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큘러스

차갑고 달콤한

별찌(Byeoljji_public) 님과 연성교환

가브리엘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냉혈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큰 키 때문에 항상 사람을 내려다봤다. 위에서 아래로 시선을 내리꽂는 회청색 눈동자의 색이 싸늘했고, 입매는 항상 아래로 기울어진 채였으며 농담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성격이 그 단서였다.

사실 가브리엘은 냉혈한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보이길 원했다.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세운 벽을 넘는 사람들은 절대 그를 만만하게 보지 않는 자들일 테니까.

그의 가면은 두껍고 견고했지만, 빈틈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밀리만은 가브리엘의 민낯을 볼 수 있었다. 숨겨진 사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에밀리 앞에서 잇속과 실리를 챙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무슨 일로 부른 거야?"

평온을 가장했지만 숨이 차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상기된 얼굴로 에밀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지금과 같은 얼굴. 이럴 때마다 에밀리는 사랑을 실감한다.

에밀리가 오랫동안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은 결코 심술이 아니었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그의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밤이 늦었어."

숨을 고른 가브리엘은 재촉하는 대신 그렇게 말했다. 걱정이 드러나는 얼굴을 보며 에밀리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등 뒤에 숨겼던 것을 앞으로 꺼내 보였다.

"중요한 건 아니야. 그냥 오늘이 지나기 전에 이걸 전해주고 싶었어."

"이건···?"

"역시 몰랐구나. 관심 없을 것 같았어.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잖아.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으로 마음을 전하는 날."

에밀리의 말대로였다. 가브리엘은 그런 기념일을 사사로운 것이라 여겼고 구태여 챙겨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잊고 있었다. 하지만 에밀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본래의 가브리엘이라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자신이라는 변수가 생겼다는 점.

가브리엘은 에밀리가 내민 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잘 포장된 작은 상자. 속을 알 수 없는 것. 가브리엘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는 종일 에밀리가 누구에게 초콜릿을 줬을지 신경 썼다. 에밀리는 그런 가브리엘의 속도 모르고 사사로운 것에 관심 없는 그에게 초콜릿을 줘도 되는지 망설였다.

엇갈렸던 마음의 결과를 은은한 달빛이 비췄다. 연한 분홍색 포장지로 감싼 하트 모양의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는 가브리엘. 자신의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에밀리의 마음을 받아든 채로.

"별거 아닌 걸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해."

에밀리의 말에 가브리엘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정말 고마워."

가브리엘은 에밀리가 준 상자의 포장을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었다. 그 형태 그대로 훼손하지 않고 간직하고 싶었다.

"열어보지 않을래?"

"그래도 돼?"

"물론이지!"

가브리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긴장 때문이라는 걸 에밀리는 알 수 있었다. 귀엽다고 생각해도 될까? 가브리엘 아그레스트를. 진지한 표정으로 초콜릿의 포장을 벗긴 가브리엘을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상자 안에는 동그란 모양의 초콜릿이 칸막이 사이에 가지런하게 들어가 있었다.

"완전히 내 힘으로 만든 건 아니야. 아멜리가 많이 도와줬어. 그런데도 많이 어설프지?"

에밀리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과 달리 모양도 맛도 전혀 어설프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원래 초콜릿을 잘 먹지 않았지만, 드물게 먹을 때에는 항상 씹어 삼켰다. 하지만 에밀리가 준 초콜릿은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차갑고 딱딱한 초콜릿을 천천히 녹였다. 아마 평소처럼 먹었다면 알 수 없었을 과일 향이 느껴졌다.

곱씹을 여지가 많은 초콜릿이 머리 속에 생각을 늘렸다. 가브리엘은 상상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래보다는 과거가 떠올랐다.

익숙하게 무심함을 그려냈던 그에게 다가왔던 에밀리의 미소. 첫 만남부터 그렇게 환하게 웃는 사람은 처음 봤다. 참 쉽게 웃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잘 웃었지만 함부로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에밀리의 불순물이라고는 없는 맑은 웃음을 몇 번이고 그려내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가브리엘은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알게 됐다. 부정하려 해봤지만 에밀리의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진심을 전하는 방법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바보 같이 흘러나오는 속마음을 숨길 수도, 정돈해서 전해주지도 못했다.

"어때?"

에밀리가 물었다. 기대가 녹아 있는, 설렘으로 토핑된 미소를 지으며.

"차갑고 달아."

단순하고 일관적인 감상에 에밀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가로질렀다.

"···맛있다는 뜻이었어."

따라오는 말이 작고 느렸다. 부끄럼을 타는 가브리엘의 모습이 낯설어, 에밀리는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간지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평소에는 분위기가 아무리 얼어 붙었어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던 가브리엘이 힘겨운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데려다줄게'라고 뒷말을 이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말을 꺼내고 말았다.

"자고 가."

"뭐?"

"어?"

가브리엘은 자신이 꺼낸 말에 스스로 놀랐다. 평소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가고, 좀처럼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가브리엘 답지 않게 온 몸으로 당황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는 것을 잊은 사이, 에밀리가 선수를 쳤다.

"좋아."

"미, 어?"

여러가지로 놀랄 일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은 이 상황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속을 투명하게 내비치는 데다 '미안'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가브리엘 아그레스트라니. 에밀리조차도 혹시 '미쳤다'고 하려 했던 걸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아무튼 가브리엘에게도 에밀리에게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좋아, 가브리엘."

그래서 에밀리가 한 번 더 말했다. 없었던 일이 되지 않게, 다시 무를 수 없도록. 당연하게도 가브리엘은 에밀리의 "좋아" 위에 "안돼"를 덧칠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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