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유리 조각에 떨어지는 빛처럼

sn by 송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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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모고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지근해진 문고리를 잡은 채로 나는 심호흡했다. 입시 학원의 강의가 한창일 시간이었다. 몇 번째일지 모를 망설임을 다시 새기며 나는 문에 귀를 대보았다. 두꺼운 철문 너머로는 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엄마는 장 보러 나갔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주에 세 번씩 나가는 문화 강좌의 아줌마들과 같이 카페라도 갔거나. 하지만 만약 그 중 어느 가능성도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나는 엄마에게 맞아야 했다.

문고리를 다시 꾹 쥐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나의 것이 아니라 마네킹의 손을 보는 것 같았다. 수없이 가능성을 돌려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문고리를 돌리고 집에 들어가는 것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심호흡하고 나는 문을 열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나는 살며시 신발을 벗어서 신발장에 숨기고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잠그고 나서야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단 걸 내쉬고 나서야 깨달았다.

양말조차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천장이 하얬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옮긴 집은 아직도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디를 가나 비슷한 구조, 비슷한 인테리어인데도.

이어폰을 귀에 끼고 스마트폰의 블루투스를 켜면, 터치 몇 번에 쿵쿵 울리는 사운드가 흘러들어왔다. 적막 속에서는 다소 크게 들리는 볼륨. 하지만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엄마가 있을 때는 딱 적당한 수준의 볼륨이었다.

혈관 속에 빠르게 도는 음악을 느끼며 나는 머릿속으로 콧노래를 그린다. 언제 엄마가 돌아올지 모르니까 숨소리 하나도 삼켜야 했지만,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댄스 플로어에 올라가 춤을 췄다. 더 큰 소리를, 더 큰 고동을. 금방이라도 이미지를 따라 튀어 오르려는 몸을 억누르며 헤드뱅잉을 할 때였다.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왔다.

잠깐 노랫소리를 착각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은 노래에서 나오기에는 이질적인 소리였다. 나는 이어폰을 벗었다. 벽과 문을 거쳐 들려오는 소리는 웅웅거렸지만, 큰소리로 누군가를 욕하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쾅 하고 거칠게 문을 닫는 소리를 끝으로 소음은 사라졌다.

앞집에는 젊은 부부가 사나 봐. 엄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꺼냈다. 애도 없이 둘만 사는데 낮이고 밤이고 싸우더라고. 시작은 차분하게 했어도 점점 감정이 실려 가는 목소리였다. 무뚝뚝한 얼굴로 젓가락질하던 아빠가 툭 내뱉었다. 아파트에 살면 이웃도 신경 써야지.

가만히 기다린 지 5분쯤 흘렀을까.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다 이어폰을 케이스에 넣었다. 주머니에 스마트폰과 이어폰 케이스를 넣고 밖으로 나왔다. 조심히 현관을 닫고 앞집 문에 섰을 때는 긴장이 되었다.

살면서 이웃의 초인종을 누른 적이 없었다. 학교가 바뀔 때마다 이사를 했어도 떡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옛날에는 이웃과 삼겹살 파티를 했다는 늙은 선생님들의 얘기가 꼰대 같다고 생각했다. 남은 남, 이웃은 남일 뿐이었다. 문과 벽을 두고 그어진 선을 넘어오지 않는 것이 가장 평화로운 거 아닐까.

그런데도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앞집 여자를 떠올렸다. 겨울에 이사 왔을 때 여자는 두툼한 스웨터와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뻣뻣하게 인사하는 내게 여자는 웃어 보였다. 그리고 봄을 지나 여름이 가까워지는 5월에도 여자는 얇은 긴소매 옷을 입었다. 이제 5월만 되어도 소매 길이가 짧아지는데 여자는 항상 긴 소매의 옷을 고집했다.

문 앞에 서 있는지 얼마나 지났을까. 앞집 남자가 금방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앞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짧은 벨이 울리고,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지금이라도 발을 돌려서 집으로,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가 굳은 사이 앞집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약간 피로한 낯빛의 여자가 물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혀를 움직여 내가 대답했다.

“아, 안녕하세요. 앞집에 사는 학생인데요. 저, 뭔가 도울 일 같은 건 없을까 해서요.”

여자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어두운 갈색이 도는 눈동자가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금방이라도 도망쳐서 구석에 틀어박히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나는 여자를 마주 보았다.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두고 여자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죄송해요. 너무 시끄러웠죠.”

“아, 아니에요!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괜찮으면 차라도 마시고 갈래요?”

여자가 문을 활짝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정말로 들여보내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나는 멍하니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고등학생인 나보다 키가 조금 작았다. 푸석한 갈색 머리카락이 구불거리며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마른 몸에는 오늘도 느슨한 가디건을 입었다. 어색하지만 친절해 보이는 여자를 보고 나는 결국 집안으로 들어섰다.

여자는 나를 마루에 앉히고 부엌으로 갔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과일을 깎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커다란 TV와 오디오 기기, 반짝이는 장식품, 커다란 가죽 소파, 벽에 기대진 골프채에서 나는 왠지 모를 거북함을 느꼈다. 둘러보는 것에 질린 나는 쭉 허리를 곧추세웠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티백이 담긴 유리잔과 과일 접시를 내려놓았다.

“학원 갔다 오는 길이에요?”

사근사근하게 여자가 물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을 찔린 나는 움츠러들었다. 손가락을 꾹꾹 누르다가 겨우 대답했다.

“네.”

“그렇구나. 저도 선생님이었어요.”

의외의 사실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나한테 여자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요. 지금도 학생들은 좋아해요.”

눈을 휘어 부드럽게 웃는 여자의 얼굴에 한낮의 햇살이 닿아 밝게 빛났다. 나는 어쩐지 바짝 마르는 입을 축이려 유리잔을 들었다. 내가 차를 마시는 사이 여자가 방에서 앨범을 가져와서 보여주었다.

“내가 가르쳤던 반의 졸업 앨범이에요.”

아기자기한 아이들의 얼굴들 사이에서 여자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님인데도 앳된 티가 나는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지금은 느껴지지 않는 어떤 충만함이. 아이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추억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어느새 앨범보다도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말을 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멋쩍은 듯이 웃는, 그러나 어떤 즐거움이 느껴지는 여자의 미소와 마주한 내게서 긴장이 풀어졌다.

동시에 손에서 놓친 유리잔이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괜찮아요.”

당황해서 묻는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 여자가 일어섰다. 나는 앉아서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에 떨어지는 빛을 바라보았다. 이미 깨어져 날카로운 파편을 지난 빛이 얇은 무지개가 되어 마룻바닥으로 펼쳐졌다. 손을 대면 피부를 찢고 상처를 남길 조각인데도 빛을 만나 아름다운 무지개를 그렸다.

빗자루로 조각을 쓸어 담아 버리고 청소기까지 돌린 여자가 그제야 일어나도 된다고 말했다. 내가 여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유리잔, 깨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잔은 새로 사면 되는데 다치면 큰일이잖아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걱정이 담긴 부드러움이 매일 들려오는 고함과 어울리지 않아서 나는 목에 무언가 걸린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다음에 또 와도 되나요?”

여자가 다시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손안에 조금씩 습기가 차오르는 느낌을 느끼고 있을 때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앞집 여자에게 인사하고 나왔을 때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아마 지금은 저녁 시간이니까 엄마가 돌아왔겠지. 그러나 왠지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역시나 엄마는 돌아와 있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을 때 앞으로 있을 일이 또렷하게 보였다. 엄마는 나를 마루에 무릎 꿇리고 왜 학원에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점점 고성으로 변해서 나를 찔렀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다.

이윽고 엄마가 매를 들었을 때도 나는 유리 조각에 맺히던 무지개를 생각했다. 손바닥에 새겨지는 빨간 줄을 보며 파편을 지나 마룻바닥에 새겨지던 무지개를 생각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 같은 날에도 무지개가 있다면.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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