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

챌린지: 무지개

보리밭 by 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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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올랐다. 부산에서 울산까지. 야밤에 가는 것치고는 꽤 먼 길이었다. 운전면허가 있긴 하지만 아직 밤길을, 그것도 어두운 산길을 오를 용기는 없어 택시를 택했다. 약 5만 원, 둘이니까 인당 2만 5천 원을 지불하고 떠나는 여행이었다. 택시 기사의 ‘젊은 아가씨 둘이 이 시간에 어딜 가냐.’, ‘아가씨들 나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같은 헛소리를 들어줘야 하는 건 덤이었다.

그 때문에 ‘그냥 기차를 탈 걸 그랬나.‘하는 생각과 ’다음 번에는 운전 연수라도 해서 직접 몰고 와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문드문 들었지만 속으로만 삼켰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창밖을 멍하니 보기를 한참, 택시가 한 공터에 멈췄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택시에서 내리며 차 안을 가볍게 훑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무언가 떨어져 있지 않았다.

‘웬일로 다 챙겼네.’

장난스레 말을 걸려다, 비아냥처럼 들릴까 봐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슬슬 펴자.”

대꾸도 없이 대충 고개를 끄덕인 한은 무겁게 이고 온 가방을 조심스레 땅에 내려두었다. 저 가방 안에는 망원경뿐이었다. 그 외의 짐을 내가 이고 온 탓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어도 저 가방에 다른 것이 담겼을지는 모르겠다. 한은 차례대로 망원경 부품을 꺼내고 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애정 담긴 손길을 잠시 바라보다 내 가방을 풀었다. 한의 단조로운 가방과 달리 내 가방에는 꽤 많은 것이 들어 있었다. 배고플 때 먹을 간식과 물, 누울 돗자리와 보조배터리, 비상약, 담요.

나는 그중 당장에 필요한 돗자리만을 꺼낸 후 가방 지퍼를 닫았다. 그리고 한이 망원경을 이래저래 손보는 동안 돗자리를 펴고, 한을 구경했다. 오늘 우리가 볼 것은 은하수였다. 은하수는 오직 여름에만 볼 수 있으며, 직녀성과 견우성을 한 줄로 쭈욱 이었을 때 그 가운데를 지나간다. 옛 설화대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뤄주는 빛의 향연인 것이다. 물론 맨눈으로는 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은하수를 맨눈으로 보려면 많은 것이 도와줘야 했다. 날이 흐리면 안 되고, 그렇다고 달이 너무 밝아도 안 된다. 이외에도 여러 조건이 있다고 했던 것 같지만 거기까지는 내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한의 ‘오늘 은하수가 보일 거야. 보러 가자.’라는 말에 대뜸 따라 나왔을 뿐이었다. 별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한의 연락이니 거절할 순 없었다. 그래도 정말 그의 말대로 오늘 은하수가 보인다면, 나는 살면서 오늘 은하수를 처음 보게 되는 것이니 이 정도 수고는 그리 헛되지 않았다.

“이리로 와봐.'”

“벌써 잡았어?”

한의 부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나도 모르는 새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 배 있는 탓이었다. 조금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은하수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니까.

내가 망원경으로 다가가자, 한이 몇 발짝 비켜섰다. 딱 사람 한 명이 설 정도의 공간만 두고. 난 그 틈으로 들어가 망원경에 눈을 맞췄다. 그리고 마침내 본 은하수는, 이상했다. 정확히는 보이지 않았다.

“없는데…? 잘못 잡은 거 아니야?”

“거기 있는 게 은하수야. 주변은 까만데 한 부분만 희뿌옇지?”

한의 말에 다시 들여다본 렌즈에는 희뿌연 무언가가 있었다. 이게 은하수라니. 기대한 것과 너무나 달라 실망만 컸다. 실망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가만히 희뿌연 것을 바라봤다. 저게 은하수라니, 직녀와 견우를 만나게 해주는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름 괜찮지 않아?”

한이 물었다. 웬만하면 그렇다 했겠지만, 이번엔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저게 무슨 은하수야. 하지만 한은 대답도 듣기 전에 말을 이었다.

“천문대에서 보여주는 은하수 사진은 알록달록하게 예쁘게 나오잖아.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은하수는 이게 다거든. 근데, 그래도 이건 이것대로 이쁘지 않아? 잘 보이지도 않고 색도 없지만, 난 그냥 지금 직접 보는 게 더 좋은 것 같아.”

한은 꼭 별 이야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졌다. 별을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겠지. 나는 좋아하는 것 앞에서 말을 자꾸만 삼키게 되는데 한은 그 반대 같았다. 별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사람과는 다른 이야기도 많이 할까? 그다지 영양가 없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삼켰다.

나는 아무말 없이 눈을 깜박였다. 다시금 초점이 맞춰지고, 아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 렌즈를 통해 보였다. 한의 시야다. 저 작고 잘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그의 눈. 없는 색을 입히고, 우주의 먼지에 별이란 이름을 주고 의미를 부여하는 별지기의 눈. 그의 눈을 따라 은하수가 다채롭게 반짝였다.

“그래서 어때?”

“예쁘네.”

그런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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