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마리]레이디버그가 없는 날
시즌 2 기준
그 날은 레이디버그가 나타나지 않은 날이었다. 간만에 얼굴 보나 싶었는데. 블랙캣은 속으로 혀를 찼다. 물론 레이디버그가 아무 말 없이 잠적한 건 아니었다. 브레이크 고장난 버스가 대로를 질주하고 있단 소리에 황급히 변신을 했는데 레이디버그에게 음성메세지가 와 있는 걸 발견했다. "블랙캣, 내가 오늘은 급한 일이 생겨서 아무래도 도시에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오늘만이니까 부탁해. 물론 호크모스가 나타나면 나도 갈게."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명색이 영웅인데, 얼굴 보고 싶다고 호크모스가 나타나길 바랄 수도 없었으니 블랙캣은 애만 탔다. 혹시나 해서 알겠다고 메세지를 보내봤지만 역시 답은 없었다. 블랙캣은 혼자서 버스를 세우고, 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고양이를 땅으로 내리고 강에 빠진 아이를 건져냈다. 긴 봉을 늘려 아이를 구해낸 후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그가 서 있는 다리 위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고마워요 블랙캣! 레이디버그는 어디에 있어요?"
"레이디버그는 지금 좀 바빠요, 아 못 온 건 아니고."
"그럼요?"
"영웅 사정도 생각해주셔야죠. 여러분."
레이디버그가 일이 있어서 오늘 못 온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호크모스가 나타나겠지. 그럼 레이디버그가 하는 '일'에 방해가 될테고. 블랙캣은 황급히 사람들의 질문에 말을 둘러댔다. 레이디버그가 오늘 나타나지 않은 것도 서러운데 자신이 구해준 사람들마저 자기 자신보다 레이디버그를 찾으니 당연하다 생각하면서 울컥한 심정이 들었다. 대충 상황을 무마시키며 블랙캣은 레이디버그가 무슨 일로 나오지 않는 지를 생각했다. 평소에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빠르게 나타났으니까 그녀에게 큰 일이 생겼나보다라고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사정이 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의 말을 정리하며 블랙캣은 윙크를 했다.
"그럼 이만. 다음에 만나요 여러분."
사람들이 레이디버그에 대해 묻는 것도 불만스러웠지만, 자기 자신도 레이디버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이게 뭐야. 블랙캣은 사람들을 피해 지붕으로 뛰어다니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 시간에 집에 들어가게 되면 혼자 방에서 피아노연습을 해야했다. 듣는 사람 없이 같은 곡만 수십 번 치는 독주회, 그 텅 빈 방 안에서 홀로 피아노를 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블랙캣은 해가 질 때까지 지붕 위를 걸었다. 해가 지평선으로 넘어가고 하늘이 서쪽부터 짙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석양이 붉은 빛으로 얼룩졌다. 완전히 레이디버그같은 저녁인 걸.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레이디버그가 무슨 일로 못 오는지 궁금했다. 상을 당한 걸까? 아니면 데이트? 생각만 해도 속이 끓어올랐다. 그는 생각이 점점 자신에게든 그녀에게든 안 좋은 쪽으로 빠지고 있단 걸 깨닫고 상상을 멈췄다. 다시 만날 때 묻게되면 알게 되겠지. 아, 싫어하려나.
정처없이 걷다보니 그는 저도 모르게 공원에 다다랐다. 저녁의 공원은 낮보다 한산했다. 불빛이 켜진 채 돌아가는 회전목마만이 간혹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을 뿐이었다. 풍선파는 아저씨도 사라졌고. 바람에 나뭇잎들이 저끼리 부비는 소리나 분수대의 물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퍼졌다. 그러던 와중 블랙캣은 공원을 가로지르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마리네뜨?"
저 앞에서 마리네뜨가 힘이 빠진듯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걷고 있었다. 마리네뜨의 뒷모습에서 블랙캣은 오늘 가브리엘사가 학생대상 워크숍을 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일 때문에 가뜩이나 바쁘신 아버지도 오늘은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으셨지. 블랙캣은 아버지가 오늘 아침 일찍 인사도 없이 회사로 출근하셨다는 것과, 전날 마리네뜨가 교장 추천으로 워크숍에 참가하게 됐다고 말하던 뷔스티에 선생님이 기억났다. 기쁨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내젓던 마리네뜨 모습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가 오늘 왜 저렇게 우울해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사나 건네볼까. 블랙캣은 마리네뜨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가로등 위에서 뛰어내렸다.
"안녕, 레이디."
"블랙캣?"
블랙캣의 인사에 마리네뜨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블랙캣은 그녀가 품 안에 안고있는 워크숍 안내 책자와 그녀의 디자인 수첩을 발견했다. 짐을 그대로 들고 있는 걸 봐서 워크숍이 이제야 끝났나보네. 그럼 아버지도 지금쯤 집에 도착하셨을려나.
"블랙캣, 오늘 레이디버그가 없었다는데 괜찮았어요?"
마리네뜨가 들고 있는 책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생각에 잠겨있던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질문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눈을 깜빡이자 마리네뜨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오늘 많이 힘들었나요?" 그가 대답하지않는 걸 보고 오해한듯 마리네뜨가 덧붙였다. 블랙캣은 고개를 저었다.
"나야 늘 괜찮죠. 마리네뜨는 이제 집에 가는 중인가요?"
"네, 워크숍 참가했던 게 이제야 끝나서."
마리네뜨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눈이 여전히 동그랗게 뜨인 게 블랙캣의 갑작스런 등장에 적잖이 놀란 모습이었다. 블랙캣은 무안한 마음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힘들었겠어요." "블랙캣이야 말로요." 그의 말에 마리네뜨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초여름이라 낮은 꽤 더웠지만 밤에는 공기가 빠르게 식었다. 블랙캣은 바람이 자신의 귀를 간지럽히는 걸 느꼈다. 발걸음을 바꿔서 블랙캣은 마리네뜨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런데 레이디버그가 안 나타난 건 어떻게 알았어요? 워크숍이 있었다면 바빴을텐데."
"아, 그게, 집에 오는 길에 알리야 그러니까 제 친구가 말해주더라구요! 알리야 아시죠? 레이디버그 블로그 운영자인데."
"네, 알죠. 저도 레이디 블로그 구독자인 걸요." 블랙캣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마리네뜨가 웃음을 터뜨렸다. 블랙캣은 마리네뜨의 웃음을 따라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마리네뜨의 웃음은 묘하게 사람을 안정시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러지. 반장이라서 그런가. 블랙캣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하늘이 점점 레이디버그의 머리칼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블랙캣은 크게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덧붙였다.
"사실 많이 힘들었어요."
"아. 역시 레이디버그가 오지 않아서 힘에 부쳤나봐요."
마리네뜨가 그의 말에 회색하며 말했다. 블랙캣은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사로운 문제들이야 당연히 저 혼자서도 거뜬하죠. 근데, 그냥. 얼굴을 못 봐서 그런가."
블랙캣은 그 말을 하고 마리네뜨를 돌아보았다. 마리네뜨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썹이 쳐진 게 꼭 강아지 같아서 블랙캣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가뜩이나 보고 싶은데 사람들은 또 레이디버그만 찾는 거 있죠. 내가 있는데도, 아니지. 모르겠네요. 레이디버그가 보고 싶은데 또 한편으론 사람들이 나 혼자로는 변변치 못하다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 저는 블랙캣이 훌륭한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주먹을 쥔 채 마리네뜨가 외쳤다. 곧이어 마리네뜨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블랙캣을 좋아해요. 그리고 레이디버그도. 레이디버그도 블랙캣을 영웅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블랙캣을 믿고 의지하니까 이번에 이런 부탁을 했겠죠.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요 블랙캣."
블랙캣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마리네뜨는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때에 정확하게 듣고싶어하는 말을 해 줄 줄 알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는 척 한 걸까. 분명 처음에는 격려해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블랙캣은 팔짱을 꼈다. 흐릿한 조명 아래서 보니 그녀가 레이디버그를 닮아 보였다. 머리빛이나, 눈 색깔이. 순간 심장박동이 빨라졌으나 블랙캣은 그럴리 없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블랙캣은 마리네뜨를 향해 화답했다.
"고마워요. 마리네뜨도 워크숍 결과 분명히 좋게 나올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블랙캣."
마리네뜨가 굳은 얼굴을 풀고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를 만나서 생겼던 긴장이 어느정도 완화된 듯한 모습이었다. 블랙캣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뭐, 내일은 또 레이디버그를 만날 수 있을테고, 사람들이 말은 잘 안했지만 나도 그들에게 훌륭한 영웅일 거고. 블랙캣은 저도 모르게 아드리앙이었을 때처럼 미소를 지으며 마리네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마리네뜨의 뺨이 다시 불그스레 물들었다. 그녀의 시선에 블랙캣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라 양 손을 든 채로 뒤로 한 발짝 물러난 블랙캣은, 마리네뜨 너머로 하늘이 이미 절반쯤 어두워졌단 걸 발견하고 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 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지 마리네뜨의 말소리가 흐릿했다. 블랙캣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가로등 위로 뛰어올랐다. 들키면 어쩌려고 이런 짓을. 블랙캣은 자신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아직도 손 안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던 촉감이 남아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를 토닥인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폈다 하면서 블랙캣은 지붕을 달렸다.
* * *
"……깜짝이야."
블랙캣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던 마리네뜨는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블랙캣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부터 죄책감과 당혹감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블랙캣의 행동이나 어투가 레이디버그로 만났을 때랑은 다른 게 한 몫했다. 가방에서 티키가 살포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아까 블랙캣, 누군가 닮지 않았어?"
티키가 말하지 않아도 블랙캣이 미소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는 순간 그녀의 머릿 속에는 누군가 빠르게 지나갔다. 아무리 빠르게 지나가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인상의 사람이었다. 아드리앙. 마리네뜨는 고개를 저었다. 블랙캣이 아드리앙일리가 없지. 하지만 오늘 블랙캣은 묘하게 아드리앙처럼 그녀의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어깨를 토닥이던 손길을 기억하자 다시 얼굴에 피가 몰려 뜨거워졌다. 마리네뜨는 티키에게 고개를 빠르게 저어보이곤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도로 집을 향해 걸었다. 심장 뛰는 소리를 블랙캣이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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