놓고 있었다. 다정히 맞잡은 손을 끌어안으며 민호가 춥지는 않냐고 물었으나 정인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젓는다. 괜찮사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입가의 두 뺨이 홍조를 띄는 것을 민호는 흐린 눈으로 넘어가 주었다.
뽀드득 밟히는 눈밭 위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경쾌하였으나 눈발에 의해 빠르게 지워져 가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조용히 또 신속히 이루어지는 터라 뒤에 붙는 발걸음이 있는 줄도 모르고 두 사람은 멀리, 저 멀리 저들만의 세상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
검은 옷을 둘러 입은 사람들이 모두 비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민호도 허리춤에 매단 칼을 꽉 쥐어내며 앞에서 들려오는 설명에 귀 기울인다.
"우선 경복궁에 있을 양도원과 김수흔을 꼭 처리해야 합니다."
민호는 귀에 꽂히는 익숙한 이름을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그도 예상했던 결말이었을 테니. 그저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 착잡한 마음을 진정시킨다.
곧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올 터였다. 다시 일러주는 용도로 읊어진 설명을 끝으로 모두가 흩어지고 민호는 앞서 나가는 무사들 뒤에 걸음을 붙였다.
성문 앞으로 다가가니 궁을 둘러싼 검은 물결을 본 궁인들이 이곳저곳에서 뛰쳐나와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라님보다 자기 목숨이 중요하다는 얄팍한 충성심이었으나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를 걸었을 그들을 생각하면 나무랄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입한 민호가 반정공신이 될 사람들을 앞세워 왕이 있는 곳에 쳐들어갔다. 허니 방안에서 환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들어온지라. 말로만 듣던 모습을 마주한 민호가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며 옥새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덜덜 떨리는 손에서 건네받은 옥새를 쥐고 재빠르게 뒤돌아선 뒤로 짧은 비명이 이어지다 뚝, 끊겼다. 무언가 바닥을 뒹구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민호는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갔을 뿐이다.
이제 대비전으로 향해 제가 왕이 되었음을 아뢰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였다. 이게 끝나면, 오랜만에 달을 보러 가자고 해야지.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며 민호가 보고 싶은 제 정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대비전에서도 큰 어려움 없이 일사천리로 일이 해결되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어마마마께 인사드린 민호가 텅 빈 궁 안을 돌아보며 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어디까지 진행된 상태더냐."
민호가 생각보다 헛헛한 마음을 느끼며 제 곁에 함께한 공신들에게 질문한다.
"아마도 거의 끝냈을 겁니다. 동쪽으로 건너가 마지막으로 좌의정네 집안만 처리하면 모든 거사가 끝납니다."
"⋯ 다시 말해보거라."
"거의 다 끝냈다고⋯⋯."
"아니, 그 전에 말이다. 좌의정 댁을 어찌⋯ 오늘 궁에 양 대감이 있다 하지 않았느냐."
"예. 있었습니다만, 아직 그의 가족들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소리더냐! 나와 약조한 것을 잊은 것, 아니다. 아니야. 내 이만 가봐야겠다."
민호가 급히 몸을 일으켜 계단을 내려가자 뒤에서 내리 깐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안대군."
"⋯⋯."
"민심을 잡으려면, 세력부터 확장하셔야 하는 겁니다. 즉위하시면 바로 혼사부터 처리될 것입니다."
하. 민호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제 앞에 서 있는 늙은 남자를 쳐다봤다. 이제 보니 관상이 뱀 같았다. 내가 누구 말에 홀렸던 건지. 허나 이런 사색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 민호는 곧장 뒤 돌아 궁 밖으로 뛰쳐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긴장이 풀린 다리가 중간마다 삐끗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런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 걸 예감하고 있었기에.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민호는 더 힘차게 발을 굴렀다.
'제발, 제발.'
아무생각없이 달리기만 하던 민호가 아침에 정인을 보살펴달라고 만수에게 요청했던 일을 떠올린다. 어쩌면 만수가 정인을 데리고 외출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둘이 집에 없을 수도 있었다. 불안이 크게 덮쳐왔지만 꾸역꾸역 누르며 다른 확률에 기대를 걸어보는 중이었다.
제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동시에 잃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정말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을 때, 눈에 익은 대문이 나타났다. 다만 이미 반쯤 열려있는 상태였는데, 민호가 다급히 집안으로 들어서자 처참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그의 이성이 끊겨나간다. 자신과 한 번씩은 안면을 튼 시종들이 안마당에 널브러져 있었다. 정인아. 혼비백산인 정신에 단 하나의 이름만 선명했다. 민호는 뛰어오느라 풀린 옷자락을 휘날리며 별당채로 내달린다.
쪽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니 난간 아래에 쓰러진 만수가 있었다. 어지러운 시야 위로 하얀 창호지 위에 번진 빨간 핏방울이 휘몰아친다. 핏기 없이 창백한 몸이 딱딱히 굳어있는 걸 확인한 민호가 삐그덕거리는 걸음으로 찬찬히 마루 위로 올라갔다. 붉게 물든 창호지로 다가가자 살짝 찢어진 틈으로 검붉은 색만 가득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민호는 소리 없이 울며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안쪽이 말해주는 의미를 알아서. 그 마지막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한참을 문고리를 붙잡고 끅끅거렸다.
얼굴꼴이 엉망이 된 상태로 코로 숨쉬기가 어려워졌을 때에야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이렇게 방안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껴안고 싶었으니까⋯. 힘겹게 뜬 시야에 조용히 누워있는 정인의 모습이 들어온다. 빨간 방바닥 위로 누운 모습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언뜻 보면 잠이 든 것 같아 민호가 아닌 걸 알면서도 정인의 코 밑으로 손가락을 갖다 대본다. 정말, 죽었네. 다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민호가 정인을 들어 올리자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니 굳어있는 손에서 빠져나온 듯한 붓이 보였다. 붓을 왜⋯. 무릎을 들어 정인의 뒤통수를 받친 민호가 자유로워진 손으로 핏물에 굴려진 것을 들어 올린다. 제 손에 묻는 선명한 피와 붓이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설마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 쳐다보니 평소에 정인이 자주 쓰던 서안 위로 무언가 올려져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 정인을 다시 눕힌 뒤, 천천히 앞으로 이동한다. 움직임을 따라 빨간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길을 만들었다. 도착한 곳을 내려다보니 둥그런 술잔 두 개와 서신 하나가 보였다. 손에 묻은 피를 옷 위로 아무렇게나 문댄 민호가 혹시 몰라 손 끝으로 얇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형님, 비록 제게 일언반구도 없으셨던 건 조금 서운하였지만 그래도 무사히 거사가 성공하여 참 다행입니다. 그동안 함께 지내온 형님 곁에 더는 머물지 못하겠지만, 잘 해내실 거라 믿고 있으니 걱정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그 언젠가 달에 가자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그 말이 참 좋아서 내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조촐하지만 제가 작은 술잔 하나 준비해봤습니다. 직접 만든 거라 엉성하지만 이번에는 함께 풍류를 즐겨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다시 달을 보면서
한참을 눈으로 정갈한 글씨를 쫓던 민호의 호흡이 점차 가빠져 간다. 채 마무리 짓지 못한 문장 뒤에 빨간 점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그 위로 번지는 물 자국으로 인해 모든 것이 희석된다.
더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글자 위로 민호는 조용히 고개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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