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버그 소설 재업

[캣버그] 고양이 달래기

시즌 1 기준

좋아하는 마음을 혀와 성대로 표현하자면, 그건 필시 말이 아니라 음색이 될 터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우주였고, 그녀의 눈동자는 바다였다. 그는 우주와 바다가 원래는 이 색이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세상이 그녀의 색으로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초여름의 분수대처럼 청량했고, 그녀의 몸짓은 산들바람처럼 우아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세상은 그녀가 되어있었다. 그는 어디서나 그녀를 발견했다. 길거리 틈새로 피어난 들꽃에도 추운 겨울밤 반짝이는 별빛에도 그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히어로 활동이 끝난 후 아드리앙은 습관적으로 알리야의 블로그에 들어갔다. 레이디버그의 열렬한 팬인 그녀는 레이디버그에 관한 모든 소식을 블로그에 백업하곤 했다. 심지어 방송보다 더 빠르게 올리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그는 블로그에 들어가자마자 메뉴 옆에 떠올라 있는 'N' 표시를 볼 수 있었다. 벌써 오늘 있었던 일을 알리야가 올린 게 분명했다. 아드리앙은 레이디버그의 제 1의 팬인 그녀에게 감사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마우스를 움직여 게시물을 눌렀다. 이번에 올라온 것은 영상이었다.

영상의 섬네일은 레이디버그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시간 제한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뜬 뒤, 찍힌 영상 같았다. 아드리앙은 재생버튼을 누른 후 영상 화면을 확대했다. 언제나처럼 그녀는 놀란 시민들을 토닥이고 사람들을 향해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드리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 * *

"오늘은 일찍 왔네, 야옹아."

레이디버그가 고개를 돌리다 그를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었는데, 블랙캣이 조금 이상했다. 블랙캣이 볼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마치 털을 빳빳하게 세운 고양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블랙캣은 그녀의 인사를 받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의 눈 앞까지 천천히 걸어와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블랙캣, 왜 그래?"

레이디버그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블랙캣의 양 볼이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빵빵했다. 블랙캣이 그녀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약한 원망이 섞인 눈빛이었다. 레이디버그는 빠르게 자신이 블랙캣에게 잘못한 게 있었는지 머리 속 테이프를 감아보았다. 놀랍게도 짐작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스터 피죤과 싸웠을 때 블랙캣의 손으로 빌런의 손을 내리쳐 호루라기를 깼던 기억이나, 저주에 막 풀린 블랙캣을 다크큐피드에게 던졌던 것들이 생각났다. 레이디버그는 척추를 타고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잘못이 너무 많았다. 블랙캣 없이 혼자서 그녀가 빌런을 정화할 수는 없었다.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을 달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허나 미처 닿기도 전, 블랙캣이 입을 열었다.

"레이디버그."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려있었다. 레이디버그는 그대로 손을 뻗지도 거두지도 못한 채 화들짝 놀라 답했다.

"응?"

"왜 다른 사람 손등키스는 받는 거야?"

"뭐?"

레이디버그는 그 말에 놀라 블랙캣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비치는 블랙캣의 눈동자가 어느새 촉촉히 젖어 있었다. 블랙캣의 목소리에서 물기 서린 원망이 섞여 나왔다.

"내가 손등에 하려는 건 매번 밀어내면서, 오늘 다른 사람이 하는 건 그냥 받았잖아!"

블랙캣의 입이 오리입처럼 뚱 하니 나와있었다. 레이디버그는 당혹감에 블랙캣을 바라보았다. 장난인가 싶었지만 블랙캣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불현듯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구해준 시민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손등에 입을 맞춰도 되는지 물어봤다. 그저 보답과 존경의 표시 같아서 승낙했는데, 블랙캣이 그 모습을 볼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레이디버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애매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게, 그러니까…."

레이디버그는 둘러댈 말을 골랐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블랙캣을 납득시키진 못할 것 같았다. 빌런을 물리치느라 바빴다고 생각하면 빌런을 잡은 후가 생각났다. 시간이 없었다고 말하기엔 그렇지 않았던 경우도 수두룩했다. 말을 쥐어짜내면 짜낼 수록 그 말을 격추시키는 다른 말들이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불랙캣은 그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레이디버그는 손을 떨구며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하지만 네 손을 뿌리친 것도 고의는 아니었어."

"그래?"

"그러니까…, 대신 내가 뭐라도 해줄까?"

민망함과 미안함이 만들어 낸 제안이었다. 지금 손등키스를 해도 된다고 말하기엔 너무 스스로가 오만하게 느껴졌다. 레이디버그는 조심스럽게 말하며 블랙캣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의 제안에 순식간에 삐죽 삐져나왔던 블랙캣의 입이 들어갔다. 시시각각 어두워지는게 분명한데, 블랙캣의 눈동자가 좀전보다 훨씬 반짝거렸다. 하지만 아직 볼의 공기는 다 빠지지 않은 것 같았다.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응."

"뭐든지?"

레이디버그는 말을 멈췄다. 그녀는 블랙캣을 힐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서려있던 질투와 원망이 순식간에 흩어져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괜히 뭐라도 해준다고 말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자신의 소원을 외쳤다.

"그럼 무릎베개 해 줄래, 마이레이디?"

방금 전의 침울함과 우중충함은 어디로 가버린 것 같았다. 블랙캣이 그녀에게 익숙한 호칭을 붙였다. 블랙캣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레이디버그는 그를 알기 쉽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허튼 소원이 아니라 그녀에겐 다행이었다.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무릎베개만 해주면 되는 거야?"

"그리고……."

블랙캣이 말꼬리를 흐렸다. 레이디버그는 발가락을 꼼지랑 거리며 블랙캣을 바라보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레이디버그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블랙캣이 잠시 하늘을 보며 고민하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턱도 쓰다듬어 줘."

"푸하."

블랙캣의 말에 레이디버그는 저도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블랙캣이 고양이처럼 사뿐히 그녀의 옆에 다가왔다. 입모양이 마치 정말 고양이 같아서 레이디버그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의 부탁이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레이디버그는 자신이 서 있던 지붕에 앉은 후 옆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좋아. 이리와, 야옹아."

블랙캣이 그녀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레이디버그는 블랙캣이 머리를 베기 편하게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리고 블랙캣을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에 방금 전의 표독스럽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포근함 만이 가득 차있었다. 레이디버그는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블랙캣을 보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블랙캣이 기분 좋게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블랙캣, 정말 고양이가 되기라도 한 거야?"

"난 언제나 너만의 고양이라고, 마이레이디."

블랙캣이 윙크를 지어보였다. 레이디버그는 웃음을 참으며 한 손가락으로 그의 턱 밑을 가볍게 간지럽혔다. 얇은 슈트 너머로 그의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지는 듯 했다. 레이디버그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무당벌레가 심장에 앉아있다고 생각했다. 심장에서 부터 해서 온 몸으로 간질거림이 퍼져나갔다. 바람이 불었다. 블랙캣이 다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이자 블랙캣에게서 머스크 향이 났다. 레이디버그는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차가웠다. 레이디버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블랙캣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깥쪽 턱선에서 안쪽 턱선까지 쓸어내리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그의 턱 끝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는 불쾌한 내색없이 그런 그녀의 손길에 스스로를 맡겼다. 늦저녁의 지붕 위에서 만족한 고양이의 그르렁 소리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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