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뎬
속이 울렁거린다. 눈을 감았다 떠도 바뀌는 사실은 없다. 아직도 손바닥에 촉감이 남아있다. 슈트 밑으로 느껴지던 근육의 배열. 꿈틀거리던 움직임. 애써 고통을 참는 소리와 함께 퍼져나가던 보랏빛 균열이 핏줄처럼 눈앞에 퍼져나간다. 그는 어둠 속에서 혼자다. 잊고 싶어. 하지만 잊을 수 없어. 목소리가 들린다. 그 전에는 사람에게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이러다 나무에 달려있는 모든 잎사귀들이 떨어져 다시 겨울이 될 것만 같았다. 블랙캣은 어깨를 감싸안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큰거리는 푸른 하늘이었다. 햇볕이 부드러웠지만 바람이 너무 차서 도저히 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저 멀리서 빌런이 된 마리네뜨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그녀가 입은 정장과 똑
그 날은 레이디버그가 나타나지 않은 날이었다. 간만에 얼굴 보나 싶었는데.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레이디버그가 아무 말 없이 잠적한 건 아니었다. 브레이크 고장난 버스가 대로를 질주하고 있단 소리에 황급히 변신을 했는데 레이디버그에게 음성메세지가 와 있는 걸 발견했다. "블랙캣, 내가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겨서 아무래도 도시에 나갈 수 없을 것 같
- 꿈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다. 그는 꿈을 잘 꾸지 않는 사내였다. 대개 그의 꿈은 불이 다 꺼진 무대 처럼 컴컴했다. 그는 그 곳에서 안식을 취하고는 했다. 언제나 컴컴했으니, 이것이 꿈이란 것을 알아챈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잠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잠이 단순히 밤을 보내는 한 방법이며 제일 본능적인 휴식이라 생
빌런에게 의식이 끊기는 순간은 여태 많았으나, 몇 번이나 겪어도 기분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젠장.」 빌런이 흔드는 추를 본 순간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품 안에서 레이디버그의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작은 새처럼 파닥거리는 심장이었다. 빌런의 추를 보면 안돼. 레이디버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통통 튀어올랐다. 그는 여차 싶던 순간에서 레이디버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혀와 성대로 표현하자면, 그건 필시 말이 아니라 음색이 될 터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우주였고, 그녀의 눈동자는 바다였다. 그는 우주와 바다가 원래는 이 색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세상이 그녀의 색으로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초여름의 분수대처럼 청량했고, 그녀의 몸짓은 산들바람처럼 우아했다. 어
호크모스의 미라큘러스를 빼앗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방을 메운 수 많은 흰 나비들이 차례차례 창 밖으로 날아올랐다. 햇빛에 따라 금빛으로, 때론 붉은 빛으로 빛나는 자그마한 날개들이 날아올라 창공으로 사라져갔다. 패배해 쓰러진 호크모스의 목덜미에서 미라큘러스를 빼낸 것은 레이디버그였다. 미라큘러스를 빼냄과
마리네뜨는 벨을 누르기 전 잠시 심호흡을 했다. 디자인 노트를 쥐고 있는 손에서 땀이 배여나왔다. 머리 끝까지 긴장에서 뿜어나온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프랑스 파리 21구 고틀릭 가 7번지. 그 성벽과 같은 담장 밑에서 마리네뜨는 자신의 손가락 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침을 한 번 삼키곤 담벼락으로 한 걸음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 곧이어 머리
꽃다발을 샀다. 원래 꽃다발을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꽃가게에 들릴 계획도 없었다. 오늘도 평소처럼 고릴라를 닮은 경호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들린 후 화보촬영을 위해 밖에 나갈 계획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탈리가 여느때와 똑같은 일정을 읊는 것을 들으면서 그는 멍하니 차의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이 경쾌한 걸음
아드리앙은 사탕을 좋아했다. 먹다가 지칠만큼 커다란 막대사탕에서 손바닥에 여러개 들어오는 자그마한 사탕까지. 그는 모든 사탕을 좋아했다. 달콤한게 입안에서 사르르 녹으며 혀를 감싸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잠시라도 흠집 하나 없이 행복해질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엄격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사탕을 많이 주는 것을 싫어했으나, 온화한 그의 어머니는 늘 사탕을
01 "아, 아드리앙."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였다. 말 마디마디가 입에서 토막나서 도저히 이어지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빠르게 달려가는 증기기관차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그 앞에선 짧은 몇 마디의 말 마저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마리네뜨는 다시 외쳤다. "아드리앙, 조…좋아해!" 좋아해 라는 말 만큼은 깔끔하게 내뱉고 싶었는데. 마리네뜨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