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ey For
필양
고요한 아침, 볕 드는 창 옆에 한 남자가 우수에 찬 표정으로 앉아있다. 즐거운 표정으로 널찍한 카페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다르게 그저 테이블 위로 시선을 고정한 모습이 어딘가 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소음 뒤로 잔잔히 섞여드는 재즈가 그의 그림자 아래로 스며들었다. 무엇을 고민하는 걸까. 남자는 한 손을 턱에 괸 채 제 앞에 놓인 흰 종이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멍을 때리는 건가 싶으면 이따금 좁아지는 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온다. 이래서 오늘 안에 끝날 수는 있을는지. 백지 위로 점이라도 찍히면 좋으련만. 오지랖 넓은 사람이라면 분명 그의 빈 앞자리에 앉아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걸 바라는 건 아닌지 남자는 커피잔 아래로 숨어 물기가 묻어버린 연필을 들어 올리며 드디어 어떠한 행위를 이어 나간다. 뾰족하게 깎인 흑연이 하얀 바탕 위로 뭉개지며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 갔다.
그리운 너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종종 너와 함께 하늘을 날며 놀던 기억이 떠오르곤 해.
참 자유롭고 좋았는데. 물론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내 어린 시절을 빛내줘서 고마워.
덕분에 지금까지 순수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어.
솔직히 좀 많이 보고 싶을 때가 있어.
그치만 전하지 못 할 말이니까, 이렇게라도 표현해볼게.
항상 건강 조심하고 행복하길 바라. 안녕.
이제는 뭉툭해진 연필 끝이 남은 여백을 무시한 채 마침표를 찍는다. 종이 속에 들어갈 듯 숙어져 있던 고개가 제자리를 찾아 떠오르면 아까보다 한층 개운해진 얼굴이 보였다. 뻐근한지 작은 기지개를 켠 남자가 마음이 담겨 무거워진 편지지를 들고 카페 밖으로 나선다. 벌써 2시가 되어 햇빛이 하늘 중심에서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어우, 눈을 못 뜨겠네. 매서운 공격에 눈살을 찌푸린 남자가 입구 옆 작은 우체통 안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스르륵 암흑으로 가라앉는 것을 뒤로한 가벼운 발걸음이 점점 멀어져갔다.
수능이 100일도 안 남은 시기에 고3 양정인은 압박감에 못 이겨 예민해지는 다른 수험생과는 다르게 느긋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공부는 제 길이 아니라고 포기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느 정도 할 줄은 알지만 그걸로 먹고 살 마음이 없어서 그랬다. 자습 시간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다닐 때 양정인은 절반 정도는 사색에 잠겨 살았다. 새까만 정수리 사이로 초점을 알 수 없는 눈이 유독 눈에 튀었으나 선생님들은 집중하라며 혼내지 않았다. 오직 정인에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나름 신도시라고 자식 못지않게 성적에 열 내는 학부모가 많은 동네에 한번 불미스러운 일이 터진 적이 있었다. 12살짜리 아이가 유괴당한 사건이었다. 한창 아동 범죄 얘기로 시끄러웠을 때라 모든 부모가 그 집 참 불쌍하다며 제 아이를 품에 껴안고 다녔다. 다만 조금 더 말이 많았던 건 유괴당한 아이의 부모에게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 진전이 없자 소문은 무수한 가지를 달며 거짓을 키워나갔다. 실은 애가 가출한 거래. 어딘가 음침하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지. 원래 발 없는 말이 천 리 가는 거라 근거 없는 얘기를 사람들은 빠르게 믿고 퍼다 날랐다.
그러다 도마 위에 올랐던 아이가 멀쩡히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종된 지 장장 3개월 만이었다. 발견 된 장소는 기이하게도 자기 방 침대였다고 한다. 이후 아이에게 많은 사람들이 여러 차례 접근했으나, 그 누구도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기이한 결말만 남긴 채 사건은 종결로 처리되었다.
웃긴 건 아이가 돌아온 직후부터 소문이 더 활개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평범하지 않은 얘기에 모두가 두려움을 느낀 탓이었을까. 그저 모든 루머를 묵묵히 듣던 아이의 부모는 제 새끼를 끌어안으며 따스한 사랑을 속삭이는 일에만 주력했다. 너른 품에서 나오는 끝없는 온기에 아이는 큰 방황 없이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로 친구들과의 힘든 일은 없냐고 물어도 그저 해맑게 웃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할 뿐. 별다른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폭풍전야처럼 긴장감이 맴 돌던 집안도, 동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는 아이를 낯선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식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등하굣길에 아이에게 꽂히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부모는 잡은 고사리손을 꽉 쥐어내며 힘차게 걸어 나갔다. 그리고 본래 태풍의 눈이 고요한 법이라, 주변이 어떻게 흘러가든 아이는 제 할 일을 해내는 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이 얘기의 주인공은 저기 앉아 사색에 잠겨 있는 양정인이 맞다. 벌써 교복을 두 번이나 바꿔입었지만, 매번 정인의 새 교복 뒤엔 뗄 수 없는 꼬리표가 붙어버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성정이 조용한 탓에 기분 나쁜 눈초리만 빼면 평범한 하루를 영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온순하고 착한 성격 덕에 편견 없는 친구들이 다가와 주기도 했다. 홀로 학교를 다니는 일 같은 건 다행히 일어나지 않았다.
정인은 사색에 잠길 때마다 하는 습관인 턱을 괸 모습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앞으로 두 달. 잘 보내보자. 누가 듣는다면 수능을 위한 응원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인의 초점이 여전히 창밖 그 어딘가를 향해있다는 점에서 약간은 갸웃하게 되는 발언이었다.
7교시 전부 자습, 자습, 점심, 그리고 가끔 체육. 이 상태로 돌아가는 터라 한번 시간을 죽이기 시작하면 잠깐 눈 감았다 뜬 사이에 훅 지나가곤 했다. 정인의 오늘 또한 이러했다. 공부 좀 하다가, 사색에 잠겼다가, 친구들이랑 모여서 급식 먹고 돌아와서 다시 자습 좀 하다 보니 어느새 담임선생님이 교탁 앞에 서 있었다. D-100일이 된 순간부터 종례를 가장한 숫자 놀이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진부한 얘기가 끝나자마자 정인은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보챘다.
왜 이리 피곤한 건지. 방금 막 저녁을 먹은 정인의 눈꺼풀 위로 잠이 쏟아져 내렸다. 아, 안 되겠다. 축 늘어지는 몸을 겨우겨우 일으킨 정인이 제 방에 있는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며 잠에 빠져들었다. 생각보다 깊게 잠든 정인이 어스름한 저녁 빛이 감도는 방 안에서 누군가의 부름에 의해 눈을 떴다. 얼굴을 베개 위로 붙인 불편한 자세로 내내 누워있어서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피곤이 몰려들었다. 계속 흔들리는 몸을 느끼며 아, 왜애… 그냥 더 잘래… 하고 정인이 잠투정을 부린다. 닿아있던 손이 잠시 멈칫한 사이 정인은 깜빡이는 정신을 놓쳤다. 이대로 잠드나 싶던 순간에 일어나. 하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다시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누구지. 낯선 목소리가 귀에 박히자 순간의 소름과 함께 정인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움직인 터라 몸을 바치던 손목이 삐끗하며 저 위로 미끄러졌다. 그래도 침대 위니까. 편하게 다음을 예상한 정인이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잡은 손에 당황하며 고개를 돌린다.
"조심해야지, 웬디."
가까이 마주한 얼굴이 낯설지 않아서, 그 언젠가 저 이름으로 살았던 때가 있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과거가 정인을 집어삼킨다. 주체하지 못한 감정이 정인의 얼굴 위로 흘러내리자 조심히 눈가를 쓸어내리는 따뜻한 손길이 따라붙는다.
"오랜만이야."
"그러게."
"여기는 어떻게 왔어?"
웬디, 네가 날 불렀잖아. 하고 자신을 쳐다보며 웃는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홀린 듯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던 정인이 귓가에 박힌 말을 되새기다 이상한 점을 눈치챈다. 내가 불렀다고?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제 볼을 한번 쿡 찌른 남자가 알잖아. 내가 너에 관한 건 다 알고 있다는 거. 하고 대답해온다. 그렇구나. 정인은 말을 덧붙이는 대신 다시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우리 가야 해."
꽤 긴 시간 동안 붙어 있으니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실은 중간부터 제정신을 차린 정인이 뒤이어 밀려오는 수치심에 남자의 품에 숨어있던 거였다. 평소라면 절대 부리지 않았을 어리광을 삐걱대며 갈무리한 정인이 제 뺨을 긁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간다니? 어디를?"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창틀에 걸터앉은 사람을 보며 정인은 궁금증을 내뱉었다. 질문을 던질 땐 눈을 보라고 배운 탓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들었던 정인이 급히 시선을 내리며 제 손을 쳐다봤다. 답변이 돌아올 때까지 꼼지락 거리며 손장난을 치다가 무언가 다른 점을 발견하며 정인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이거 설마.
달빛 위로 비친 손의 끝부분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살피려는 순간 다른 방향으로 손이 이끌려갔다. 제 손을 쥔 남자가 오목한 형태를 만들더니 그 위로 같은 빛깔의 가루를 쏟아부었다. 그리고 다시 정인의 얼굴로 밀어주는데 꽤 조심성 없던 속도였기에 결국 가루들이 공중으로 흩어지게 됐다. 하필이면 얼굴 가까이 간지럽히던 것들이 콧속까지 침범해온다. 에취. 뭘 할 틈도 없이 정인의 재채기로 인해 수많은 가루가 찬란히 쏟아져 내린다. 여전히 안쪽 점막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느낌이 들어 정인은 살짝 튀어나온 코끝을 비비며 제 앞에 앉은 인영을 쳐다봤다.
"얼른 가자."
"어?"
"다시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며."
조금의 준비도 없이 남자를 따라 창밖으로 날아오르게 된 정인이 혼비백산이 된 채로 멀어지는 제 방을 쳐다봤다. 아니, 잠깐만. 문, 방충망. 아니!
"용복아, 문은 닫고⋯ 아악. 무서워!"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에 열린 창문에만 집중하던 정인이 우연히 제 발밑을 쳐다보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용복 아니고, 피터팬이야."
다급한 부탁에 정인을 옆집 지붕에 앉혀두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다 온 용복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정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용복 아니고 피터팬. 정인이 어깨 위에 닿은 손을 꼬옥 붙잡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7년 전에도 그랬지만 하늘을 나는 기분은 상상 이상으로 짜릿했다. 건물 내로 올라가는 것조차 어려운 고층 빌딩 위를 날아다니며 널따란 공간을 유영하는 건 자유를 넘어 꼭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착각을 갖게 했다. 구름 사이를 지나갈 때면 촉촉한 물기가 팔에 닿았다 바람에 의해 말라가는 걸 반복해서 볼 수 있었다. 매캐한 연기 따위 없는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면 온 몸에 상쾌함이 퍼지는 게 느껴졌다. 누구나 상상만 해온 일을 이뤄내는 순간이었기에 정인의 입꼬리가 위로 솟아오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네버랜드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날아서만 갈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직진만 하면 되었다. 어쩌면 비행기를 타고 지나가던 어린 아이들이 한 번쯤은 이곳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기억보단 작아졌지만, 여전히 큰 섬을 둘러본 정인이 바로 앞에 보이는 핑크빛 호수의 이름을 상기하려 노력했다. 가만히 호수를 바라보며 서 있는 정인의 곁으로 다가온 용복이 눈을 도르륵 굴리며 정인과 호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와, 여전히 예쁜 곳이네. 이 호수 이름이 뭐였지?"
정인이 용복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어봤다. 그 언젠가 호숫가에서 다 같이 놀던 기억까진 떠오르는데 그다음은 누가 지워낸 듯 흐릿하게 번진 상태였다.
"오로라 호수. 우리 자주 놀았던 곳이잖아."
"맞다, 오로라. 자주 놀던 건 기억이 나는데⋯ 딱 거기까지만 기억이 나서."
정인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귓바퀴를 매만졌다. 여긴 정말, 바뀐 게 하나도 없네. 부러 딴소리를 늘어놓으며 아닌 척 주제를 돌린 정인이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을 지나치며 하얀 빛의 숲길로 들어섰다.
아, 좋다. 정인이 길가에 핀 아이보리 빛깔의 동그란 꽃을 들이마시며 감탄했다. 중화된 레몬의 향이 부드럽게 제 몸에 퍼지는 기분이었다. 한 걸음 옮기면 그 옆엔 구불구불한 잡초가 형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양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나무는 부드럽게 껍질을 벗길 수 있어 손을 갖다 대면 그 자리에 눌린 자국이 남았다. 온갖 오감을 자극하는 섬을 둘러보며 정인은 새삼 이만큼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곳은 없을 거라고 경탄한다.
구경하느라 고작 숲의 입구에서 열걸음 정도 들어간 정인을 용복이 뒤에서 밀었다. 구경은 나중에 하고 제 친구들을 보러 가자고 종용하는 탓에 정인이 하는 수 없이 발을 굴러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안 걸려 빠져나온 숲길 앞으로 작은 요정들이 반짝이는 가루를 흩날리며 날아다니는 광경이 보였다. 그 뒤로는 파스텔톤 작은 집들이 길의 갈래마다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붕 위로 요정들이 떨어트리는 가루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제 눈높이와 비슷해진 마을을 내려다보던 정인이 용복의 손에 이끌려 비좁은 골목 사이를 지나쳐갔다. 모퉁이를 세 번 정도 돌았을까 용복이 여기로 들어가라며 정인을 작은 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 쉽지 않은데. 몸을 최대한 구기며 집안으로 들어선 정인은 낮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여기가 네가 있던 곳이야, 웬디."
"내가 여기서 지냈다고?"
다시 둘러봐도 제가 살기엔 너무 작은 집이었기에 정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용복을 쳐다봤다.
"우리 고작 며칠 안 본 건데 어떻게 다 잊을 수가 있어."
아까 호수 이름을 물었을 때처럼 정색한 용복이 정인을 노려보며 말했다.
"며칠? 아니야, 용복아. 벌써 7년이 지났어."
"거짓말 하지 마. 네가 떠난 날부터 만든 쿠키가 아직 5개도 안 넘었는 걸."
"나를 봐봐. 이 공간에 있기엔 내가 너무 커버렸잖아."
"괜찮아, 집이야 다시 지으면 돼."
그게 아니라… 하아. 정인이 막무가내로 구는 용복에게 제 말을 더 잘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근데 왜 자꾸 용복이라고 해? 난 피터팬이야."
잠깐 정적이 이는 사이로 용복이 언성을 높이며 정인의 말을 붙잡고 늘어진다.
"그야, 네 이름이 용복이니까 그러지. 그래, 말 나온 김에 다 말하자. 난 더 이상 웬디가 아니야. 난 정인이야. 양정인. 내 이름 알려줬잖아."
"아니, 넌 웬디야. 그리고 나는 피터팬이고. 우리의 이름은 그거야."
고집을 부리는 용복이 꼭 말 안 듣는 어린 아이 같아서 정인은 무슨 말을 더 꺼낼 수가 없었다. 계속 이런 상황이 반복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알겠어, 피터팬. 내가 미안해. 근데 있지. 난 내일이 오기 전에 다시 돌아가야 해. 그러니까 이런 집까지는 필요 없어."
단호하게 제 입장을 건네는 모습에 용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마을 전체로 내려앉는다. 그 탓에 아까 본 작은 요정 중 하나가 용복의 어깨 위로 내려앉으며 상황을 살피러 왔다.
"무슨 일이야?"
"내가 웬디를 데려왔어."
웬디? 갑작스러운 소식에 요정이 놀라며 눈앞에 있는 방 안을 살폈다. 그러니까, 지금 저기 몸을 구기고 있는 저 큰⋯ 사람이 웬디라고?
"피터팬. 어른을 데리고 오면 어떡해."
"어른이면 들어오지도 못했어. 앞으로 우리랑 같이 살 거니까 문 잘 지키고 있어."
낮은 목소리를 더 내리 깐 용복이 방문을 닫으며 요정에게 주의를 줬다. 철컥이며 잠긴 문 앞으로 다가간 정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문고리를 돌렸지만 달그락 거리며 돌아갈 뿐 열리지는 않았다.
"저기, 문 좀 열어줄래?"
"안 돼. 피터팬이 한 얘기 들었잖아."
"몰래 열어주면 조용히 돌아갈게. 나 진짜 가야 해."
"안 된다니까. 걸리면 나 바로 죽어."
죽는다니, 무슨 말이 그래. 무시무시한 협박에 정인이 입을 꾹 다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쩌다 여기서 돌아가게 됐더라. 자주 회상하지 않아서 바래진 조각들을 정인이 꿰맞추며 상념에 잠겼다.
- 웬디. 꼭 가야 해?
- 나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
- 그러면 나는? 나는 어떡해야 해?
- 내가 다시 네게 연락할게. 그때 나를 찾으러 와 줘.
심연에서 끌어올려진 기억이 너무도 먹먹한 탓에 정인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한번 물꼬가 터져서 그런가 끝나는 기억을 물고 다른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 안녕, 웬디.
- 난 양정인인데?
- 아니야, 넌 이제부터 웬디야. 우리 앞으로 재밌게 놀면서 지내자.
- 으응, 일단은 알겠어⋯.
오늘처럼 창틀에 걸터앉은 자세로 자신을 웬디라 청했던 용복을 떠올린 정인이 씁쓸히 웃으며 아무것도 모르던 어릴 적 자신을 그리워했다. 분명 그랬던 때가 있었지. 세상을 몰라 환하게 웃을 수 있던 시절이 지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이야기가 되었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기억에 추억팔이와 성찰을 반복하던 정인이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으며 좁은 방 안, 유일한 장식인 작은 창문을 바라봤다. 어, 근데 왜… 벌써 저녁이지? 고작 몇 분 전만 해도 환하게 빛났던 세상이 붉게 물드는 과정도 생략한 채 어둡게 칠해지고 있었다.
"이상하네. 아직 어두워질 때가 아닌데."
문밖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지금이 딱 기회인 거 같았다. 정인이 말을 걸려고 입을 뗀 순간, 다른 목소리가 순서를 가로채며 기회를 앗아갔다.
"팅커벨, 하늘이 이상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이렇게 빨리 어두워질 리가 없는데."
"아이들도 아직 놀고 있는데 무슨 일이지?"
고민하는 두 사람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뒤에 있는 조용한 집을 바라보며 어떠한 생각을 떠올린다.
"웬디. 이곳의 시간은 가장 큰 염원을 따라 움직이는 게 원칙인데,"
"⋯⋯."
"보통의 아이들은 노는데 정신이 팔려 하루가 빨리 저물기를 바라지 않거든."
"⋯⋯."
"지금 이 상황이 꼭. 누군가 간절히 내일을 바라는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아니지?"
"⋯⋯."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나를 두고 어른이 되는 걸 고르다니. 말이 안 되잖아."
"⋯ 미안해."
얇은 문을 두고 조용히 오가는 대화를 팅커벨은 초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이미 까마득한 어둠이 섬 전체를 뒤덮은 상태였다. 이러한 이례적인 상황은 네버랜드 위에 자리 잡은 모든 생명에게 어떠한 징조로 다가가는 중이었다.
결국 밤이 내려앉은 하늘을 등지고 용복이 잠긴 문을 열어 정인과 마주한다.
"나는. 이날만 계속 기다렸어. 너는 다른 웬디들과 달랐단 말이야."
"⋯."
"네가 성장할 걸 알면서도,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라며 네 연락을 기다렸어."
"⋯."
"그런데 돌아온 모습이 어른이 되기 직전의 모습이라니."
용복의 큰 눈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말간 얼굴이 순수하게 감정을 비춰오는 것을 보는 정인 또한 슬픔이 옮은 듯 눈가가 촉촉이 젖어갔다.
나는, 이제, 누굴 믿어야 해? 좁은 문틈 사이로 용복이 무너져내린다. 가만히 대화를 듣던 팅커벨은 제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자루를 내려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걸 택했다. 마을 입구에 바글바글 모여있는 아이들에게로 다가가 가끔 이런 날이 있다며 안심시키는 걸로 제 다른 할 일을 찾아냈다.
"미안해, 용복아⋯."
정인은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잃지 않을 거라던 동심은 현실에 돌아감과 동시에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었다. 소중한 기억을 품고 돌아갔지만 정인은 이 얘기를 발설하는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는 나이였다. 어르고 달래며 사라진 공백에 관한 실마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정인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이유가 이 탓이었다.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이상한 사람이 될 거라면, 차라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속으로 펼친 거였다. 실제로 몇 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생각하면 정인은 그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 조차 아무 말을 할 수 없어서. 어떤 얘기가 도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게 죄송해서. 정인은 평범한 삶을 모방하며 자신을 증명하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낭만이 오글거린다는 말로 치부되고, 아이 같은 모습은 철없는 모습으로 비치는 세상에서 정인이 가장 먼저 버린 게 동심이란 게 그다지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보단, 삶에 지쳐 하루를 질질 끌어가는 모습이 보통의 삶으로 통했으니까.
그래도 남들 모르게 작고 작게 뭉친 동심을 한쪽에 품고 살기 위한 노력도 해봤다. 네버랜드가 그리울 때마다 적었던 일기장이 그 증거였다. 너무 지치고 힘든 날마다 그 속을 채우거나 혹은 돌려보면서 어디에도 말하지 못한 추억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붙잡으면 붙잡혀주던 그곳의 시간과는 다르게 현실은 잡을 생각도 못 하게 빠르게 달아나는지라 정인은 제 일기장을 찾는 텀을 늘리며 현재의 시간을 뒤쫓아가는 걸 선택했다.
용복에게 편지를 적었던 날도 돌아보니 자신의 삶이 너무 삭막한 듯해서 충동적으로 행했던 것이었다. 오픈 이벤트로 느린 우체통을 진행하고 있다는 카페에서 정말 우연히 선택한 결과들이 엮이고 엮여 현재를 구성했다 볼 수 있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상황을 되짚어보던 정인은 그럼에도 미안하다는 말을 제외하면 해줄 말이 없는 상태였다.
마룻바닥 위로 점점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짙은 색깔로 변한 자리 위로 더는 스며들지 못한 물기가 솟아오르는 중이었다. 정인이 흐릿한 시야를 들어 올려 앞을 쳐다봤다. 여전히 그 앞에 서 있는 몸이 웅크린 상태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한 뼘 이상이 컸던 키를 이제는 내려다보게 된 정인이 초라한 소년의 몸을 껴안으며 다정을 베풀었다.
작은 등을 토닥이던 정인이 어떠한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작지만 날카로운 파편이 아까의 기억을 가르고 선명한 모습을 드러낸다. 7년 전,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대화 뒤로 용복이 자신의 이마 위로 짧은 입맞춤을 전하는 기억이었다. 정인은 품에 안긴 용복을 바라보다 그날의 기억을 되풀이했다. 다만 이번에는 자신이 용복의 위로 짧은 입맞춤을 선사하는 내용이었다.
눈가가 벌게질 정도로 울던 용복이 그 순간 정인과 같은 장면을 떠올리며 저를 내려다보는 다정한 눈빛을 마주한다. 그러자 만났을 때부터 무시했던 몇 개의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 보다 높아진 시선, 커진 품,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단단함 같은 것들이 겉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어른이 되는 건 좋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동경하고 있던 것들이 정인에게 깃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곧 돌아올 거라는 자신만의 특별한 웬디를 그리며 같이 나눴던 추억을 회상하느라, 또 쌓아갈 하루를 그리느라 느리게 흘러갔던 시간은 오직 여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일 강한 염원을 따라 시간이 당겨지기도 느려지기도 하는 법칙을 이용한 용복은 나날을 질질 끌기 위해 노력했다. 꼭 노을 지는 풍경이 되면 웬디가 가장 좋아했던 별 가루 쿠키를 하나씩 만들며 정성스레 포장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직 정인이 다시 방문할 날만 손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당연하게도 중간에 제 웬디가 너무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괜히 보러 갔다가 가장 두려워하는 장면을 보게 될까 무서웠다. 벌써 어른이 되어버렸으면 어쩌지 하고 손끝을 물어뜯으면서도 아니야, 믿어보자. 하고 속을 달래는 일이 하루에 수십 번씩 반복됐다. 나중엔 그저 연락이라는 단어를 잊고 시간을 붙잡는 게 용복이 정인을 그리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직은 참을 수 있다며 네 번째 쿠키의 포장을 마쳤을 때, 새로운 웬디를 찾아 나섰던 팅커벨 중 한명이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집들을 지나치다 유난히 반짝이길래 집어 왔다고 자랑하며 내민 것은 제가 그토록 기다리던 웬디의 연락이었다. 그 안에 딱히 저를 지칭하는 말은 없었지만 그냥 느낌이 그러했다. 검은 문자들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용복은 고맙다는 의미로 그날 죽을 예정이었던 팅커벨에게 마지막으로 아침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치를 거스르면 안 됐지만, 고작 몇 시간에 어떤 일이 생기지 않을 거란 안일한 생각이 가벼운 용복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다음 날 아침, 웬디를 데려올 준비를 마친 용복이 마을 입구에 쓰러진 팅커벨을 금빛 돌 아래에 묻어주곤 제 할 일을 위해 하늘로 날아갔다.
아마 정인은 제가 먹였던 별 가루 때문에 현실 세계에서도 더딘 성장을 보이고 있을게 분명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네버랜드에 붙잡아 둔 채로 어른이 되는 걸 막는 것도 가능한 얘기였다. 하지만 용복은 제일 중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저 숫자나 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아니었음을. 한 번도 어른이 되어본 적 없는 경험에서 비롯한 무지함이었다.
다시 마주한 정인이 여전히 예쁜 모습이라 용복은 당장 깨우기 보단 눈코입 하나씩 뜯어보며 제 기억 속 모습과 어디가 닮았는지를 찾기 바빴다. 짧은 감상 시간을 마치며 용복이 이젠 데리고 가야 할 때라는 걸 느꼈다. 그대로 손을 뻗어 아래에 놓인 몸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놀라서 삐끗하는 몸을 바치며 가까이 마주한 얼굴 위로 또르르 흐르는 물방울이 보였다. 아, 다행이다. 아직 나를 잊지 않았구나. 용복은 가라앉는 불안에 미소 지으며 제 손을 말랑한 뺨 위로 갖다 댔다. 일단은, 별가루를 이용해 웬디의 성장을 멈추는 게 급선무였다.
나중에서야 제 뺨에 묻은 별 가루를 확인한 정인을 보며 가져온 양의 절반을 그 위로 들이부었다. 자, 얼른 몸에 묻히고 나와 같이 돌아가자.
다만 정인이 재채기 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뽀얀 얼굴 위로 내려앉은 별 가루를 용복은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좀 낭비하긴 했지만, 일단은 이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을 마친 용복이 정인의 팔목을 붙잡곤 고대하던 순간을 재연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다시 가서 나와 함께 호수에서 놀자. 따사로운 햇볕 아래 춤추다가 낮잠도 즐기자. 네가 좋아하던 쿠키도 매일 정성을 다해 만들어뒀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무수한 말들은 목적지에 도착함과 동시에 고백할 예정이었다.
일부러 가장 자주 놀았던 호숫가로 자리를 잡았다. 보자마자 반색하며 호수에서 놀았던 기억을 종알댈 줄 알았던 입이 끝까지 무겁게 닫혀있는 걸 보며 용복은 서서히 얼굴을 굳혀갔다.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땐, 용복의 기대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게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다시 천진한 웃음과 함께 나를 저곳으로 데려가야지.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손을 잡고 이 세상을 누벼야지.
하지만 정인은 계속 용복의 기대와는 반대로 행동했다. 심지어는 자신을 모른 척 지나가는 모습까지 보였다. 안정되었던 감정이 다시 들쑥날쑥 요동치며 혼탁해져 갔다. 괜찮아. 다시 기억하게 하면 돼. 떨어져 있는 순간에 조금은 잊었을 수도 있지. 물론 밉지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웬디니까. 잊은 것보단 기억하는 게 더 많길 바랐던 염원도 아쉽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줄 알았던 공간에서 정인은 이만 집에 가야 한다며 용복의 마지막 희망까지 무너뜨렸다.
이래서 어른은. 아, 아니야. 어른이 아니야. 아직 나의 웬디인 걸.
복잡한 마음을 잠재우며 웬디를 제 손안에 가두고 뒤돌아 선 용복은 합리화를 이어 나갔다. 말만 저럴 거야. 아직 나랑 노는 게 제일 좋을 거야. 용복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너덜너덜한 얇은 희망을 주워들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까맣게 밀려드는 어둠으로 인해 모든 과거와의 연이 끊어졌다.
전에 다시 만나자는 의미로 제가 남겼던 입맞춤을 되돌려준 정인을 용복이 멍하니 쳐다본다. 이젠, 보내줘야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날 너무 쉽게 잊지는 말아 줘."
"그럼. 당연히 그럴 거야."
정인이 제 몸에 별가루를 뿌려주는 용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떠오르는 몸을 느끼며 두 사람 모두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한 번 지나온 길이라고 수월히 도착한 종착지에서 용복은 과거처럼 정인을 침대 위로 눕혀주는 것까지 자처했다. 목 끝까지 덮인 새하얀 이불을 내려다보며 애써 다잡은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뒤를 돌아 떠날 채비를 했다. 이제 가볼까. 미련 없이 떠나가려던 순간, 손목을 잡아오는 게 느껴졌다. 잡힌 팔을 따라 시선 끝을 향하니 정인이 눕혔던 몸을 일으켜 세운 상태로 눈을 맞춰오고 있었다. 교차하는 시선을 중심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인지했을 땐 이미 서로의 입술이 맞붙은 상태였다. 완전히 제 입술을 덮은 말랑한 촉감을 느끼며 용복의 귀가 몇 초 만에 빨갛게 달아오른다. 정인또한 눈웃음으로 민망한 제 감정을 감춰냈다.
"안녕, 잘 가. 피터팬."
그토록 보고 싶었던 웃음과 함께 정인이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렇게 첫 번째 이별 위로 두 번째 이별이 덧씌워진다.
- 피터팬, 가기 전에 네 이름 알려줄 수 있을까?
- 내 이름? 왜?
- 이름을 불러줘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거든.
- 그렇구나. 그래, 넌 특별하니까. 네게만 알려줄게. 내 이름은⋯⋯
그러고 보니 이런 얘기를 했었지. 진정한 친구⋯. 다시 볼 수는 없겠지만 평생을 기억할 나의 웬디. 나의 친구.
"잘 지내. 정인아."
제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정인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예쁘게 접어내며 손을 흔들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담아낸 용복이 한 번 더 돌아보는 거 없이 바로 자리를 떠났다.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순간을 몰래 목격한 달 또한 아무것도 못 본 척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며 정인에게 휘몰아치는 연말을 선물했다. 자소서 쓰기, 원서 넣기, 수능 보기, 크리스마스 보내기 등등. 눈코 뜰 새 없이 두 달을 떠나보낸 정인이 새해를 앞두고 일기를 꺼내 들었다. 제야의 종소리는 꼭 들어야 한다는 친구의 강력한 주장을 따르며 이른 저녁부터 바깥에 있어야 했다.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 하루를 끝내는 기분이 묘했다. 적을 내용이 없는 것도 문제였다. 별로 한 것도 없는 하루였기에 이후에 무얼 할지만 줄줄이 적은 일기장을 덮으려던 정인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다시 펜을 들었다.
몇 시간 뒤면 나는 스무살이 돼. 완전히 어른이 된다는 뜻이야. 고작 앞자리 수 하나 바뀌는 건데 세상이 참 많이 달라진다고 다들 겁 주는 거 있지. 무섭고 두렵지만, 그래도 나아가보려고 해. 성인이 되어서도 너를 추억할 수 있을까? 최대한 노력해 볼게. 그럼 안녕.
뿌듯한 얼굴로 일기장을 바라보던 정인이 느긋하게 시간을 확인했다가 찍혀있는 부재중을 발견한다. 와, 망했네.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건 정인이 제 사정을 설명하며 방을 벗어났다. 어, 아니. 나 가는 길. 진짜야. 어어, 거기서 봐. 정신없이 집 밖으로 나선 정인을 끝으로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찬 바람이 들어찬다. 거실에서 들어온 바람은 온 집안을 헤집으며 정인의 방까지 스며들어 갔다. 닫는 걸 잊은 일기장도 예외없이 펄럭거리는 중이었다. 이전 장과 다음 장을 오가며 정인의 비밀을 들춰낸 바람은 금세 흥미를 잃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딱히 다를 거 없는 집 안이 다시 고요함에 잠겼을 때, 다만 하얀 종이 위로 반짝이는 가루가 살짝 묻어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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