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버그 소설 재업

[캣버그] 꽃다발

시즌 1 기준

꽃다발을 샀다.

원래 꽃다발을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꽃가게에 들릴 계획도 없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고릴라를 닮은 경호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들린 후 화보촬영을 위해 밖에 나갈 계획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탈리가 여느때와 똑같은 일정을 읊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멍하니 차의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경쾌한 걸음을 이어나갔다. 하늘은 맑았고 가로수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꽃봉오리들이 맺혔다. 봄내음이 천천히 거리를 점령해나가고 있었다.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부딪히는 게 상쾌해 보여 그도 봄바람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맡기고 싶어졌다. 창문을 내리고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민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나탈리가 위험하다며 평소 그녀답지 않게 질색을 했지만 그 목소리는 그에게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의 눈에 길거리의 꽃가게가 들어온 탓이었다.

"잠시 차 좀 멈춰 주시겠어요?"

그는 저도 모르게 차를 멈춰 세웠다.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 인도 곁에서 멈췄다. 그는 차 문을 열었다. 어느 순간 다시 깔끔한 사무비서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탈리가 한쪽 눈썹을 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삼십 분 뒤에 화보촬영이 있습니다, 아드리앙."

"오 분 내로 다녀올게요. 잠시만요."

아드리앙은 미안하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탈리는 그의 그런 미소에 약했다. 역시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탈리는 다시 앞을 쳐다보고 기계처럼 말했다.

"딱 오 분이에요."

오 분이면 충분하지, 아드리앙은 꽃가게로 달려갔다.

꽃가게에 간 것은 어쩌면 봄바람이 그의 마음을 너무 흔들어서 일지도 몰랐다. 꽃가게 앞에 있는 "오늘의 꽃 : 남초롱"이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봄바람에 살포시 떠오른 마음을 그 문구가 아예 저 멀리 놓쳐버린 헬륨풍선처럼 날려버렸다. 꽃가게의 유리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잠깐 뛰었는데도 설레는 마음때문인지 뺨이 발그레해지고 가슴이 어린아이처럼 뛰어다녔다. 꽃가게 주인이 그를 알아보며 놀라기도 잠시, 아드리앙은 황급히 말을 내뱉었다.

"펄이 들어간 남색 전지에 남초롱꽃 좀 포장해주시겠어요?"

꽃가게 주인은 능숙하게 종이를 재단하고 그의 부탁대로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물방울 무늬가 들어가있는 끈으로 꽃다발을 묶었다. 꽃다발에는 남색끼리 있으면 색이 죽는데다가 남초롱꽃은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다며 하얀 안개꽃까지 함께 담았다. 그녀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담아냈으니 하얀 안개꽃까지는 필요 없는데. 아드리앙은 그렇게 생각하며 꽃다발을 안았다. 그녀를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대책없는 구입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닮은 꽃다발을 안으니 기분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연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는 꽃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꽃다발의 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미소만큼이나 싱그러운 향기였다.

집으로 가면서도 그는 꽃다발이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갔다. 다행이도 나탈리는 그가 왜 꽃다발을 구입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가 가져온, 누가 봐도 레이디버그를 떠올릴만한 꽃다발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단순한 사춘기 소년의 동경으로 치부해버리는 듯했다. 아드리앙은 집으로 가는 내내 창 밖을 바라보며 빌런이 나타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품었다. 히어로로서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만큼은 호크모스가 빌런을 만들어내기를 바랐다.

* * *

하지만 그럼 바람이 애석하게도 그날은 해가 질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꽃다발의 줄기 끝을 물에 담궈놓은 채 바로 에펠탑 근처에서 가브리엘사의 이번 S/S 청소년 라인을 찍어야 했다.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했던 그는 총 15제품의 화보를 다 찍고나서야 기대가 산산조각 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시 리무진을 타고 그의 방으로 돌아온 아드리앙은 바로 책상 앞으로 달려가 앉았다. 다행히 꽃들은 아직도 생생해보였다. 하지만 오늘 내로 그녀에게 이 꽃다발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다면 남초롱꽃은 처참하게 시들어버릴 것이었다. 꽃병을 바라본 채 한숨을 쉬는 그를 플랙이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꽃다발을 살 돈으로 까망베르 치즈를 사는 게 더 나았겠다!"

"조용히 해. 플랙."

"정말 이해가 안 가.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사랑하는 걸 넘어서 언제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꽃다발을 산 거야?"

"니가 다 사랑을 몰라서 그래."

플랙의 말을 한 귀로 흘려넘기며 아드리앙은 꽃다발을 감싸는 포장지 끝을 만지작거렸다. 펄이 들어가서 조명에 비출때마다 은하수가 펼쳐져있는 밤하늘처럼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지는 포장지가 마치 그녀의 머리칼을 연상시켰다. 실제로 만져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머리칼도 이 포장지처럼, 아니 이 포장지보다 훨씬 부드럽겠지. 그는 다시 남초롱 꽃 향기를 맡았다.

그 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림이 들렸왔다. 아드리앙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바람때문에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약하게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리앙은 황급히 창가로 다가갔다. 안타깝게도 그의 위치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변신해야겠어."

"뭐?"

갑작스런 그의 말에 플랙이 질색하며 반문했지만 아드리앙의 귀에 그런 게 들어올 리가 없었다. 변신, 블랙캣! 평소에 취하던 변신 자세를 잡을 새도 없이 그는 서둘러 블랙캣의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책상에 여전히 놓여져있는 꽃다발을 집은 채 창문을 넘어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사람들의 외침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가로등에서 가로등으로, 지붕에서 지붕으로 넘어다니며 그는 군중이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원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바라보기 위해 그들 근처에 있는 가장 높은 건물의 위에 올라갔다. 밤눈이 밝은 그에게 지금이 밤이라던가, 사람들이 사방을 메워서 가로등 불빛이 가운데까지 미치지 못한다던가 같은 사실은 문제되지 않았다. 정확히 인파 가운데에 그녀가 서 있었다. 살짝 수줍어 하면서, 부끄러워 하면서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드는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블랙캣은 바로 그녀의 곁으로 뛰어내리려다가 멈췄다. 그녀는 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들사이에서 스캔들이 생겨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꽃다발을 내민다면 그녀는 받아주긴 하겠지만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쑥덕거릴 것이며 그녀는 그에게 이러지 말라며 쓴소리를 할 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자신이 그녀를 생각하며 포장지 색상까지 골라 준비한 것을 그녀가 이 꽃다발을 보고 어느정도 알아줬으면 했다.

그래서 블랙캣은 사람들이 다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가 혼자 남게 될 때까지. 다행히 밤이 되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드디어 그녀가 혼자 남자 블랙캣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요요를 던지려던 레이디버그가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쏟아지는 달빛에 그녀의 모습이 찬란하게 빛났다. 블랙캣은 숨을 삼켰다. 그녀가 그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늦었네, 야옹아. 일은 다 끝났는데 어쩌지?"

"괜찮아. 내 일은 아직 안 끝났거든, 마이 레이디."

그녀의 목소리에 심장이 다시 주체할 수 없이 뛰는 게 느껴졌다. 블랙캣은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곁으로 뛰어내렸다. 꽃다발은 등 뒤로 감춘 채였다. 레이디버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시선에 호기심이 서렸다. 레이디버그가 자신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우리 야옹이가 알고보니 밤고양이였어?"

블랙캣은 대답하는 대신 꽃다발을 내밀었다. 레이디버그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조차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블랙캣은 자신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미소를 지었다. 잠시 그녀가 꽃을 싫어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질문은 레이디버그의 외침에 지워져버렸다.

"이거, 남초롱꽃이야?"

"응. 맞아. 레이디버그."

네가 생각나서 남초롱꽃으로 샀어, 라고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블랙캣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는 지금이 밤이라서, 레이디버그가 밤눈이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레이디버그는 그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향기를 맡으려다가 잠시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이거 나한테 주는 거 맞아?"

"물론이지, 마이 레이디."

"오늘 무슨 날이야, 블랙캣?"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말야."

흠, 흠. 레이디버그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꽃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머리칼과 그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의 포장지가 밤하늘고 섞여서 그녀가 곧 밤하늘이고 밤하늘이 곧 그녀같았다. 가슴이 벅차서 블랙캣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이디버그는 꽃다발을 껴앉고 그가 이전에 보지 못했던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두근두근. 그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붉게 달아오른 뺨에 아직 선선한 밤바람이 닿아서 시렸다.

"고마워, 블랙캣."

블랙캣은 침을 삼켰다. 그녀의 모습에 잠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속삭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또 그녀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사과하겠지. 그는 현재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그도 똑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나도."

앞으로도 너에게 꽃다발을 줄 날이 많았으면 좋겠어.

블랙캣은 눈을 감았다. 봄바람과 싱그러운 풀향기에 심장뛰는 소리가 어느 노래보다 감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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