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기회

하운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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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시니.

수많은 귀신들 중에서 그나마 귀에 익은 이름. 뭐하는 귀신이었더라. 인간의 공포를 먹고 자란다던가 그랬는데. 내가 아는 어둑시니는 오드아이를 가지고 있고 까칠한 척하면서 사실은 다정한 까만 고양이인데* 말이야. 고양이를 주진 못할 망정 이래도 되는 거냐.

"아아악, 진짜 이놈의 학교 묻어버려! 메워!"

도망치던 안유정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성하운이 저 멀리서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공포를 잡아먹는 귀신이 웃음을 흘렸다. 어두운 학교 위로 창백한 달빛이 걸렸다.

초대 이사장 동상에게서 간신히 벗어난 게 며칠.

그들은 또 쫓기고 있었다.

스멀스멀 몰려오는 기묘하고 소름끼치는 어둠에에.

정확히는 쫓기다가 떨어졌지. 그래서 이 꼴이고.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귀신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중얼거렸다. 새빨갛게 찢어진 입이 빨간 마스크처럼 보였다. 안유정은 욕을 몇 번이나 삼키면서 정반대편의 성하운과, 제 손에 들린 활과 화살 한 발을 번갈아 보았다. 저편의 성하운은 화살만 여러 발 들고 있다. 당연하지 활은 내 손에 있으니까. 그래, 나한테 있지. 나한테 있긴 한데!

이걸 나한테 주면 어쩌라고! 이 활은 성하운의 것이었다. 화살도 한 발 외엔 없다. 남의 물건을 이용해서 움직이면서 낄낄대며 피 눈물 흘리는 귀신을 맞히라고? 차라리 야구배트로 귀신 머리통 날리는 게 쉽지!

'차라리 활로 패?'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감싸 쥐며 안유정이 이를 악물었다. 근데 이거 성하운 개인 물품이잖아. 패다가 박살나면 어떡해? 아무리 덜 까탈스러운 선수라도 맨날 쓰던 활이 교체되면 본 실력 못할 수도 있는데. 성하운의 더럽게 예민한 성격을 고려하면 특히나 그랬다. 쟤 곧 국가대표 선발전 나가는데? 그렇게 쏘던 엑스 텐 못 쏘면? 평소에는 그렇게 잘 쏴서 사람 열받게 만들고 거기서 실수하면 어떡하는데!

죽게 생겼는데 활 좀 망가뜨린다고 쟤가 화내지야 않겠지만, 아니 양심이 있다면 화를 내면 안 되지만 저것도 꼴에 우리 아는 사이라고 신경이 쓰였다. 젠장. 화살촉은 휘둘러 봤자 흠집도 안 날 것 같은데…….

그때였다. 시야에 스치듯 성하운의 얼굴이 들어왔다. 가까이에서 죽으라고 속사포로 중얼거리는 목소리 때문에 신경이 쏠려서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은 선명했다. 쏴.

안유정, 쏴.

그게 말이 되냐니까!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안유정은 이를 꽉 악물었다. 어둑시니의 입에서 피가 흘러서 바닥에 툭 투둑 고였다. 아아아. 진짜. 안유정은 결국 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시야 한켠을 차지한 성하운에게서 애써 신경을 껐다.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기다란 귀신의 머리칼이 흩날리면서 빠르게 움직이는 입술 모양이 보였다. 소름이 끼치는 얼굴이었다. 사람 이목구비가 저렇게 중구난방이어도 되는 거냐, 물론 사람 아니지만! 공포를 몰아내려고 입술을 씹고, 헛생각을 이어가면서 목표를 겨냥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각은 명료해졌다.

성하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음을 저주하는 반복적인 말 틈새로도 선명하게.

안유정. 정신 차려.

그냥 쏴.

널 내가 아니까 그냥 쏴!

"알겠어! 알겠으니까 이젠 조용히 해, 좀!"

안유정이 소리를 지르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알겠어. 뭘 원하는지 알겠으니까 화살이 바람에 흔들려서 너 스쳐도 견뎌, 성하운! 눈을 가늘게 뜬 안유정이 이내 망설임 없이 시위를 놓았다. 귀신의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나뭇잎처럼 우수수 소리를 내며 흩날렸다. 하늘 위로 허공으로 달빛 위까지…….

화살은 빗나갔다.

하지만 귀신의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다. 눈을 질끈 감은 안유정이 활을 껴안고 달렸다. 단숨에 덮쳐 올 줄 알았던 귀신이 주춤거리는 찰나의 순간으로도 충분했다.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고 느껴서 눈을 뜨자 성하운이 휘청거리며 앞으로만 달리는 안유정을 받치고 있었다.

성하운이 곧장 활을 받아 뒤돌았다. 떨리지 않는 커다랗고 굳은살 박힌 손으로 단번에 시위를 건다. 그 뒤에서 안유정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국대 선발 내가 나가도 되겠다!"

"주위가 시끄럽다고 활 못 쏘면 선발 못 될걸?"

"귀신 아니라 나한테 묻히고 싶냐 성하운?"

"농담이야."

성하운의 목소리에 짙은 웃음기가 섞였다. 안유장의 눈썹이 당장에 위로 치솟았으나, 고성보다 빠르게 화살이 움직였다. 다시 한번 바람을 뚫고.

"잘했어, 안유정."

우리가 이겼다.

*《학교 괴담》(감독 아베 노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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