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버그 소설 재업

[캣마리] 배포전기념

시즌 1 기준 / 재업

01

"아, 아드리앙."

마리네뜨는 고개를 숙였다. 말 마디마디가 입에서 토막나서 도저히 이어지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빠르게 달려가는 증기기관차처럼 시끄럽게 울렸다. 그 앞에선 짧은 몇 마디의 말 마저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마리네뜨는 다시 외쳤다.

"아드리앙, 조…좋아해!"

좋아해 라는 말 만큼은 깔끔하게 내뱉고 싶었는데. 마리네뜨는 자신의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대신 눈을 감아버렸다. 티키, 난 정말 바보야! 마리네뜨는 속으로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이래서야 아드리앙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볼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마리네뜨는 자신의 입술을 물었다. 심장이 빠르게 달음박질 쳤다. 세게 쥔 주먹에서 핏기가 서서히 가시는 것 같았다. 머리가 뜨거웠다. 찰나의 순간이 츄잉껌처럼 길게 늘어졌다. 마리네뜨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대답이라도 좋아. 그녀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고백을 하는 것보다 한 뒤가 더 힘들구나. 얼굴이 붉어졌다. 모든 청각세포가 자신의 앞을 향해 바짝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미안, 마리네뜨."

그런 상념을 깨뜨리기라도 하듯, 아드리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나 그녀가 사랑했던 부드러운 목소리. 마리네뜨는 눈을 살며시 떴다. 심장 박동이 갑자기 느려졌다. 가슴께가 아려왔다. 갑작스런 맥박 변화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대답 때문일까. 마리네뜨는 일부러 대답을 회피했다. 얼굴로 몰렸던 열이 급작스레 식어서 오히려 차가워졌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이 시야에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위로 언제나 그렇듯 행운을 부르는 초록빛의 눈과, 미안한 듯 애매하게 찡그려진 황금빛 눈썹이 보였다. 아드리앙은 그녀에게 다가오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그녀가 불러세웠던 그 모습 그대로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을 다시 열었다. 아주 느리게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뜨거운 햇살에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처럼, 어딘가 힘겨워 보이는 모습으로 그가 말했다.

"미안해."

"…아, 아니야! 뭐, 넌 인기도 많고 잘생겼으니까. 아니! 이게 아니라. 응! 괜찮아! 정말!"

마리네뜨는 손을 내밀었다. 자신의 대답을 들으며 마리네뜨는 자신의 심장대신 돌아가고 있던 증기기관차는 이제 브레이크가 부러졌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고백을 거절당한 것의 창피함 때문인가? 마리네뜨는 자신의 신체변화를 읽을 수가 없었다. 입에 나오는 대로 다시 말을 내뱉고 마리네뜨는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떨렸다. 그의 앞에서는 자신의 안면 근육 하나 조차 제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티키, 나 어떡해. 눈가가 촉촉해져갔다. 마리네뜨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럼, 내일보자. 아드리앙!"

머릿속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맞은편에 선 아드리앙이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마음 속에서 폭풍이 몰아치게 만들었다. 왜 걱정하는 거야? 불쌍해? 불쌍해 할 거면 거절하지나 말지. 말도 안되는 원망의 말이란 걸 알면서도 마리네뜨는 그런 생각을 품었다. 뒷걸음질로 인해 아드리앙에게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지자 그녀는 바로 몸을 돌려 집을 향해 뛰었다. 이건 답을 고민하고 할 여지가 없었다. 명백한 도망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리네뜨는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마리네뜨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쉬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디자인 수첩을 꺼내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공부나 하지 뭐. 마리네뜨는 상념을 없애려는 듯 펜을 거칠게 쥐었다. 의자에 어찌나 세게 앉았는지 주머니 가방이 열리면서 티키가 빠져나왔다.

"괜찮아, 마리네뜨?"

언제나 그렇듯 티키가 맑은 종소리 같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마리네뜨는 펜을 집어들다 티키의 질문에 마리네뜨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올렸다.

"응, 뭐. 예상 못했던 결과도 아닌 걸. 아드리앙 쯤 되는 애라면 더 멋진 사람을 좋아하겠지. …나보단 말이야."

"오. 그러지마, 마리네뜨. 넌 정말 대단한 아이인걸. 너보다 멋진 사람은 없어."

티키가 그녀의 공책 곁으로 다가왔다. 마리네뜨가 펼친 면은 백지였다. 마리네뜨는 티키의 말을 들으며 펜을 들어 옷 형체를 잡을 외곽선을 긋다가, 마지막 말에 그녀의 머릿속 만큼이나 엉킨 실뭉치를 그려넣었다. 그리고 펜을 내려놓고 거칠게 공책을 찢어 손으로 구겼다. 멋진 사람이라. 마리네뜨는 꾸깃꾸깃 구겨버린 공책을 구석으로 던졌다. 날아간 공책이 벽에 맞고 다시 튕겨져 나왔다. 자신의 얼굴이 저 공책같다고 생각하면서 마리네뜨는 얼굴을 수그렸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티키, 난 레이디버그가 아니야. 그냥 마리네뜨라고. 운없고 덜렁거리는 평범한 여자아이."

"하지만 동시에 레이디버그지."

어느새 그녀 곁으로 다가온 티키가 그녀의 어깨에 자그마한 손을 올리며 말했다. 글쎄. 물론 레이디버그는 멋진 사람이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레이디버그가 되면 그녀는 알 수없는 용기가 솟았고, 뭐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리고 실제로 레이디버그가 된 그녀는 뭐든지 해냈다. 파리 전체를 지배하려던 악당의 계략도 두 번이나 저지했고, 여태까지 호크모스가 보낸 모든 검은 나비들을 정화시켜 돌려보냈다. 언제나 당당하게 웃으면서 레이디버그는 모든 것을 해냈다. 블랙캣과 함께, 마리네뜨는 그런 레이디버그가 낯설었다. 티키는 언제나 봄햇살같이 상냥한 말들을 건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빛이 물속까지 닿는 건 아니었다. 마리네뜨는 대답하지 않고 숨을 깊게 들이마쉬었다. 그리고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티…"

"마리네뜨!"

하지만 그녀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티키가 그녀를 황급히 불렀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마리네뜨는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네뜨는 옥상 문을 열고 옥상위로 올라갔다. 어딘가 탁하고 답답한 화약냄새가 났다. 난간 앞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자 사람들이 혼비백산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리네뜨는 난간을 붙잡고 밖을 향해 몸을 내밀었다. 시청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빌런이야, 마리네뜨!"

다시 한 번 날카로운 경고음처럼 티키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속을 울렸다. 아직까지도 물이 가득 찬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빌런? 이 상황에? 마리네뜨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날 까지 호크모스는 그녀를 그냥 놔두려는 법이 없었다. 영웅이 뭐라고. 마리네뜨는 홧김에 미라큘러스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티키의 눈빛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단은 빌런을 퇴치하고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먼저다. 마리네뜨는 머리칼을 넘겼다. 변신, 레이디버그! 따뜻하고 매끄러운 빛이 자신의 몸을 덮는 걸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 * *

연기 틈으로 무언가 반짝거리더니 무당벌레 무늬의 옷을 입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는 아이마스크를 쓴 채, 레이디버그는 요요를 통해 반대편 건물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연기가 거리를 덮었기에 사람들은 그녀가 TS베이커리 옥상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레이디버그다!"

"레이디버그가 왔어!"

매캐한 연기를 뚫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도망치던 사람들이 그녀를 가리키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는 그런 사람들을 등진채 눈을 가늘게 떴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빌런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번 능력을 보아 그는 폭발물질을 다루는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피해가 만만치 않으리라 예감하며 그녀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번에도 저와 블랙캣이 해결해 드릴테니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해계세요! 집이나 지하철로!"

그녀의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던 사람들이 다시 분주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리네뜨는 손을 들어 연기를 휙휙 휘저었다. 현재 미라큘러스 힘으로 보호되고 있는 것인지, 다행이 연기 속에서도 숨쉬기는 편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가시거리가 너무 짧아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굴뚝도 보이지 않았다. 요요를 휘저어 연기 속을 돌파해야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누군가 그녀의 곁에 다가왔다.

"마이 레이디, 오늘도 빠른 걸?"

"장난치지마 블랙캣, 오늘은 네 장난 받아줄 기분 아니니까."

평소라면 고양아, 라고 부르면서 네가 늦은 거라 타박을 줬으련만 오늘은 전혀 그런 기분이 나지 않아 레이디버그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언제나 그렇듯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걸어오던 블랙캣이 그녀의 말에 발걸음을 주춤거렸다. 눈이 커다랗게 뜨여있어 가면을 썼는데도 그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절레 저은 후 말을 이었다.

"빌런은 시청쪽에 있는 것 같아. 부르주아 시장님이 목표인 것 같은데,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접근하기 어렵겠어."

"좋은 수 있어?"

"글쎄, 그냥 일단은."

레이디버그는 요요 줄을 잡은 채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연기가 잠시 밀려나며 한뼘 정도 보이던 거리가 일 미터 정도로 늘어났다. 그녀는 블랙캣 곁눈질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가는 수 밖에 없겠어. 할 수 있겠지?"

"물론이지, 날 뭘로 보고."

블랙캣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봉을 꺼내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이 지붕을 뛰어다니며 시청쪽으로 다가갔다.

빌런이 된 사람은 대부분 불합리한 처사를 받아 마음에 앙금이 쌓인 사람들이다. 여기에 호크모스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한 검은나비를 불어넣으면, 그 사람은 막강한 초능력을 쓸 수 있는 악당이 되는 것이다. 시청으로 가까워질 수록 지독한 연기는 서서히 옅어져갔다. 레이디버그는 이번 빌런은 어째서 검은 나비에 잠식당했는지 궁금해졌다.

"저거, 폭탄을 설치하는 건가?"

잽싸게 그녀의 뒤를 따라온 블랙캣이 빌런을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디버그는 좀 더 가까이 살펴보기 위해 몸을 낮췄다. 빌런에게 가까이 갈 수록 연기가 옅어졌던 이유가 있었다. 지금 빌런은 뭔가를 터뜨리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매우 세심하게 시청의 겉면 전체에 무언가를 붙이고 있었다. 짙은 보라색과 하얀색으로 이뤄진 푸른 동그라미들이었다.

"부르주아 시장님이 아직 저 안에 계신 거겠지?"

레이디버그는 요요의 줄을 감았다. 현재 거리에서는 아무리 들여다보려 해도 시청의 유리창 안 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시청에 빌런이 폭탄을 설치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꽤나 꼼꼼하게 폭탄을 붙이던 빌런이 건물 뒤로 넘어갔다.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에게 눈짓을 보냈다.

"우선 내가 빌런을 상대할테니 네가 그 틈에 시장님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래?"

블랙캣이 그녀의 말에 씨익 웃으며 팔을 위로 쭈욱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초승달처럼 그의 얼굴에 걸렸다. 그의 맑은 초록빛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분부 받들죠, 마이 레이디."

블랙캣이 순식간에 봉을 늘이더니 단 두 번 만에 시청으로 넘어갔다. 블랙캣은 아주 조용히, 목에 방울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움직일 줄 알았다.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이 시청의 옥상으로 향한 것을 바라보며 가로등에 요요를 감았다. 이제 블랙캣이 돌아올 때까지는 자신이 저 악당을 상대해야 했다. 급작스레 피곤이 몰려왔지만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현재 마리네뜨가 아니라 파리의 영웅 레이디버그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들을 지켜야 했다.

타잔이 정글에서 움직였던 것처럼 그녀도 요요를 이용해서 가로등 사이를 날아다녔다. 빌런은 아직도 시청 건물의 뒤에서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시청 건물이 큰 것에 대해서 난생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빌런에게 근접한 레이디버그는 손을 들어 빌런을 향해 요요를 내던졌다. 요요가 부드럽게, 그리고 살아있는 것처럼 재빠르게 빌런의 팔목을 돌돌 말아 죄었다. 그 바람에 빌런이 들고 있던 폭탄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뭘 하려고 했는 지는 몰라도, 네 뜻대론 안 될걸!"

레이디버그는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빨리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검은나비가 어디에 숨어들었는지도 정말 명확하게 보였다. 빌런의 가방이었다. 가방이 워낙 헐렁하게 걸려 있어서 블랙캣이 나타나기만 한다면 바로 뺏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 그럼 블랙캣이 오기 전에 시간을 좀 끌까. 레이디버그는 눈동자를 굴렸다. 빌런이 계속 팔을 잡아당겼지만 케이블이 워낙 죄여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빌런의 팔이 떨리는게 케이블을 타고 그녀의 손까지 전해졌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그만 두는 게 좋을 거예요. 호크모스는 그저 당신을 이용하는 거라구요! 이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요?"

"이야기?"

빌런이 그녀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옳지, 잘하면 블랙캣 없이 혼자서도 검은나비를 정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 레이디버그는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네, 천천히 이야기 해보면 더 좋아질 거예요."

빌런이 잡아당기던 팔을 내렸다. 줄이 순간 살짝 느슨해졌다. 빌런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레이디버그는 미소를 지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주고 어서 다시 집으로 가서 변신을 해제해야지. 그리고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씻은 다음에 한 숨 자는 거야.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조금 쉬자. 레이디버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만 돌아가자구요."

그 순간 갑자기 빌런이 팔을 치켜올렸다. 레이디버그는 순간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로등에서 떨어질뻔 했다. 간신히 가로등 머리를 붙잡은 채 레이디버그는 빌런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빌런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환하게, 햇살마저 삼킬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쭈볏했다.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빌런의 손바닥에서 뭔가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다. 스위치였다. 빌런은 그녀와 지긋이 눈을 맞춘 채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콰앙!"

밑에서 매캐한 화약냄새가 피어올랐다. 가로등이 크게 진동하더니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는 서둘러 빌런의 손목에 묶인 요요 줄을 풀고 다른 가로등으로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빌런이 그녀의 요요를 꽉 쥔 채 놓아주지 않았다.

"이야기? 내가 빌런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도, 준다고도 하지 않았어!"

빌런의 고함히 귓속을 후벼팠다. 서서히 땅이 그녀의 눈앞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머리 속이 매우 끈적거리는 늪으로 가득 채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호흡이 가빠졌다. 요요를 빌런이 쥐고 있어서 줄을 더 풀 수도 없었다. 결국 레이디버그는 요요를 손에서 놓은 채 가로등을 밟고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내 계획은 이미 완성됐다고! 끼힉! 키히히히힉!"

빌런이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다시 주먹을 쥐었다. 한 쪽 손에는 그녀의 요요가 들린 상태였다. 방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어찌나 커다란지, 레이디버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하늘과 밑의 지면까지 울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발로 박차고 다시 지면에 발이 닿기까지 그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비디오 테잎을 억지로 늘인 것처럼 모든게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빌런의 웃음소리가 폭발음에 서서히 잡아먹혔다. "쾅, 콰과광!" 귀가 아팠다. 빌런은 그들이 있는 벽면 폭탄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쪽이 먼저 무너져 내리면서, 시청 전체가 그들 위로 쏟아져내리기 시작했다. 레이디버그는 시청건물의 수많은 창문들이 자신을 비추는 것을 바라보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점점 커다래지는 자신을 보았다. 공간 감각이 통째로 사라졌다. 붕괴된 시간감각 속에서 바닥에 간신히 착지한 레이디버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사라졌다. 이미 어두운데, 더 깊은 어둠이 그녀에게 다가오고있었다. 빌런의 웃음소리는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02 

영웅이라니, 분수를 알아야지. 너 같은 영웅 아무도 바라지 않았어. 어두운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오른쪽 귀에 대고 속삭였다. 차가운 숨결이 느껴져 귀 뒤로 부터 목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누군가 머리를 양 옆으로 세게 쥔 듯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번엔 왼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가의 솜털이 섰다. 영웅? 자신조차 돌보지 못하는게 영웅이야? 좋아하는 남자애에겐 거절당하고, 빌런도 잡지 못했어. 한심하다.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돌리려고 애 썼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끝없는 어둠이 그녀를 부드럽게 덮고 놔주지 않았다. 한심해, 한심해.

부르주아 시장을 내려다 준 블랙캣은 시장의 고맙다는 인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렸다. 장난기로 넘치던 그의 눈동자에 음영이 졌다. 블랙캣은 시청쪽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위에 서 있는 레이디버그가 보였다. 그는 서둘러 그녀의 곁에 가기 위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연기가 아직 많이 가셨다지만, 여전히 공기는 희뿌옜다. 블랙캣은 민첩하게 고양이처럼 양손과 양발을 이용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가로등 위에 서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굳건히 영웅과 같은 모습으로. 희미한 연기가 햇빛을 받아 그녀가 빛의 구름에 쌓여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블랙캣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파리의 진정한 영웅. 그가 보기에 그녀는 혼자 만으로도 완벽했으나, 그는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가 무너졌다.

순식간에 사고가 정지되는 듯한 폭음이 들렸다. 레이디버그가 가로등 위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요요 줄을 잡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레이디버그는 요요를 놓지 않으려는 듯 자신의 팔을 뒤로 젖히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의 요요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케이블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끝이 담벼락에 가려져 블랙캣은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이디버그, 그걸 놓아!"

"쿠구과과광!"

블랙캣이 외쳤으나 다시 한 번 시작된 굉음에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열기와 모래조각들이 섞인 바람이 그를 덮쳤다. 블랙캣은 반사적으로 팔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태양빛에 레이디버그의 슈트가 붉게 번쩍였다. 레이디버그가 요요를 놓고 가로등 위로 뛰어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건물은 그녀 바로 위로 무너지고 있었고, 매캐한 흙먼지가 그녀를 삼켰다.

"레이디버그!"

블랙캣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메마른 흙먼지가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발이 계속 미끄러져 블랙캣은 발을 다시 디뎠다. 검은 슈트 위로 근육이 솟아올랐다. 건물이 무너진 충격에 그는 고작 버티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굉음이 수시로 쉬지 않고 사방에 울려퍼졌다. 무너져 내린 아랫층 위로 다시 윗층이 허물어져 갔다. 빈 냄비를 수저로 사정없이 두들기는 것 같은 소음이었다. 햇빛이 스러졌다. 블랙캣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서지다 만 콘크리트 조각들이 여기저기로 떨어져내렸다. 태양같던 머리색이 잿빛으로 변해갔다. 철근 하나가 차에 꽂혀서 차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레이디버그."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한 번 휘몰아쳤던 바람은 빠른 시간내로 가라앉았다. 먼지는 아직도 상공을 부유하고 있었지만 소음은 이제 거의 가셨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시청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부러지다만 철근들과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엉켜있었다. 그는 먼지들이 눈을 찌르는 것도 무시한 채로 서둘러 잔해로 다가갔다. 그리고 서서히, 점점 빠르게 돌덩이들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그녀를 본 지점에서.

성가신 목소리들은 그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레이디버그는 자신이 갇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양아, 나 좀 꺼내줘. 속으로 중얼거리며 레이디버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빌런은 어떻게 되었는지, 블랙캣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게 많았다. 가슴 한 구석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목소리들은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저들끼리 주고 받으면서, 목소리들은 그녀에게 물었다. 역시 그때 알리야에게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런게 영웅이야. 그녀는 목소리들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목소리들은 집요하게 그녀의 귀 속에 자신의 말들을 쑤셔넣었다. 레이디버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눅눅해진 목소리로 외쳤다. 티키, 블랙캣. 어딨어. 나 좀 도와줘. 그러다 문득 멈췄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레이디버그!"

갑자기 눈 앞이 서서히 환해졌다. 날카로운 건물 파편의 모서리들이 그녀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때문인지, 방금 전의 충격 때문인지 손끝과 발 끝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건조한 공기가 그녀의 점막을 빠르게 말렸다. 레이디버그는 입을 열었다.

"블랙캣…."

나 여기있어. 뒷말은 쉬고 갈라져 잔해의 틈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팔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자신이 손 끝이 자신의 뜻대로 오므려 지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무거웠고, 답답했다.

"레이디버그, 거기 있어?"

귀가 좋은 블랙캣은 아주 대견하게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저 멀리서부터 조각들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얼굴에 내려앉던 답답한 공기가 사라져 레이디버그는 눈을 뜰 수 있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빛들과 역광으로 인해 그녀는 블랙캣의 형체만 인식할 수 있었다. 햇살에 찬란히 빛나는, 어딘가 부산스레 뻗어있는 금색 머리칼에 누군가 엇필 떠올랐지만 연상은 가늠하기도 전에 이내 흩어졌다. 블랙캣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레이디버그는 기침을 토했다. 그녀의 기침소리에 서둘러 블랙캣이 아직 그녀의 몸을 짓누르는 시멘트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다리를 짓누르고 있던 끝이 부러진 철근을 걷어내자 레이디버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슈트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기한 힘 덕분인지 어느 한 곳도 헤지거나 찢어지지 않았다. 레이디버그의 몸도 겉에서 보기에는 얕은 찰과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얼굴 위로 돌조각들이 굴러 떨어졌음에도 얼굴 또한 여전히 매끈하고 발그스레했다. 블랙캣은 그녀 바로 옆에서 무릎을 꿇은채 그녀의 상체를 조심히 들어올렸다. 마른 기침이 다시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고마워, 블랙캣."

블랙캣의 부축으로 간신히 제자리에서 선 레이디버그가 말했다. 아직 발끝의 감각이 없어 잔해 위에서 평정을 유지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블랙캣은 그녀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다시 한 번 블랙캣이 키가 꽤 크다는 것을 실감하며 레이디버그는 계속해서 발을 여러 방식으로 디뎠다. 빌런이 어디로 갔는 지는 알 수 없어도 더 이상의 피해를 막으려면 서둘러서 쫓아가야만 했다. 거리는 사람 한 명 없어 조용했고, 빌런이 폭탄을 터트리는 것을 멈췄는지 연기와 매캐한 냄새 또한 나지 않았다. 목이 탔지만, 물을 마시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레이디버그, 나 할 말이 있는데."

아마 다시 시장님을 쫓아갔겠지, 어서 시장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겠어. 레이디버그가 혼자서 빌런의 행보에 대한 이런 저런 가설을 세우는 동안 블랙캣이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장난기 하나 없는 그 목소리가 왠지 심장을 깊게 꿰뚫어서 레이디버그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레이디버그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올리느라 약간 앞으로 고개를 숙인 블랙캣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진한 버터색의 머리카락이 내려와 표정이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사뭇 진지한 그의 말에 심장이 뭉쳐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레이디버그는 애써 정면만 보려 노력하며 말했다.

"블랙캣…, 그런 건 나중에 이야기 하면 안될까?"

그녀의 옆구리에 얹혀있던 블랙캣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애초에 손만 올려놓은 것이었지만 그가 힘을 주자 갑갑한 기분이 들었다. 레이디버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블랙캣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장난스럽게 올라가있던 입꼬리가 땅과 수평을 그리며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의 클로버색 눈동자에 살얼음이라도 낀 것처럼 긴장이 서렸다.

"오늘따라 우리 야옹이가 왜 이러시지."

레이디버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으나 그는 여전했다. 그와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본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그의 눈빛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가슴 위에 뭔가가 얹히기라도 한 듯 불편해졌다. 진지한 그의 말투가 계속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 레이디버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블랙캣의 눈빛이 바늘처럼 얼굴과 심장을 찔렀다. 아니야, 블랙캣. 지금은 아니야. 제발. 레이디버그는 차마 할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 외쳤다. 애초에 닿을 수 없는 말들. 블랙캣이 말했다.

"이런 경우가 다시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겠지. 마이 레이디,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말하고 싶어."

블랙캣이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레이디버그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대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이 상황을 피할 수라도 있는 것처럼,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다. 저번에도 이런 적 있었어. 말은 못 들었지만 말이야. 레이디버그는 속으로 뇌까렸다. 언젠가 다시 듣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일 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하필 오늘이라니. 레이디버그는 자신이 눈을 감는 걸 보고 그가 그만 두기를 바랐다. 폭풍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나비의 날개짓처럼 아주 미약한 저항이었지만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

"사랑해. 레이디버그."

오늘의 제일 끔찍한 일을 꼽자면, 그녀는 그게 바로 아드리앙에게 거절당했던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빌런이 나타났지만 그 생각은 건물에 깔리기 전까지만 해도 확고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더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아니었다. 오늘은 정말 끔찍한 날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실연당했는데, 그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로 이번에는 자신이 그 고백을 거절해야 했다.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던 남자애와 비슷한 목소리의 고백을 말이다. 누군가 자신의 하루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이 분명했다. 아직 머리가 멍했고, 발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블랙캣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대답이 끝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레이디버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03

"블랙캣."

레이디버그는 침을 삼켰다.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아직 저 돌무더기 속에 파묻힌 듯 했다. 레이디버그는 다시 눈을 떠 블랙캣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블랙캣이 그녀를 바라보다 살포시 눈웃음을 지었다. 평소에도 많이 봐 오던 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손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어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력히 그녀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블랙캣, 나는."

레이디버그는 시선을 돌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건물 외벽에 조각되어있던 무늬들이 그녀의 발 아래에서 바스라져 있었다. 먼지와 콘크리트와 철근의 산산히 부서진 잔해들의 상이 눈을 아프게 찔렀다. 말을 잇지 않고 멈춰 레이디버그는 말을 골랐다. 자신의 말이 그에게 비수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시야가 볼품없이 녹아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미안해."

누군가 차갑게 그녀의 머리를 얼려버린 것 같았다. 머리로 향하는 핏줄까지 전부 다 꽁꽁 얼려서 더이상 생각이 돌아가지 않도록 굳혀버린 것 같았다.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입 속에서 왈칵 토해진 말이 낯설어서 다리의 저릿저릿한 감각까지 잊었다. 스스로 최대한 생각해서 말을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뱉고나니 자신이 아드리앙에게 들었던 말과 똑같았다. 그녀는 거절당하면서 들었던 말로 그를 거절했다.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바라볼 수 없었다. 보지 않아도 그가 어떤 심정일지 절실히 와닿아서 팔을 두른 그의 어깨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는 그의 손이 그대로 있다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최악의 날이었다. 아직 살 날이 더 많다해도 오늘은 영원히 최악의 날이 될 것이라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괜찮아, 마이레이디."

블랙캣이 농을 던지듯 그녀를 위로했다. 연하지만 그 특유의 장난기가 섞여있어 레이디버그는 그를 마주했다. 태양을 등져서 그런지 그의 눈이 풀빛으로 반짝였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있었다. 크레인으로 입꼬리만 들어올린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지만 블랙캣이 그 미소를 짓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기에 레이디버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블랙캣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가라앉아있었다. 속삭이는 게 아드리앙같아. 레이디버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가 울적해졌다.

"빌런이 어디로 갔는지 통 모르겠는데 말이야, 어디 짐작가는 데 있어?"

블랙캣이 화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정말 자연스럽지 못한 화제전환이었다. 하지만 그가 새로 꺼낸 화제는 아드리앙과 블랙캣에 대한 레이디버그의 상념을 잠시 가라앉히기엔 충분했다.  레이디버그는 고개를 들어 블랙캣을 바라보았다. 블랙캣이 그녀를 구출하는 동안 빌런은 어디로 갔는지 파리는 조용하기만 했다.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발목을 빙글빙글 돌려보았다. 아직 조금 저릿한 느낌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감각이 어느정도 돌아온 듯 했다.

"글쎄, 넌 어떻게 생각해?"

"시장님을 찾고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조용한 것 같지 않아?"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폭발을 일으키는 빌런은 다른 빌런들보다 더 심각하게 도시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서둘러 그에게 깃든 검은나비를 잡아야만 복구가 이뤄질텐데, 레이디버그는 똑바로 서서 자신의 허리를 여전히 감싸고 있는 블랙캣의 손을 슬그머니 자신에게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블랙캣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자신의 팔을 빼냈다. 앞을 보고 있던 블랙캣의 시선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얼굴이 절반이나 가면으로 뒤덮여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레이디버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어 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더욱 헝클었다. 부드러웠다.

"고마워, 야옹아."

"별말씀을."

그녀의 목소리에 블랙캣이 미소를 지었다. 레이디버그는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꾹 쥐어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도망쳤던 나보다 네가 더 낫구나. 레이디버그는 다시 한 번 힘주어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빌런은 다시 그들에게 나타날 것이었다. 시장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든, 그들의 미라클스톤을 빼앗기 위해서든. 호크모스가 그를 그대로 둘 리가 없다. 레이디버그는 배에 힘을 줘 외쳤다.

"가자, 블랙캣!"


* * *

"수고했어 마리네뜨!"

가볍게 날아서 지붕에 착지한 뒤, 변신을 해제하자 티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나와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로 발랄하게 말했다. 마리네뜨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짓고 바닥에 자리잡은 문을 열고 침대 위로 폭 뛰어내렸다. 그리고 더 내려가지 않고 바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마리네뜨, 괜찮아?"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래, 티키."

티키가 그녀의 머리 맡으로 날아오며 물었다. 마리네뜨는 여전히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 대답했다. 변신을 풀고나니 손끝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군데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씻어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 떠오른 말은 의지를 품지 못하고 새어나와 바로 베갯잇에 먹혀버렸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티키가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의 머리 주변을 돌아다녔다.

"티키, 나 정말 괜찮아. 씻는 것도 내일 아침에 씻으면 되는 걸."

계속해서 걱정하느라 안절부절 못하는 신경이 쓰여서 티키에게 대충 말을 하는데 창문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마리네뜨는 몸을 굴러 뒤집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로는 창밖이 보이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몸을 일으켜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비록 창 밖이 보이지 않지만 누가 온 건지는 예상이 가능했다. 이 높이의 건물 창문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만약 그가 맞다면 마리네뜨는 창을 열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마리네뜨, 블랙캣이야."

그 사이에 조심스럽게 날아가 창을 바라본 티키가 마리네뜨에게 다시 돌아와 속삭였다. 자는 척을 할까, 하지만 그러기엔 해가 아직 황금빛 햇살을 은은하게 뻗고 있었다. 끄응, 마리네뜨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늘 낮에 보았던 블랙캣의 부자연스러웠던 미소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경직되있던 굳센 팔도.

'똑, 똑.'

상념을 깨뜨리듯 다시 한 번 얇은 유리창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버그야 그렇다 치지만 마리네뜨는 블랙캣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억지로 가라앉혔던 죄책감이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마리네뜨는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04

"안녕, 프린세스. 미안하지만 잠깐 실례해도 될까?"

창을 열자 블랙캣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글쎄요, 죄송하지만 오늘은 다른 곳 가시면 안 될까요?' 마리네뜨는 목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꿀꺽 삼켰다. 대신 마리네뜨는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캣이 몸을 잠시 뒤로 내뺐다가 훌쩍 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마리네뜨는 그런 블랙캣이랑 부딪히지 않도록 옆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에요. 블랙캣?"

"이 근방을 지나는데 우리 공주님이 잘 지내나 싶어서 말이야."

블랙캣이 그녀의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블랙캣의 시선이 아드리앙의 포스터에 멈췄다. 그가 포스터를 생각보다 흥미롭게 보는 바람에 마리네뜨는 잠시 당황했다. 저걸 치웠어야 했나? 하지만 어차피 차인 거, 보여도 상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나이 또래의 아이들은 대부분 아드리앙의 팬이었다. 블랙캣이 그녀가 아드리앙과 아는 사이고, 오늘 아드리앙에게 차였다는 사실을 알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치우면 더 의심사지 않을까. 마리네뜨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책상의자에 앉았다.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아드리앙 사진이 많네? 저번엔 못 봤던 것 같은데."

"그땐 숨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래? 지금은 왜 안 숨기는 거야?"

"숨길 필요가 없잖아요. 블랙캣은 아드리앙을 알아요?"

마리네뜨가 한숨을 쉬다가 입을 열었다. 아드리앙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마리네뜨의 말에 블랙캣이 잠시 멈춰서선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더니 몸을 틀어 창 옆에 있는 마네킹으로 다가갔다. 마네킹에 걸려있는 옷은 매 번 달랐는데, 오늘은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입으려고 했던 남방이 걸려있었다. 물론 그녀가 직접 디자인해 만든 것이었다. 블랙캣이 그녀의 옷을 잠깐 만져보더니 감탄사를 뱉었다.

"이거 원단도 그렇고 박음질도 좋은데? 직접 만든 거야?"

"아, 그거야……. 네."

마리네뜨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블랙캣이 옷에 관심이 많았나? 마리네뜨는 블랙캣과 자신이 예전에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빌런을 퇴치하는 것 외에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빌런을 쫓거나 순찰 중에 만나서 나눈 대화니까 어쩔 수 없지. 마리네뜨는 그렇게 생각하며 블랙캣을 바라보았다. 블랙캣이 그녀가 만든 옷을 들더니 깃의 안감과 안쪽 소매의 박음질을 살펴봤다. 블랙캣의 입에서 끊임없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대단한데. 솜씨가 좋아. 전문 디자이너는 아니어도 아틀리에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야."

"칭찬 고마워요."

속으로 내심 '블랙캣 아틀리에 관계자라도 되는 거예요?'라고 생각했지만 마리네뜨는 내뱉지 않았다. 대신 블랙캣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블랙캣과 자신이 오늘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맞는지 궁금했다. 자신은 이렇게 녹초가 되었는데 블랙캣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쌩쌩해보였다. 마리네뜨는 방금 전 블랙캣이 아드리앙 이야기가 나오자 명백하게 말을 돌렸던 것을 기억해냈다.

"블랙캣도 패션쪽에 관심이 많나봐요? 원단 재질이나 박음질 모양까지 아는 걸 보면 말이에요."

"…음, 개인적으로 관심이 좀 있긴 해."

질문과 대답 사이에 약간의 간극이 있었다. 마리네뜨는 블랙캣에게 다시 질문했다.

"패션에 관심이 있으면 아드리앙도 알겠네요?"

블랙캣이 그녀의 질문에 눈을 굴렸다. 그러더니 느릿느릿하게 답했다.

"어, 그래. 알아."

"그런데 왜 방금 말을 돌렸어요? 블랙캣, 아드리앙 말이에요. 정말 멋있지 않아요?"

블랙캣의 말에 마리네뜨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어째 아드리앙의 이름이 나오자 자신보다 블랙캣이 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비록 아드리앙에게 차였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의 팬이었다. 껄끄럽긴 하지만 어찌 팬으로서 이 상황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마리네뜨는 좀 더 몸을 뻗어서 의자에 편하게 기댔다. 블랙캣이 옷의 소매를 만지작 거리는 것이 보였다. 블랙캣은 아드리앙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그런 것 같아."

"제 생각에도 그래요."

그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궁금해서 묻긴 했지만 역시 아드리앙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은 느낌이 이상했다. 마리네뜨는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블랙캣이 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블랙캣은 그녀의 옷을 다시 잘 펴서 마네킹에 다시 걸쳐놓았다.

"멋있어서 아드리앙을 좋아하는 거야?"

마네킹에 옷을 걸친 블랙캣이 그녀를 바라보지 않고 대뜸 질문을 던졌다. 그가 먼저 아드리앙 이야기를 할 지 몰랐기 때문에 마리네뜨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블랙캣은 그렇게 말한 뒤 천천히 그녀의 스툴에 다가가 앉았다. 마리네뜨는 대답하지 않았다. 블랙캣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프린세스는 아드리앙의 단순한 팬인건가?"

그의 눈동자가 부드러운 녹색빛으로 반짝였다. 마리네뜨는 잠시 눈을 굴렸다. 당연히 그녀는 아드리앙의 단순한 팬이 아니었다. 아드리앙이 잘생겨서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당연히 아니었다. 외모때문에, 명성때문에 좋아했다면 그가 편입한 첫날 부터 좋아했겠지. 마리네뜨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블랙캣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과연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마리네뜨는 자신이 여기서 말을 돌리는게 나을지 아니면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지 가늠했다. 하지만 이내 피곤해졌다.

"아뇨."

블랙캣은 그녀의 말에 더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제 그녀의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리네뜨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꼬리가 스툴에 대충 걸쳐져 있었다. 마리네뜨로 만났을 때와 레이디버그로 만났을 때의 블랙캣은 분위기가 달랐다. 그가 말하는 어조의 높낮이나 보이는 행동이 그 차이를 만들었다. 마리네뜨는 그가 가만히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 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그가 매우 피곤해보였다. 마리네뜨는 그가 자신에게 차였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고백했는데 차였거든요."

평범한 팬은 아니죠. 마리네뜨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블랙캣이 그녀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블랙캣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생각하는 듯 그의 눈동자가 왼쪽 위를 향했다가, 대각선으로 떨어졌다. 그가 입을 연 것은 그 뒤로 일 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거 의외네."

블랙캣은 잠시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살짝 떼서 읖조렸다. "나도 오늘 차였거든." 그리고 마리네뜨의 웃음에 희미하게 마주 웃어보였다. 미소가 심장에 콕콕 박혔다. 마리네뜨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죄책감에 블랙캣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블랙캣도 현재 그녀와 같은 표정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마리네뜨는 레이디버그의 이름을 꺼내려다가 관뒀다. 그 말을 하면 더이상 돌이키지 못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대신 마리네뜨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활짝 웃어보였다. 마리네뜨는 자신이 레이디버그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마리네뜨는 블랙캣에게 슬픈 표정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몰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습지만 그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주제는 상관 없었다. 마리네뜨는 블랙캣에게 물었다.

"그 사람 많이 좋아했어요?"

"지금도 많이 좋아하지."

"저도 그래요."

다시 한 번 침묵이 흘렀다. 마리네뜨는 블랙캣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책상에 몸을 살짝 기댄 채 창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집 근처 공원에 있는 풀벌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네뜨는 팔에 얼굴을 포갰다. 그리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디버그는 멋있는 것 같아요."

"맞아."

"레이디버그는 늘 반짝반짝 빛나고요."

"그렇지."

"친절하면서도 강단있어요. 그 점이 매력적이에요."

"내 생각에도 그래."

"강해서 그녀가 부러워요."

블랙캣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반쯤 눈을 감았다. 지금이 몇 시 일까. 블랙캣은 이대로 집에 안 들어가나.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을까. 솜뭉치처럼 걱정들이 떨어져내렸다. 그녀가 느리게 눈을 두 번 끔뻑거리는 사이에 블랙캣이 말했다.

"아드리앙은 참 신사적이야."

"맞아요."

"공부도 잘하고, 말 잘듣는 모범생이지."

"그렇죠."

"예의바르고, 상냥한 면이 있어."

"제 생각이 딱 그래요."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지."

어쩌다 보니까 대화가 방금 전의 대화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마리네뜨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블랙캣이 그녀의 웃음에 놀랐는지 움찔거렸다. 마리네뜨는 한참동안 웃음을 토해내다가, 노력해서 간신히 그쳤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블랙캣이 아드리앙에 대해 저렇게 잘 알고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마리네뜨는 블랙캣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블랙캣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에요. 영웅이잖아요."

"마리네뜨도 나름 강단있는 사람이고 말이야."

블랙캣이 화답했다. 위로의 말이 위로의 말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을 떠올렸다. 아드리앙을 다시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쿡쿡 찔렸다. 하지만 그를 더이상 사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마리네뜨는 스스로를 향해 던졌던 질문을 그에게 했다.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이미 사랑받고 있지 않을까?"

의외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마리네뜨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우리 둘 다?"

"음, 우리 둘 다."

"마리네뜨와 블랙캣 말이죠?"

"응, 마리네뜨와 블랙캣 이야기야."

블랙캣의 목소리에 다시 장난기가 어렸다. 마리네뜨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켜 블랙캣을 마주보았다. 창 밖으로 동그란 달이 보였다. 블랙캣의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반짝인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리네뜨는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블랙캣이 다리를 쭉 뻗었다. 카펫의 둥그런 원가에 그의 발꿈치가 살짝 걸쳐졌다. 블랙캣이 말했다.

"차라리 우리끼리 사귈래?"

"네?"

예상치 못한 블랙캣의 발언에 마리네뜨는 화들짝 놀라 블랙캣을 바라보았다. 블랙캣이 웃고 있었다.

"미안해, 농담이야."

"그런걸로 농담하는 거 재미 없어요."

짤막한 대화와 투덜거림이 오갔다. 마리네뜨는 그의 실없는 말에 자신도 활짝 웃어보였다.

"차인 사람끼리 연대라도 하자는 거예요?"

"글쎼, 그럴지도 모르지."

블랙캣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리네뜨는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블랙캣을 바라보았다. 우울했던 감정들이 많이 날아가고 없었다. 하지만 대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아드리앙이 없었다면 블랙캣하고 사귀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게 기억났다. 사랑받고 있지 않을까? 그의 말이 맴돌았다. 심장이 간질간질 했다. 블랙캣이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길 밖에선 사람들의 목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풀벌레 소리들 뿐이었다. 블랙캣이 몸을 일으켰다.

"가보게요?"

"많이 늦었으니까. 왜, 아쉬워?"

"음, 음. 어떨까요?"

마리네뜨가 말꼬리를 일부러 늘이며 말했다. 블랙캣이 그녀의 말에 살짝 눈을 찡그렸다.

"아쉬운 걸로 해줘."

"네, 아쉬운 걸로 할게요."

말을 마치면서 둘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블랙캣이 창가로 다가갔다. 마리네뜨는 그가 창문의 문턱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달빛이 그의 몸에서 산산히 조각났다. 그가 몸을 웅크렸다. 고양이 처럼 지붕 위로 뛰어오르기 위해서였다. 마리네뜨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네뜨는 그의 등 뒤에서 속삭였다.

"블랙캣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라요."

레이디버그가 어쩌면 그쪽한테 반할지도 모르죠. 뒷말은 발화하지 않았다. 마리네뜨는 미소를 지었다. 블랙캣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광으로 인해 눈동자 말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가 보석같이 반짝거렸다. 블랙캣은 잠시 눈을 굴리다가 이내 자신도 웃으며 말했다.

"프린세스의 사랑도."

그리고 다시 그는 몸을 돌려 뛰어올랐다. 신선한 바람이 창을 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의 디자인 노트들과 마네킹에 걸린 남방이 펄럭였다. 마리네뜨는 블랙캣의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블랙캣은 자신의 방울소리가 나지 않을 만큼 조용히 움직였다. 그래서 그녀가 들을 수 있는 것은 풀벌레 소리밖에 없었다. 마리네뜨는 풀벌레 소리를 듣다가, 창을 닫았다.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야?"

어느 순간 티키가 그녀의 옆으로 날아오며 물었다. 마리네뜨는 티키를 바라보다가 애매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로 가는 나선 계단에 올랐다. 마음 속에 누군가 깃털 하나를 떨어뜨린 것 같았다. 간지러워서 자신도 깃털알레르기가 생겨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리네뜨는 자신의 폭신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며 티키에게 말했다.

"그냥,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하품이 나왔다. 티키는 더이상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밤은 깊었고, 내일은 학교에 가야하는 날이었다. 마리네뜨는 방금 전 문을 열어서 시원해진 이불 속으로 몸을 더 파고들었다. 티키가 날아가서 방 전체의 조명을 꺼 주었다. 금새 방 안이 레몬색 달빛과 푸른색 어둠으로 가득 찼다.

"잘 자."

마리네뜨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좀 더 아드리앙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아. 더이상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그녀의 발가락을 간질였다. 티키는 그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잘 자."

티키가 그녀에게 자장가처럼 속삭였다. 마리네뜨는 눈을 감았다. 졸음이 쏟아졌다. 그대로 마리네뜨는 잠에 빠져들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