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바다 위에 이천 개의 별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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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내 여름날에 비할까요?

그대는 그보다 더 사랑스럽고 온유합니다.

거친 바람이 오월의 사랑스러운 꽃망울 흔드는

여름 한철 너무나 짧습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18번 (박우수 역)

사람의 심장 소리는 어쩌면 파도치는 소리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애셔는 평생을 그런 낭만적이고 시적인 표현과 연관 없게 살았다. 화자와 음유시인과 학자들이 말하는 수많은 은유와 비유는 애셔의 인생을 대단하게 바꿔 주지 않았다. 피 냄새가 씻기지 않았던 시절에야 당연히 그랬지만, 일상의 여유를 되찾고 난 이후도 같았다. 애셔는 여전히 복잡한 이야기를 싫어했다. 그러니까 얘 말은, 상대가 좋다는 거 아니야? 그냥 그뿐인데 거기에 여름이니 한낮이니 오월이니 말도 안 되는 비유를 쑤셔 넣을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단순히 좋다고만 말하면 될 일이었다.

물론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이유는 별로 특별하지 않다. 처음에는 그따위 선호를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고, 두 번째로는, 그냥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엔이 매번 눈을 빛내며 책 속 글귀를 읽어댄 탓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활기차서 꼭 태양 같았던 그 애는 책을 읽을 때도 요란했다. 애셔와는 정반대로 그 애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용사를 구해낸 공주의 이야기. 왕자를 사랑한 마녀의 이야기. 높다랗게 솟아오른 성과 작지만 평화로운 나라와 순하고 성실한 사람들의 이야기. 사랑이 사람을 구하고 삶을 지속하며 세계를 지탱하는 이야기. 하엔이 가끔 재잘재잘 그런 이야기를 떠들면 애셔는 잠자코 하엔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가만히 그래, 응, 그래서? 대답을 해 주곤 했다. 말하자면 애셔는 그런 이야기를 말하는 하엔의 조금은 들뜬 듯한 얼굴은 좋아했다. 그런 이야기 자체는 아니었지만.

그러므로 그런 동화 속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문장을 곱씹은 것은 그의 인생에 최초라고 할 수 있겠다.

“애셔.”

조금 긴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하엔이 환히 웃는다. 한 줌 별빛에 집어삼켜진 듯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사람의 심장 소리는 쏴아아…… 저 멀리 사라져가는 바람 소리를 닮았고 철퍽거리며 밀려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파도 소리를 닮았고 요란한 듯 고요한, 우리 둘만 있는 이 공간을 닮았다.

“바다 좋아함까?”

대답하자면.

“좋아해.”

지금부터 그러기로 했다.

날짜를 맞춰 만나기로 했을 때 하엔은 약간 붉어진 뺨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제법 오래 지났는데도 그랬다. 얼굴을 맞댈 때의 여유로운 표정, 애셔를 마주했을 때 습관처럼 밝아지는 낯, 조금 길어져 어깨를 덮은 주황빛 머리카락. 손을 붙잡고 손가락 마디마디로 깍지를 끼고 괜히 고개를 기울이며 배시시 웃는 모습 따위가 세월을 실감하게 한다면 환한 낯 뒤로 다소 민망해하는 듯 눈을 굴리는 모습에서는 언제나 첫 만남 때가 읽혔다.

“가고 싶은 곳 있어?”

“음, 애셔가 있으면 어디든 좋슴다!”

그런 말을 할 때는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웃는 것도 처음과 똑같았다.

“애셔는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슴까? 하고 싶은 것도 좋슴다.”

“딱히…… 떠오르는 건 없는데.”

“그럼 혹시 제가 골라도 됨까?”

처음부터 그걸 위해 물었는데. 의아하게 시선을 들자 하엔이 씩씩하게 말했다.

“다 제가 짜겠슴다!”

“다?”

“애셔는 몸만 오십쇼!”

“…….”

주황빛 눈동자가 반짝이는 모습에서 벌써 들뜬 기색이 느껴졌다.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물었지만 하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까진 비밀임다, 같은 소리를 하는 하엔의 낯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그걸 보고 있으니 뭐 알고 있으나 모르고 있으나 갈 건 똑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엔은 단숨에 기뻐 보이는 낯이 되었고 정말로 그날의 일정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일정을 조정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애셔는 어지간하면 조정에 의견을 더하지 않았으므로 가끔 있는 일에 미리 언질만 주면 됐다. 며칠을 조금 바쁘게 보내자 금방 당일이 되었다. 턱짓하는 보스를 두고 돌아 나왔을 땐 오전이었다.

새벽부터 유독 날이 따뜻했다. 거의 말미라고는 해도 겨울인데 햇살이 유독 밝았다. 이슬처럼 뚝뚝 굴러떨어지는 태양이 발치를 간질이며 길모퉁이에 서 있는 하엔을 비추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하엔은 애셔를 찾자마자 환한 얼굴이 되어 달려왔다.

애셔는 무심코, 혹은 늘 그랬듯 그 낯이 볕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애셔!”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임다! 오늘은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됨다.”

하엔이 쿵 제 가슴을 쳤다. 당당하게 턱을 쳐든 얼굴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로 그랬듯이.

그래, 그래. 그대로 손을 붙잡아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애셔는 설핏 웃고 말았다. 주황빛 머리칼 위로 햇살 한 줌이 고였다.

햇살도 물처럼 미끄러지듯 찰랑찰랑, 떨어진다.

“그나저나 엔, 목도리 안 가져왔어?”

“앗……. 깜빡했슴다.”

“자. 이거 둘러.”

“이걸 저한테 주면 애셔는 어떡함까?”

“난 괜찮아.”

“그래도…….”

애셔가 곧장 제 목도리를 풀어내 하엔에게 둘러주었다. 애당초 평소에 목도리 같은 걸 할 리 없다. 하엔을 위해 가져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보다 엔, 너한테 잘 어울려.”

목도리를 붙잡은 하엔이 눈을 깜박이다가 웃었다. 슬쩍 얼굴을 묻었다. 붉어진 코끝이 숨겨졌다.

물도 햇살처럼 흐드러지듯 찰랑찰랑, 고인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 위에 조개껍데기가 눈에 띈다. 하얀 모래사장 위의 하얀 조개껍데기. 그렇다고 한들 같은 색일 수는 없고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도 하엔은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릎을 굽혀 잘게 부서진 껍데기를 한참 쳐다보았다. 애셔는 그의 옆에 가만히 서 있다가 마찬가지로 허리를 굽혔다.

“조금 더 일찍 왔다면 조개껍데기가 햇살을 받아서 반짝거렸을지도 모름다.”

모래사장은 조개껍데기를 숨길 수 없지만 어둠은 그 파편을 숨겨줄 수 있었다. 하엔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자 애셔가 대수롭지 않게 껍데기를 주워 올렸다.

“다음에는 아침에 올까.”

“그래도 됨까?”

“바다는 온 적이 별로 없으니까.”

생각해 보면, 확실히.

오전에 여기, 점심을 먹은 다음에 오후가 되면 여기랑 여기, 저녁을 먹고, 밤쯤 되면 바다. 하엔이 간략하게 설명해 준 일정을 처음 들었을 때도 애셔는 그런 생각을 했다. 정석적으로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손잡고 길거리를 걷거나, 집 안에서 종일 수다를 떤 적도, 하다못해 온갖 색채가 들어찬 꽃밭에 가서 생전 어울리지도 않는다 생각했던 화관을 얼기설기 만들어 얹어본 적도 있는데 제법 가까운 바다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네, 하고.

애셔도 종종 일 때문에 바닷가 근처로 갔었다. 하엔도 친구들과 바다로 놀러 간 경험을 전해 들었다. 타고 있던 기구가 뒤집혀서 물을 잔뜩 먹은 사연이나 물장구를 치다가 물싸움이 나서 집중 세례를 받은 나머지 지고 말았다는 사연을 들으면서 사진들을 구경했었다. 활짝 웃는 얼굴이 찍혔던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단둘로는 왜 가 본 적이 없더라.

그 순간 주황빛 눈동자가 눈에 밟혔다.

“애셔, 물에 들어갈 검까?”

“……그럴까. 엔, 너는? 들어갈 거야?”

“바다는 보기만 하면 아깝지 않슴까!”

너를 보면 잔잔히 가라앉은 파도 소리보다는 온화하게 쏟아져 내리는 햇볕이 떠올라서 그랬나.

환히 웃으면서 물가로 달려가는 하엔을 볼 때면 다른 것보다 태양이 떠올랐다. 탐스럽게 피어난 꽃, 열매, 과실, 밝고 따뜻한 뭐 그런 것이.

그런 소리를 들으면 하엔은 쑥스러워하곤 했으나, 애셔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랑이나 애정이나,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안정을 느끼고 조금 더 붙어 있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만큼이나, 실제로도 하엔이 태양을 닮았기 때문에.

그리고 애셔는 생각한다.

밀려갔다가 쓸려갔다가 저 멀리, 그러다가 다시 가까이, 거품이 일면서 돌아오는 그 순간.

맨발로 축축한 모래사장 위를 걷던 하엔이 몸을 돌리며 뒷걸음질 쳤다. 반 바퀴 빙그르르 돈 하엔의 몸이 순간 기우뚱 기울었으나 그는 휘청거리지도 않고 곧바로 중심을 잡았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주름치마가 바람을 타고 살짝 흩날린다. 어그부츠를 모래사장 위에 벗어둔 하엔이 바다를 등지고 웃었다.

바람 소리와 뒤엉켜 귓가를 메우는 파도 소리. 구불구불한 옷자락은 울퉁불퉁한 물결을 닮았다.

어둠 속의 너를 상상하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인지.

엔, 네가 태양이나 다름없는데.

별빛은 흐리고 가장 빛나는 것은 어둠에 파묻힘 등대이며 새까만 파도가 밀리고 사라지는 곳에서.

하엔은 한 손을 뻗는다.

“저 여기 있슴다.”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

흩날리는 주황빛 머리카락.

하얗고 말간 얼굴 위에 듬성듬성 떠오르는 불빛 같은 미소.

“애셔.”

조금 높은 목소리가 귓가에 박히듯이 들렸다. 늘 그랬듯, 주위의 소음을 뚫고 분명하게.

애셔는 생각했다. 그건, 유독 네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이유는 단지 네가 늘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보고 커다랗게 말하며 웃었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붉은 눈이 이미 저물고 없는 태양의 궤적을 훑는 것처럼 이쪽을 돌아보는, 팔을 펼치는, 입술을 벌리는, 그 찰나의 여자에게 새겨지듯 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찰나의 눈 맞춤은 짧은 기억을 낳고 짧은 기억은 영원한 감정을 만든다.

애셔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바다가 노래하는 소리와 함께 태양에 가닿듯 손끝이 닿았다. 하엔이 힘주어 애셔를 당기고 그 크지 않은 힘에 애셔는 당겨진다. 물방울이 튀어 바지 아랫단을 살짝 적셨다.

눈이 부시도록 웃는 얼굴 위로 희미한 별빛이 쏟아지는 듯하다. 태양을 향해 떨어지듯 노래하듯 나아가듯 넓게 퍼지는 파편들.

“예쁘지 않슴까?”

하엔이 말했다. 애셔는 피식 웃었다.

“그래. 예쁘네.”

이천일의 끝무렵.

그리고 이천 개의 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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