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버그 소설 재업

[아드마리] 치수재기

시즌 1 기준

마리네뜨는 벨을 누르기 전 잠시 심호흡을 했다. 디자인 노트를 쥐고 있는 손에서 땀이 배여나왔다. 머리 끝까지 긴장에서 뿜어나온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랑스 파리 21구 고틀릭 가 7번지. 그 성벽과 같은 담장 밑에서  마리네뜨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을 한 번 삼키곤 담벼락으로 한 걸음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곧이어 머리 위에서 카메라가 달린 둥근 구체가 튀어나왔다. 이미 예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리네뜨는 자신의 심장이 방금 땅으로 굴러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누구시죠?"

저 비서의 목소리는 언제나 들어도 깔끔하게 잘린 유리 단면을 보는 것 같단 말야. 마리네뜨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을 억누르며 머릿 속으로 할 말을 침착하게 골라내고 배열했다. 하지만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애처로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그, 그게. 저, 그러니까. 공모전이요! 가브리엘 사! 이번 시즌 공모전에서 우승을 했더니……."

"들어오시죠."

준비한 말의 반도 내뱉지 못했는데 비서는 칼같이 그녀의 말을 끊더니 문을 열었다. 마리네뜨는 걸어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했던 말들이 모두 끓어 올라서 머리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마리네뜨가 정원을 가로질러서 집의 정문에 닿자, 정문이 부드럽게 안을 향해서 열렸다. 방금 전까지 인터폰으로 대화하던 비서가 그녀의 눈 앞에 서 있었다.

"가브리엘씨는 바쁜 관계로 간단한 안내사항만 남기셨습니다. 곧바로 안내해드리죠."

비서는 그녀에게 짤막하게 말을 남긴 후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네뜨는 그런 비서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았다. 아드리앙의 집은 크리스마스에도, 그리고 레이디버그의 모습으로 몇 번 들어온 적이 있었지만 중세 대 저택같은 실내구조는 언제나 신기했다. 비서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기에 그녀는 홀 중앙의 아그레스트 가족 그림을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아마 작년에 그려진 것이겠지. 마리네뜨는 약간은 울적한 표정의 아드리앙을 보다가 그와 함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당신과 닮았어요.' 어디선가 아드리앙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들어가겠습니다."

잠시 후 비서가 어느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마리네뜨는 방문을 알아보고 숨을 들이켰다. 아드리앙의 방이잖아! 마리네뜨는 간신히 가라앉혔던 수증기가 다시 머릿속을 꽉 채우는 것을 느꼈다. 마리네뜨는 한 손으로 비서의 옷자락을 황급히 붙잡았다.

"제가 오늘 해야하는 게 설마!"

"아, 들어와요, 나탈리."

비서가 그녀의 말에 답해주기 전 방문을 뚫고 그녀의 귓가에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닿았다. 마리네뜨는 믿기지 않는 다는 눈빛으로 방문과 비서를 나란히 바라보았다. 비서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문을 열었다. 오른쪽 면을 가득 채운 창에서 햇빛이 쏟아졌다. 그 가운데 한 소년이 하얀 티셔츠에 회색 츄리닝 바지를 입은 채로 서 있었다. 소년이 마리네뜨를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이내 손을 흔들었다.

"오늘 온다던 디자이너가 너였구나, 마리네뜨!"

소년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마리네뜨는 자신의 심장과 뇌가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비서가 그런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드리앙에게 다가갔다. 마리네뜨는 비서가 아드리앙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치수를 잴 준비는 다 된건가요, 아드리앙."

"네, 방금 샤워도 했는걸요."

"그럼 마리네뜨양에게 무엇을 해야하는지 설명만 해주면 될 것 같군요. 마리네뜨양?"

마리네뜨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랬다. 오른손을 들고 "네… 네!"라고 외치자 그 모습을 본 아드리앙이 웃음을 터뜨렸다. 마리네뜨는 부끄러움에 황급히 손을 내렸다. 비서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전달이 안 되었다니 이상하군요. 분명히 메일이 갔었을텐데…. 마리네뜨양이 해주셔야 하는 일은 이번 가브리엘 201X S/S 컬렉션 런웨이에 올라갈 정장을 디자인 하는 일입니다. 모델은 바로 가브리엘사 전속 모델 아드리앙 아그레스트군이고요. 오늘은 디자인 및 제작에 앞서서 치수 확인을 위해 모델과 한 번 컨택하시라고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아드리앙이 입을 정장을 디자인 해야한다고요?"

"그렇습니다."

마리네뜨는 잠시 자신의 손등을 꼬집었다. 얼얼했다. 꿈이 아닌 걸까? 마리네뜨는 자신이 입을 살짝 벌리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비서를 바라보았다. 비서의 옆에 서 있던 아드리앙이 그녀에게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그의 머리카락이 아직 마르지 않아 물기가 배여있었다. 그 때문인지 소년의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 더 여름날의 초목처럼 싱그러워보였다.

"잘 부탁해, 마리네뜨."

마리네뜨는 머뭇 거리며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잡는 순간 손끝부터 시작된 열기가 순식간에 심장을 치고 들어왔다. 마리네뜨의 뺨이 붉어졌다. 아드리앙에게서 갓 피어난 캐모마일의 향기가 났다. 마리네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운명의 여신이 무슨 장난을 치는 건지 몰라도,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심장이 고삐를 놓친 말처럼 날뛰었다. 마리네뜨는 자신의 고동소리가 부디 맞잡은 손을 통해 그에게 전달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럼… 이번에는 팔을 들어줄래?"

마리네뜨가 그의 목덜미에 감겨있던 줄자를 풀면서 말했다. 아드리앙은 자신의 목가를 스치는 줄자를 바라보다  순순히 그녀의 말대로 팔을 들었다. 목을 지나 어깨를 스치는 줄자의 끝이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웠다. 마리네뜨가 줄자를 잡고 그를 끌어안듯 그의 어깨 아래로 자신의 팔을 넣었다. 그리고 줄자를 당겨 그의 가슴팍을 죄었다. 한동안 평소보다 더 당황해하며 실수를 하던 마리네뜨는 누가 디자이너가 꿈이 아니랄까, 줄자를 잡자 인격이 바뀐 것처럼 그녀는 그의 치수를 재는 데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42인치. 좋아"

마리네뜨가 중얼거리며 다시 줄자를 풀었다. 마리네뜨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머리네뜨의 머리는 마치 밤하늘을 작게 펼쳐놓은 것 같았다. 아드리앙은 간지러움을 찾으며 이 모습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아니. 마리네뜨는 내 뒷자리인데. 아드리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마리네뜨의 가느다란 팔목과 손가락이 조명에 더 하얗게 빛났다. 마리네뜨는 디자인 노트를 펼친 채 가슴둘레를 써 넣었다.

"이제 허리를 잴게. 팔은 잠깐 내려도 좋아."

마리네뜨의 말에 아드리앙은 팔을 잠시 내렸다. 역시 마찬가지로 그를 살짝 끌어안듯이 마리네뜨가 다가왔다. 다시 한 번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마리네뜨의 숱 많은 속눈썹이 빛을 받아 광섬유처럼 반짝거렸다. 그녀가 살짝 눈을 내리까느라 보이는 눈꺼풀이 파리했다. 아드리앙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삼켰다.

"허리는 32인치네. 역시 상체근육이 상당히 발달해서 차이가 좀 있구나."

마리네뜨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드리앙은 자신의 뺨에 열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다시한 번 몸을 감싸고 있던 줄자가 풀렸다. 마리네뜨는 다시 공책을 펴고 그의 허리치수를 써 넣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앙은 숨을 들이마쉬었다. 한 순간 마리네뜨의 모습에서 레이디버그가 겹쳐보였다. 설마. 아드리앙은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숨을 천천히 들이마쉬고 내뱉었다. 미소를 지으며 공책에 그의 허리둘레를 써넣은 마리네뜨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아드리앙은 블랙캣처럼 몸이 좋구나."

순간 공기가 멈췄다. 과열된 공기가 폭발하기 바로 그 직전에 잠시 정체된 것 같았다. 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앙은 자신이 얼어붙었다고 생각했다. 마리네뜨가 숨을 들이켰다. 마리네뜨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녀의 뺨이 홍매화를 올려놓은 것처럼 발그레 물이 들었다.

"아, 그게! 그러니까……. 내가 저번에 블랙캣을 만났는데 몸이 진짜 좋더라고! 아니, 네가 블랙캣보다 훨씬 낫지만, 어, 그러니까. 역시 둘 다 운동을 해서 그런가봐! 블랙캣은 그러니까, 사람을 구하는 것도 운동이라고 치면……."

당황한 마리네뜨가 횡설수설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아드리앙은 뇌가 센 공에 머리를 맞은 것처럼 붕붕거린다고 생각했다. 다행이 마리네뜨의 말을 보아하니 그의 정체를 예상하고 말한 것 아닌 것 같았다. 아드리앙은 자신이 마리네뜨를 블랙캣의 모습으로 몇 번 보았는지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빌런에게서 도망치느라 마리네뜨를 안은 적도 있었지. 그 때 신체 치수를 본 건가? 디자이너 지망생이라 그런가? 생각이 여기까지 오자 당황으로 물처럼 끓어오르던 머리 속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는 평정을 가장하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했다.

"고마워."

마리네뜨가 그의 말에 횡설수설을 멈췄다. 마리네뜨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줄자를 집어들었다. 아드리앙도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마리네뜨가 도착하기 전 플랙을 까망베르 상자에 넣은 채 침대 위에 올려놓은게 천만다행이었다. 쭈볏거리며 다가온 마리네뜨가 이번에는 그에게 팔을 옆으로 살짝 벌릴 것을 부탁했다. 아드리앙은 다시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줄자가 그의 팔뚝에 스쳤다. 아드리앙은 치수를 재는 마리네뜨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작은 크로스백을 메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하면서 불편하지 않을까. 아드리앙은 그녀를 불렀다.

"마리네뜨."

"어, 어?"

그의 목소리에 간신히 진정한듯한 마리네뜨의 목소리가 다시 튀어올랐다. 줄자가 풀려서 미끄러졌다. 마리네뜨가 잠시 낭패란 표정을 지었다. 또 어딘가 익숙한 표정이었다. 아드리앙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이내 그녀가 무엇을 닮았는지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고 생각하고 있던 것을 물었다.

"가방을 메고 하면 불편하지 않아?"

"아, 괜찮아. 이건 메고다니는 게 오히려 익숙하거든."

마리네뜨가 그의 말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의 가방은 작고 끈이 얇아 그렇게 많이 거추장스러워보이지는 않았다. 아드리앙은 그녀가 평소에 학교에서도 그 가방을 언제나 메고 다녔다는 것을 떠올렸다. 수업시간에도 그녀는 그 작은 가방을 내려놓고 다닌 적이 없었다.

"뭔가 중요한 게 들었나 봐?"

미처 생각할 틈도 없이 질문이 혀를 박차고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그의 질문에 이상하단 표정을 짓던 마리네뜨는 그가 이 질문을 하자 줄자를 떨어뜨렸다. 당연히 중요한 게 있으니까 매일 가지고 다니겠지. 아드리앙은 생각할 틈도 없이 나와버린 질문을 질책했다. 마리네뜨는 당혹과 의미심장이 같이 담긴 눈빛으로 그와 자신의 가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줄자를 주워 그의 팔에 걸쳤다.

"응."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답했다. 옆모습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기 힘들었다. 마리네뜨가 다시 그의 팔을 줄자로 죄었다. 그녀의 시선은 줄자를 향했고, 입매는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아드리앙은 얼굴의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을 느꼈다. 뭔지는 몰라도 그가 말실수를 한 게 틀림이 없었다. 곤란한 질문이라 마리네뜨가 답하지 않고 그의 말을 피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팔 치수를 잰 마리네뜨가 디자인 공책 쪽으로 걸어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행운의 부적이 들어있거든. 보여줄 수는 없지만."

행운의 부적이란 단어에 잠시 레이디버그가 떠올라 그는 손끝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마리네뜨에게서 위화감을 느낀 이유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알리야로부터 마리네뜨가 사실은 레이디버그와 친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아드리앙은 마리네뜨 몰래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방 안에 든 것은 아마 레이디버그가 준 것이 틀림이 없었다. 마리네뜨가 그가 말을 하기 전 보여줄 수 없다고 딱 선을 그은 것이 아쉬웠지만 아드리앙은 빠르게 체념했다. 뭐, 너무 궁금하면 블랙캣으로 변신했을 때 레이디버그에게 직접 물어보자. 아드리앙은 괜한 생각하지 말자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마리네뜨가 자신의 다리 길이를 재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손을 위로 뻗었다. 눈도 살짝 감았다. 줄자의 끝이 허리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간지러웠다.

감긴 눈꺼풀 위로 금빛으로 물든 노을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눈을 감았기에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의 희고 가는 목이 당혹감으로 붉게 물든 것을 알지 못했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이 눈을 감은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티키가 그녀의 가방을 톡톡쳤다. 마리네뜨 또한 가방을 살짝 쳤다. 그리고 가방을 전 보다 눈에 띄지 않도록 조금 뒤로 고쳐 멨다. 마리네뜨는 다시 줄자로 시선을 옮기며 오른손에 밴 땀을 대충 자켓에 닦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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