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버그 소설 재업

[에밀리엘] 꿈은 신의 선물

시즌 1 기준

- 꿈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다.

그는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내였다. 대개 그의 꿈은 불이 다 꺼진 무대 처럼 컴컴했다. 그는 그 곳에서 안식을 취하고는 했다. 언제나 컴컴했으니, 이것이 꿈이란 것을 알아챈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잠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잠이 단순히 밤을 보내는 한 방법이며 제일 본능적인 휴식이라 생각했다. 그는 잠을 자는데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 날도 그는 잠자리에 들지 말지 고민했다. 그의 회사에서 주최한 패션쇼는 이틀 전에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가 며칠간 밤을 새가며 디자인 했던 옷들은 이미 아틀리에의 재봉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이제 당분간 그가 할 일은 없다는 것을 세 번 검토하고 나서야 그는 잠을 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잠은 제일 본능적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효율 좋은 휴식이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침실 문을 열었다. 방은 불을 키지 않아 어두웠고 크기에 비해 가구가 많지 않아 휑랑한 기분을 주었다. 그는 간단하게 씻은 후 침대보가 깨끗하게 펴져있는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침대 한 켠에 누워 잠을 청했다.

* * *

"가브리엘!"

공기를 가르고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팔 안이 묵직했다. 교과서와 여러 디자인이 그려져 있는 책들이 그의 팔 안에 들려있었다. 그는 당혹감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소녀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소녀의 얼굴은 달걀처럼 갸름했으며,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서 장난스럽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소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르려니 기억에 성에낀 유리를 덧댄 것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바람이 선선했고, 소녀는 하얀 블라우스에 회색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하늘색 치마 밑으로 하얀 양말과 캔버스화가 보였다. 소녀의 머리카락이 햇볕에 반짝거렸다.

"-!"

그가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사이에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아는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발음이었다. 소녀의 이름이었다. 그와 소녀의 눈길이 동시에 그 쪽을 향했다. 소녀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에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소녀가 또래사이에서 그럭저럭 유명한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소녀가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가야했다. 소녀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소녀가 미묘하게 발음을 끄면서 말했다.

"가야겠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이야기 하자, 가브리엘."

매니저가 듣지 못하게 하려 했던 건지, 뒷 말은 소근거림이었다. 소녀는 몸을 돌렸다. 그는 소녀의 머리카락이 한 차례 공중에서 찰랑거리는 것을 보았다. 태양이 액체가 되어서 쏟아지면 이런 모습일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가 발걸음을 내딛기 전 그녀의 가디건을 잡았다. 현재는 쓰지 않는 마감방식의 포슬포슬한 촉감이 전해졌다. 현실이었다면 그는 소녀의 가디건을 잡지 않았을 터였다. 소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오래된 극장의 무대 위에 놓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지마."

그는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무척이나 앳되었다고 느꼈다. 소녀의 이름은 발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신 그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소녀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소녀의 눈동자에 한차례 파문이 일듯 일렁였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비스듬히 몸을 돌린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휘둥그렇게 뜨여져 있었다. 햇빛이 그들의 머리 위로 산산히 흩어졌다. 그는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지말아줘."

그는 다시 한 번 내뱉었다. 긴장으로 인해 손끝이 떨렸다. 소녀가 그를 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양 손으로 자신의 가디건을 집은 소년의 손을 잡았다. 피부위로 부드러운 감각과 온기가 느껴졌다. 바람이 약하게 불었다.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 환경이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다. 소녀를 부르는 매니저의 목소리와, 그의 팔을 묵직하게 누르던 책들의 무게가 사라졌다. 비스듬히 떠있던 태양은 어느새 그들의 머리 위에서 내리쬐기 시작했다. 소녀가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소녀의 눈동자가 한 여름의 짙은 녹음처럼 반짝였다. 바람이 한차례 거세게 불었다. 소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쏴아아, 하얀색 나비들이 소녀의 뒤에서 하늘을 향해 얇고 작은 날개를 팔랑이며 날아올랐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비들이 날아오르는 소리에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하얀 나비들의 날갯짓 사이로 소녀의 입이 달싹거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올게.'

소녀가 서서히 그의 손을 놓았다. 그는 다시 소녀를 잡으려다, 주춤였다. 소녀가 그런 그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장난기가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웃음이었다. 소녀가 그를 바라보며 다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달려나갔다.

* * *

"삐비빅, 삐비빅."

그는 눈을 떴다. 미처 다 여닫지 못한 커튼 틈새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눈을 잠시 깜빡거리다, 일어나서 탁상 위의 알람을 껐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베개는 여전히 푹신했고, 침대보에는 그가 낸 주름 말고는 아무것도 잡혀있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손을 대보았다. 얼핏, 손끝으로 온기가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손바닥을 다 디뎠을 때는 온기는 커녕 약간의 싸늘함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탁상 위에 놓인 안경을 쓰고 나자 탁상 위에 놓여진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테두리가 금빛으로 장식되어있는 사진에는 꿈에서 보았던 소녀와 한 소년이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들어서 천천히 쓰다듬었다. 눈가가 시큰했다. 그는 다시 사진을 내려놓았다. 핸드폰은 벌써부터 그의 메일함에 메일이 쌓이고 있다는 듯  파란불을 내며 깜빡거렸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내려다보고 한 숨을 쉬었다. 오늘도 그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는 다리를 내려 슬리퍼 안에 자신의 발을 밀어 넣었다.

그는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기 전 검은색 나비모양 브로치를 맸다. '다시 올게.' 소녀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그는 거울 너머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이미 중년의 남성이 되었다. 붉은색 줄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매며 그는 소녀의 이름을 손쉽게 기억해냈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거울 속 사내가 씁쓸하다는 듯 웃었다. 그는 넥타이를 보기 좋게 부풀려 브로치를 감췄다. 그리고 니트 조끼를 입은 후, 하얀색 마이를 걸침으로 옷차림을 다듬었다.

오늘도 그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그는 방을 나서기 전 벽에 걸린 사진을 한 번 바라보았다. 달걀형 얼굴에, 금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인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방 안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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