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큘러스

나누기

영웅들 간의 정체 공개가 권장되는 우주

"아, 시간 다 됐다. 그럼 난 먼저 가볼게."

에펠탑에서 집으로 가는 건 이제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레이디버그에게는 던지는 곳에 정확히 감기는 요요와 원하는 만큼 멀리 뛸 수 있는 다리가 있었으니까.

레이디버그는 지붕 몇 개를 밟고 뛰어넘어, 파리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의 3층에 발을 딛음과 동시에 사라졌다. 던지는 곳에 정확히 감기는 요요도, 원하는 만큼 멀리 뛸 수 있는 튼튼한 다리도 이제는 없다.

걸음마다 자신감이 묻어나는 레이디버그의 발자취에 남은 건 산뜻한 플랫슈즈를 신은 여자아이였다. 주변에 천이 잔뜩 흩어진 재봉틀, 끝내지 못한 에세이 숙제, 영상의 재생 바가 중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컴퓨터는 건들지도 못했다. 영웅 레이디버그의 일은 완수했지만 뒤퐁고 1학년 마리네뜨의 일은 아직도 산더미였다. 둘은 해야 할 일을 공유하지 않으면서도 시간과 피로도는 공유했고, 마리네뜨는 이미 레이디버그로서 모든 힘을 다 쓴 후였다.

"마리네뜨, 일어나. 아직 숙제 다 못했잖아."

"으으, 안돼. 더는 못 움직이겠어."

쿠션에 얼굴을 파묻은 채 움직이지 못하는 마리네뜨 대신 작고 붉은 요정이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재봉틀 근처에 쌓인 천을 정리하고, 끝내지 못한 숙제를 우선 덮어뒀다. 마지막으로 재생 버튼을 눌러 멈춰있던 영상을 틀었다. 이미 몇 번을 돌려 본 유명 디자이너들의 다큐멘터리였다.

마리네뜨가 귀를 쿠션으로 막으러 들자 티키가 한숨을 쉬었다. 마리네뜨의 피로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훨씬 많이 뛰고, 훨씬 많은 거짓말을 해야 했으니 몸도 마음도 지칠 수밖에.

"왜 블랙캣에게 정체를 알려주지 않아? 너희들은 서로가 누군지 아는 게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마리네뜨가 처음 변신했을 때, 티키는 미라큘러스의 사용법과 레이디버그로서 해야 하는 일 같이 필수적인 것만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지만, 마리네뜨가 자신의 파트너에게도 정체를 숨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족과 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는 부담을 줄이려 할 줄 알았는데. 게다가 레이디버그가 정체를 비밀로 하고 싶다고 하자 그걸 존중한 블랙캣이 자신도 블랙캣으로 남겠다고 선언해버렸다.

"···내 생각엔 아닐 것 같아. 오히려 레이디버그가 이렇게 덜렁대고 평범한 여자애라는 걸 알면 나한테 실망할 게 뻔해."

마리네뜨가 쿠션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확실히 자신만만한 레이디버그를 연상시키지 않는 태도였다.

"마리네뜨, 넌 걱정이 너무 많아. 파리의 평화를 수호하는 레이디버그가 바로 너잖아. 그것만으로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한데, 뭘 그렇게 겁내."

"그래서 더 걱정이야!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블랙캣은 더 이상 레이디버그를 신뢰하지 못하게 될 거라구."

티키의 작은 몸에서 한숨이 폭 터져 나왔다. 이 어린 영웅은 어쩌면 자기 파트너를 그렇게도 모르는지. 하지만 아무리 설득하려 들어봤자 몸과 마음이 지친 어린 소녀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나저나 내가 너였다면 그렇게 힘들어할 시간에 과제를 마무리했을 것 같은데?"

"맞다, 숙제가 있었지. 기간이 넉넉해서 천천히 해도 될 줄 알았는데 검은 나비는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거야······."

그야 악당은 영웅의 사정을 봐주지 않으니까···. 마리네뜨도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티키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우선 좀 자고, 밤에 일어나서 숙제를 끝내면 어때?"

"으응, 그게 좋겠어.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아무것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마리네뜨는 엎어진 그대로 잠들려고 했다. 자신이 켰던 영상을 끄고 온 티키가 제대로 누워서 자라며 마리네뜨를 살짝 흔들자 마리네뜨는 거의 기다시피 베개까지 올라갔다.

에세이의 주제는 장래 희망이었다. 왜 그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걸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까지 설명하려면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써야 했다. 과거 부분은 다 썼다. 미래는 어떻게 쓸지 구상만 해뒀다. 현재는 쓰고 지우길 반복하는 중이었다. 마리네뜨는 많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옳은 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 미래도 확신할 수 없는데 파리를 지킬 수 있을까······.'

마리네뜨는 수마에 빠져들기 직전까지도 걱정에 잠겨 있었다.

결국 에세이의 중간 부분은 채우지 못했다. 티키가 깨웠을 때도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던 마리네뜨는, 볼펜을 손에 들고도 계속 조느라 좀처럼 글을 이을 수 없었다. 불편하게 자느라 수면의 질도 떨어졌다. 악순환의 반복으로 마리네뜨는 다음날 또 지각할 뻔했다.


"넌 비밀이 너무 많은 게 문제야."

"내가?"

알리야의 말에 마리네뜨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그럼 누구겠어. 오늘 지각한 이유도 거짓말이었잖아."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모르냐고 물어보는 게 낫겠다. 너 지각한 핑계 댈 때 강아지가 스웨터를 물어뜯어서라고 한 게 세 번째인 건 알고 묻는 거야? 늦잠을 잤으면 나한테라도 말해줬을 텐데 나한테까지 숨기는 걸 보면, 엄청난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고 있는 거 아냐?"

농담처럼 덧붙여지는 말에 소름이 쭉 돋았다. 알리야는 정말이지 눈치가 빨랐다.

"비밀 작전은 무슨! 내가 거짓말에 서툰 거 알잖아. 그런 게 있었으면 더 진작에 너한테 들켰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넌 너무 서툴러. 솔직하다 못해 투명해. 그러니까 아드리앙 앞에서도,"

"내 얘기하고 있었어?"

알리야가 말을 이어갈수록 당황하는 마리네뜨를 위해 누군가 알리야의 말을 끊어줬다. 물론 대상이 아드리앙인 탓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어? 어, 아, 어, 아드리앙? 그게!"

순식간에 고장 나 버린 마리네뜨는 제대로 된 말을 한마디도 출력하지 못했다. 결국 알리야가 대신 나섰다.

"맞아. 마리네뜨가 네 팬이거든."

"정말?"

아드리앙이 반색하며 바라보자 머리를 헤집던 마리네뜨가 딱 굳었다. 알리야가 그런 마리네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마리네뜨 장래 희망이 디자이너야. 넌 파리 최고의 디자이너의 아들인 파리 최고의 모델이니까 자연스럽게 팬이 된 거지."

진실이 적절히 섞인 거짓말이었다. 마리네뜨는 어설프게 새 핑계를 꾸미는 대신 고개를 격하게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마저도 너무나 부자연스러워서 문제이긴 했다.

'자연스럽게 좀 있어!'

'아드리앙 앞이라서 잘 안돼!'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어색한 태도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대신 마리네뜨를 더 혼미하게 만들만한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럼 이번 주말에 촬영이 있는데 보러 올래? 현장에 직접 와보면 도움이 될 거야."

"뭐어??"

"와~ 그거 좋은 방법이네! 마리네뜨, 정말 잘 됐다, 그렇지?"

'그냥 고개만 끄덕여!'

버퍼링과 오류 중 고르라면 전자가 낫다. 알리야는 마리네뜨의 말을 끊고 대신 대답해 준 다음 간단한 명령어를 입력했다. 마리네뜨가 말실수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리네뜨가 고개를 거의 털다시피 끄덕이자 아드리앙은 조금 웃었다.

"자세한 건 메시지로 알려줄게. 나중에 봐!"

아드리앙이 떠나고, 뒤늦게 머리까지 피가 돈 마리네뜨가 그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아드리앙의 촬영 현장에 초대받았어! 이거 꿈은 아니지?"

"자, 꿈이 아니야. 됐지?"

이런 반응에 익숙한 알리야가 마리네뜨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으아아. 아파, 알리야! 그보다 내가 팬이라는 걸 알려줘 버리면 어떡해! 아드리앙은 날 평범한 친구라고 생각했을 텐데, 이제 부담스러워할 게 분명해!"

"그럴 리 있겠어? 친구이면서 팬일 수도 있지, 뭐. 오히려 좋아하는 눈치기도 하고. 불편했으면 촬영장에 오라고 안 했겠지."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넌 다음 주까지인 과제를 오늘 안에 끝내고, 주말에 아드리앙을 만날 준비를 하면 돼. 알겠어?"

"으으, 그래. 에세이 숙제를 끝내야 했지."

마리네뜨의 불안이 다시 숙제로 넘어갔다. 알리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제때 끝내려면 많이 힘내야겠는걸.

알리야는 마리네뜨가 에세이를 쓰는 것을 지켜보며 한가지 문제점을 깨달았다. 마리네뜨는 완벽함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옛날이야기는 대충 얼버무려도 될 텐데 그걸 기억해 내겠다고 시간을 낭비하질 않나. 꿈은 크게 가져도 될 텐데 지금 실력으로는 어림 없으니 수준에 맞는 목표를 쓰겠다고 또 자기 비하를 쏟아내질 않나. 결과적으로 에세이는 '완성'에서도 '완벽'에서도 멀어지고 있었다.

마리네뜨가 원래도 지나치게 솔직하고 자존감이 낮은 편인 건 알았지만, 요즘 들어 그게 좀 심했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알리야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당연히도 마리네뜨가 파리의 평화와 안전이라는 책임을 짊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지만, 마리네뜨는 자신의 힘이 과분하다고 생각했고 책임에 짓눌리고 있었다. 완벽함에 집착하는 것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파리 전체가 위험해지니까 실수는 허용되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의 촬영장에 가기 전날까지도 과로했다. 악당은 영웅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사정은 더더욱.

심지어 촬영장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급하게 마농을 맡아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급하게 알리야에게 구조요청을 넣자 알리야는 기꺼이 마리네뜨를 도와주러 왔다.

"에세이를 아직 다 못 썼다고? 어쩔 수 없네. 오늘 아드리앙 촬영하는 거 보면 정리가 좀 더 잘 될지도 몰라. 그럼 밤을 새워가면서 쓰면 되겠다."

"또 밤을 새워야 한다니······."

"진작 써두라고 했잖아! 자업자득이야."

며칠 동안 마리네뜨의 '업'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모르는 알리야가 신랄하게 말했다. 신나서는 숙제는 자기처럼 제때제때 해야 한다고 한마디를 얹는 마농은 덤이었다.

촬영장이 야외였기 때문에 알리야는 촬영장까지 마리네뜨와 함께 간 다음 마농만 데리고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피해주기로 했다. 굳이 촬영장까지 간 이유는 마리네뜨의 표정과 행동을 바로잡아 줘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였다.

"헉, 방금 아드리앙이 이쪽을 본 것 같아!"

"그러네, 손도 흔들고 있고. 애초에 아드리앙이 초대한 거니까 당연한 거겠지."

심지어 아드리앙은 마리네뜨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까지 했다. 알리야는 마농을 안고 있지 않은 손으로 마리네뜨의 등을 툭 쳤다. 마리네뜨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부자연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마리네뜨, 왔구나. 오늘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야. 기껏 널 초대했는데 비라도 올까 봐 걱정했어."

"그, 그러게! 정말 좋아해! 내 말은, 좋다고! 날씨가 말이야!"

"오늘 일기예보를 보니까 하루 종일 날씨가 좋을 거라더라. 날씨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난 눈이 왔으면 좋겠는데!"

마농이 말하자 알리야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는 핑계로 촬영장에서 멀어졌다. 촬영장에는 아드리앙과 마리네뜨, 그리고 사진사만 남았다. 물론 이 공간의 주인에 가까운 건 사진사와 아드리앙이었고, 마리네뜨는 구경꾼에 불과했지만 그것조차 좋았다. 그때 사진사가 촬영을 재개하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난 촬영 마저 해야겠다. 편하게 있어, 마리네뜨. 너한테 도움이 되면 좋겠다."

아드리앙이 급하게 촬영에 돌아가느라 마리네뜨가 말실수를 하는 일은 다행히도 없었다.

마리네뜨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아드리앙의 모습이 화보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아드리앙의 등에 대고 마리네뜨가 중얼거렸다.

아드리앙의 밝은 금발과 연한 녹안이 태양에 반짝였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도, 상쾌한 녹음도 아드리앙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마리네뜨, 아드리앙이 뚫어지겠다."

가방 속에서 얼굴을 살짝 꺼낸 티키가 작게 웃었다. 하지만 저런 모습의 아드리앙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잖아, 라고 생각한 마리네뜨는 그 말을 대답으로 해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러 이유에서 촬영장이 야외라 다행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아드리앙을 보고 달아오른 마리네뜨의 열기를 금세 식혀줬다.

"그런데 좀 추운 것 같지 않아?"

"글쎄, 잘 모르겠는데?"

티키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팔을 문지르자 그제야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종일 맑다고 했는데 먹구름이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건 설마.

"꺄아아아아아악!"

바람과 구름이 밀려오는 것과 같은 방향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마리네뜨! 검은 나비인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얼른 변신해야겠어."

품 속에 있던 티키와 작게 대화를 나눈 마리네뜨가 숨어 변신할 만한 곳을 찾았다. 근처에 있을 알리야와 마농, 그리고 아드리앙과 아드리앙의 촬영을 지켜야 해!


한편 아드리앙도 급하긴 마찬가지였다. 기껏 촬영장에 친구들을 초대했는데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하지만 플랙은 자신의 속도 모르고 아직도 치즈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시원하고 좋기만 하네. 그냥 좀 즐기자!"

"즐기긴 뭘 즐겨, 얼른 이리 와!"

아드리앙은 플랙의 사고방식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심각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가끔 너무 안일하게도 느껴졌지만 대부분 자신도 여유롭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하는 날이었다. 마리네뜨에게 촬영에 대한 좋은 기억을 주고 싶었다. 악당이 끼어들어 망치게 둘 수는 없었다.

억지를 부려도 요정은 미라큘러스 소유자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 플랙은 까망베르 치즈를 베어 물다 말고 반지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플랙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지 않아도, 플랙이 가진 힘을 얻은 아드리앙은 자신감이 좀 생겼다.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스토미웨더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스토미웨더의 폭풍에 단숨에 나가떨어진 블랙캣이 레이디버그 앞에 떨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고양이인가?"

레이디버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블랙캣은 방심했다고 투덜거리며 레이디버그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때 온몸에 폭풍을 두른 스토미웨더가 먹구름을 이끌며 다가왔다.

"속보입니다. 무당벌레와 고양이를 멀리 날려버릴 강풍이 불어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지금 당장!"

"이제 마른하늘이 아니게 됐네."

블랙캣의 말이 끝나자마자 먹구름과 바람이 휩쓸려왔다. 차와 버스가 종잇장처럼 날아다니고 바닥은 빙판이나 다름없었다.  쉴 틈 없이 폭풍이 불어대니 공중전도 여의치 않았다.

'어쩌지? 지금 행운의 부적을 써야 하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게 낫나?'

날아가려는 블랙캣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할까? 폭풍이 멈추면 바로 달려들까?"

"생각할 시간을 줘. 아직 정리가 잘 안 돼."

"시간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끌어줄게. 말만 해."

말은 든든했지만 스토미웨더의 공격에 뼈도 못 추리던 블랙캣이다. 섣불리 움직이면 둘 다 위험해 질 게 뻔했다.

"우선 피하자!"

바람이 멎자 블랙캣은 고양이답게 금세 균형을 잡았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은 건물 너머로 몸을 숨겼다.

"숨어도 소용없어! 곧 어마어마한 폭풍이 몰려와서 파리 전체를 날려버릴 거니까! 아무것도 남김없이, 전부 다!"

의기양양하게 새 예보를 외친 스토미웨더는 옆에 있던 미레유의 전광판이 거슬렸는지 우산을 꽂아버렸다.

'역시.'

"뭔가 눈치챈 모양이네?"

"어, 어떻게 알았어?"

"표정을 보면 알지. 그래서, 저 얼음 공주님의 약점은 뭐야?"

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신하기 전까지는 말을 아끼고 싶었지만 블랙캣이 눈치채버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약점이라고 확신할 수 없어. 스토미웨더는 공격하기 전에 항상 예보를 해. 그러지 않는 건 미레유와 관련된 것뿐이야."

"그러니까 질투심이 약점이라는 거지? 약점까지 알았으니 그럼 더 망설일 것도 없겠네. 어떻게 하면 돼?"

"아직 확실하지 않아! 이대로 갔다간 너랑 나까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구."

"네가 세운 계획에 우리 능력이 더해지면 실패할 일이 어딨어. 그리고 실패하면 어때. 다시 하면 되지."

"우리가 실패하면 파리가 위험해지잖아!"

레이디버그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완벽한 영웅 레이디버그 속에서 덜렁이 소녀 마리네뜨의 불안이 요동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넘치는 블랙캣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반면 블랙캣은 변신 전의 신중했던 때와 달리 여유가 넘치는 기분이었다. 무력한 일반인이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블랙캣의 능력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레이디버그가 곁에 있었다.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여름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순간이 좋았다. 그 순간의 레이디버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디버그에게 확신을 주고 싶었다. 그렇다면 스토미웨더가 날뛰어도 날이 갠 것 같아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실패하더라도 그게 완전한 실패는 아닐 거야. 우리가 스토미웨더를 유인하는 데 실패한다고 단번에 우리 정체가 밝혀지고, 미라큘러스를 뺏기고, 파리가 전부 날아가 버리진 않겠지, 안 그래?"

레이디버그는 그제야 자신의 사고가 극단적으로 튀었다는 것을 알았다. 알리야나 티키도 자주 지적해준 부분이다. 상황은 제 생각만큼 나쁘게 흘러가지 않을 거라고. 마리네뜨 혼자만의 일이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파리 전체의 평화가 걸려있는 상황이긴 했다. 이쪽에 초능력이 있는 만큼 저쪽에도 파리를 날려버릴 힘이 있었다. 그래서 레이디버그는 힘이 아니라 블랙캣을 믿기로 했다.

"방송국으로 갈 거야. 따라와 줘!"

요요를 손에 쥐고 일어선 레이디버그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블랙캣은 그 눈동자를 자신의 눈에 담았다.

"물론이지, 마이 레이디."


밤 눈이 밝다는 건 참 편리한 기능이었다. 스토미웨더가 잠식된 곳으로 추정되는 방송국의 저층은 전등이 모두 부서져 있었다. 방송국 구조에도 어두운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은 블랙캣이 송출실까지 달렸다.

"이제 뭘 하면 돼?"

"스토미웨더를 유인할 거야. 그러려면 미레유가 필요해."

레이디버그가 손짓하자 블랙캣이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둘의 손발이 잘 맞았던 덕에 스토미웨더가 있는 파리 한복판까지 금방 영상이 송출됐다. 블랙캣이 방송국의 구조와 기기에 빠삭한 것도 도움이 됐다.

―여러분, 이제까지의 엉터리 일기예보는 잊으세요. 이제 '진짜' 기상캐스터가 올바른 일기예보를 해줄 테니까요!

"뭐?"

미레유의 풍선에 서리 조각을 날리던 스토미웨더가 레이디버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건물에 붙어있던 대형 모니터에 레이디버그가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돌아가더니 미레유의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미레유 까께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쨍그랑!

화면을 부수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스토미웨더는 모니터를 통째로 날려버리고는 방송국을 향했다.

자신에게 뼈아픈 패배를 남겨준 장소. 자신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미레유가 있는 방송국의 송출실 문을 날려버릴 듯이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건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뿐이었다.

"어때? 미레유의 오디션 영상. 아주 재능이 넘치지 않아?"

"영상을 조금만 더 봤다면 함정이라는 걸 눈치챘을 텐데. 질투심에 눈이 먼 네 패배야, 스토미웨더!"

"이익···!"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스토미웨더가 거대한 폭풍을 날렸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휘청이고 조명이 깨졌다. 스토미웨더는 그 틈을 타 문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블랙캣!"

"좋았어!"

하지만 그것도 예상했는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블랙캣이 스토미웨더를 붙잡았다. 바람을 만들 수 없어 팔을 휘둘러 떨쳐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네 말대로야! 강풍을 만든 직후에는 곧바로 능력을 쓰지 못해!"

약점에 이어 능력의 허점마저 파악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고대의 재앙에 우산이 부서진 뒤였다.

그리고 레이디버그가 미리 불러 둔 행운의 부적이 빛을 발했다. 손전등 빛에 검은 나비의 날갯짓이 잡혔을 때 게임은 완전히 끝났다.

""임무완수!""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이 주먹을 부딪쳤다.

변신이 풀리기 전, 두 사람은 건물 옥상에서 맑게 갠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각자의 마음에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레이디버그는 아드리앙의 태양같이 찬란한 머리카락을 생각했고, 블랙캣은 레이디버그의 눈을 바라봤다.

"파리의 맑은 날을 되찾아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하늘을 보고 네 눈을 닮았다고는 못하게 됐을 테니까."

블랙캣의 능청스러운 말에 레이디버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이 접혀 눈동자가 조금 덜 보였지만, 블랙캣은 그게 훨씬 좋았다. 확신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보는 사람까지 따라 웃게 하는 미소. 그런 것들이 레이디버그를 사랑하게끔 했다. 그리고 자신이 레이디버그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제 맑은 하늘도 돌아왔으니 촬영도 계속해야 했다. 자신과 레이디버그가 구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촬영이 기대됐다. 마리네뜨도 좋아해 줄까?

"슬슬 돌아갈까? 변신도 풀릴 때가 다 됐고."

"잠깐만."

떠나려는 블랙캣을 레이디버그가 붙잡았다. 귀걸이를 봤을 때 남은 시간은 1분 내외였다. 이대로면 레이디버그의 변신이 풀려버린다.

"블랙캣, 나는······."

레이디버그가 말끝을 흐렸다. 블랙캣이 오히려 조급해졌다. 레이디버그의 손을 잡으려던 찰나, 변신이 풀렸다.

레이디버그를 부르려던 블랙캣은 자신도 모르게 눈앞에 나타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네뜨."

레이디버그가 스스로 정체를 밝혔다는 사실 만큼이나 그 정체가 마리네뜨였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아주······ 좋은 의미로.

레이디버그가 되면 평소보다 자신감이 생겼다. 항상 받던 걱정스러운 시선들이 동경으로 바뀌니 꼭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마리네뜨가 하는 실수를 레이디버그는 하지 않았다. 하면 안 됐다.

함께 파리를 지킬 의무를 짊어진 블랙캣에게 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전처럼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들었다. 자신을 믿어주던 블랙캣을, 자신도 믿는다는 의미.

가면을 쓰고서도, 가면 아래의 모습을 고백하려니 꼭 좋아하는 사람의 앞에 선 것처럼 혀가 꼬이고 몸이 굳었다.

그래서 레이디버그는 말을 하는 대신 기다렸다. 귀걸이가 반짝이고, 변신이 풀려 본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자존감이 낮고 잘난 게 없는 덜렁이의 모습이 드러나 버릴 때까지.

"···마리네뜨."

블랙캣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를··· 알아?"

"당연하지, 왜냐하면 나는―."

말을 멈춤과 동시에 블랙캣의 변신도 풀렸다.

마리네뜨의 눈앞에는 맑게 갠 하늘을 보며 떠올렸던 사람이 있었다.

"아드리앙···?"

좋아하는 사람의 앞에 선 것 같았던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의 앞이었을 줄이야.

"네가 레이디버그였구나, 마리네뜨."

아드리앙은, 블랙캣은 뜻밖에, 아니 예상했던 것과 완벽히 다르게 행동했다. 그는 마리네뜨와 레이디버그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파리를 구하는 영웅이라는 게······."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해? 넌 늘 정의롭고 당당했어. 너라서 좋아했던 거야."

"나를 좋아했던 게 진심이었어? 너도 나를 좋아했다고?"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마리네뜨가 처음으로 레이디버그와 마리네뜨를 동일시했다. 동시에 자신이, 혹은 자신도 아드리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말해 버리고 말았다.

"쭉 진심이었어. 혹시···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야?"


촬영장으로 돌아오자 알리야가 마농과 함께 아드리앙과 마리네뜨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농과 알리야는 아이스크림을 사자마자 날씨가 나빠져 방금 산 아이스크림을 내팽개치고 근처 가게로 들어갔다고 했다. 가게 주인의 친절로 다 같이 따뜻한 물을 마시며 버틸 수 있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나저나 넌 어때? 몸은 괜찮아?"

"어, 나? 나는···."

아무런 변명도 떠올리지 못한 마리네뜨가 말을 더듬었다.

"마리네뜨는 계속 나랑 있었어."

그때 아드리앙이 말했다.

"어?"

"도망치다가 우연히 같은 곳에 있게 됐는데, 스토미웨더가 우리가 있던 곳을 얼려버렸거든. 얼음이 녹아서 이제 겨우 나왔어. 그렇지?"

"어, 응! 맞아! 그렇게 됐어!"

마리네뜨가 허둥거리는 것이 아드리앙의 옆에 서 있기 때문으로 오해한 알리야가 알만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랬구나. 무사했다니 다행이다. 이제 안전해졌으니까 촬영도 계속 되려나?"

"응, 그럴 것 같아."

아드리앙이 장비를 다시 세팅하는 사진사를 향해 눈짓했다. 얼마 안 되어 그가 아드리앙을 불렀다.

"그럼 다녀올게. 마리네뜨, 계속 있어줄 거지?"

아드리앙이 마리네뜨에게 물었다.

"응, 당연히···!"

'어라, 얘네들······.'

알리야는 둘의 기류가 조금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 눈빛의 온도나 다정함의 농도. 무엇보다도 마리네뜨의 태도가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가까워진 마음의 거리가 상당히 줄어든 것 같았다. 먹구름이 드리워진 동안 둘 사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촬영이 끝나면 물어봐야겠네.'

해명해야 할 것이 늘어난 줄도 모르고,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가올 미래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전처럼 이 순간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래가 기대될 정도였다.

아드리앙의 곁에 있고 싶었다. 아드리앙이 그렇게 해주는 만큼, 자신도 아드리앙의 책임을 나눠 들어주고 싶었다. 함께 파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아드리앙과 눈이 마주쳤을 때, 둘은 서로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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