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모음01

하라는 인리수복은 안하고 창궁의 관계수복에만 힘쓰는 마스터라서 미안합니다.

잠드는 숲 by 김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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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트 창궁으로 쓴 가벼운 글 모음.

- 칼데아 배경

- 캐붕, 날조, 오타, 비문 많습니다.

포스타입에서 글 쓰다, 펜슬에도 백업 겸 업로드 해봅니다.

n년째 은은하게 창궁 덕질중.


※ 글에 대한 좋아요와 감상은 연성에 힘이 됩니다 : ) 같이 창궁토크 해주세요...

https://peing.net/ko/sleeping_forest









1. [창궁] 하필이면 새로운 조미료에 섞여든 것이 회춘의 영약일 줄이야 (이래서 행운E는..)

- 랜서x꼬마아처

회춘의 영약을 진부하게 쿠훌린에게 먹여서 세탄타 만들지 말고 이번엔 아처에게 먹여봅니다. 하지만 아처 릴리가 차마 이름을 말할수 없는 그 릴리로 나오면 커플이 꼬이고, 거울을 본 아처는 자살플래그 세우고, 칼데아가 혼란해지면서 여러모로 위기가 닥칠 테니 회춘의 영약을 먹은 아처는 그 모습 그대로 축소한 아처 미니미로 갑니다.



여러 서번트가 소환되어 이제는 제법 북적이기 시작하는 칼데아는 오늘도 시끌벅적 하다. 주방조들은 식사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또한 여느 때와 같은 풍경이다. 평소대로 발걸음을 옮기던 이들에게 주방에서는 듣기 힘든, 어딘가 이질적인 소리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토돗. 토돗. 토도돗. 

보폭이 짧고 가벼운 발소리는 미니 쿠짱의 느긋한 '뾱뾱'과는 조금 다르다. 그 발소리가 바쁘게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리며 저도 모르게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리면…. 그 시선 끝에는 로빈이 익히 아는 얼굴이지만 낯선 아이가 서 있었다.

"로빈이군, 어제는 안보이더니 오늘은 저녁 식사를 하러왔나?"

187cm의 근육 빵빵하고 기골이 장대한 남자는 온데간데 없이, 많이 쳐줘도 10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하지만 외모는 어디를 봐도 '에미야'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게 생긴 아이가 제 몸에 큰 앞치마를 두르고 제 몸보다 큰 냄비를 들고 서 있었다. 말투도 그 말투고, 외모도 그가 알던 그 아처인 에미야가 맞긴 한데 여기서 조금만 더 작아졌으면 미니아챠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는 냄비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함과 나쁜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들기 시작했다. 보통 귀찮은 일은 떠맡지 않고, 굳이 남의 일에 번거롭게 손을 넣지 말자는 주의인 로빈 조차도 저도 모르게 대신 들어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가 '아무리 근력 D라지만 이 정도는 거뜬하다!'라는 일갈에 손을 거두었다. 예민한 반응을 보니, 이미 여러차례 배려 아닌 배려를 당한 모양이었다.

아무렴 아무리 근력이 후달려도 서번트인데 근력이 E 여도 거뜬히 들 수준의 냄비다. 중요한 것은 근력의 문제가 아닌, 보는 사람의 기분상 문제였지만 정작 본인은 자각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어딜 봐도 아동을 상대로 노동을 착취하는 광경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광경에, 현대의 정보와 더불어 가치관까지 성배로부터 제대로 전달받은, 지극히 상식적인-이라 본인은 생각하는- 로빈은 퍽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이는 다른 서번트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제 먹이 -엄밀히 말하면 모두의 먹이지만-를 빼앗길 까 싶어 털을 바짝 세우고 하악질 하는 고양이 같은 모습에 갈 곳을 잃는 바람에 민망해진 손을 거둔 로빈이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에미야…, 고작 하루 못 본건데 그 사이에 많이 달라졌네?"
"…사정이 있다."
"그 사정이란게…, 설마 회춘의 영약이라도 먹었나?"
"……"

뻔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는 듯 아처가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칼데아에서 갑자기 어려진 서번트가 생겼다? 그 사정은 안 봐도 뻔했고, 범인도 금삐까 라든지 혹은 금삐까 릴리의 소행 이라든지….  이미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칼데아의 클리셰에, 그저 에미야의 행운E가 그 클리셰과 제대로 맞물린 모양이었다. 어쩐지 애잔해진 로빈이 에미야의 하얀 머리를 무심코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한때 에미야와 같은 방을 사용 할 때마다 제 먹이를 빼앗긴 개 마냥 붉은 눈을 빛내며 으르렁 거리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 순간 하얀 머리카락에 닿을 뻔한 손이 내려가는 경로를 살짝 틀어 어깨를 토닥였다.

"애쓰네."
"애 취급 하지 마라!"
"……"

아무래도, 생각없이 머리를 쓰다듬지 않은 것이 다른 의미로도 다행이었다. 로빈이 모르는 하루 사이에 여러 사람에게 시달린 듯 예민함을 맥스로 찍은 반응을 보아하니, 근래 들어 무료함에 몸부림치던 할일 없는 서번트들이 짓궂게 놀려댄 모양이었다. 로빈은 여전히 시각적으로 버거워 보이는 냄비를 든 채 '그럼 이만, 나는 바빠서'이라 말하며 총총총 걸어가는 에미야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도덕성 결어 혹은 핀트나간 도덕성을 가진 이들이 득실득실한 칼데아에서 그나마 부디카를 필두로 상식적이고(?) 사람 좋고 너그럽기로 유명한 주방조에서, 손이 부족하다 해도 이런 어린아이(?)에게 큰 냄비까지 들리면서 부려먹을 리가 없었다. 결론은 이 일 중독 서번트가 제멋대로 나와서 어린 아이의 몸으로 노동을 불사하는 것으로 예상되었다. 발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로빈의 시야에 푸른 빛이 걸린다 싶더니, 붉은 눈과 딱 마주친 로빈이 아처를 내려다 보았다.

"저기 저분…, 아무래도 널 잡으러 온 것 같은데?"
"잡으러 오다니 누…ㄱ 래, 랜서…?"

하악질 하는 고양이에 이어, 랜서를 보고 놀란 토끼 처럼 펄쩍 뛸 것 같은 모양새로 냄비를 든 채 도망가려던 에미야는 로빈에게 냄비를 잡은 손 그대로 붙잡혔다. 잿빛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그 와중에 몸은 줄어들었어도 줄어들지 않은 근력에도 불구하고 근력C에게 밀리는 수치심과 서서히 다가오는 쿠훌린 랜서 덕에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 로빈, 일단 놔봐라."
"잡아줘서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거 주워 먹고 사이즈가 줄어들었다는 소식 듣고 왔어."
"주워 먹다니, 난 그저 새로운 조미료 사이에 그게 섞여 있어서…."
"별말씀을."
"랜서… 일단, 내 발로 걸어갈 테니…. 으윽!"

반항하지 말라는 듯 힘줘서 고쳐 안아들자 버둥거리던 아처도 이내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졌다. 모습이 어려지더니, 로빈에게 억울한 눈빛을 보내는 모습도 어쩐지 잘못한 것을 들켜 울상이 된 아이처럼 보였다. 랜서에게 안긴 채 로빈에게 두고 보자는 듯한 눈빛과 함께 이를 가는 아처에게 가만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의 성정상, 보복이라 해봐야 배식 할 때 잔소리 하는 선에서 끝날 것이고 무엇보다 그의 애인인 쿠훌린의 손에 얼른 넘겨주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연인의 품에 짐처럼 들린…아니, 안긴 채 애타는 눈빛으로 끝까지 제 손을 떠난 냄비에 아련한 시선을 던지던 아처가 입을 열었다.

"로빈…! 안에 든 것은 단호박 스프다! 냄비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약한 불로 데우면서 잘 저어줘야 한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저 애처로운 눈빛을 보니, 대체 누가 연인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것을 본 서번트 들 머리속에 '쿠훌린<단호박 스프'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좋게 돌려 말하면, 끝까지 책임을 다하려는 모습이 애처롭기 까지 하다. 한바탕 소동 끝에 랜서의 품에서 얌전히 잡혀가는 아처를 본 부디카가 손을 흔들어 주었고, 아처도 그제서야 여러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얼굴을 붉히며 랜서의 품에 고개를 박았다.


기나긴 칼데아의 복도를 걷는 동안, 랜서에게 불평불만을 토해내며 투덜거릴 줄 알았던 아처는 퍽 얌전하게 품에 안긴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애써 의연한 척 주방에 발을 붙이려 했지만, 힘이나 능력의 문제가 아닌 단순히 키가 작아졌다는 문제로 주방에서 일하지 못하게 된 것이 대한 상실감이 제법 큰 듯 하였다. 칼데아 서번트라면 누구나 겪을수 있는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유의미함과 보람을 느끼던 아처가 느끼는 무력감은 제법 큰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그런 아처의 생각이나 심정을 대강 짐작한 랜서가 작은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금삐까놈의 약을 먹었다길래…, 그때 그 꼬맹이의 모습일 줄 알았더니 의외네."
"…만약 그랬으면 자살했을 거다."
"어련하시겠어."
"그 미숙한 놈 모습을 원했다면 유감이겠군."
"그걸 왜 그렇게 해석해."

소소하게 투닥거리는 사이 도착한 방문을 열자, 익숙한 방이 시야에 들어온다. 침대 위에 얌전하게 내려진 아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랜서…, 왜 네 방으로 온 거지?"
"내 방이니까?"
"잠깐, 네놈…, 설마 이런 나를 상대로…."

워낙 사는게 단촐하다 보니 앉혀 둘만한 의자가 없었다지만, 하필이면 올려놔도 침대 위 였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회색 눈동자와 함께 달아오른 얼굴에, 잠시 말을 이해하지 못한 랜서의 얼굴은 아처와는 반대로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야 임마…, 너 날 얼마나 쓰레기로 보는…."

게다가 도덕적인 문제를 떠나 물리적으로(?)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무어라 더 볼멘 소리를 하려던 랜서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늘 보이던 뚱한 표정의 애인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다행이고."

방금 전 까지 보여준 당황스러운 모습을 지운 채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한 낯으로 침대에서 폴짝 내려서는 연인은 평소대로 얄밉게 입터는 그놈었다. 평소의 그 놈인데, 꼬꼬마의 모습이다 보니 화낼 마음도 없이 그저 헛웃음만 터져 나온다. 그대로 문밖으로 나가려는 듯 걸어 나가는 아처의 뒷덜미를 랜서가 잡아챘다. 

"어디를 가? 설마 주방?"
"그럴 리가…, 거기는 내가 굳이 필요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방으로…."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시간 보내자고."

짧은 팔다리로 버둥거리는 것을 품에 안은 랜서가 아처를 안은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졸지에 랜서의 품에 안긴 채 눕게 된 아처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이런 것도 좋지 않아?"
"…좋지 않다."
"난 좋으니까 괜찮아."

다시 시무룩 해지는 아처를 본 랜서가 안고 있는 팔에 힘을줘 끌어 당겼다. 점점 얼굴과 가까워지려는 랜서의 가슴팍에서 멀어지려는 듯 아처가 버둥거렸으나, 짧은 팔로 반항하는 근력D 따윈 가볍게 무시한 랜서가 아처를 제 품에 안았다. 제 가슴팍에 얼굴은 묻은 아처에게 '너보다는 못하지만 제법 괜찮지?'라며 킬킬대자 랜서의 가슴 사이로 빼꼼 고개를 든 아처가 눈을 흘겼다.

"괜찮아, 그동안 휴가도 없이 일했잖아. 좀 쉬어줘도 돼."
"애 취급하지 마라."
"애 취급이 아니라, 휴일도 없이 일하는 멍청한 놈에게 휴가를 주는 거다."
"……"
"휴가 기간 동안 특별히 잘 모셔줄 테니, 이럴 때 좀 쉬어."
"누가 누구를 모신 다는건지…."

사이즈가 줄어들어서 일까. 평소 처럼 불퉁한 태도로 툴툴대는 것 마저 아이의 어리광 처럼 보였다. 요령은 커녕 당연한 휴식시간 조차 챙길 줄 모르는 답답한 궁병도, 랜서의 품에 안겨있는 것은 싫지 않은 듯 불편하게 누워있던 몸에 힘을 풀고 자연스럽게 몸을 맡겨왔다. 다행스럽게도, 주방 일에 대한 미련이나 미안함 등은 놓아 버린 듯 랜서에게 잔소리를 종알거리는 작은 입에서 나오던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잠기운이 잔뜩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랜서의 품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는, 어려진 아처의 얼굴은 한없이 무해해 보였다. 

한없이 무해함에도 언 듯 떠오르는 연인의 잠든 모습을 보자 저도 모르게 일어나는 유해한 생각에 랜서가 가만히 제 품에 쏙 들어온 아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손길을 느꼈는지 잠결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파고드는 아처의 몸 위로 가만히 이불을 끌어올린 랜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얼른 돌아오기나 하라고."

또다시 '착한 생각'을 되뇌며 랜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회춘의 영약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발생한 랜서의 금욕의 기간은 아처의 낮은 대마력과 두 사람의 행운E가 절묘하게 맞물려 다른 서번트들 보다 약효가 길게 유지되는 바람에, 랜서의 금욕기간은 연장되었다. 덤으로 원래대로 돌아왔음에도 랜서에게 붙잡힌 아처의 주방 복귀도 연장되었다.


2. [창궁] 하지 않으려는 이유.


“잔다.”
“어이 잠깐, 뭐 잊은 거 없어?”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벌써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리는 아처의 이불 끝을 랜서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채 말리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대충 털어내고는 침대 옆에 엉덩이를 걸치자 긴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시트를 적셨다. 그런 랜서를 보며 평소라면 미간을 찌푸리며 잔소리를 쏟아 낼 법도 하건만 아처는 여전히 태연한 낯짝으로 입을 열었다.

"잘 자라?”
“야 임마….”

서운함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을 본 아처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랜서의 입술에 가볍에 입을 맞추었다.

“잘 자라.”
“어, 어… 어… ?” 

방금 입술을 부벼놓고도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이 붉어진 채 입을 벌리는 랜서를 보며, 아처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내려진 앞머리와 함께 평소보다 유순한 그 표정이 주는 위력은 굉장했던 듯 랜서는 어딘가 고장 난 사람 처럼 심장을 부여잡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과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과는 반대로 여전히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던 아처가 다시 이불을 끌어올리고 침대에 등을 붙였다.

“그럼 머리는 잘 말리고 자라.”
“잠깐! 방금 것도 좋았지만…! 우리 오늘 하기로 했던 날이잖아.”

목적어는 생략되었지만, 제법 긴 시간을 함께해온 아처로서는 그 말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았던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것은 늘 보여주던, 특히 랜서를 향해 보여주던 평소에 인상 더러운 궁병의 그 표정 이었고 랜서는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익숙한 연인의 모습에 빠르게 뛰던 심장도 어느새 진정되었다.

“…안 넘어가는군.”
“역시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잖아?”
"……"

다시 조개처럼 다물어진 입에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렇지 않아도 그간 섹스를 하는 날이면 방전된 배터리 마냥 유난히 지친 상태로 돌아와서 랜서의 마력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해롱거리던 아처를 떠올리며 걱정이…, 역시 해야겠다는 의욕이 다시 충만하게 된 랜서가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그것이 아처에게도 제대로 전해진 듯 아처는 난색을 보였다.

"…오늘은 안 하면 안 되겠나."
"왜? 몸이 안좋아?"
"아니 그 반대다."
"뭐?"
"컨디션이 오히려 너무 좋아서 문제다."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내뱉고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발언에 랜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든 말든 아처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와 섹스하는 날이면, 미리 필요한 물건을 투영하고 마력을 최대한 소모하고 오는데… , 이젠 더이상 투영할게 없다."

그렇다 해서 쓸데없는 물건을 투영하며, 공연히 마력 낭비를 할 수는 없었노라 고백하는 그의 어조는 더 없이 진지했고, 랜서의 얼굴은 갈수록 굳어졌다.

"잠깐…, 혹시나 해서 묻는데, 네놈…  지금 나와 그동안 섹스한걸 뭐라 생각해온 거지?"

마력공급이나 전략적 동침, 이따위 대답이 나왔다간 룬으로 결박해놓고, 울면서 풀어달라고 애원하다 까무룩 정신을 놓을 때 까지 범해주리라는 음험한 생각이 랜서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랜서의 손 주위로 서서히,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간 지친 상태로 몸을 섞게 된 것에 대한 의문도 해소되었겠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오늘은 해보지 못한 체위도….

"사귀는 사이니, 섹스를 하는 거지 뭐라 생각하겠나?"
"……"
"그리고 지금 룬 마술로 무얼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둬라."

아처의 말에 재빨리 마력을 흩어버린 랜서가 혀를 찼다.

"그래서? 사귀는 사이인데, 마력이 좀 남는다 해서 하지 못할 건 뭔데?"
"그건…."

또다시 조개처럼 다물어진 입에 답답함이 밀려온다. 역시 오늘은 룬마술을 활용한 결박 플레이가 답인가? 아처가 눈치채지 못하게 마술을 걸 궁리를 하던 랜서가 몸을 움찔거렸다. 여차하면 두 손을 그러쥐고 근력으로 밀어… .

"…마력으로 화하지 못한 게 뱃속에 남아있는 감각이…."
"뭐…?"

붙인 뒤 잽싸게 룬마술로 결박하려는 랜서의 계획은 아처의 발언 덕에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런 랜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시선을 떨어뜨린 아처가 콘돔 사용 내지 장내 사정을 삼가 달라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내뱉었다. 그런 말과 표정이 되려 음심을 자극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빨개진 얼굴로 그 느낌을 조곤조곤 설명하는 아처의 모습이란…. 더이상 참을 수 없어진 랜서가 조금씩 아처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다.

"내가 콘돔을 투영해줄 테니…, 잠깐 지금 뭘 하는 거지?"
"뭐긴, 빨리하자. 옷 벗어."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었나?"

여차하면 너에게 칼침을 놓아주겠다는 얼굴로 노려보는 아처를 본 랜서가 난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어."
"지금 이게 알아들은 사람의 행…, 자, 잠깐!"

어느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장이 해제며, 침대 헤드에 기대었던 몸이 미끄러져 내려가 랜서의 아래에 갇힌 아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조용해 옆방에 들릴라."
"흐읏…, 자, 잠깐, 만지지 말…, 하윽…, 읏, 먼저 투영을…."
"잘 생각해봐."

생각하라니, 뭘? 회음부와 사타구니 사이를 지분거리는 손길에 순식간에 여유를 잃은 아처가 다리를 바르작 거렸다. 생각해보라면서, 생각할 여유따위는 주지 않는 개같은 연인을 욕하며 시트를 그러쥐었다.

"식사도 많이 하면 식사량이 늘고, 술도 많이 마시면 주량이 늘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마력도 그렇지 않겠어?"
"……"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는 순식간에 쾌감을 더하는 손길로 인해 애타는 마음과 늘 마력의 절대치가 부족하단 것에 대한 아쉬움 탓에 날아가 버린 지 오래다. 얼굴을 붉힌 채 랜서의 아래에서 헐떡이던 아처는 그의 제안에 수락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랜서에게  필요치 이상의 마력을 공급받으며 시달리던 아처는, 그런 방식으로 마력의 절대량은 늘어나지 않는다는 캐스터 쿠훌린의 말에 분노한 아처로 인해 칼데아는 뒤집혔다. 그렇게 랜서는 한동안 아처에게 핫도그를 배식받게 되었다고….


3. [창궁] 그 아처는 과연 어떤 아처인가요.

쿠훌린 랜서의 상태가 이상하다.
사실, 이 칼데아에서 이상하지 않은 서번트를 찾는 게더 어렵겠지만 평소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주는 랜서의 행각은 결국 켈트 출신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무슨일이야. 네가 좀 헤프긴 해도 그정도는 아니었잖아?"
"퍼거스…,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의 네가 할 말은 아닌데."
"말을 말자…."

이유인 즉슨, 얼마 전 부 터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는가 하더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불꽃 플러팅을 날리지 않나 -심지어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그래놓고는 갑자기 시무룩 해지더니 정말 그와 어울리지 않게 몇몇 스태프나 서번트에게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라는 식으로 운을 띄우지 않나. 반쯤 수육한 것이나 다름 없으니 인생을 즐겨야 한다며 먹고 마시는데 힘을 쓰던 그가 주방에도 두문불출하다. 이쯤 되니 아무리 눈치 없는 이라도 랜서의 증상을 한 번쯤 의심해 볼 법도 했고, 이미 참지 못한 몇몇이 단도직입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라고 질문을 던졌으나 랜서는 끝끝내 그 질문에는 함구했다.
결국 돌고 돌다 퍼거스에게 걸려버린 랜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양아버지는 평소에 다른 사람의 감정 변화에 둔한 듯하다가도 이런 쪽에는 쓸데없이 촉을 곤두세운다. 어지간히 할일도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냐?"
"……"
"아니 질문이 이상하군, 이미 다 티를 내고 다녔는데…. 누구 좋아하는 여자라도 생겼냐? 누구야?"
"그런게 아니야.
"진짜였나?"
"설마하니, 진짜였군요!"
"…너희들 내 말을 들을 생각따윈 없었지?"

어느 새 합류해서 맞장구를 치는 디어뮈드를 보는 랜서의 눈이 짜게 식어 있었다. 켈트 출신 서번트 중에 가장 고지식하고 상식적인 그조차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눈을 빛내니 그저 난처할 따름이었다.

"설마 스카사하냐?"
"미쳤냐? 처맞지나 않음 다행이지."

랜서의 불퉁한 태도에 퍼거스와 디어뮈드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고, 퍼거스 쪽에서 떡밥을 던졌다. 랜서가 이상해졌던 시기와 마스가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가며 모은 성정석을 터뜨리며 서번트들이 대거 유입된 기간을 생각하니….

"너랑 엮일만한 인물이면…, 설마 에레쉬키갈? 5차 성배전쟁에서 만난 아가씨와 닮았다더니…."
"아니라고. 신경 꺼줘 제발…."
"설마 아처인 이슈타르인가?"
"아, 그 아처 아니라고!"
"아처 클래스였군요."
"……"

빙고.
또다시 빠르게 시선을 교환하는 두 남자를 본 랜서가 마른 세수를했다. 사냥꾼의 눈을 하고 점점 랜서를 궁지로 몰아가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할일도 없나보다.

"아처 클래스중에 너와 인연이 있을만한 서번트라면 역시…."
"다시 소환되었을 때 서로 검을 겨눴던 기억이 있다는 건 역시 각별한 일이지요."
"……"

이미 궁지에 몰릴대로 몰려 사고의 폭이 좁아진 랜서의 눈이 잘게 떨렸다. 제대로 된 떡밥도 없이, 벌써부터 랜서와 엮어서 이상한 소문이 나기 전에 수습을 해야했다라는 일념 하에,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역시, 길가메쉬 였구나!"
"뭐…?"

금삐까가 왜 거기서 나와?
격렬하게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붉은 눈을 보지 못했던 듯, 디어뮈드가 맞장구를 쳤다.

"역시! 한 지붕 아래, 한 솥의 마파두부를 먹던 것이 이렇게…."
"잠깐…! 무슨 개소리야! 그리고 마파두부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라! 그리고 디어뮈드 넌 4차 성배전쟁에 소환되었던거 아냐?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거야?"
"아… 그게, 4차와 5차의 기억을 함께 가지고 있는 서번트가 있다보니…."

길가메쉬가 그것을 언급했을리 없고, 그가 정보를 주고받을 만한 서번트라면 아무래도 세이버인 모양이었지만 궁지에 몰린 랜서가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그보다는, 금삐까와 얽혀서 소문이 나느니 차라리 솔직하게 고백하는 쪽이 신상에 이롭다 판단한  랜서가 다급하게 외쳤다. 

"영기 오류라도 그놈을 좋아할 일은 없다! 차라리 내 심장에 창을 찔러넣고 말…."

저도 모르게 붉은 창으로 가슴을 찌르는 것을 연상하며 자신에게 자해하라 명했던 망할 마스터를 떠올린 랜서가 얼굴을 구겼다. 여러 모로 피곤해지는 날 이었다.

"…설마 에미야 입니까?"

설마, 금삐까 보다도 맺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보여진 것일까.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은 이름이 드디어 거론되었고, 오만상을 찌푸리던 랜서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 처럼 붉어졌다. 첫사랑을 맞이한 사춘기 소년마냥 갑자기 얼굴을 붉힌 채 말없이 시선을 떨구는 랜서를 본 퍼거스와 디어뮈드가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싸우면서… 정든다더니, 딱 그 모양인가보군."
"하필 에미야 라니…, 당신을 볼때 눈빛을 보면…, 아닙니다. 무운을 빕니다."

신나게 구석에 몰아넣고서는 놀려대놓고 이제와서 랜서의 어깨를 토닥이는 두 남자를, 붉은 눈이 원망스러운 듯 째려보았다.
그렇게 맺어질 가능성 없다고 점쳐진 두 사람은, 멀지 않은 시일에 사귀게 되어 칼데아는 또 한번 발칵 뒤집히게 된다.


4. [창궁] 시작은 금궁이었으나 그 끝은 창궁 하리 (?)


- 저 제목으로 개드립치고 싶어서 썼던 창궁

- 아처에가 마력공급 해주려고 들이대는 왕님 때문에 약간 금궁 요소 있습니다.

- 언젠가 금궁으로 꼭 단편으로 따로 내리라는 다짐을 눌러담아서 올립니다.


“한심하구나 페이커여!”
“…무슨 일이지, 영웅왕”

어쩐지 길가메쉬 특유의 웃음소리가 환청 처럼 들린다 싶더니 환청이 아니었다. 
늘 많은 서번트로 북적북적 시끄러운 칼데아에, 영웅왕을 끼얹는다면? 시끄럽다 못해 성가실지도 모른다. 제 눈앞에 나타난 길가메쉬를 본 아처는, 불현듯 그런 감상을 떠올렸다. 저녁 식사 전에 이미 랜서와 말다툼으로 한판 한 터라 누적되어있는 분노와 더불어 또다시 밀려오는 짜증으로 인해 물기를 닦아던 접시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처는 이러다가 제 손으로 깨버릴까 싶어 조심스럽게 싱크대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아무리 화가 나도 물건에 화풀이를 해선 안 된다는, 아처 나름의 소소한 신념이었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주방 안까지 들어와 조리대 근처 적당한 의자에 자리잡은 길가메쉬는 특유의 한껏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아처를 바라봤다. 아처는 이대로 가다간 망할 반신놈들에게 시달린 스트레스로 인해 최초로 위에 구멍이 난 서번트가 자신이 되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마력이 부족해서 쓰려졌었다고 들었다. 역시 한심한 잡종이로구나.”
“…뭐,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니까 제발 꺼져’ 라는 의미를 한껏 담은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저 길가메쉬가 읽어 낼리, 아니 설사 읽었다 하더라도 그의 안중에 없으리라. 반신인 또 다른 남자가 그랬듯, 인간과 거리가 있는 이들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때때로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감정이나 예의에 대해 간과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눈 앞에 남자가 찍고 있었다. 아처는 바로 표정을 풀고 심호흡을 했다. 차라리 상대가 랜서였다면 '개'소리와 함께 잔뜩 비아냥거리며 말로 털어줄 요량이었지만, 이 영웅왕을 상대로는 언어적으로 유효타를 먹이기란 여간 쉽지 않았다. 요샛말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별 용건이 없다면, 제발 돌아가 주겠나. 너의 말 그대로 나는 잡종이라, 마력이 보충되었어도 피곤하군.”

아무리 말을 안들어 처먹어도 이정도 말하면 알아듣겠지 생각하며 아처는 길가메쉬를 상대하면서도 쉬지 않았던 손을 더 빠르게 놀려 뒷정리를 마쳤다. 앞치마를 벗어서 곱게 개어놓고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저를 바라보는 붉은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길가메쉬는 아처와 눈이 마주치자 드물게 눈꼬리를 곱게 휘면서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금삐까라는 별명값이라도 하려는 듯 갑작스러운 반짝이 효과와 함께 보여주는 얼굴은 분명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아처의 눈에는 그저 미친듯한 불길함과 짜증만이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앞머리를 살짝 쓸어넘기며 와인잔이라도 건네는 듯한 포즈를 취한 길가메쉬가 입을 열었다.

“영광으로 알거라, 페이커여. 짐이 손수 마력 공급을 해주러 왔느니라.”
“하…?”

그렇지 않아도, 저녁식사 준비전에 랜서와 신경전을 벌였던 문제가 이렇게 다시 대두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상대가 길가메쉬라는 사실에 아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독설을 내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장난 사람처럼 몸을 삐걱거렸다. 

“무엄하고도 멍청한 반응이로구나. 하지만 그것도 관대하게 넘어가도록 하마.”

또다시 지어보이는 화사한 미소에, 뭐가 좋다고 쳐웃냐 라는 말이 아처의 목구멍까지 넘어왔다가 내려갔다. 말이 통하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아처는 진지하게 목을 매달아 좌로 돌아가는 쪽이 신속한 해결책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 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길가메쉬에게 순결(?)의 위협을 느낀 아처는 ‘헛소리 하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라!’ 라고 외치고 서둘러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런 아처의 뒤를 길가메쉬가 졸졸 따라왔다. 이대로 숙소에 도착하는 순간 범해지는 건가, 아처의 동공이 흔들렸다. 무력으로 떨어뜨려 놓기엔 아처의 근력은 부족했고, 마력도 부족했다. 

“영웅왕.”
“왜 그러나 페이커여. 어서 너의 누추한 숙소로 안내해라.”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아 듣는이로 하여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를 일으킬 정도였지만, 지금 아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마력이 채워졌기 때문에 문제 없다. 이런 하찮은 몸에 닿아봤자 너에게 좋을 것도 없지 않나.”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하는 아처에게 붉은 눈이 빤히 아처를 응시해 왔다. 그러고 보니 그놈도 붉은색 눈이었지-. 라는 생각이 들자 또다시 속에서 깊은 빡침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놈이나 이놈이나 사람의 피를 말린다는 점에서는 같을지도 몰랐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페이커여, 나는 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이런 미친…”

죽인다. 
저놈을 좌로 보내거나 자신이 좌로 가거나 둘 중 하나 밖엔 답이 없다는 생각이 아처의 머리를 채웠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마력을 퍼올려 간장과 막야를 투영하려던 찰나 길고 흰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얼굴을 덮었다. 방심한 탓에 뒤로 당겨지는 힘에 맥없이 손의 주인의 몸에 기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영웅왕 미안하지만, 이 녀석은 이미 나랑 선약이 있어서.”
“랜서?”
"그렇지? 아처?”

평이한 말투에 비해 길가메쉬와는 또 다른 붉은 눈이 길가메쉬를 향해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이상 다가오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듯 한 눈빛에 길가메쉬는 짜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개가 먹던 것이었나… . 흥이 식었다.”
“누굴 지금 먹던 것 취급…!”
“그래, 잘 생각했다.”

랜서는 성질을 내며 왁왁 거리려던 아처의 입을 틀어 막고 남은 손으로는 길가메쉬를 향해 어서 꺼지라는 듯 휘휘 저었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길가메쉬가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손을 풀었다.

“누가…! 너와 약속이 있다는 거냐!”
“그럼 그 상황에서 뭐라 말하냐?”
“다른 핑계도 많지 않나? 왜 하필?”
“그래서 저놈에게 통하던가?”
“……”

늘 설렁설렁 넘어가는 듯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정곡을 찔러오는 랜서의 말에 아처가 입을 다물었다. 그 자신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뿐 이해는 하고 있던 문제였는 듯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찌되었건. 신세를 졌군.”
“오, 인정해 주는거야?”
“…고맙다.”

툭 내뱉어진 말을 끝으로 매우 부끄러운 듯 돌아선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솔직하지 못함에 귀여움을 느낀 랜서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래서, 우리 아까 약속한 것은?”
“약속이라니?”
"왜, 나랑 하기로한거 아니었어?"
"무슨…, 그건 아까 핑계로 댄 것이 아닌가?"
"저런…, 날 이용해놓고 이젠 필요없다고 버리는거야?"

부끄러움도 모르고 여러사람 앞에서 대놓고 마력 공급을 해준다며 입털던 그 랜서는 어디로 갔는지, 물기 어린 촉촉한 눈으로 아처보다 살짝 낮은 시야를 십분 활용해 아처를 올려다 보기 시작했다. 그런 랜서의 미모가 주는 위력은 굉장했고 아처에게 제대로 유효타를 먹였다. 실눈뜨고 봐도 심장에 해로울 그것을 정면에서 제대로 목도해버린 아처는 점점 세차게 뛰는 심장과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 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그건 네가 제멋대로…, 잠깐…, 놔라!"
"자자, 부축해줄테니 들어가자고."

마력 고갈로 인한 피로감와 두 반신 사이에서 기운 빠진 아처는 결국 랜서의 부축아닌 부축을 받아 숙소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늘도 시끄러운 칼데아의 밤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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