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버그] 꿈
시즌 1 기준
빌런에게 의식이 끊기는 순간은 여태 많았으나, 몇 번이나 겪어도 기분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젠장.」 빌런이 흔드는 추를 본 순간 블랙캣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품 안에서 레이디버그의 심장소리가 전해졌다. 작은 새처럼 파닥거리는 심장이었다. 빌런의 추를 보면 안돼. 레이디버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통통 튀어올랐다. 그는 여차 싶던 순간에서 레이디버그가 빌런을 보지 못하도록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하지만 대신 그는 빌런의 추를 똑바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꼭 이상한 부분에서 실수를 한다고 생각했다. 손과 발끝에서 서서히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눈 앞의 모든 것들이 파도처럼 앞으로 다가왔다 뒤로 밀려났다.
「미안해, 레이디버그.」
조종당한 채 자신이 또 아무것도 모르고 그녀를 공격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녀 혼자서 빌런을 막아내야 한다니 심장이 난도질 당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스스로 해낼테지만, 자신이 도울 수 없다는 생각에 한이 서렸다. 입술이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블랙캣은 미약한 저항으로 눈에 힘을 주었다. 허나 어둠이 곰팡이처럼 시야를 좀 먹으면서 그의 모든 의식이 사라졌다.
* * *
「아드리앙?」
길다랗게 뻗은 풀들이 그의 팔과 다리를 간지럽혔다. 낮게 부는 바람이 그의 콧잔등을 스쳤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여서 눈을 감았는데도 시야가 오렌지 껍질 같은 주황색이었다. 블랙캣, 아니 아드리앙은 익숙한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그를 다시 불렀다.
「아드리앙, 거기에 누워서 뭐 하니?」
아드리앙은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물감을 풀은 것 같은 진한 푸른빛의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솜을 찢어놓은 것 같은 불규칙한 모양의 구름들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눈동자를 굴리던 아드리앙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만 해를 마주 본 탓이었다. 강렬한 구체의 이미지에 눈을 꼭 감았는데 푸른 빛이 계속 떠다녔다. 그 빛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들, 엄마가 왔는데도 눈 꼭 감고있기야?」
아드리앙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머리맡에서 누군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상대방이 앉아있는지 얼굴 간 거리가 꽤나 가까웠다. 그녀의 귓가에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달콤한 꿀과 같은 색깔의 머리카락이었다.
「엄마?」
목구멍을 박차고 튀어나온 목소리는 봄에 피어오른 냉이꽃처럼 여리고 높았다. 아드리앙의 목소리에 그의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헝클어뜨렸다.
「맞아, 엄마야. 아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아드리앙은 자신의 머리칼을 휘젓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런 그를 놀리는지 어머니의 손은 느리게 움직이다가도, 그의 손 틈에서 쏙 빠져나갔다. 그런 장난을 다섯 번 쯤 쳤을 때 어머니가 꽃망울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아드리앙은 겨우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로 아드리앙은 힘겹게 상체를 올려 풀밭에 앉은 자세가 되었다. 아드리앙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매번 어머니와 산책했던 공원이었다. 나뭇가지를 덮은 잎사귀들이 아직 풋풋한 연두색이었다. 주변에서 풀을 잡아 으깬듯한 풋내가 났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어머니가 웃음을 멈췄다. 아드리앙의 손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드리앙, 무슨 일 있었어?」
그의 어머니가 그의 이마를 들어올렸다. 언제 흘린 건지 땀으로 젖어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있었다. 엇필 보니 얼굴이 핼쓱한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의 눈동자에 걱정이 서렸다. 아드리앙은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꿈? 아드리앙은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클로버를 꺾어서 엮은 것 같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드리앙은 자신이 봤었던 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몇몇 이미지가 반짝거리면서 떠올랐다. 무당벌레 무늬였다. 아드리앙은 왜 자신이 무당벌레에 관한 꿈을 꿨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왜 그 꿈을 꿨다고 식은땀을 흘리는 지 알 수 없었다. 아드리앙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등으로 아드리앙의 땀을 훔쳤다. 아드리앙의 작은 눈동자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어꺠를 토닥였다.
「아니면 중요한 걸 잊어버렸니?」
아드리앙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에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깜빡 거리는데 어머니의 표정은 바람없는 수면처럼 잔잔했다. 의외의 말이었다. 아드리앙은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저으려다가 머뭇거렸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때이른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손을 내려서 바닥을 짚었다. 푹신하고 축축한 흙이 그의 손에 닿았다. 팔이 간지러웠다. 고개를 돌리니 무당벌레 한 마리가 그의 팔을 오르고 있었다.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약간 뒤뚱거리는 어설픈 몸짓이었다. 무당벌레의 등껍질이 햇살에 평소보다 더 매끄럽게 빛났다. 어째서인지 쫓아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어머니를 살펴보았다. 어머니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를 토닥이던 손길이 멎었다. 어머니가 그의 이마에서부터 머리선을 따라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의 머리카락을 귓가에서 넘겼다. 짧은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그의 어머니가 그의 머리를 다시 톡톡 두 번 토닥였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아드리앙, 네 꿈 기억해?」
아드리앙은 어머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아버지의 과보호 속에서 티비 프로그램만이 유일한 그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가 티비로 접했던 어린이 프로그램에선 언제나 영웅들이 나왔다. 그들은 시민을 구했고, 아무 댓가도 바라지 않았으며, 자신이 영웅일을 하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반드시 영웅이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꿈을 아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유일했다. 그런데 어째서 어머니는 그에게 그런 말을 묻는 것일까. 아드리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런 그를 보더니 환희로 가득찬 얼굴로 그의 머리카락을 힘껏 쓰다듬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헝클어졌다. 눈을 잠깐 찌푸리는 동안 그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너의 레이디에게 가야할 시간이야.」
레이디? 그는 눈을 깜빡였다. 땅에서 부터 환하고 이질적으로 선명한 녹색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땅에 닿은 그의 발과 손에서부터 녹색 빛이 뿜어져나왔다. 녹색빛이 지나간 곳은 검고 부드러운 천으로 뒤덮혀 있었다. 그는 다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가 서서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열심히 그의 팔을 올라가던 무당벌레가 그의 어깨 끝에서 날아올랐다. 그의 어머니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올게.」 그는 자신의 뺨을 타고 무언가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햇빛은 여전히 눈이 부셨다. 그는 자신이 내뻗은 손을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의 통통하고 작았던 손이 이제는 크고 단단하게 변해있었다. 검은색 슈트로 덮인 손가락 끝이 뾰족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거세졌다. 세상이 다시 한 번 변화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더니 한꺼번에 시들고 다시 자라났다. 해가 여러 번 그의 주위를 돌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떴다. 무당벌레가 날아간 곳에서 누군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햇빛에 붉은 빛이 강렬하게 반짝였다. 팬지꽃처럼 누군가 발라놓은 듯한 선명함이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상대가 가까워질 수록 그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블랙캣, 울어?"
가까이 온 상대가 그를 보더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덕분에 상대의 눈동자가 잘 보였다. 봄이오면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마리 같은 색깔이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자신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슈트로 인해서 만져지지 않았으나, 눈가가 시려웠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는 일부러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고여있던 눈물이 바람으로 빨리 마르길 바랐다. 레이디버그가 의아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던 부분이 괜히 화끈거렸다. 블랙캣은 부러 능글맞은 웃음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울리가, 마이레이디."
블랙캣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지만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블랙캣은 얼굴을 붉혔다. 레이디버그가 그런 그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블랙캣은 서둘러 손으로 눈을 가렸다. 허나 그런 노력도 무색하게 레이디버그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블랙캣은 눈동자를 굴렸다. 레이디버그가 그들 사이를 가린 손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토닥이는 박자가 꿈꿨던 박자와 같아서 그는 속에서 왈칵 뜨거운 것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과 폐가 폭풍 속에 포류하는 배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최대한 헐떡거림을 그치려 노력하며 물었다.
"레이디, 난 너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야?"
레이디버그가 그의 말에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레이디버그가 그의 손을 잡았다. 블랙캣의 손끝이 갸냘프게 떨었다. 레이디버그의 손이 따뜻했다. 블랙캣은 자신의 눈물샘이 포화상태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꾹꾹 눌러왔던 눈물이 역류해서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레이디버그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웃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두 번의 경고음이 그녀의 귓가에서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은 채로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다.
"블랙캣, 넌 언제나 내게 소중한 파트너야. 내가 사람들에게 영웅인 것처럼, 넌 내겐 영웅인걸."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댐이 무너진 것처럼 눈물이 계속해서 눈가에서 흘러 넘쳤다. 블랙캣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레이디버그가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고마워 블랙캣." 블랙캣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이 불규칙해서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레이디버그는 그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다시 한 번 레이디버그의 귀걸이에서 경고음이 들렸지만, 둘 다 신경쓰지 않았다. 레이디버그는 변신이 풀리기 직전까지 블랙캣을 다독였다. 고마워. 고마워. 마치 무당벌레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블랙캣은 쉽게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