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현재 미래
레랑스 au 합작
"수고했어, 키티. 오랜만에 보여준 과감함, 멋있더라."
"다 네가 있어서 가능했던 거지."
두 사람의 손바닥이 맞부딪치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파리를 구하고 난 후에 하는 둘만의 의례였다.
마침 아이스크림 트럭이 근처를 지나가던 참이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까 넌 어쩌다 스카라벨라가 된 거야?"
"나? 한방 치료받고 계산하려고 보니까 가방 안에 뭐가 있더라고. 그땐 어디서 잘못 가져온 소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미라큘러스였던 거지. 정확히는 미라큘러스가 든 함이었지만. 그게 어떻게 내 가방에 들어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어. 요정도 자기가 날 찾아왔다고만 하고."
"나랑 비슷하네? 나도 일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매니···, 친구가 네 거 아니냐고 건네준 반지함에 이게 들어있었거든."
블랙키티가 손을 들어 반지를 바라봤다.
"사실 네 친구가 수호자였던 거 아냐?"
"어머, 그 정도였으면 배우가 됐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잘하면 이번에 나오는 스카라벨라와 블랙키티 영화에 나올 수도 있겠다. 거기 조이도 나온다잖아."
"어, 응, 그랬지! 넌 어때? 조이 말이야."
"좋아하지. 조이는 국민배우잖아. 예쁘고, 착하고, 연기 잘하고. 이미지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착하다고 업계 쪽에서 칭찬이 자자하더라. 업계에서 그 정도로 평이 좋은 건 아드리앙 아그레스트 정도잖아. 조이가 맡은 역이 내 절친이라던데. 실제 내 친구랑 생각보다 잘 어울릴 것 같아. 그 애도 착하고 상냥하거든.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잘 캐스팅한 것 같아.“
스카라벨라의 농담과 함께 대화 주제는 곧 제작될 두 사람의 영화로 넘어갔다. 제목은 직관적이게 <스카라벨라와 블랙키티>. 그들의 실제 인터뷰를 바탕으로 인생을 재구성한 영화를 찍을 예정이 되어있었다. 장르가 다큐멘터리 영화인 이유는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만큼 각색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파리를 구하는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제작 발표만으로 파리 전체의 주목을 받았다. 당사자들 역시 어느정도 기대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잠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작별했다.
“그럼 내일 봐.”
블랙키티와 헤어진 후 변신을 풀자 본래 알리야의 몫이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지금 당장 집에 가고 싶어. 오늘까지 마감인 원고도 있고, 한 시간 뒤에 인터뷰도 있는데…. 변신할 때만 피로가 사라지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아. 게다가 영웅 일만 아니었어도 진작 다 끝냈을 거라고.”
“그래도 넌 글을 잘 쓰니까 금방 끝내겠지. 넌 파리에서 알아주는 연예계 기자 알리야잖아.”
붉은 요정이 알리야를 위로했다. 그러나 눈 밑의 다크써클까지 지워주지는 못했다.
“안녕하세요, 알리야 기자님. 또 뵙네요.”
“저번 특집의 후속기사 요청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지금 조이는 파리에서 스카라벨라와 블랙키티 다음 가는 유명 인사니까요.”
“기자님 덕이 크죠.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일이 많나 봐요”
“일이 많아봐야 당신만큼은 아니죠.”
파리에서 가장 잘나가는 연예잡지 <파리 시네마>의 기자 알리야와 파리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 조이는 이미 면식이 있었다. 얼마 전 알리야가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쓴 <파리의 국민 배우 조이 리는 지금,>이 화제가 되며 알리야는 보너스를 받았고 조이의 주가가 더 높아졌다. 조이가 <스카라벨라와 블랙키티>에 출연하게 된 데에도 그 역할이 컸다. 소탈하고 상냥한 성격과 드문드문 드러나는 파리에 대한 애정이 파리지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재미있고 참신한 질문은 지난번에 다 해버렸으니까 이번엔 좀 진부하게 가볼게요. 유명해지면 뭐가 좋나요?”
“어렵네요. 음… 친구가 많아지는 거?”
“에이, 겸손하긴. 그런데 그 이야기는 좀 흥미롭네요. 더 자세히 들려줄래요?”
“파리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친구가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파리에서 처음 사귄 친구가 말해줬어요. ‘파리는 너를 환영해’라고. 그 말을 듣고 용기를 내서 오디션에 도전할 수 있었어요.”
이야기를 경청한 알리야는 이번에도 성공적인 결과가 나올 것임을 직감했다. 진부한 질문으로도 흥미로운 답을 이끌어내는 알리야는 훌륭한 인터뷰어였고 모든 질문에 섬세하게 답하는 조이는 성실한 인터뷰이였다. 둘의 조합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자, 그럼 마지막 질문을 해볼게요. 요즘 최대의 관심사는?”
“까망베르 치즈요.”
“까망베로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네요.”
“향은 좀 호불호가 갈려도 풍미 있는 맛이 꽤 중독적이거든요.”
“그렇군요. 좋아, <파리의 국민 배우 조이 리는 지금,> 뒤에 들어갈 말은 ‘까망베르 치즈에 미쳐있다’라고 해야겠네요. 혹시 또 만나게 되면 그때는 까망베르 치즈라도 가져올게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알리야의 농담을 마지막으로 인터뷰가 끝났다. 두 사람은 또 만나자고 인사했다.
“갑자기 웬 까망베르 치즈? 입에도 안 대더니.”
벗어 둔 비니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이가 주머니에서 까망베르 치즈 한 조각을 꺼내자 비니 속에서 그 조각만 한 요정이 튀어나와 치즈를 낚아챘다. 사실 인터뷰 내내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싶어 초조했던 조이였다. 촬영장과 대기실은 소품과 의상이 많이 적재 돼 있기 때문에 말썽꾸러기 요정이 굴러다니다가 사고를 치기 십상이었다.
“그야 널 위해서지, 플랙. 내가 까망베르 치즈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나면 내가 디저트로 치즈를 요청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거 아니야.”
“그리고 네 팬이라는 사람들이 보내주는 선물에도 치즈가 들어있겠네. 그건 꽤 기대되는데.”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러나 플랙의 말이 맞았다. 그다음부터 조이에게 전달되는 선물에는 항상 까망베르 치즈가 들어있었다. 당황스러워하는 조이와 달리 플랙은 마냥 좋아했다. 어째 날이 갈수록 검은 몸이 조금씩 불어나는 것 같았다.
“남은 건 내일 먹는 게 어때? 오늘만 벌써 세 통 째잖아.”
“겨우 세 통 가지고 빡빡하게 굴지 마. 이렇게나 많잖아.”
가방 속에 수북이 쌓인 까망베르 치즈 통 사이에서 헤엄치던 플랙은 기어이 치즈 통 몇 개를 떨어뜨렸다. 떨어진 치즈 통이 데굴데굴 굴러 문 앞까지 갔다.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밟고 넘어지기 딱 좋은 위치였다.
“어어, 으아아!”
아니나 다를까.
조이가 미처 통을 줍기 전에 방에서 나온 사람이 치즈 통을 걷어차다시피 밟으며 바닥에 넘어졌다. 가지고 나온 수북한 양의 상자가 시야를 가려서 장애물을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다친 건 아니죠?”
“으으, 네, 괜찮, 으악!”
조이가 넘어진 이를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이 꼬여 조이까지 덩달아 넘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죄송해요, 괜찮아요? 으악!”
당황해서 벽을 짚고 힘겹게 일어나던 이가 옆에 있던 다른 치즈 통을 밟고 다시 한번 넘어졌다. 조이는 침착하게 몸을 일으켜 치즈 통을 주워 다시 가방에 넣은 후 다시 손을 내밀었다.
“난 괜찮아요. 당신은 괜찮아요? 두 번이나 넘어졌는데…….”
“네, 괜찮아요.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꽤 심하게 넘어졌음에도 익숙하다는 태도를 보이자 조이는 조금 당황했다. 그 사이 상대방은 떨어뜨린 짐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는 모양새가 영 위태로워 조이가 얼른 가장 위쪽에 있는 상자를 들어 올렸다.
“도와줄게요. 이번 영화 소품 맞죠? 저도 쓰게 될 것 같으니까 저도 들게요.”
“아, 안 그래도 돼요. 이건 제 일인걸요. 안에 든 건 정확히 말하자면 의상이에요. 스카라벨라와 블랙키티가 일반 시민일 때 입는 평상복들이요. 아직 영웅들의 옷 취향에 대한 건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제 나름대로 그들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게 준비해 봤어요.”
“그럼 혹시 당신이 이번 영화의 의상을 담당하나요?”
“네, 맞아요. 마리네뜨 뒤펭 챙이라고 해요. 함께 일하게 돼서 영광이에요, 조이.”
“나야말로 영광이에요, 마리네뜨 디자이너님.”
조이가 상자를 내려놓고 마리네뜨에게 악수를 청했다. 마리네뜨는 이미 조이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지만, 같은 동작이라도 목적이 다르니 기분이 새로웠다.
결국 마리네뜨는 조이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함께 의상을 옮기며 조이가 다시 말을 걸었다.
“작년에 아그레스트 오뜨 꾸뛰르 컬렉션에 참여했죠? 저도 그거 보러 갔어요. 패션을 잘 모르지만 굉장하다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마리네뜨가 디자인한 옷을 입어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왔네요.”
“아…, 알고 있었군요. 그날 검은 나비도 나타났었는데 끝까지 봐줘서 고마워요. 부족한 실력이지만 이번 일도 열심히 해볼게요!”
“기대할게요. 그런데 아까 영웅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을 준비했다고 했죠. 어떤 식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거죠. 가령 스카라벨라는 신중한 면과 진취적인 면이 공존해요. 그래서 캐주얼한 스타일에 눈에 띄게 붉은 색 포인트를 줬어요.”
“좋은 분석이네요. 그럼 블랙키티는요?”
“블랙키티는 대담해 보여도 생각보다 신중해요. 장신구를 하지는 않을 것 같고, 채도 낮은 셔츠에 검은색 겉옷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모자도 준비했는데 블랙키티의 머리카락처럼 노란색을 바탕으로 했어요.”
“분석 능력이… 굉장하네요. 실제로 그렇게 입어도 개성 있고 좋을 것 같아요. 역시 디자이너는 다르네요.”
“아직 부족하죠. 만약에 스카라벨라와 블랙키티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기면 옷 취향을 물어보고 싶어요. 영웅들의 옷 취향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도 해보고 싶거든요.”
“멋진 목표네요.”
조이는 당황이 얼굴에 표나지 않게 노력하며 말했다. 자신의 평상복과 거의 일치했다. 한동안은 사석에서도 협찬 받은 옷들을 입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옷이 든 상자를 다 옮기고 난 후, 조이가 머뭇거리는 사이 마리네뜨가 조이를 붙잡았다.
“이거 받아주실래요?”
투명한 비닐봉지에 예쁘게 포장된 과자였다.
“직접 구운 거예요?”
“네…. 그런데 까망베르 치즈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미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사실 전 치즈보다 과자를 더 좋아하거든요.”
그 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조이는 과자 하나를 집어 먹었다. 진한 버터 향이 나는 과자에서는 먹는 이를 향한 애정이 느껴졌다. 조이는 그런 이유에서 빵과 과자를 좋아했는데, 또 그런 이유 때문에 평범한 빵과 과자는 잘 먹지 않았다. 애정이 담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가 준비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죠. 이런 건 당연한 게 아니잖아요. 정말 고마워요. 다음에 답례로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마리네뜨는 답례가 너무 크다고 했지만 조이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 싫지는 않았는지 좋다고 답했다. 구체적으로 일정을 잡기에는 두 사람이 귀속된 일인 영화 제작의 계획이 워낙에 변동이 커서 우선 시간이 나는대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오늘이지? 조이랑 식사 약속 잡은 날이.”
“그렇긴 한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이 옷 아직 집에 있지? 오늘은 이걸 입고 가. 학생 때 많이 입었었잖아.”
아침부터 전화를 건 알리야가 메세지로 몇 년 전 함께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마리네뜨가 입고 있던 옷은 마리네뜨가 직접 디자인했던 옷이기도 했다. 실력이 좋아졌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입지 않는 옷이었지만 알리야는 그 옷을 고집했다.
“그런데 너 너무 피곤해 보여. 어제 잠은 좀 잤어?”
“아니. 일이 다 끝나니까 새벽이더라고. 잠들면 낮까지 못 일어날 것 같아서 버텼어. 이제 출근 준비하는 중이야.”
“하루 정도 쉬는 게 어때? 요즘 너무 무리했어.”
“어쩔 수 없어. 스카라벨라 영화랑 관련된 취재를 내가 맡게 됐거든. 뭐, 안 그래도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좀 쉴까 싶긴 했어. 오늘 일 끝나면 바로 퇴근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하지만 검은 나비라는 변수 때문에 알리야의 멋진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퇴근 직전 사무실에 가방을 버려두고 문이 아니라 창문을 열고 나온 알리야가 탄식했다. 너무 지치고 화가 나서 자신이 검은 나비에 잠식되지 않은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러다 별안간 변신이 풀렸다. 티키가 귀걸이에서 튕겨 나오고 높이 뛰어오르던 몸이 순식간에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리야! 괜찮아?”
“발목을 좀 접질린 것 같아. 몸도 어쩐지 무거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른이 된 이후로 변신이 강제로 풀린 적은 없었는데. 티키, 혹시 어디 안 좋아?”
알리야가 티키의 상태를 살피자 티키가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너야, 알리야.”
“내 문제?”
“과로 해서 그래. 누적된 피로가 쌓여서 미라큘러스의 힘을 몸이 견디지 못하는 거야. 내가 과자를 먹는 것처럼 너도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어.”
“지금 당장 어떻게 휴식을 취해!“
“스카라벨라, 괜찮아요? 아까 떨어진 것 같았는데. 혹시 거기 있어요?”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스카라벨라를 불렀다.
‘마리네뜨잖아. 하필 아는 사람이랑 마주치다니. 어떡하지?’
다시 변신을 할까하던 알리야는 체념했다. 이 상태로는 변신해도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다.
“괜찮긴 한데, 혹시 옆에 누구 있어요?”
“아니요! 도와줄 사람을 불러올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오히려 아무도 모르는 게 나아요.”
결국 알리야는 본 모습 그대로 마리네뜨의 앞에 섰다.
“알리야?”
동그랗게 뜬 눈동자 안에 의구심이 깃들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내가 스카라벨라야. 최대한 싸워보려고 했는데 통증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질 못하겠더라고. …이런 부탁을 하게 돼서 정말 미안해. 그런데 더 방법이 없더라. 혹시 네가 나 대신 스카라벨라가 되어줄 수 있어?”
“내가?”
마리네뜨는 알리야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알리야가 스카라벨라라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알리야가 워커홀릭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종종 급하게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철두철미한 성격에 맞지 않게 약속에 늦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지만 스카라벨라가 되어달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보고 파리의 영웅이 되라고? 하지만 알리야는 진지했다. 진심으로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맡길 결심을 한 얼굴이었다. 마리네뜨는 스카라벨라가 지키는 파리의 시민으로서도, 알리야의 친구로서도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알리야가 걸고 있던 귀걸이를 빼서 내밀었다. 마리네뜨가 귀걸이를 걸자 작고 붉은 요정이 나타났다.
“안녕, 난 티키라고 해.”
“잘 부탁해. 난 이제 어떻게 하면 돼?”
“그냥 ‘변신’이라고 하면 돼.”
“정말 그거면 돼? …변신!”
자신 없는 목소리로 외쳐도 충분했다. 붉은색에 둘러싸인 마리네뜨는 그 색만큼 정열적인 힘이 자신의 안에 스미는 것을 느꼈다.
“어? 내 모습, 스카라벨라가 아닌데?”
“오…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줄은 몰랐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였지만 옷의 무늬도 미세하게 달랐다.
“그럼 난 스카라벨라 대신… 레이디버그가 될게. 스카라벨라의 대리 레이디버그. 어때?”
“오히려 그게 낫겠다. 키티한테 가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을 이해할 거야. 걔도 내 사정을 대충 알거든.”
“블랙키티랑 너는 서로 정체를 알아?”
“아니. 우리도 서로가 누군지는 몰라. 갓 영웅이 됐을 때는 비밀 엄수가 규칙이었거든. 이제 굳이 정체를 감추지 않아도 되지만 우리는 사생활 존중 차원에서 계속 모른 채로 살기로 했어. 가능하면 아무도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아마 걔도 내 상태를 알 테니까 대충 알아차릴 거야. 고양이라 그런가, 눈치가 빨라.”
마리네뜨를 안심시킨 알리야가 무당벌레 미라큘러스의 사용법을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마리네뜨는 스스로가 미덥지 않았지만 ‘정 안되면 키티를 믿으라’는 알리야의 말에 한 발짝을 내디뎠다.
파리의 상공을 뛰어다니는 건 꽤 심장 뛰는 일이었다. 항상 올려다 보던 하늘을 가로지르고 늘 걷던 길을 스치듯 지나가다 보니 그 끝에 블랙키티가 있었다.
“벨라-!”
붉은 실루엣을 보고 스카라벨라의 이름을 부르려던 블랙키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리네뜨?”
“…조이?”
두 사람은 쓰고 있는 가면이 무색하게 서로를 알아봤다. 반사적으로 마리네뜨의 이름을 꺼낸 조이는 스스로도 놀랐다. 미라큘러스의 고유 능력인 인식의 왜곡을 뚫고 마리네뜨를 알아봤다는 사실이 못내 놀라웠다. 그리고 조이가 마리네뜨를 알아보자 마리네뜨도 조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조이가 자신을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여러 가지로 당황했지만 조이는 재빨리 블랙키티의 의무를 떠올렸다.
“우선 검은 나비를 잡고 이야기하는 걸로 해요. 당신의 역할이 중요한 거 알죠?”
“네, 집중할게요. 저는 레이디버그라고 불러주세요.”
“좋아요, 레이디버그. 행운의 부적부터 사용해 줄래요? 사용법을 알게 될 때까지 엄호할게요.”
무사히 검은 나비를 치유한 후, 알리야에게 미라큘러스를 돌려주고 집에 데려다준 마리네뜨는 조이와의 약속을 지키러 갔다. 검은 나비가 나타나고 조이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만 해도 약속이 취소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검은 나비를 다시 얘기하자는 두 번째 약속까지 생겨버렸다.
“스카라벨라는 괜찮아요.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요새 너무 피곤해 보였거든요. 진작 쉬라고 했어야 했어요.”
조이가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어쩐지 속이 복잡해 보였다.
“조이, 괜찮아요?”
“생각이 좀 많아져서 그래요.”
의아해하는 마리네뜨를 보며 조이가 조금 웃었다.
“원래라면 같은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와 디자이너로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아까 당신이 나를 알아보고 나니까 또 다른 욕심이 들어요.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무슨 뜻이에요?”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옛날의 못난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때의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잠시 말을 쉰 조이는 마리네뜨를 눈에 담았다.
“당신이요.”
마리네뜨는 자신이 가득 담긴 눈을 보며 놀란 듯했다.
"나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자, 선물이야.”
알리야가 막 발매된 <파리 시네마>를 내밀었다.
마리네뜨는 알리야가 기사를 쓰는 데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제값을 주고 샀다. 알리야도 마리네뜨의 그런 의리를 고맙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드물게도 마리네뜨가 구매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선물했다. 친절하게 자신이 쓴 부분을 펼쳐주자 마리네뜨가 천천히 기사를 정독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가운데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파리에서 처음 사귄 친구가 말해줬어요, ‘파리는 너를 환영해’라고.
“그거 네가 해준 말이라며. 조이도 기억하고 있던데?”
“그러네……. 당연히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어.”
성공하면 서로 축하해주자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느라 바쁘던 시기, 드물지만 꾸준히 안부를 주고받던 두 사람의 연락이 갑작스레 끊기고, 얼마 있지 않아 조이가 데뷔했다. 환한 조명을 받는 화면 너머의 조이를 바라보며 마리네뜨는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바빠서 연락할 틈이 없었나 봐. 이제는 국민배우가 됐으니 매일 같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느라 나 같은 평범한 시민은 기억 못 하는 게 아닐까?“
알리야에게 들려준 조이와의 일화는 그렇게 끝났었다. 그러나 조이를 인터뷰해 본 알리야는 세심하고 상냥한 조이가 마리네뜨를 잊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조이는 마리네뜨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재회했던 날 조이는 마리네뜨를 옛 친구가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대했다. 알리야는 조이가 시간이 지나 마리네뜨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조이와 친구가 됐을 때쯤 입었던 옷을 입고 가보라고 제안했다.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니었어요. 나는 오히려 당신이 나를 잊었을 줄 알았는걸요. 그때의 나는 많이 소심했고 위축되어 있었잖아요.”
그리고 사실은 조금 안일했다. 유명해지면 다시 만나기 쉬워질 거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조이가 배우로서 자리를 잡고 파리에 녹아들었을 때 마리네뜨는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마리네뜨 역시도 자신에게 명성이 생겨야 조이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막상 다시 만났을 때는 배우로서,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서로에게 그걸 내세우기는 부족해 보였다.
“그렇지만 당신은 한결같이 빛났는걸요. 파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배우가 된 지금도 여전히 선하고 다정해요. 그때도 당신은 넘어진 나를 일으켜줬잖아요. 너무 덜렁대서 속상해하는 나에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모습이 좋다고 해줬고, 내 도전을 응원해 줬었죠.”
“그랬죠…. 하지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한결같을 수 있었던 건 그때 당신이 해준 말이 있어서였어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원동력을 얻었고,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다 마리네뜨 덕분이에요.”
하지만 털어놓고 보니 모두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두 사람 다, 아주 오랫동안 진심을 털어놓기를 고대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둘은 쭉 같은 마음이었고, 그래서 눈빛만 보고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몇 년간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전하기에는 부족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요. 식사라도 하면서 마저 이야기할까요?”
“좋아요. 서로가 성공하면 축하해주자는 약속, 이제 지킬 때가 됐죠.”
조이가 연기하는 ‘스카라벨라의 친구’의 원본이 마리네뜨라는 것, 마리네뜨가 블랙키티의 평상복을 구상할 때 무심코 떠올린 게 처음 만났을 당시 조이가 입었던 옷이라는 것 같은 부록과 외전,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꿈과 계획들을 이야기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랐다.
댓글 2
상상하는 펭귄
수고했어...'키티'...?!
행복한 청설모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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