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큘러스

망령과 악당

가브리엘 아그레스트는 아주 불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그의 꿈에 에밀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가 꿈에 나온 게 불쾌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가브리엘은 꿈 따위의 환상에 관심이 없었다. 떠나가는 에밀리를 붙잡으려고 애썼던 것이 꿈이라는 것은, 자신의 노력도 미소 짓던 에밀리도 환상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날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꼭 에밀리가 죽은 사람이라는 뜻 같았다.

아침 일찍 지하에 내려가 잠든 에밀리를 보고 온 가브리엘은 파리의 모든 사람을 걸고서라도 에밀리를 깨우리라 다짐했다.

이상이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아침부터 출동하게 된 이유였다. 그들은 악당의 꿈자리가 사나운 것이 자신들의 과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


평소보다 일찍 등교 준비를 하면서도 아드리앙은 마냥 설렜다.

첫 번째 이유는 일찍 등교하는 이유가 학급 단위의 할로윈 파티를 위해서였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 파티에 입을 의상을 준비해 준 게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일 때문에 바빠서 아직 얼굴을 못 보는 바람에 나탈리에게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오후엔 꼭 직접 고맙다고 말해야지.

하지만 아드리앙은 결국 그 옷을 입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설마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의상 말고 다른 걸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그러게. 말 안 해도 알 줄 알았는데."

미리 정해둔 것도 아닌데, 반 친구들 모두가 레이디버그나 블랙캣 의상을 입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의상을 정하는 기준이 성별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킴은 빨간색이 좋다는 이유로 레이디버그 의상을 입고 있었고, 이반과 밀렌은 나란히 블랙캣 의상을 입은 채 노래를 하고 있었다.

뒤늦게 온 마리네뜨도 사정은 비슷해 보였다. 마리네뜨는 마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독특한 디자인이나 공장제 같지 않은 자수를 보니 직접 만든 의상인 것 같았다.

"알리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된 일이긴. 할로윈 파티 코스튬을 통해 우리 반의 단합력을 알게 된 거지. 대단하지 않아? 아무도 상의하지 않았는데 다 같은 코스튬을 준비해 오다니. 너랑 아드리앙만 빼고 말이야."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는 몰랐지만 결국 진짜들만 코스튬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다. 알리야는 자신이 두 사람 몫의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의상을 구해주겠다고 했다. 마리네뜨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신이 레이디버그 의상을 입으면 정체가 들통날 것이 분명 했고, 두 번째 이유는 아드리앙에게 블랙캣 의상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아서였다.

아드리앙과 블랙캣은 너무 다르잖아!

첫 번째 이유는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 이유를 눈치챈 알리야가 이쯤에서 타협하자는 듯 대안을 내놓았다.

"그럼 아드리앙한테 레이디버그 의상을 주고 너한테 블랙캣 의상을 줄게. 그럼 됐지?"

아드리앙과 마리네뜨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지만 알리야의 적극적인 태도와 반 전체의 분위기를 보니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머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설마 반 전체가 나를 따라 한 건 아니겠지?"

"그래도 네가 제일 멋있어, 클로이!"

"클로이까지···?"

"말조심해! 내 건 너희 것처럼 싸구려 공산품들이랑은 질이 다르거든?"

"맞아, 클로이 건 평범한 빨간색이 아니라 퍼머넌트 레드야! 내 것도 평범한 검은색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블랙이고!"

아무리 그래도 클로이와 사브리나는 다른 옷을 입을 줄 알았는데. 이제 정말로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만이 반 전체의 흐름에 탑승하지 못한 게 되어버렸다.

"자, 너희 옷도 구해왔어! 뭐야. 클로이랑 사브리나까지 용케 잘 입고 왔네? 너희만 입고 오면 되겠다! 얼른 다녀와."

어느새 돌아온 알리야가 두 사람 몫의 옷을 안겨 주고는 은근슬쩍 마리네뜨와 아드리앙을 붙여주었다. 얼떨결에 함께 사물함에 가게 됐다는 사실에 마리네뜨는 조금 기뻤다.

"마리네뜨, 그 옷은 직접 만든 거야?"

그때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의 옷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 응! 어떻게 알았어?"

"네 디자인은 특별하잖아. 그래서 알아봤어."

"정말···?"

마리네뜨가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드리앙은 왜 의상으로 갈아입지 않았어? 가브리엘 씨가 준비해 주신 거 아니야?"

마리네뜨의 질문에 아드리앙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 사실 입고 오려고 했는데···,"

"꺄악! 유령이야!"

그때 옆 교실에서 비명과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초현실적 존재에 민감한 아드리앙과 마리네뜨가 유령이라는 말에 동시에 반응했다.

문을 열자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잠깐 사이 아무도 없어진 데다 적막과 고요가 찾아왔다고? 그렇다기에 복도를 가득 채운 음산함이 꺼림직했다.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분명 비명 지르는 걸 들었는데."

"발소리도. 나도 분명히 들었어."

두 사람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건 검은 나비 때문이다. 호크모스의 짓이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다. 오랫동안 영웅 일을 하며 합을 맞춰왔던 둘의 사고는 비슷하게 흘렀다.

'아드리앙을 지켜야 해!'

'마리네뜨를 지켜야 해!'

"아드리앙, 거기 있지···?"

"응, 난 괜찮아. 너도 조심해."

아드리아의 안전을 확인한 뒤, 레이디버그는 복도로 달려 나갔다. 블랙캣 역시 마리네뜨의 안전을 염려한 뒤, 조금의 틈을 두고 사물함 밖으로 나왔다.

"블랙캣! 생각보다 훨씬 빨리 왔네?"

"너야말로. 게다가 순찰하고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줄이야."

"그러게. 이런 식의 만남이라면 사양이야."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는 블랙캣이 여지를 잡아챘다.

"다른 식이라면 어떤 만남? 더 자세히 얘기해줄래?"

"집중 좀 해!"

조금 전까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목뒤에 소름이 돋아 걸음을 멈췄다. 이 음산한 기운은 설마.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

"할로윈의 유령···?"

얼핏 보면 하얀 천을 뒤집어쓴 아이 같았지만 몸이 반투명했다. 발이 바닥을 통과하는 것을 보니 유령이 확실했다.

"혹시 사탕 있어?"

"아니, 있을 리가 없지!"

"사탕이 없으면 골탕이야!"

유령이 천처럼 생긴 몸통에서 잭 오 랜턴을 꺼냈다. 얼굴 모양의 호박에서 낄낄 웃는 소리가 나더니 사방에서 유령이 나타나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을 붙잡기 시작했다.

"너희가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구나! 그럼 사탕 대신 미라큘러스를 가져가겠다!"

"그렇겐 안 되지···!"

요요로 유령들을 떨쳐내려 했지만 불공평하게도 유령에게는 공격이 닿지 않았다.

"이미 죽어서 고대의 재앙을 쓸 수도 없고!"

"일단 도망치자!"

유령은 삶의 흔적 하나하나를 더듬는 모양인지 집요하기 짝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음산함에 둘러싸인 기분이 썩 불쾌했다. 후유증인지 오한이 남아 둘은 한동안 팔을 문질렀다.

"유령을 이길 방법이 뭐가 있을까?"

"글쎄. 하지만 확실한 건 검은 나비가 그 호박에 있다는 거야. 아까 봤지?"

"응. 웃는 게 엄청 기분 나빴지."

머리를 오래 맞댄다고 파훼법이 떠오르지 않을 것 같자 레이디버그는 행운의 부적을 사용했다. 레이디버그의 손 위 앙증맞은 열쇠가 하나 떨어졌다.

"승리의 열쇠를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열쇠가 나와버렸네."

블랙캣의 농담에 피식 웃던 레이디버그는 그 열쇠의 모양이 사물함 열쇠의 모양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물함? 사물함에는···."

아드리앙과 마리네뜨가 숨어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하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눈치껏 자신이 들어 있기로 했던 사물함을 피해 갔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사물함 중 어떤 사물함을 여는 열쇠란 거지? 유령이 오기 전은 고사하고, 5분이 지나기 전에 알맞은 사물함을 찾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래도 하나씩 열어볼 수밖에 없어. 서두르자!"

그때 반대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경첩이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컸다.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

'벌써 오다니!'

'내가 시간을 끌어볼게!'

블랙캣이 몸을 낮춰서 이동했다. 멀리서 무언가 부식되는 소리가 났다. 유령도 그 소리를 들은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 레이디버그가 열쇠를 넣은 사물함이 열렸다. 킴의 사물함이었다. 킴이 숨겨놓은 게 대체 뭐길래. 조심스럽게 문을 연 레이디버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반쯤은 실소였고, 나머지 반은 확신에서 나온 거였다. 이거면 확실하지.

블랙캣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유령이 레이디버그가 있는 곳은 물론, 마리네뜨가 있는 곳으로 가게 해서도 안 됐다. 행운의 부적이 부디 행운을 가져다주길 바랄 뿐이었다.

"거기 꼬마 유령 친구! 사탕이 먹고 싶어?"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

"좋아, 그럼 얼른 잡아 먹어보라구!"

레이디버그가 유령을 향해 사탕을 표창처럼 던졌다. 그러자 천 속에서 나온 잭 오 랜턴이 진공청소기처럼 사탕들을 빨아들였다.

'저렇게 먹는 거였어?'

블랙캣이 당황했다. 레이디버그도 비슷하게 놀랐지만 잭 오 랜턴 쪽이 본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에 결과를 기다릴 뿐이었다.

컥···!

분명 웃는 얼굴이었던 잭 오 랜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이게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원하는 대로 사탕을 줬는데 뭐가 문제지? 아직 어려서 소금 사탕은 조금 이른가?"

레이디버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괴로워하던 잭 오 랜턴은 유령과 사탕을 가득 토했다. 잭 오 랜턴에서 나온 유령들도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서서히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옆 반 친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분장하지 않은 일반인들이었다.

그리고 더 놀랄 틈도 없이 잭 오 랜턴이 파괴됐다. 여차하면 요요로 당겨 빼앗으려던 레이디버그는 손쉽게 그 안에서 나온 검은 나비를 잡아 정화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과 옆 반 학생들을 돌려보낸 후 블랙캣이 말을 걸었다.

"할로윈에 소금 사탕을 준비하다니. 굉장한데?"

"킴의 사물함에 잔뜩 들어있더라고. 보통 장난꾸러기가 아니지?"

"참, 사물함 하니까 생각났는데, 혹시 사물함에 숨어있거나 한 사람은 없겠지?"

레이디버그는 오늘 두 번째로 목뒤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서, 설마 그런 사람이 있겠어? 이상한 소리 하지말고 너도 얼른 할로윈을 마저 즐기러 가는 게 어때?"

"오, 안 그래도 시간이 다 되어 가네. 해피 할로윈, 마이 레이디!"

블랙캣이 사라지자 레이디버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마리네뜨가 숨었던 사물함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변신이 풀렸다.

"놀라라, 블랙캣은 왜 그런 말을 해서."

"고양이라 감이 좋은 가보네."

잠시 키득거리다가 티키를 숨기고 사물함 밖으로 나온 마리네뜨가 조심스럽게 아드리앙이 들어간 사물함 앞에서 그를 불렀다.

"아드리앙, 괜찮아?"

"나 찾았어?"

"어?!"

목소리는 바로 뒤에서 들렸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밖에서 엄청 큰 소리가 계속 들려서 무서웠어···."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덕분에 다 해결된 것 같아. 맞다, 우리 옷 갈아입으러 온 거였지. 얼른 갈아입고 돌아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러네! 다들 기다리겠다. 얼른 갈아입어야겠어!"

의상은 남녀노소 모두가 입을 수 있게 만들어진 만큼 입고 벗기 편했지만 환복 속도는 모델 일에 익숙한 아드리앙이 조금 더 빨랐다. 덕분에 마리네뜨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채 레이디버그 의상을 입은 아드리앙을 마주하게 됐다. 새빨간 수트가 아드리앙의 맑은 녹색 눈동자를 더 돋보이게 했다. 아드리앙이 레이디버그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듯 했다.

"블랙캣 의상 잘 어울린다, 마리네뜨."

갑작스러운 칭찬에 마리네뜨는 평소의 배로 당황했다.

"어? 어, 너, 너야말로! 레이디버그랑 잘 어울린다! 아니, 옷이 잘 어울린다고!"

"고마워. 여러 옷을 입어봤지만 레이디버그 옷은 처음 입어보는 것 같아."

'아드리앙이 또 칭찬해 줬어!'

'너무 신난 거 아냐? 이러다 진짜 블랙캣이 되려고 하겠어.'

'설마 그럴 리가!'

교실로 돌아오는 동안 아드리앙의 칭찬에 설레하던 마리네뜨는 티키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드리앙과 마리네뜨까지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됨으로써 반의 모든 학생이 영웅이 됐다. 사실 그들의 파티는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사탕을 비롯한 간식을 나눠주는 것으로, 어찌 보면 상의도 없이 의상을 통일한 데는 꽤 어울리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너희들! 내 사탕 먹지 않을래?"

킴이 사탕 몇 개를 내밀었다.

"받지 마. 킴이라면 분명 소금 사탕 같은 걸 준비했을걸?"

"킴이라면 놀랄 일도 아니지."

"웩, 이건 소금 사탕이잖아!"

마리네뜨와 알리야가 소곤거리는 사이 피해자가 속출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킴이 낄낄거렸다. 평소였다면 킴의 그런 장난기가 아니꼽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소금 사탕 덕에 유령을 몰아냈으니 오늘만은 그런 '킴 다움'에 감사하기로 했다.


고등학생 아들이 있는 호크모스에게 할로윈 의상을 구하지 못해 슬픔에 잠긴 아이를 구슬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직접 유령이 되어 신난 아이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사탕을 갈취하고, 사탕을 주지 않는 사람은 잡아 가둬버렸다. 자신이 사탕을 모두 빼앗아 놓고서는 그렇게 사탕이 없어진 사람을 잡아다 가뒀다. 이대로라면 파리 시민 전체를 잡아 가둘 수 있을 터였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을 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일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버렸다. 탐욕스러운 잭 오 랜턴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않고 모든 사탕을 집어삼켰고, 결국에는 유령에게 해로운 소금마저 삼켜 자멸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흰 천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던 어린아이가 어릴 적의 아드리앙과 비슷했다. 감정적 자극을 받은 호크모스는 변신을 풀지 않고 인정과 사탕으로 가득한 파리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감지해 내려 했다.

"의상을 준비 못 해준 건 미안하다고 했잖아. 너무 바빠서 어쩔 수 없었어."

"그럼 사탕이라도 주시면 안 돼요?"

"알았어. 여기 사탕 살 돈이야. 사탕 많이 먹으면 이가 상하니까, 조금만 먹는 거다?"

분노로 변했던 서러움도 가셨다. 하지만 사라진 건 감정만이었다. 원인은 그대로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바빴다. 할로윈 의상을 찾는 사람이 너무 많다나.

받은 돈으로 사탕을 샀다. 그래봤자 통의 밑바닥을 다 가리지도 못했다.

사실 사탕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속이 상했던 건 의상이 없어서나 사탕을 먹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래···. 할로윈의 망령이 그리 쉽게 사라져선 안 되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귀에 익은 목소리로, 잭 오 랜턴이 속삭였다.

'파리의 모든 사람에게 가서 사탕을 가져오거라. 외롭지 않게 망령을 불러낼 힘 또한 주겠다. 이번엔 더 잘 해낼 수 있겠지?'

유령의 재림이었다.

아까보다 훨씬 좋았다. 귀찮게 유령을 만들지 않아도 사탕이 없는 사람을 혼내줄 수 있었다.

"하, 할머니? 정말 할머니예요?"

"그래, 네 할머니다. 할로윈에 사탕 하나 가지고 다니지 않는 네 모습이 답답해서 되살아났다! 난 너를 그렇게 키운 적이 없어! 어서 나와 함께 가자!"

"으아아아악!"

"사탕이 없으면 골탕이야!"

꼬마 유령이 망령에게 끌려 잭 오 랜턴에 빨려들어간 행인을 비웃었다.

담벼락 뒤에 숨은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그 모습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아까와 능력이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어, 이건 이것대로 성가셔 보이네."

그때 건너편에서 익숙하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따라와, 사브리나! 움직임이 왜 이렇게 굼뜬 거야!"

"미안해, 옷이 너무 불편해서······."

다이아몬드 블랙 색이라던 사브리나의 의상은 아름다움과 불편함이 비례하는 듯했다.

그들은 길거리가 왜 한산한 줄도 모른 채 자신들의 의상을 뽐내며 걷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저대로 가다가는 유령에게 발각될 텐데!"

"레이디버그! 블랙캣!  드디어 나타났구나! 사탕과 미라큘러스를 내놔!"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저건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아니다!'

"이건 또 뭐하는, 꺄아아아악!"

"클로이, 조심, 꺄아아아아악!"

망령에게 끌려가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클로이와 사브리나는 바로 잭 오 랜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유령은 잭 오 랜턴 속에 손을 넣어 뒤적이더니 장난감 요요와 천으로된 가면, 가짜 반지 따위를 꺼냈다.

"뭐야, 미라큘러스가 없네!"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분명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었는데···."

호크모스의 호통에 꼬마 유령은 시무룩해졌다. 레이디버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떤 악당들은 때때로 스스로의 규칙에 얽매이기도 한다. 지금처럼 원본이 있는 경우에는 특히. 어쩌면 그 점이 클로이와 사브리나를 흡수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령은 신나게 거리를 돌아다녔다. 오늘은 어른과 차를 피해 움츠리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할로윈에는 유령이 우선이니까.

"다음 목표는 이 집이다!"

딩동.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

호크모스가 당황했다. 유령의 이번 방문지는 아그레스트 저택이었다.

'어리석은 꼬마 같으니···!'

"누구시죠? 방문 약속을 하셨나요?"

"사탕이 없으면 골탕이야!"

사정을 모른 채 인터폰 넘어 유령과 마주친 나탈리는 곧 망령과 마주치고 말았다.

"···에밀리 님?"

아그레스트 저택에 있는 두 사람을 동시에 데려갈 망령이었다.


"나탈리, 유령은 떠났나?"

호크모스가 통신을 시도했지만 나탈리는 받지 않았다.

"어서 망령을 거두어들여라! 여기, 아니, 그곳 말고 다른 곳으로,'"

"가브리엘."

유령에게 지시를 내리던 호크모스는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말을 멈췄다. 순간 숨조차 멈출 것 같았다.

"레이디버그! 찾았다!"

유령이 외쳤지만 호크모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 레이디버그는 진짜 레이디버그가 아닌 킴이었다. 자신의 빠른 다리에 자부심이 있던 킴이 무모하게도 유령 앞에 직접 나타난 것이다.

"킴이 위험해!"

잭 오 랜턴을 파괴하려고, 하지 못한다면 유령의 시선이라도 끌 생각으로 고대의 재앙을 발동한 블랙캣이 뛰어 나갔다.

"블랙캣, 잠깐 기다려! 킴, 그 가면 벗어!"

레이디버그의 외침을 듣고 블랙캣은 달려 나가려던 것을 멈추고, 킴은 가면을 벗은 다음 요요와 함께 귀신에게 던져버렸다. 물론 그것들은 유령을 통과해 버렸다.

"뭐야, 레이디버그가 아니잖아! 날 속이다니, 사탕 두 개 내놔! 안 그러면 골탕도 두 배야!"

"워, 어떻게 된 거야?"

"간단해. 악당이 할로윈의 유령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야. 원래 할로윈에는 유령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의상을 입고 분장을 했던 거잖아. 저 유령도 의상에 따라서만 사람을 구분하는 거야. 그러니까 클로이도, 사브리나도, 킴도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으로 본 거야."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네. 우리는 그걸 역이용하는 거지?"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훼법을 알아낸 영웅들과 달리 호크모스는 거대한 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서재에만 있지 말라고 했잖아. 매일 산책하자고 약속했으면서."

잊었을 리가 없다. 에밀리와의 추억은 모두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

에밀리가 잠든 뒤의 호크모스는 감정을 죽였다. 사실 그러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에밀리가 사라진 삶은 무감각했다. 상실감에서 비롯된 절망과 분노가 태풍처럼 몰아치고 나면 공허가 추억까지 갉아먹었다.

에밀리를 깨울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꿈이나 환상에는 관심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에밀리를 떨쳐낼 수가 없었다.

"10년 전 오늘이었지? 아드리앙이 식탁보를 뒤집어쓰고 유령 놀이를 했었지. 조그만 몸을 웅크리고 서랍 옆에 숨어 있으면 찾을 수가 없었는데."

에밀리의 목소리가 마치 마법이라도 거는 것처럼, 에밀리가 이야기하는 순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호크모스의 집중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검은 나비와의 연결도 느슨해졌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운이 좋게도 그 순간을 아주 잘 잡아챘다.

"꼬마 유령! 여기 진짜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사탕을 주러 왔어!"

"정말?"

어린 유령이 몸을 스르르 미끄러뜨리며 접근했다.

평소 같은 상황이었다면 아마 호크모스가 제지했을 것이다. 레이디버그가 무방비 상태로 다가온다니.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자, 여기."

레이디버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탕을 건넸다. 어린 유령은 아무 의심 없이 그 사탕을 받아 들며 헤실거렸다.

"잠깐! 미라큘러스도 내놔!"

사탕에 넋을 빼앗았던 어린 유령이 갑자기 생각난 듯 외쳤다.

"흠, 그건 좀 곤란한데? 사탕으로 만족하면 안될까?"

"뭐? 그럼 골탕 먹을 준비 해!"

유령이 품속에서 잭 오 랜턴을 꺼내 들었다. 레이디버그가 기다린 순간이었다.

"레이디버그들, 이쪽으로 와서 나 좀 도와줄래요?"

그러자 레이디버그 복장을 한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내 사탕 가져가! 사실은 내가 진짜 레이디버그야!"

"아니, 진짜 레이디버그는 나야!"

"누, 누구야! 누가 진짜야!"

수 명의 레이디버그들이 사탕을 들이밀었다. 어린 유령은 원하던 대로 사탕을 잔뜩 받았음에도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모습을 본 레이디버그들은 더 열렬하게 자신이 진짜라며 우겨대기 시작했다. 아까 된통 당했던 킴은 망령을 달고도 끈질기게 유령을 괴롭혔다.

"역시 레이디버그야, 인심이 넉넉한데? 블랙캣들, 우리도 지지 말자구!"

블랙캣이 재빨리 몰아붙였다.

블랙캣들이 2차 공격을 퍼부었다. 유령이 눈앞에 보이는 레이디버그들과 블랙캣들을 구분하지 못해 당황하는  사이 레이디버그가 행운의 부적을 꺼내들었다.

'웬 우산인가 했더니.'

우산 손잡이의 둥그런 부분을 이용해 잭 오 랜턴을 낚아챘다.

"부탁해, 블랙캣!"

"물론이지!"

레이디버그가 던진 잭 오 랜턴을 블랙캣이 받았다. 재앙이 넘실거리는 손이 닿자 잭 오 랜턴은 표정을 일그러뜨릴 새도 없이 부서졌다. 그러면서 안에 있던 사탕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레이디버그가 치유의 힘을 사용하고, 사탕과 함께 하늘로 솟구친 클로이와 사브리나까지 안전하게 받쳐주면서 일은 마무리됐다.

""임무 완수!""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사탕의 분수를 배경 삼아 주먹을 맞댔다.

유령 분장을 하고 있던 어린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주변에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가득했다.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싶은 와중 레이디버그들 중 하나가 사탕을 내밀었다.

"사탕 줄까?"

"고, 고마워요."

"해피 할로윈!"

레이디버그들과 블랙캣들이 준 사탕으로 호박 통이 가득 차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디버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블랙캣."

자뭇 진지한 목소리였다.

"응? 아직 뭔가 남았어?"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

순식간에 장난스럽게 풀린 목소리에 블랙캣이 웃었다. 아까 주웠던 사탕 하나가 손안에 있었다.

"사탕이 없으면 골탕이라고 했던가?"

그러더니 단숨에 포장지를 까곤 사탕을 입에 넣어버렸다. 산뜻한 레몬 향이났다.

"그게 어떤 건지 궁금한데."

사탕을 굴리는 혀가 능글맞았다.

"너한테 장난을 친 내가 바보지."

때마침 블랙캣의 반지가 신호했기 때문에 레이디버그의 골탕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게 됐다.

"이만 가봐야겠네. 골탕은 다음에 부탁해."

레이디버그가 피식 웃었다.

"다음은 무슨."

변신이 풀릴 때쯤, 블랙캣은 자신이 먹은 사탕이 평범한 레몬 사탕이 아니라 안에 고농축 레몬 원액이 들어있는, 무지하게 신 사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탕이랑 골탕을 같이 먹었네."

덕분에 플랙에게 한껏 비웃음을 샀다.


"고작 환상에게 당하다니!"

호크모스가 이를 악물었다. 변신을 풀고 난 뒤의 그는 평소보다 한층 지쳐 보였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이런 고통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의 미라큘러스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하지만,"

가브리엘은 누루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브로치를 빼버렸다.

하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무척 피로해졌다. 차라도 한 잔 마실 생각으로 서재에서 나오던 가브리엘은 막 집에 도착하던 아드리앙과 마주쳤다. 아드리앙은 어딘지 기분이 안 좋아보였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잠시 침묵하던 뒤늦게 말을 이었다.

"내가 준 의상은 어땠니."

아드리앙이 가브리엘의 눈을 피했다. 어딘지 걸리는 구석이 있는 표정이었다.

"사실··· 못 입었어요. 의상을 입으려고 했는데 잘 안 맞더라고요. 마침 친구들이 레이디버그 의상을 구해줘서 그걸 입었어요. 기껏 준비해 주셨는데 못 입어서 죄송해요."

아드리앙이 내민 가방 안에는 새것처럼 깨끗한 옷이 있었다.

가브리엘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심기 불편해 보이는 표정에 아드리앙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미안하구나. 네가 이렇게 커버린 줄도 모르고 마지막 촬영 때의 크기에 맞춰버렸구나. 생각해 보면 너도 성장기인데 말이야."

"아니에요. 의상 챙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드리앙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아쉬운 기색도 없어진 것 같았다.

"앞으로는 더 신경 쓰도록 하마."

그리고는 시계를 확인한 가브리엘이 제안을 꺼냈다.

"중국어 레슨 전에 시간이 좀 남으니 함께 차라도 마시는 게 어떠니."

"정말요? 좋아요!"

아드리앙은 꼭 아이처럼 웃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아드리앙은 들떠서 모든 가족이 함께 보냈던 할로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가브리엘은 이미 수천수만 번 되새겼던 기억이었지만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 할로윈에는 반 친구들이랑 다 같이 거리 사람들한테 사탕을 나눠줬어요. 매일 받기만 했던 것 같은데 주는 쪽이 되니까 기분이 색달랐어요."

"······재미있었겠구나."

에밀리가 잠들며 가정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브리엘의 기억과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에밀리의 미소였다. 그러나 아드리앙은 에밀리가 없는 순간에도 행복한 기억을 만들고 있었다.

식탁보를 쓰고 유령 놀이를 할 만큼 어렸던 아드리앙은 이제 식탁보를 뒤집어쓰는 짓도 하지 않고, 숨바꼭질 따위도 하지 않는 나이가 됐다. 서랍 옆에 몸을 웅크리고 숨으면 아무도 찾을 수 없을만큼 작았던 아드리앙은 이제 서랍이 허리 높이까지밖에 오지 않을 만큼 커버렸다. 

'어쩌면 아직도 나는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게 에밀리와의 추억이라면 벗어날 생각은 없었다. 에밀리를 위해서라면 파리 최악의 악당이 되어도 상관없었다.

시월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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