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구원자
그날 파리의 시간은 멈췄다.
침잠한 달은 더 이상 밤을 데려오지 않았다. 파리의 하늘이 달을 독점하게 됐음에도 밤을 맞이하지 못한 이유였다. 부서진 달은 그날부터 쭉, 파리의 하늘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때문에 그날부터 몇 주야가 지났는지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홀로 남은 이에게 가혹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었다.
별 대신 하늘을 꿰뚫은 달의 파편들이 마치 이 모든 사건의 범인 같았다. 그러나 달 또한 궤도를 잃은 피해자일 뿐이다. 진짜 범인은 마음과 본질 모두가 달과 다름없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너였다. 밤이 오지 않아 잠들지도 못하고, 네 손에 망가진 달과 파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너였다.
만약 후회 하고 있다면, 너는 어떤 날, 어떤 순간, 어떤 선택을 후회할까.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모든 일의 발단이 언제인지는 너무나 확실했다.
너를 찾아온 건 바로 그 순간의 레이디버그였다.
"마리네뜨, 괜찮니? 안색이 너무 창백해."
"네, 괜찮아요. 꿈자리가 좀 사나워서 그래요."
"저런, 피곤하겠구나. 그래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원래 꿈은 현실의 반대라잖아."
"···그랬으면 좋겠네요."
사실 거짓말이다. 차라리 그게 다 꿈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모두 실재했던 일이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마리네뜨! 어떻게 됐어?"
"어, 그게··· 잘 안됐어! 역시 무리였나 봐."
"마리네뜨······."
"괜찮아.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거든. 그래서 생각보다 슬프지 않아. 맛있는 걸 먹으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친구들의 눈을 속이지는 못한다. 거짓말에 서툰 것은 자신도 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는 친구들은 말 없이 따라주기로 한다.
결국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해산한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자 어쩐지 지친 기분이 든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방에 들어오자 악몽이 기다리고 있다.
"안녕, 내 사랑. 기다리고 있었어."
토끼굴의 주인조차 눈치채지 못했지만, 토끼굴이 닫히는 순간 그 공간을 파고든 재앙 탓에 시공간에는 작은 균열이 생겼다. 수몰된 파리와 과거의 시간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그날이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시작한 날. 생각해보면 우리는 늘 엇갈렸지. 처음에는 마음이, 이제는 시간이···. 하지만 괜찮아. 내가 이렇게 왔잖아? 네가 바라는 대로 안전한 파리에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 영원히 함께하자."
"이럴 리가, 없는데."
눈동자에 악몽이 가득 들어찬다. 절망과 두려움이 맺혀 흐르는 것을 닦지도 못한다.
"난 고백하지 않았단 말이야."
내가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자 과거의 나에게 있어서의 오늘.
시작부터 몹시 불운한 하루였다. 아드리앙에게 줄 선물을 포장하던 중 포장지가 부족해서 새로 사와야 했다. 시간이 지체된 것만으로 조급했는데 경호원이 집 안에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변신을 하고 아드리앙의 방에 몰래 들어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고백을 위한 편지를 집에 두고 빈 편지지를 가져와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하게 편지를 쓰고 빠져나오는 길에는 머리 끈이 터져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 하나 잘 풀리는 일이 없었다.
한때는 그 순간들을 행운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 불운들이 만든 사소한 단서들을 통해 너는 레이디버그와 마리네뜨가 동일 인물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과 자신을 사랑하던 사람이 같다는 걸 깨달은 네가 그 고백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마냥 행복했다.
사랑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우리는 몰랐다. 호크모스의 사랑은 그의 정의를 망가뜨릴 만큼 강했다. 그의 악의가 사랑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남의 사랑을 이용할 만큼 잔혹했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최후의 전투였다. 우리가 나눠온 사랑과 지켜왔던 정의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호크모스는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분노와 욕망을 자극한다. 그의 말은 자극적인 감언이설이 대부분이지만 너를 지배할 때는 오히려 절망감을 더 자극했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절망감을 상기시키고, 거기에 자신이 느꼈던 절망까지 너에게 느끼게했다. 그렇게 네가 그 끔찍한 감정을 사라지게 하는 것에 집착하게끔. 실제로 거기에 성공해 너는 검은 나비에 잠식됐지만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영웅으로서 나와 나누어 가진 책임감이 뒤섞여 폭발했다. 호크모스도 네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날 파리의 시간은 멈췄다.
"이곳은 이제 없어질 시간선이야. 가서 원인이 뭔지 파악하고 와야 해. 기억 해, 미니 버그. 나는 언제나 네 등뒤에서, 너보다 한 걸음 앞서 걸을 거야. 그러니 위험에 빠지면 뒤로 물러서. 알겠지?"
버닉스는 과거의 레이디버그를 시간이 멈춘 파리로 인도했다. 수많은 시간선의 붕괴를 보며 가슴아파 했던 것도 옛날 일이다. 이제는 진심으로 이 시간선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다. 이것은 그 어떤 결말 가운데서도 최악의 결말이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었다. 과거의 레이디버그는 아주 안전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아직 블랙캣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할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환상을 보고 있는 건 아니지?"
멸망한 파리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었다. 심지어 누구보다 그리워했던 레이디버그였으니 믿기 어려울만도 했다. 너는 그게 네 광기에 의한 환상일까 두려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과거의 레이디버그는 변해버린 파리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지나간 일에는 신경 쓰지마. 별 일도 아니야."
"파리가 사라졌는데 별 일이 아니라고? 내가 여기 온 건 이게 현실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야. 파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아야만 해."
"내 사랑,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게 현실인데."
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꿈이라면 차라리 깨고 싶다고 매 순간 생각했고, 파리와 함께 너 자신도 지워버릴지를 끝없이 고민했다. 네 현실이 과거의 레이디버그에게는 악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한편 과거의 레이디버그는 처음들어보는 호칭에 당황했다. 블랙캣과 파트너가 된 이래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을 때의 나니까 당연했다.
"너는 나를 이 악몽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온 게 아니었어? 모든 걸 잃은 나에게 찾아온 행운이잖아."
과거의 레이디버그에게 천천히 다가간 너는 그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준다. 그리고 미라큘러스를 빼러리려 하지만 제지당했다.
"뭐하는 거야! 이러지마. 블랙캣,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너 맞아···?"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대답이 갈리는 질문이었다. 따라서 너는 대답하지 않았고, 과거의 레이디버그는 침묵을 통해 부정을 확인했다.
"네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마리네뜨구나."
"내 정체를······ 알아?"
"사랑하는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말한 건 너였어.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지. 기억 못하겠지. 너는 겪은적 없는 일일테니까. 파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물었던가? 간단해."
너는 그 모든 일들을 한 번에 압축해버렸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네가 날 사랑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넌 언제나 나와 함께 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잖아. 그런데 네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파리가 이렇게 됐다고?"
"그래. 내가 너를 사랑했고, 네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네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과거의 레이디버그는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과거에는 너무 신경쓰지마. 네가 나한테 미라큘러스를 넘겨주기만 하면 모든 걸 바로 잡을 수 있어. 우리의 미라큘러스를 합치면 세계를 재창조할 수 있다고 호크모스가 말했어. 이런 세계 따위 부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야. 우리가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호크모스의 말 따위 믿지마! 그의 이상은 폭력적이야. 남을 희생시켜서 얻는 평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자의 말을 듣는 이유가 뭐야?"
"그를 이해하니까."
"뭐?"
"이 방법밖에 없었던 거야.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 이렇게 해야만해. 어머니를 되살리고, 파리를 깨우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너와 사랑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과거의 나는 블랙캣의 눈을 떠올렸다. 항상 사랑이 녹아 있고 장난기로 반짝거리던 눈. 반면 너의 눈에 가득찬 사랑은 광기로 얼룩져 있었다.
"왜 파리가 이렇게 됐는지 알려줘, 블랙캣. 내가 전부 원래대로 되돌릴테니까, 응? 세계를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네 목숨까지 걸어야 해!"
"되돌린다고?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들까지 모두 없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렇게 둘 수 없어. 내가 돌아가서 파리도 되돌리고, 너도 힘들지 않게 할 거야."
너는 너의 연인이 아닌, 고결한 영웅 레이디버그를 마주한다. 아마 그가 너의 연인인 레이디버그였다면 감히 맞서싸울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그러나 레이디버그가 블랙캣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오히려 물러진 내가 모든 걸 망쳤다.
"마리네뜨, 나를 이 세계에 버리고 가지 마."
너는 과거의 내가 너를 구하기 위해 너를 버리는 일도 서슴치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히려 너와 함께하기 위해 너를 구하고 싶어하는 것도 모른 채.
그 모습을 본 레이디버그는 너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만 너를 사랑해도 좋아. 그러니까 제발 이 세계에 혼자 남기지 마."
"하지만 세계를 되돌려버리면 나는 너를 잃어. 난 내 파트너를 잃고 싶지 않아.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야."
"그래? 그럼 나와 함께 죽어줄래?"
네가 달을 향해 재앙을 날렸다. 반파되어 하늘에 겨우 걸려 있던 달이 물에 잠겼다.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당연하지만 과거의 나는 아직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
"블랙캣."
뒷걸음질친 순간 등 뒤에서 토끼굴이 열렸다.
"안돼!"
너는 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토끼굴은 닫혀버린 후였다.
과거의 내가 고백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 시간선은 없어졌지만, 너는 이곳에 있다. 꼭 망령과 다름없는 상태다.
"고백하지 않았다고?"
너는 분노한다. 과거의 내가 블랙캣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드리앙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드리앙과 블랙캣이 동일인물임을 알고 블랙캣을 사랑하게 됐다. 아드리앙에게 고백하는 것은 그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 과거의 나는 그 과정을 아예 지워버린 것이다.
"대체 왜? 더 이상···, 아니,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들을 전부 없었던 일로 만드려는 거야?"
"네가 상처입는 걸 원치 않으니까! 내가 널 떠날까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계속 옆에 있어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
"이제 그런 건 두렵지 않아. 우리는 평생 함께할테니까. 그래, 이렇게 된 거 내가 호크모스를 없애줄까? 그게 좋겠어. 파리에서 우리 사랑을 방해하는 건 모두 없애버려야지."
"그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겠어!"
과거의 나는 네가 파리를 없애버렸다는 것도 알고, 눈 앞에서 달을 박살 내 버린 모습도 봤으면서 두려운줄도 모르고 네 앞을 막아선다.
"위험해, 미니버그!"
순간 토끼굴에서 나온 버닉스가 둘 사이에 끼어든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닉스를 향해 고대의 재앙을 날린다.
"버닉스!"
과거의 내가 버닉스를 넘어뜨려 겨우 위험에서 벗어난다. 책상과 의자를 관통하고 벽이 무너진다. 과거의 나는 레이디버그로 변신한다.
"나와 싸울 거야?"
네가 묻는다. 과거의 레이디버그는 대답 대신 행운을 부적을 사용한다. 하지만 나온 물건이 뭔지 보지도 않고 치유의 매개로써 사용해버린다.
그리고 망가진 의자가 복구되자마자 변신을 풀어버린다. 눈짓으로 이야기를 끝낸 티키는 방 안 어딘가로 몸을 숨긴다.
"버닉스, 잠깐 둘만 있게 해줘."
버닉스는 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신의 존재가 너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는 것도. 그래서 알겠다는 짧은 대답 뒤에 다른 질문을 붙이지 않고 토끼굴 속으로 들어간다. 어차피 그 속에서도 상황을 지켜볼 수 있으니까.
"계속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어. 하지만 악몽은 아니야. 네가 나오는 꿈이 악몽일리 없잖아, 블랙캣."
영원한 잠에 빠져든 파리를 등지고, 밤에 물들지 않는 하늘의 부서진 달을 바라보며 자신을 생각하는 블랙캣을 떠올리면 슬퍼졌다. 네가 나를 사랑하면 안됐는데. 그리고 나는 너를 사랑하면 안되는데.
그래서 아드리앙에게 고백하지 않았다. 파리를 위해, 과거의 나는 사랑을 포기하려 했던 것이다.
"사랑이 우리의 약점이라고 생각해?"
과거의 나는 나와 다른 대답을 한다.
"아니."
단호한 대답에 너는 놀란다. 나와 같은 일을 겪었으니 너또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호크모스가 우리 사랑을 이용해도? 그게 파리를 멸망시킨 결과가 돼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블랙캣, 네가 파리를 멸망시킨 게 나를 사랑해서야?"
"······아니."
"우리의 책임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 우리는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영웅이니까··· 더 완전무결해야할 필요가 있는 건 맞아. 실수를 해서도 안되고. 조금의 빈틈이라도 내보였다가는 호크모스가 파고들테니까. 아마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실수였을 지도 몰라."
"···맞아. 호크모스가 검은 나비를 보냈을 때, 네가 충분히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네가 걱정돼서 정체를 드러냈어. 내가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어도 네가 혼자 이겨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네 덕분에 내가 파리를 멸망시키지 않은 거네."
과거의 내가 조금 웃는다. 그 말이 맞다. 네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내가 레이디버그로 남지 못했을 지도 몰랐다.
"어쨌든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해. 우리는 영웅이니까. 우리가 파리의 위험요소가 되어서는 안돼. 내가 치유해줄게. 다시 영웅으로 돌아와줘, 블랙캣."
"돌아온다······. 난 이미 파리를 멸망시켰는데도, 영웅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이지. 전부 바로잡으면 돼."
과거의 나는 너에게 깃든 검은 나비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너의 긴 악몽이 끝날 시간이었다.
"고마워, ···마이 레이디."
너의 소멸로 시간이 멈춰버린 파리는 지워진다. 그 시간선의 너와 나도 마찬가지다.
편히 쉬어, 내 사랑.
마리네뜨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시간의 엉킨 매듭도 다 풀렸을 것이다. 파리가 멸망하는 계기를 없애 버렸고, 그 시간선의 망령도 사라졌다.
모든 것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하지만 마리네뜨의 기억에는 또렷하게 박혀버렸다. 영원히, 어떤 방법으로도 잊을 수 없을 만큼. 그렇다면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긴 악몽을 꿨다고 생각해."
토끼굴에서 나온 버닉스가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될줄은 나도 몰랐어. 너도 꼬마캣도, 원래라면 이정도로 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나이인데···. 미안해, 도와주지 못해서. 완전무결을 강요받게 해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 도와줘서 고마워, 버닉스."
"천만에, 그게 내 일인걸. 참, 그런데 오늘 아드리앙에게 고백한 날 아니야? 왜 여기 있어? 지금쯤 아드리앙과 함께 있을 때 아닌가?"
"아, 그게··· 고백 안 했어. 블랙캣과 내가 이어지면 안된다고 생각했거든."
"뭐? 너··· 그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
마리네뜨가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깨달아버린 사람처럼. 마리네뜨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언제부터?"
"미래의 파리에서부터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어."
"그래서는 안 돼! 그 결과가 미래의 파리, 그리고 화이트캣 자체라는 걸 모르겠어? 어떡하면 좋지? 이 시간선도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하나? 더 과거로 돌아가야···."
"알릭스."
마리네뜨가 버닉스의 이름을 불렀다. 미래의 알릭스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버닉스도 깜짝 놀랐다.
"레이디버그의 동료이자 마리네뜨의 친구인 너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지?"
"잘 알지. 겁이 많지만 결단력 있고, 또 누구보다 정의로운 영웅. 옛날부터 쭉."
버닉스가 말하는 옛날은 그의 기준이라, 마리네뜨의 입장에서는 지금이라는 뜻이었다. 토끼굴을 타본 마리네뜨는 이제 버닉스의 시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말을 알아들었다.
"고마워. 넌 언제나 빠르게 통찰하고 정확하게 판단했지, 알릭스. 그러니까 네 판단을 믿는 나를 믿어주면 안될까?"
"무슨 뜻이야?"
"블랙캣이 파리를 멸망시킨 계기가 된 건 우리가 서로의 정체를 알게 됐기 때문이기 이전에, 우리가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잖아. 블랙캣이 나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불행해지는 걸 원하지 않아. 그리고 이 마음이 슬픔이나 절망보다 강해. 내가 검은 나비에 잠식될 일은 없을 거야. 블랙캣을 위해서. 그렇다면 내가 그애의 정체를 알고 있어도 상관 없지?"
"꼬마캣, ···아드리앙에게도 네 정체를 알리려고?"
"아니, 그저 이 시간선을 더 이상 고칠 필요 없게 만들겠다는 이야기야."
버닉스의 해결방식은 언제나 싹을 자르는 식이었다. 그것도 안 되면 씨앗채 파냈다. 이런 식의 방법은 시도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일분일초 단위의 시간싸움이 익숙하던 버닉스에게는 드물게도 오랫동안 고민할 문제였다.
하지만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레이디버그의 판단이었다. 버닉스는 레이디버그의 미숙함도 존중했다. 레이디버그는 자신의 실수로 일이 틀어져도 결국에는 해결할 방법을 찾아냈다. 사실 토끼굴조차도 해결책의 일부였다.
"만약 또다시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그때는 내 미라큘러스를 가져가줘. 아마 몇 번을 반복해도 결말을 바꿀 수 없을 거야."
"그럴 일 없을 거야, 마리네뜨. 네 의지는 시간이 흘러도, 시간을 되돌려도 그대로일테니까. 그리고 너는 그 시간선의 마리네뜨보다 강해졌어. 만에하나 또 똑같은 결과가 나오게 되더라도, 그때는 더 잘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알릭스가 마리네뜨의 손을 잡았다. 작별의 시간이었다.
"잘 있어, 미니 버그! 내가 있는 시간까지 와줘야 해!"
"응, 난 그때까지 쭉 레이디버그일거야. 잘 가, 알릭스."
버닉스가 떠나자 티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네가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리네뜨."
"영원히 파리의 영웅으로 남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아까 날아갔던 책상 위에 있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알리야.
"지금 집이야?"
"응. 방에 있는데, 왜?"
"잠깐 나와봐!"
"뭐?"
"마리네뜨, 친구들 왔다!"
아랫층에서 사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은 마리네뜨를 보낸 후 자기들끼리는 계속 같이 있었던 모양이다.
"다들 무슨 일이야?"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자신이 어땠는지를 알아서 아예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네가 너무 힘들어보여서 응원해주러 왔지. 자!"
알리야가 신호하자 친구들이 문 앞에서 비켜섰다. 문 가에는 아드리앙이 서 있었다.
"안녕, 마리네뜨. 응원이 필요하다고 해서 왔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넌 뭐든 잘할 거야."
사정도 모르면서 친구들의 말에 한달음에 뛰어온 아드리앙은, 마리네뜨에게 꽃다발을 안겨줬다. 친구들이 주변에서 환호성을 질러줬다.
무거운 마음이 단숨에 녹아 내려, 마리네뜨는 조금 울고 말았다. 당황한 친구들과 아드리앙이 마리네뜨를 달랬다.
사랑은 조금 미뤄둬도 좋았다. 모두가 함께 하는 순간이 좋았고, 언젠가는 실수할까봐 걱정할 필요 없이 고백할 수 있을 날이 올 테니까.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